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에 애 보는 키라


 경제동화라는 이름으로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 같은 책이 몹시 잘 팔리며, 널리 사랑을 받는다. 나는 이 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니, 나는 이 책을 장만해서 우리 도서관에 꽂아야 할까. 열두 살 어린이라면 초등학교 오륙 학년쯤이겠지. 이무렵 아이한테 돈이 무엇인지 가르치면서 사회를 읽도록 이끄는 일은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가르쳐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아이도 어버이도 부자가 될 까닭이 없다. 아이도 어버이도 돈을 알맞게 벌어 제대로 쓸 줄 알면 넉넉하다. 또한, 어버이한테든 아이한테든 얼마만 한 돈이 들어와야 부자가 되는 셈이겠는가. 뜻을 이룬다든지 부자가 된다든지 은행계좌에 숫자가 얼마만큼 쌓여야 한다든지 하는 일은 그야말로 덧없다.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목숨을 사랑할 줄 아는 열두 살 애틋한 어린이여야 해맑으며 어여쁘리라 생각한다. 내가 굳이 무슨무슨 ‘교육동화’를 써야 한다면, 내가 쓸 ‘삶을 가르칠 이야기’는 “열두 살에 애 보는 키라”이다. 그러나, 어떻게 고작 열두 살에 애를 볼 수 있겠는가. 열두 살에 애 보는 키라는 알맞지 않다. 왜냐하면 “애 보는 키라”는 열두 살이 아닌 여섯 살이어야 하고, 너덧 살부터 제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보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어버이 일손을 덜려고 동생을 본다든지, 부업으로 삼아 애보기를 한다든지 할 어린이가 아니다. 따숩게 사랑하면서 너그러이 보듬는 착한 사람이 되는 길에서 아주 스스럼없이 동생을 보는 어린이 삶이다.

 곰곰이 생각한다. 아이들한테 제 삶을 사랑하며 아끼는 이야기를 담는 교육동화를 써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지 다시금 곱씹는다. 이런 교육동화도 있다면 나쁘지 않을 테지. 다만, 교육동화보다는 《몽실 언니》 같은 동화가 좋다. 《수경이》 같은 동화가 좋다. 《해와 같이 달과 같이》 같은 동화가 좋다. 이러한 동화가 있으니 구태여 교육동화를 쓴다든지 “열두 살에 애 보는 키라” 같은 동화가 나와야 한다느니 하고 생각할 일이란 없다.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사람 이야기를 눈물겹고 웃음나게 엮으면 좋다. (4343.12.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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