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책 읽는 즐거움 ㉡ 사진책을 어디에서 살까
  ― 새책방과 헌책방을 나란히 찾아다닌다


 책은 책방에서 삽니다. 책방은 책을 갖추는 가게입니다. 사진책 또한 책방에서 삽니다. 그러나 작은 책방은 사진책까지 갖추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제법 크다 싶은 책방쯤 되어야 비로소 사진책을 함께 갖추곤 합니다.

 이제는 동네 자그마한 책방은 참 많이 문을 닫았습니다. 시골 면내에는 책방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읍내 책방은 책이 그리 안 많거나 문방구 구실에 조금 더 힘을 쏟는다는 느낌이 짙곤 합니다. 사진책을 찾아보려는 분들로서는 제법 큰 곳이 되어야 비로소 사진책을 갖추니까, 외려(?) 사진책 구경하기에 한결 낫다 여길 만합니다.

 오늘날은 인터넷이 무척 발돋움해서 여러 인터넷책방에서 사진책을 찾아보면 손쉽게 책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크기가 어떠하며 두께는 어떠하고 사진은 어떠한가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인터넷책방에서는 몇 가지 퍽 사랑받는 사진책을 빼놓고는 속에 담긴 사진을 거의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겉그림마저 구경할 수 없는 책이 꽤 많습니다.

 책방마실을 한다 한들 비닐에 싸인 책을 함부로 뜯을 수 없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비닐을 뜯어 안을 들여다본 다음 안 산다고 합니다. 사진책은 그냥 눈으로 슥 훑으면 다 볼 수 있는 책으로 여겨 버릇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진책을 마주하는 매무새가 이와 같기 때문에 사진책이 안 팔리는지 모릅니다. 두고두고 즐기는 사진책이요, 사진 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찬찬히 읽을 사진책이나, 이러한 사진책 빛깔을 옳게 헤아리는 책손은 퍽 적은 이 나라입니다.

 저는 사진책을 두 군데에서 삽니다. 먼저,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인문책방 〈이음책방〉에서 삽니다. 다음으로, 헌책방에서 삽니다. 새로 나오는 나라안 사진책은 〈이음책방〉을 찾아가서 ‘책에 적힌 값’ 그대로 셈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멧기슭 시골집에서 살아가다 보니 서울로 마실할 일이 뜸해, 서울로 마실을 하면 〈이음책방〉에 들러 사진책을 사지만, 하는 수 없이 인터넷책방에서 사진책을 삽니다.

 헌책방은 서울이 아니어도 나라안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인천이든 수원이든 제주이든 부산이든 대전이든 진주이든 마산이든 청주이든 춘천이든 …… 나라안 곳곳 헌책방으로 마실을 하면서 사진책을 장만합니다.

 사진책을 장만할 때에는 헌책방을 안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책은 금세 판이 끊어지기도 하지만, ‘책 만드는 돈이 많이 들어 새책방에는 안 넣고 비매품으로 알음알이로 팔거나 나누는’ 일이 퍽 잦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사진학과에서 내놓는 졸업작품 또한 새책방에 없을 뿐더러 도서관에조차 없습니다. 이런 작품책은 흘러흘러 헌책방 책시렁에 꽂힙니다. 사진연감이나 보도사진연감도 매한가지입니다. 이런 사진책은 헌책방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진기자》 같은 잡지도 똑같습니다. 철지난 사진잡지를 찾을 때에도 헌책방이 가장 좋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나온 사진잡지를 비롯해 일본이든 미국이든 독일이든 프랑스이든, 나라밖에서 나온 사진잡지는 헌책방에 골고루 있습니다.

 다만, 내가 찾아간 그날 그곳 헌책방에 이 사진책들이 늘 골고루 있기는 어렵습니다. 다 팔려 없을 수 있고, 몇 권 겨우 남았으나 내가 다 가진 책일 수 있어요. 어느 날은 아주 반가운 사진책을 만날 수 있으며, 어느 날은 빈손으로 돌아설 수 있겠지요. 한두 번 헌책방마실을 한다 해서 반가운 사진책을 수십 수백 권 장만할 수 있지 않습니다. 한 번 마실을 할 때에 한 권 만날 수 있으면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꾸준하게 자주 찾아다녀야 사진책을 그러모을 수 있습니다.

 저는 헌책방을 1992년부터 다녔으나, 헌책방에서 사진책을 장만하기는 1999년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1998년에 비로소 사진찍기를 익혔고, 이때까지는 따로 사진책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1998년에 처음 사진찍기를 익힐 때에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먹고살았으며, 날마다 열 몇 가지 일간신문을 읽으며 ‘신문에 실린 사진’을 견주어 살피며 사진을 헤아렸습니다. 책에 실린 사진을 들여다보기로는 이듬해부터예요. 그러니까 1999년부터 차곡차곡 사진책을 그러모아서 2007년에 인천 배다리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열 무렵에는 삼천 권 남짓 되었고, 2010년 9월에 사진책 도서관을 충주 멧골마을로 옮길 때에는 사천 권 남짓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루에 한두 권쯤 그러모은다는 생각으로 사진책을 장만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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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2-0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책만 4천권이라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파란놀 2010-12-06 12:35   좋아요 0 | URL
대단할 일이 아니랍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책은 그만 읽으셔요
 [책읽기 삶읽기 24]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둘레에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어 보았느냐고 더러 물었습니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저한테 여러모로 도움이 되거나, 글을 쓰는 매무새를 되짚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곤 했습니다.

 책을 읽기 앞서 책이름을 들었을 때에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말은 참 옳다고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매무새가 아닐 때에는 글을 쓸 수 없으나, 오늘날 이 땅 많은 글쟁이는 이 대목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이름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뼛속으로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뼛속으로는 ‘들어가야’지요. “뼛속까지 들어가서 써라”라 말해야 올바릅니다. 책을 덮은 뒤에는 이 생각이 더 맞다고 새삼 느낍니다. 글을 쓰고픈 사람이라면 ‘내 살갗에 머물지 말고 내 뼛속을 속속들이 파고들면서’ 글을 쓸 노릇이요, ‘내 이웃사람과 동무와 살붙이들 뼛속으로 깊이 들어가 하나로 얼크러지면서’ 이야기를 엮을 노릇입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파고들기’라든지 ‘스며들기’라든지 ‘녹아들기’라든지 ‘부둥켜안기’라든지 ‘살아내기’ 같은 말마디를 넣었어야 알맞습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쓴 나탈리 골드버그 님은 말합니다. “대학생이던 나는 이미 영국을 비롯한 유럽 출신 대부분의 남성 작가들의 시와 이미 세상을 떠난 남성 작가들의 작품까지 죄다 읽었다고 자부했다. 문제는 내가 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의 일상 현실과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15쪽).” 이와 같은 흐름은 2010년대 한국땅이라 해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땅에는 내로라 하는 여성 글쟁이가 제법 많기는 하지만, 여성다움을 살뜰히 풀어내는 글쟁이는 뜻밖에 그리 안 많습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따순 사랑으로 온마음을 가누면서 글줄에 다부지며 씩씩한 기운을 담는 글쟁이는 얼마 안 됩니다. 살림꾼 글쟁이는 몇 안 됩니다. 바깥을 맴돌기만 할 뿐, 정작 내 뼛속을 깊디깊이 느끼며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여성 글쟁이는 아직 몇 사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내가 엘크론을 둘러싼 들판을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은 그곳의 지리학적인 정보를 안다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 들판 속으로 영원히 산책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66쪽).” 같은 대목을 곱씹으면 어느 만큼 함께 헤아릴 수 있을까요. 문학이든 산문이든 지식정보를 다루는 책이든, ‘내 마음이 그 들판을 언제까지나 걷고 싶어 하는 줄 안다’는 마음결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을 얼마나 손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나탈리 골드버그 님은 “진짜 인생은 글쓰는 행위에 있는 것이지, 같은 작품을 몇 년 동안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것에 있지 않다(72쪽).” 하고 말합니다. 나 스스로 ‘작가’라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글쓰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요, ‘번듯한 문학이나 산문이나 (신문)기사’를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내 삶을 아로새기는 글’을 즐거이 쓰라는 소리입니다. 애써 남들한테 읽히거나 보여주는 글이 아닌, 내 삶을 즐기는 글이요, 내 동무한테 띄우는 편지와 같은 글이며, 내 아이나 어버이하고 주고받는 쪽종이 같은 글을 쓰면서 아름다이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몹시 좋은 글이나 책일 때에는 여러 해에 걸쳐 얼마든지 또 읽고 거듭 읽을 만합니다. 읽으며 즐기되 얽매이거나 붙들리면 안 좋을 뿐입니다.

 글에는 어떤 틀이 따로 없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에도 어떤 틀이 따로 없습니다. 골목길을 사진으로 찍으려 할 때에 ‘골목은 이런 모습으로 찍어야 한다’는 틀이 없습니다. 틀이란 아예 없는 글쓰기요 사진찍기요 그림그리기인데, 그래도 뭐 하나 틀이 있어야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하지 않느냐고 자꾸 묻는다면, 꼭 하나는 밝힐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매무새’ 하나를 틀이라면 틀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글을 쓰고, 내가 살아가는 무늬대로 사진을 찍으며, 내가 살아가는 빛깔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담는 글이고 사진이며 그림입니다.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들여다볼 때에 ‘추억’이나 ‘전통’이나 ‘옛것’이 떠오른다면 내 삶이 이러한 틀에 사로잡혔다는 소리입니다.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마주할 때에 따스하다고 느끼면 나 스스로 따스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볼 때에 똑똑하구나 싶다면 지식을 머리에 잔뜩 담아 놓았다는 얘기입니다.

 “글쓰기를 대하는 올바른 눈이 떠질 때 우리는 세부묘사를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모든 진실을 반영시키는 것으로 다루게 된다(135쪽).”는 말을 찬찬히 곱씹습니다. 제대로 못 쓴 글이란 앎조각을 잔뜩 늘어놓은 글입니다. 제대로 못 찍은 사진이란 내 사진에 담긴 사람이나 사물이나 자리나 터전을 어느 한쪽 느낌으로 몰아간 사진입니다. 제대로 못 그린 그림이란 삐뚤빼뚤하거나 빈틈이 있는 그림이 아니라, 살가움과 이야기를 잃은 그림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그림을 그립니다. 어린이가 사진을 찍는다니 터무니없다고 여길 분이 있을는지 모르는데, 어린이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찍을 만하며, 사진 찍는 삶을 즐깁니다. 그러니까 어린이한테 글 한 줄을 쓰라고 시킬 때에는 억지스럽게 ‘어린이답지 않은 글’을 쓰도록 하면 안 됩니다. 열두 살 나이에는 열두 살 나이에 걸맞도록 글을 쓰고, 일곱 살 나이에는 일곱 살 나이에 알맞도록 글을 쓰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스무 살 젊은이는 스무 살 젊은이다운 글을 쓰며, 마흔 살 아저씨는 마흔 살 아저씨다이 글을 써야 아름답겠지요. 내 나이와 함께 내가 걸어온 길을 담고, 내가 살아내는 살림새를 담으며, 내가 부둥켜안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담습니다. 내 넋과 얼을 담습니다.

 할머니는 할머니로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당신 아이나 동무한테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이처럼 조곤조곤 들려주는 삶자락을 가만히 종이에 옮겨 적으면 곧바로 ‘글’이 태어납니다. 글쓰기란 이렇게 합니다. 아이는 아이로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하루를 제 동무나 어버이한테 신나게 떠들어댑니다. 이렇게 신나게 떠들어대는 삶덩이를 바지런히 종이에 적바림하면 이내 ‘글’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그나저나, 나탈리 골드버그 님은 “이미 잘 쓰는 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더 앞으로 발을 내딛으려 하지 않는다(212쪽).”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제법 손꼽힌다거나 퍽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분들이 새로운 글이나 글쓰기나 글매무새로 거듭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 대목을 씁쓸히 읽습니다. 퍽 훌륭하다 싶은 글쟁이들은 왜 새롭게 거듭나지 못하거나 새삼스레 일어서지 못할까요. 빼어난 글솜씨를 왜 더 가다듬지 못하고 마나요.

 아무래도 글솜씨는 빼어나다 할지라도, 당신 삶을 더 북돋우거나 일으켜세우지 못하는 탓이 아니랴 싶습니다. 하루하루 당신 삶을 더 북돋우면서 일으켜세울 때에 비로소 당신 글 또한 이 삶결에 따라 저절로 북돋울 수 있고 일으켜세울 만하지만, 당신 삶부터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는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을 가꿀 때에 글을 가꿉니다. 삶을 사랑할 때에 글을 사랑합니다. 삶을 아낄 때에 글을 아낍니다. 삶을 따스히 어루만질 때에 글을 따스히 어루만집니다.

 ‘문장수련’을 한다고 글이 나아질 수 없습니다. ‘작가학교’를 다닌다고 글재주를 키울 수 없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글을 잘 쓰지 않습니다.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좋은 문학을 길어올리지 않습니다.

 빠듯하며 벅차고 힘겨운 내 하루하루를 찬찬히 일구면서 내 삶을 살찌울 때에 바야흐로 글 하나 얻습니다. 지쳐 나가떨어지면서 고단히 잠을 이루었다가 무거운 눈꺼풀 겨우 올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루하루를 살가이 돌보는 가운데 비로소 글 하나 이룹니다.

 살을 느끼고 뼈를 느끼며 염통이랑 허파랑 콩팥을 느낄 줄 아는 글쓰기여야지 싶습니다. 눈과 코와 입과 귀를 찬찬히 알아채거나 느끼면서 움켜쥘 글쓰기여야지 싶어요.

 이제 막 글쓰기를 해 보겠다 생각하는 분이라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같은 책이 제대로 도움이 되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한창 글쓰기를 하는 분일 때에도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같은 책이 썩 도움이 될까 아리송합니다. 글쓰기를 생각하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으면 매우 따분하거나 괜한 앎조각만 머리에 가득 담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은, 글쓰기 길잡이책으로 읽어서는 덧없습니다. 이 책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느 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로 생각하며 읽을 때에 비로소 즐거우며 알차구나 하고 느끼리라 봅니다.

 한 가지 토를 달아 보면, 출판사에서 ‘눈여겨보면 좋겠다 싶은 대목을 함부로 큰 글씨로 적어’ 놓아, 책을 읽으며 자꾸 걸리적거립니다. 이 책을 쓴 미국사람은 퍽 쉬운 글로 썼을 텐데, 우리 말로 옮기면서 얄궂거나 딱딱한 낱말과 말투가 너무 많이 튀어나옵니다. “자신의 몸과 육체를 믿는 법(31쪽)”처럼 잘못 쓴 겹말마저 곳곳에 드러납니다. “동그란 원 형태로 앉았다(241쪽)” 같은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4343.12.4.흙.ㅎㄲㅅㄱ)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글,권진욱 옮김,한문화 펴냄,2000.6.20./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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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 까는 어린이. 아빠 좀 잘 도와주렴... 

- 201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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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볕과 글쓰기


 바람이 모질다 느낄 만큼 차갑게 분다. 겨울이니까 그렇겠지. 온통 집에서 밍기적거려야 하는 하루. 아이가 이것저것 들추며 놀다가 옷장 위쪽에 얹은 귤 쟁반에서 귤을 하나씩 끄집어 내어 방바닥에 톡톡 던지며 밟는다. 심심하다며 이 짓을 하고 논다. 귤을 몇 알씩 껍질을 까 놓고 안 먹을 때에는 가만히 봐주었으나, 이 짓은 도무지 봐줄 수 없다. 먹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아이가 귤물로 적신데다가 기름을 쏟은 담요를 마당가 빨래줄에 널어 놓는다. 바닥을 닦던 걸레를 셋 빨아 빨래줄에 함께 넌다. 귤물에다가 기름을 쏟았으니 방바닥은 닦고 또 닦아도 미끌미끌하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담요가 날려 바닥에 뒹군다. 주워서 탁탁 털고는 빨래줄에 다시 넌다. 바람이 차가와 걸레는 얼어붙는다. 그래도 햇볕 좀 쬐라며 밖에 둔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빨래를 했고 설거지를 했다. 아이한테 어렵사리 밥을 먹였고, 이제는 등허리가 아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다. 아이는 졸리면서 누울 생각을 않고, 더 장난질을 해댄다. 아스라한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이 겨울 햇살에 시골집에서 무엇을 하며 보내는 하루인가. (4343.12.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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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와 글쓰기


 편지를 읽는다. 손으로 한 글자 두 글자 적바림한 편지를 읽는다. 내가 요즈음 너무 고단하다 못해 지친 나머지 집식구한테 자꾸 골을 부린다고 새삼 돌아본다. 아이 하나를 돌보며 이토록 고단하다면 아이 둘일 때에는 어쩌지? 깊은 밤 손글씨 편지를 읽다가 문득, 내 일거리로 수첩에 뭔가 끄적이느라 손글씨로 글을 쓰기는 하지만, 정작 내 살붙이나 동무한테 손글씨로 편지를 얼마나 썼는가 헤아리다 보니, 한 달에 두어 번 쓰기는 하지만 찬찬히 글을 적어 띄우지는 못하는구나 싶다. 나는 손으로 글을 적을 때에 첫머리에는 좀 또박또박 반듯하게 쓰지만, 이내 삐뚤빼뚤 날림 글씨가 되고 만다. 나 스스로 내 생각을 차분하게 추스르지 못하는 탓이다. 할 말이 넘친다든지, 해야 할 말을 가만히 모두지 못하는 탓이다. 천천히 숨을 돌리면서 한 글자를 적고 두 글자를 쓰지 못하는 탓이다.

 셈틀을 켜고 글을 쓰면 훨씬 빨리 한결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다. 셈틀 자판으로 글을 쓰면 제아무리 빨리 두들기거나 마구 두들긴다 할지라도 화면에 박히는 글씨는 반듯반듯하다. 일그러지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몹시 차분해 보이는 글인 셈틀 글씨이다. 셈틀 글씨로 글을 읽을 때에도 얼마든지 이 글을 쓴 사람 마음을 읽을 만하다. 종이에 찍힌 책을 펼칠 때에도 얼마든지 이 책에 글을 쓴 사람 넋을 읽지 않는가.

 바쁘다고 글을 더 바삐 쓸 수 없다. 느긋하다고 글을 더 느긋하게 쓰지 않는다. 바삐 쓰는 글이라 해서 어줍잖은 글이 되지 않으며, 느긋이 쓰는 글일 때에 한껏 멋스럽거나 알차다 말할 수 있지는 않다.

 히유, 내가 쓰고픈 글은 우리 살붙이들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진 기쁘며 즐거운 삶이 아닌가. 셈틀로 글을 쓰든 손으로 글을 쓰든 언제나 속으로 말을 하면서 글을 쓰는데, 음, 목소리랑 숨소리랑 손길이랑 마음길을 한결같이 잘 생각해야겠다. 곰곰이 떠올리며 편지를 써야겠다. (4343.12.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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