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에 애 보는 키라


 경제동화라는 이름으로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 같은 책이 몹시 잘 팔리며, 널리 사랑을 받는다. 나는 이 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니, 나는 이 책을 장만해서 우리 도서관에 꽂아야 할까. 열두 살 어린이라면 초등학교 오륙 학년쯤이겠지. 이무렵 아이한테 돈이 무엇인지 가르치면서 사회를 읽도록 이끄는 일은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가르쳐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아이도 어버이도 부자가 될 까닭이 없다. 아이도 어버이도 돈을 알맞게 벌어 제대로 쓸 줄 알면 넉넉하다. 또한, 어버이한테든 아이한테든 얼마만 한 돈이 들어와야 부자가 되는 셈이겠는가. 뜻을 이룬다든지 부자가 된다든지 은행계좌에 숫자가 얼마만큼 쌓여야 한다든지 하는 일은 그야말로 덧없다.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목숨을 사랑할 줄 아는 열두 살 애틋한 어린이여야 해맑으며 어여쁘리라 생각한다. 내가 굳이 무슨무슨 ‘교육동화’를 써야 한다면, 내가 쓸 ‘삶을 가르칠 이야기’는 “열두 살에 애 보는 키라”이다. 그러나, 어떻게 고작 열두 살에 애를 볼 수 있겠는가. 열두 살에 애 보는 키라는 알맞지 않다. 왜냐하면 “애 보는 키라”는 열두 살이 아닌 여섯 살이어야 하고, 너덧 살부터 제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보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어버이 일손을 덜려고 동생을 본다든지, 부업으로 삼아 애보기를 한다든지 할 어린이가 아니다. 따숩게 사랑하면서 너그러이 보듬는 착한 사람이 되는 길에서 아주 스스럼없이 동생을 보는 어린이 삶이다.

 곰곰이 생각한다. 아이들한테 제 삶을 사랑하며 아끼는 이야기를 담는 교육동화를 써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지 다시금 곱씹는다. 이런 교육동화도 있다면 나쁘지 않을 테지. 다만, 교육동화보다는 《몽실 언니》 같은 동화가 좋다. 《수경이》 같은 동화가 좋다. 《해와 같이 달과 같이》 같은 동화가 좋다. 이러한 동화가 있으니 구태여 교육동화를 쓴다든지 “열두 살에 애 보는 키라” 같은 동화가 나와야 한다느니 하고 생각할 일이란 없다.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사람 이야기를 눈물겹고 웃음나게 엮으면 좋다. (4343.12.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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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라를 바라보는 눈길·마음·생각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4] 강형원,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아트스페이스,1989)


 이레쯤 지나면 스물아홉 달째 함께 살아가는 우리 아이가 며칠 앞서부터 “벼리가 그렸어.”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제 엄마랑 아빠가 하듯이 볼펜을 손에 쥐고 종이에 그림 그리기를 즐깁니다. 엄마랑 아빠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글을 종이에 쓰는데, 곁에서 이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아이로서는 그림을 그리면서 배우는 셈입니다. 아이한테는 하루하루 둘레에서 마주하며 바라보는 사람들 삶이 곧바로 제 삶으로 스며듭니다. 아이한테 건네는 말마디라든지, 곁에서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마디는 모조리 아이가 배울 만한 말마디가 됩니다.

 아주 마땅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주 마땅히 잊고 말지만, 아이들이 저지르는 잘못이란 따로 없고, 청소년이 일으키는 범죄 또한 따로 없습니다. 어느 잘못이나 범죄이든 어른이 빚습니다. 어른이 저지르기 때문에 아이들과 푸름이들이 보고 배우거나 어느 결에 젖어들고 맙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옳고 바르며 착하고 어여삐 살아간다면, 아이들이든 푸름이들이든 옳고 바르며 착하고 어여쁜 매무새를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이 티없는 눈망울로 온누리를 맑고 밝게 바라보며 껴안기를 바랄 노릇이 아니라, 어른들이 바로 이곳에서 오늘부터 티없는 눈망울로 온누리를 맑고 밝게 바라보며 껴안아야 합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예나 이제나 좀처럼 티없는 눈망울로 온누리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맑고 밝은 몸가짐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이 나라에는 몇몇 군사독재자가 서슬퍼런 칼과 총을 휘둘렀습니다. 몇몇 군사독재자에 앞서는 일본 제국주의자가 총과 칼을 휘둘렀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에 앞서는 봉건시대라 하면서 계급과 신분이 나뉘었을 뿐 아니라 여느 사람들은 글을 배울 수 없었고 잔뜩 짓눌려 지내야 했습니다. 나랏님은 예나 이제나 나랏사람을 군인으로 끌고 가거나 노역을 시키거나 합니다. 지난날에는 그예 노역장으로 끌고 가서 성벽을 쌓거나 궁궐을 짓거나 하도록 시켰다면, 오늘날에는 일삯을 주고는 고속도로를 닦는다거나 4대강 정비를 한다거나 시킵니다. 굳이 사회 탓이나 나라 때문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사회 물결이나 나라 흐름으로 본다면, 이 나라 여느 어른들은 해맑은 눈빛과 마음밭을 갈고닦을 겨를이 없기도 했습니다. 다만, 제아무리 사회랑 나라가 뒤죽박죽 어수선이라 할지라도 어른들 스스로 다소곳하며 참다운 넋을 추스를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아트스페이스,1989)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Los Angeles Times〉하고 〈Time Magazine〉 사진기자로 일하는 동안 1987년 6월부터 1988년 올림픽까지 한국땅을 밟으며 취재를 한 발자취를 그러모은 강형원 기자는 “나는 내가 간직하고 있는 사진 중 가장 잘 된 사진을 고르는 대신, 가장 적절한 순간들을 택하여 이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민주의 거리·노사분규·대통령 선거의 열풍·통일·재24회 서울 올림픽, 이렇게 다섯 자리로 나누어 사진을 실은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인데, 남녘나라 사진기자들은 도무지 담아내지 못한 모습들이 가득합니다. 이를테면 최루탄 조각 때문에 숨을 거둔 이석규 님 주검이 지나는 모습을 담은 사진에는, 저 멀리 대우조선소 모습이 비치고, 길가에는 여름철 풀이 우거졌는데, 호박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이나 최루탄을 사람 머리로 겨누며 쏘는 전투경찰 모습을 굳이 ‘흑백’사진이 아닌 ‘빛깔’사진으로 담습니다.

 흑백 아닌 빛깔 사진으로 바라보니, 소주병을 불꽃병으로 삼은 아이들(대학생) 모습이 참 앳되어 보입니다. 게다가 플라스틱 바가지를 끈으로 꿰어 머리에 뒤집어쓴 모습에는 웃음이 절로 납니다. 물안경을 쓴 모습도 우습고요. 불탄 파출소에 앉은 경찰 아저씨 또한 우습습니다. 서로서로 똑같은 한겨레일 뿐 아니라, 옷과 무기를 내려놓으면 살가운 동무이자 이웃입니다. 서로서로 어디에서 만나고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짚지 못한 채 애꿎은 사람들끼리 툭탁거리고 맙니다. 기껏 스물을 갓 넘었을 전투경찰들은 왜 제 형이나 어머니나 작은아버지 같은 사람들한테 최루탄을 쏘거나 방패와 곤봉을 휘둘러야 했을까요. 무엇보다, 조그마한 짐차를 타고 선거유세를 하던 대통령 후보들 모습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래요, 다들 이렇게 조그마한 짐차에 타고는 ‘선거유세를 할 때만큼’은 동네 골골샅샅을 누볐지요. 텔레비전 토론마당이 아닌 짐차 탄 선거유세였기 때문에 노태우 후보는 ‘투명방패’에 몸을 숨기며 억지웃음을 지었어요.

 수많은 사진기자는 이애주 교수 살풀이춤을 가까이에서만 담으려 했으나, 강형원 기자는 아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만히 동그랗게 둘러앉아 살풀이를 함께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작은 사람이고 여린 사람이에요. 1988년 올림픽을 치르느라 숱한 사람이 철거민이 되었는데, 또다른 자리에서는 어슷비슷하게 가난하며 조그마한 어른들과 아이들이 길거리에 ‘태극기 든 동원행사’로 몰려나오면서도 호돌이 인형하고 손을 잡아 보며 좋다고 웃기도 했습니다.

 사진책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에서 아쉽다 한다면, ‘올림픽이 이루어지는 빛’만큼 ‘올림픽 때문에 드리워진 그늘’이 짙었는데, 이 짙은 대목까지 담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강형원 님은 미국 시사잡지 사진기자로서 시사 이야기를 담아야 했기 때문일 터이나, 집회 마당이든 올림픽경기장 둘레이든 고작 십 분만 안쪽 골목으로 걸어서 들어가 보면 ‘짙게 드리워진 그늘’을 몸으로 부대낄 수 있었고, 몸으로 부대끼는 만큼 사진으로 엮을 수 있었어요. 반드시 ‘상계동 올림픽’을 강형원 님까지 담을 일은 아니나,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 같은 짜임새와 엮음새를 돌아본다면, 강형원 님이 한 발 더 따사롭고 조그맣게 발걸음을 내려 딛었다면 훨씬 사랑스러우면서 눈물겹고 애틋한 사진책으로 자리매겼으리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 사진책은 ‘어둡고 슬픈’ 나날인데 ‘안 어두운 척 안 슬픈 척 내보이고 싶어하던 독재정권 무렵’ 이야기를 빛깔 고운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한결 차분하면서 한껏 티없는 눈결로 남녘나라 구비치는 한 자락을 보듬는 사진넋으로 서울 시내 한복판 가난한 사람들이랑 서울 시내 바깥쪽 수수한 사람들 삶 두 자락을 보듬어 주면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다가 비로소 올림픽에 발맞추어 취재를 나온’ 강형원 님한테 이것저것 바랄 수 없습니다. ‘올림픽 뒤켠 그늘 자리’는 남녘나라에서 사진기를 쥔 기자들이랑 사람들이 살펴서 담아야 합니다. 남녘나라 사진쟁이 스스로 살뜰히 담지 못했거나 않았으면서 미국시민 강형원 님한테 함부로 바랄 일이 아닙니다. 저 머나먼 나라 미국땅에서 당신 고향나라가 민주와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꿈꾸며 보드라이 어루만지는 손길로 일군 이 사진책 하나만 해도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책은 3개의 언어로 쓰여졌다. 한국어, 영어, 그리고 사진어어가 그것이다.”라는 말마디처럼, 우리들 남녘나라 사람들은 이 책을 이루는 세 가지 말을 찬찬히 아로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말과 아울러 살며시 감도는 ‘사랑말·믿음말·나눔말’ 세 가지 말마디를 나란히 느낄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4343.12.12.해.ㅎㄲㅅㄱ)


―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민주화의 현장) (강형원 사진,아트스페이스,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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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숲의 아카리 6
이소야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책사랑과 책방사랑과 사람사랑
 [만화책 즐겨읽기 16] 이소야 유키, 《서점 숲의 아카리 (6)》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6권이 새로 나왔습니다. 1권부터 5권까지 즐겁게 읽었기에 6권도 즐겁게 집어듭니다. 다만, 4∼5권에 이르며 조금 느슨해졌나 하고 느꼈기에 6권을 집을 때에는 살짝 망설입니다.

 6권에서는 얼마나 탄탄하며 짜임새있게 ‘책과 책방과 사람’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지 궁금합니다. 6권에서 책과 책방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싱그러이 담지 못한다면 앞으로 7권이 나오든 70권이 나오든 굳이 장만할 까닭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6권에서는 ‘작은 책방 사장’으로 일하다가, 그만 ‘큰 책방한테 밀려 문을 닫고’ 말아, 나중에 ‘큰 책방 계약직 일꾼’으로 들어가서 잡지 부서를 다루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은 책방이 끝내 문닫고 말았을 때에 몹시 서운하며 가슴이 아팠을 테지만, ‘내 책방’이 아니라 ‘다른 사람 책방’에서 일하는 몸이 되더라도 ‘책방을 사랑하는’ 삶이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즐거이 일하려 했답니다. 그러나, 즐거이 일하려던 이녁은 큰 책방 정규직 부서지기가 기운을 꺾는 말을 일삼아 그만 ‘자리를 지키며 매출이 떨어지지도 올라가지도 않게끔만 일을 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책방이라는 일터가 아니라도 이런 모습은 퍽 흔하리라 봅니다. 내 일과 내 일터를 아울러 사랑하며 즐기는 사람이 있으나, 일이든 일터이든 돈벌이로만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 터전이든 일본 터전이든 저마다 제 삶을 사랑하여 돌보는 나날보다는 더 크거나 많은 돈을 벌어들여 한껏 신나게 돈을 쓰는 나날로 탈바꿈한다고 느낍니다.


- “아르바이트 직원을 혹사시키면서까지 페어를 열고, 미미하게 매출을 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 “맞아요. 페어는 직원이 알아서 기획하고 있다구요. 무엇보다 우린 하루하루 주어진 작업을 처리하는 것만도 벅차요.” “음, 제가 하는 건 좋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29쪽)
- ‘(나는) 남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에는 엄청 서툰 사람이야. 오히려, 전부 혼자 해도 되는 거라면, 그게 훨씬 마음 편해. 그럼, 저 사람들은 왜 서점에서 일하지? 책을 풀어놓을 뿐이면 다른 소매점에서 일해도 되잖아?’ (31쪽)



 누군가 책방에서 일자리를 얻어 일을 한다면, ‘책방에서’ 일하는 뜻과 보람이나 값이 남달리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서든 ‘일하는’ 뜻이나 보람을 찾을 수 있겠지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돈을 벌어 집식구 먹여살리’면 넉넉하다 여길 수 있겠지요.

 저로서는 자동차 만드는 공장이라든지 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만 벌어 집식구 먹여살리는’ 일은 하나도 달갑지 않습니다. 입에 풀을 바르지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할 판이고, 내 입만이 아니라 내 집식구 입을 떠올린다면 참말 아무 일이든 붙잡으려 할 노릇이라 할 텐데, ‘아무 곳에서든 돈만 벌어’ 집식구를 먹여살릴 때에, 내 집식구는 이러한 삶을 달가이 맞아들일 수 있나 모르겠습니다. 더 가난할 수밖에 없거나 더 쪼들릴 수밖에 없더라도, 마음이 무겁거나 힘들지 않은 곳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일제강점기에 도시에서 살아가자면 무슨 일을 해야 했을까요. 오늘날 서울이나 부산에서 사랑하는 짝꿍을 만나 살림집 마련하여 살자면 무슨 일을 찾아야 할까요. 손꼽히는 대학교를 나온다 해서 마땅한 일자리 하나 만만하지 않다는데, 이러한 요즈음 젊은이들은 어디에서 어떤 일거리를 헤아려야 좋을까요. 연봉 높으며 정년 지켜 주는 사무직 일자리만 찾기 때문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셈 아닌지요. 내 삶을 따스하며 포근히 꾸리도록 도와주는 일자리는 안 찾는 오늘날 젊은이가 아닌지요. 오늘날 젊은이를 키워 낸 어버이부터 돈으로 셈하는 살림살이는 북돋울지라도 마음으로 돌아보는 살림살이는 못 살찌운 셈 아닌지요.

 책방이라면 서울 종로에 있어도 책방입니다. 서울 용산이나 강동에 있어도 책방입니다. 불광동 안골이든 인헌동 옆골이든 어디에서든 책방은 책방입니다. 매장이 천 평을 넘어야 책방이지 않습니다. 매장이 두 평이라도 책방입니다. 갖춘 책이 십만 권이나 백만 권이어야 책방이지 않습니다. 갖춘 책이 이천 권이나 이백 권이어도 책방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집식구는 날마다 불고기를 먹든 피자를 먹든 열 몇 가지 김치를 먹든 해야 즐거운 밥차림이 아닙니다. 날마다 나물밥에 김치 한 조각 먹더라도 즐거운 밥차림입니다. 하루에 서너 끼니를 먹고 참까지 곁들여 먹어야 기쁜 밥차림이 아니요, 하루에 한두 끼 가까스로 챙겨 먹더라도 기쁜 밥차림입니다.


- “그건 뭐 하는 거야?” “아, 이렇게 아침과 밤에 잡지에 손을 올려 보면 몇 권이 팔렸는지 대충 알아.” “우와, 각각 두께가 다른데?” “응, 뭐, 매일 진열하다 보면 대강 감으로 알 수 있어.” “그렇게 하면 뭐가 편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애정이야. 하루하루의 노력이 쌓이는 거지.” (44쪽)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6권에서는 살짝살짝 ‘이 일을 왜 이렇게 하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닌 ‘이 일을 하루하루 즐기는 사랑에 담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사랑하니까 읽는 책이고, 사랑하니까 책방을 조그맣게 손수 열어 꾸리며, 사랑하니까 책방에서 사람들한테 내가 사랑하는 책을 보여주어 사서 읽도록 이끕니다.

 그래요, 사랑하기에 서로 만나 조촐하게 살림을 꾸리며 살아갑니다. 사랑하기에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너른 품으로 더 살가이 보듬습니다. 사랑하기에 더 잘난 일자리나 더 이름난 일자리나 더 거룩한 일자리보다, 나와 내 살붙이와 내 이웃 모두한테 아름다우며 즐거울 일자리를 찾습니다.


- “있잖아요, 전에 일했던 점포에 ‘책은 싫어’해도 ‘서점을 좋아’해서, 내내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만약 타사이 씨가 ‘서점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49쪽)


 물고기를 좋아하지 않으나 배와 바다를 좋아해서 바다로 나아가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내가 물고기를 안 좋아할 뿐, 내 동무와 이웃과 살붙이가 물고기를 좋아한다면 나로서는 내가 안 좋아하는 물고기라 하더라도 즐거이 낚아올리고 손질해서 밥상에 차립니다. 옳지 않으면서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삶이 아니라, 옳다는 테두리에서 내가 달가이 여기든 달갑잖이 여기든 마음으로 아끼는 가운데 할 일을 찾는 삶입니다.


- “오늘 말이야. 스오도(서점)에 갔었어. 치프도 봤어.” “뭐라고?” “여성과 임산부한테도 친절한 매장이 돼 있던걸?” “여자는 여자에게 친절한 매장을 만들려고 하지.”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는 점포의 특성상 여성의 비율이 높아서가 아닐까? 만약 남자가 많은 장소라면 다른 식으로 꾸몄을지도 몰라.” “이상하게 편드는군.”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해? ‘임신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힘드니까 잡지 매장에 육아서적을 놔두면 안 되겠어?’라고. 그러자 자기는 ‘귀찮아’라고 대답했지. 그걸 치프는 당연한 것처럼 쉽게 해 버렸으니까, 당연한 건 아닐지 모르지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손님도 바보가 아니니까. 타사이서점도 그런 곳이었어.” (50∼52쪽)


 책을 사랑하면서 책방을 사랑하지 않기 힘듭니다. 책과 책방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힘듭니다. 아니, 책을 사랑하기에 저절로 책방을 사랑하고, 책방을 고이 사랑하기에 시나브로 사람을 사랑합니다.

 다만, 사랑하는 모습은 누구한테나 똑같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이렇게 사랑하고 저무개는 저렇게 사랑합니다. 이이는 이런 빛깔로 사랑하고, 저이는 저런 내음으로 사랑합니다.

 참다이 사랑할 때에는 다 다른 사람을 다 달리 바라볼 줄 알면서 사랑합니다. 착하게 사랑할 적에는 다 다른 삶을 다 달리 껴안을 줄 알면서 사랑합니다. 곱게 사랑할 무렵이라면 다 다른 넋을 다 달리 헤아릴 줄 알면서 사랑합니다.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6권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1권부터 5권까지 오는 동안 서점 숲에서 ‘일하는’ 아카리였고, 서점 숲에서 ‘부잊히고 넘어지며 배우는’ 아카리였는데, 차츰차츰 서점 숲에서 ‘사랑하는’ 아카리로 거듭납니다. 이 사랑이란 남녀 사이 애틋한 마음을 느끼는 사랑이기도 하지만, 내가 붙잡은 내 일과 일터를 아끼는 사랑이기도 하며, 내 둘레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이곳에서 일하며 서로를 보듬는 가운데 다 함께 착한 삶터로 가꾸고픈 사랑이기도 합니다.

 책방은 자그마한 책방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책방 또한 가게이지만, 가게로만 있는 곳이 책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책방일 때에도 가게로만 있는 책방이 아니라, 책방으로서 책방이 있는 가운데, 사람과 삶이 어우러질 수 있다면 아름답습니다.

 우리 나라 커다란 책방은 얼마나 책방답거나 삶터다운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같은 이야기는 한낱 만화책 이야기일는지 모릅니다. 꿈으로만 꾸고, 꿈으로만 마주하는 사랑인지 모릅니다. 잘 팔리는 책만 더 잘 팔려 더 돈이 되도록 더 마음을 쏟는 책방 얼개를 내려놓고, 두루 사랑할 책을 두루 나누며 두루 넉넉할 수 있게끔 나아가는 책터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4343.12.12.해.ㅎㄲㅅㄱ)


― 서점 숲의 아카리 (6) (이소야 유키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0.11.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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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운 날씨에 집에서 놀아 주니 고맙습니다..

 - 2010.12.8.

 

 "세 살!" 외치며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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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사진찍기와 사진읽기
 ― 너그럽고 따스히 살아가는 내 매무새


 사진을 찍으니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사진을 읽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내 그림을 비롯해서 둘레 그림쟁이들 그림을 즐거이 읽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내가 쓴 글이 실린 책을 읽는 한편, 다른 글쟁이들 글이 담긴 책을 널리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읽으며,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읽습니다. 사진을 읽지 않고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그림을 읽지 않고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며, 글을 읽지 않고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는 내 아이 삶을 읽습니다. 내 아이 삶을 읽고 내 아이 말을 들으며 내 아이 몸짓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을 하는 짝꿍들은 서로서로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톺아보면서 서로서로 다른 삶을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읽는 가운데 저마다 얼마나 애틋하며 살가운가를 읽습니다.

 사진찍기만 해서는 이룰 수 없는 사진입니다. 그림그리기만 해서는 이루지 못하는 그림입니다. 글쓰기만 해서는 이룩하지 못하는 글(책)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글쓰기와 아울러 글읽기가 잘 맞닿지 못하곤 합니다. 그림그리기와 맞물려 그림읽기가 살뜰히 어우러지지 못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사진찍기와 함께 사진읽기를 즐기는 삶은 너무 적다 할 만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하는 사람만큼 사진잔치를 찾아다니는 한편 사진책을 사들여 읽는 사람이 늘어야 사진문화가 꽃을 피웁니다. 사진찍기를 즐기려고 여러 모임에 몸을 담는다든지 누리사랑방(블로그) 같은 데에 사진을 바지런히 올리기만 해서는 내 사진찍기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사진쟁이나 사진즐김이는 ‘내가 찍은 사진을 함께 나누어요’ 하는 마음과 함께 ‘내가 읽은 사진책을 함께 읽어요’ 하는 매무새일 때에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좋은 사진책이나 좋다 하는 사진책을 찾아서 읽는 일은 훌륭합니다. 내 사진삶을 훌륭하게 가다듬는 일은 퍽 놀랍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좋은 사진책이라거나 좋다 하는 사진책에 앞서, 그저 사진책을 가까이하며 아낄 줄 알아야 하는 우리 삶이어야 즐겁습니다. 수수한 사진책이든 좀 떨어진다 싶은 사진책이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진책이든 사진도록이든 사진잡지이든, 우리들이 꾸리는 삶을 사진으로 엮어 소록소록 담은 이야기를 마주할 사진책을 쥐어들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비평가나 평론가가 되려고 읽는 사진책이 아닙니다. 비평가나 평론가가 되려고 문학책이나 동화책이나 인문책을 읽는 사람은 없어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한결 아름다이 일구고픈 마음에 문학책이든 동화책이든 인문책이든 읽습니다. 사진책을 읽는 매무새란 사진 하나를 한결 깊이 사랑하는 가운데, 사진 하나로 내 삶과 넋과 말을 어떻게 일구는가를 깨닫고 헤아리며 가다듬습니다. 브레송을 읽어야 사진책을 읽은 셈이 아니고, 강운구를 알아야 사진책을 아는 셈이 아니에요. 동네 이웃 사진첩을 넘기든, 헌책방 책시렁에서 조용히 잠자는 사진책을 돌아보든, 내 눈을 트도록 돕고 내 마음을 열도록 이끌며 내 삶을 일구도록 어깨동무하는 사진책을 마주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찍기는 사진읽기를 밑바탕으로 삼으며 이루어 갑니다. 사진읽기 또한 사진찍기를 밑틀로 다스리면서 이룩합니다. 내 이웃과 동무들 사진을 너그럽고 따스히 읽는 가운데 내 사진찍기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내 이웃과 동무들 삶을 너그럽고 따스히 (눈으로든 사진으로든 마음으로든) 담는 가운데 내 사진읽기가 싱그럽고 아리땁게 뿌리를 내립니다.

 쟁이(작가)가 되어야 하는 사진찍기가 아니듯이, 꾼(비평가)이 되려고 하는 사진읽기가 아니에요. 즐거이 찍고 기쁘게 읽습니다. 넉넉히 찍고 따스히 읽습니다. 알차게 찍고 알뜰히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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