술잔과 글쓰기


 제주섬 마실을 왔다. 이도1동 1261번지에 자리한 헌책방 〈책밭서점〉을 들렀고, 몸국 한 그릇 먹었으며, 저녁나절 아이와 함께 잠들 잠집을 찾아든다. 애 아빠는 제주섬 마실을 기리며 보리술 한 병 사러 잠집 앞 구멍가게에 들른다. 호텔이 늘어선 한켠 구멍가게가 아니라 동네사람 노닥거리는 잠집 사이 구멍가게이니까 바가지는 아니겠지 생각한다. 서울 종로3가 안골목 구멍가게에서는 보리술 작은 병에 2500원이나 받는다. 큰 병은 5000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곳은 일본 손님 자주 들락거리는 골목이요, 그 동네 집값을 헤아리면 그쯤 받아야 달삯을 치를 만하다. 서울에서는 그만큼 바가지를 씌워 장사를 해야 살림을 꾸릴 수 있다. 잠집 앞 구멍가게 이름은 ‘한라수퍼’. 손으로 쓴 간판 글씨가 비바람에 많이 깎이고 이래저래 지워지고 했다. 문을 옆으로 밀며 들어선다. 가게 할망이 누군가하고 전화로 얘기를 나눈다. 퍽 오래 얘기를 나눈다. 천천히 시렁을 돌아보고, 뭘 고를까 헤아린다. 전화 얘기가 꽤 길어지기에 보리술 두 병하고 아이 까까에다가 탄산음료 하나를 골라 셈대에 놓는다. 한참 얘기를 하시던 할망이 살짝 “5100원.” 하고 나즈막하게 말씀한다. 응, 술값이 그리 안 비싸네, 하고 생각하며 아이 까까와 탄산음료를 하나씩 더 고른다. 따지고 보면 아이 까까이면서 아빠 까까이다. “6800원.” 할망은 전화기를 내내 붙든다. 뭔가 깊은 얘기를 나누시는가 보다. 값을 치른다. 잠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는 고단해 하면서도 까까를 잘 주워먹는다. 아빠는 보리술 한 병을 마시면서 속이 꽤 힘들다고 느낀다. 먼 마실을 오며 길에서 몹시 힘겨웠던 탓이요, 엊그제 먹은 짜장면이 아직 내려가지 않은 탓인지 모른다. 기껏 보리술 두 병인데 한 병만 겨우 마신다. 아이가 잠들고 애 엄마는 속이 더부룩하다며 텔레비전을 본다.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는 우리들은 이렇게 먼 마실을 나와 잠집에 머물 때에 텔레비전 구경을 한다. 애 아빠는 쓰러진다. 깊은 밤과 새벽에 퍼뜩 깬다. 입에서 술내음이 나는 듯하다. 막걸리 한 병 반하고 보리술 한 병을 마셨을 뿐인데 이렇게 냄새가 나나. 이제는 보리술 두 병조차 가붓이 즐기기 어려운 몸이 된 셈인가. 몸뚱이가 이와 같다면, 술 한 사발 즐기고 나서는 책이고 글이고 즐길 수 없으려나. 너덧 해 앞서까지는 서울에 있는 헌책방으로 마실을 간 다음 가방 가득 꾹꾹 눌러담은 책을 낑낑 들고는 홀로 술집에 들러 보리술 닷 잔 마시며 책을 두 시간쯤 읽고는 잠집에 들곤 했는데, 이제는 아이가 있어 이렇게는 못한다지만, 홀로 느긋이 마실할 수 있을 때에도 이처럼 즐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4343.11.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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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1-15 09:53   좋아요 0 | URL
제주도 유일의 헌책방이란 책밭서점이 아직도 있네요.저도 몇년전에 지금 자리로 이사오기전에 한번 찾아가본 적이 있는데 또 언제 제주도에 한번 들릴지 모르겠군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