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나누는 기쁨  ㉡ 글쓰기와 사진찍기
 ― 기계질 아닌 살림하기가 되어야 할 사진



 어릴 적부터 운동경기를 배우는 아이들은 퍽 어릴 때부터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곤 합니다. 어린 날부터 악기를 다루는 아이들은 꽤 어린 나이부터 뛰어난 재주를 선보이곤 합니다.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까닭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더 일찍 영어를 가르치면 영어를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참으로 맞는 이야기들인데, 이렇게 참말 맞는 이야기를 하는 우리들은 한 가지를 잊습니다. 그러면, 왜 어릴 적에 운동경기이든 악기이든 영어를 가르치면 아이들은 쏙쏙 빨아들이듯이 잘 배워서 빼어나거나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려나요.

 요즈음 아이들은 우리 말과 글을 잘 못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걸핏하면 틀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말과 글을 거의 형편없이 뇌까리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배우지 않을 뿐더러 옳게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넋을 건사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이들 마음이 옛날과 견주어 못되거나 비뚤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린 나날부터 갖가지 지식과 정보를 잔뜩 머리에 집어넣는 바람에, 아이들 스스로 마음결과 마음씨를 착하거나 참답거나 곱게 다스리는 데에서는 자꾸 동떨어지고 맙니다.

 아직 어린 아이한테 글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글을 잘 쓸까 궁금합니다. 무척 어린 아이한테 그림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그림을 잘 그릴까 궁금합니다. 매우 어린 아이한테 사진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사진을 잘 찍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테니스 기계가 아니고, 농구 기계나 탁구 기계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축구 신동이나 야구 신동 또한 아닙니다. 아이들은 앞으로 돈을 많이 벌거나 이름을 높이 얻거나 힘을 세게 부릴 셈으로 피아노를 익히거나 바이올린을 켜거나 노래나 춤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제 삶을 아름다이 살찌우는 길에서 테니스를 배우거나 피아노를 익히거나 사진기를 물려받아야 즐겁습니다.

 잘 쓰는 글도 나쁘지는 않다 하겠지요. 그러나 잘 쓴 글이란 온누리에 수두룩합니다. 잘 쓴 글이란 내 삶에서 무슨 보람이 있으려나요. 내 삶을 담는 내 이야기가 없다면, 제아무리 예쁘장하게 빛난다는 글이라 해도 무슨 쓸모가 있으려나요.

 잘 찍은 사진도 싫지 않다 하겠지요. 그러나 잘 찍은 사진이란 나라 안팎에 숱하게 많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란 내 삶에서 무슨 뜻이 있으려나요. 내 삶을 실어내어 내 이웃이랑 동무랑 살붙이랑 오순도순 나눌 이야기가 없다면, 제아무리 멋스러이 보인다는 사진이라 해도 무슨 값이 있으려나요.

 예쁜 얼굴이기에 예쁜 사람이 아니에요. 예뻐 보이는 글이라서 예쁜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쁘구나 싶은 사진이라서 예쁜 마음을 나눌 수 없어요. 예쁜 삶을 예쁜 손길로 가다듬으면서 한 장 고맙게 얻는 사진일 때에 비로소 예쁜 사진으로 자리잡아요.

 사랑을 담아 글을 쓰고 사랑을 담아 사진을 찍어야 좋습니다.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 아니고, 누구한테 내보이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작품이 되니까 쓰려 하는 글이 아니고, 작품을 만들려고 만들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에요. 돈을 벌려고 쓰는 글이란 글다운 글이 아니에요. 그냥 ­‘돈벌이’랍니다. 돈을 모으려고 찍는 사진이란 사진다운 사진이 아니에요. 그저 ‘돈벌이’예요.

 상업사진이라든지 상업작가라는 말이 떠도는데, 상업사진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돈벌이에 머물지 않습니다. 상업판, 그러니까 누군가한테서 돈을 받고 써 주는 글이나 찍어 주는 사진이라 할지라도, 내 온마음과 온땀을 바쳐 일구는 글과 사진일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좋아요. 빛납니다. 어여쁘지요. 그냥 돈벌이로 여기며 주문에 걸맞게 해치운다면 그냥 돈벌이로 머뭅니다.

 흔히들, 사진관 사진은 사진으로 안 치곤 하지만, 사진관 사진 가운데에도 놀랍도록 아름다우며 빛나는 작품, 곧 사진다운 사진이 있어요. 저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옛날 졸업사진책을 바지런히 사 모읍니다. 해마다 수천 군데 초·중·고등학교에서 졸업사진책이 쏟아지는데, 이 책들을 보면 그저 그런, 한 마디로 하자면 그냥 돈만 벌려고 만든 졸업사진책이 꽤 많지만, 이 가운데 아주 맑고 밝게 빛나는 졸업사진책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얼마나 땀흘리고 마음쏟아 졸업사진책 하나 빚었는지, 내가 나온 학교가 아니요 내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이 졸업사진책 하나를 넘기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가 있습니다.

 상업사진을 하든 순수사진을 하든 무슨 사진을 하든, 사진작가가 되고픈 이들은 ‘사진을 하면’ 됩니다. 글을 써서 돈을 벌든 이름을 얻든 뭐를 하든, 참다이 글작가가 되고픈 이들은 ‘글을 쓰면’ 돼요. 이름팔이가 아닌 글쓰기입니다. 돈벌이가 아닌 사진찍기입니다. 장사꾼 노릇이 아닌 살림꾼 몫입니다.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이요 살림하기예요.

 한 가지를 더 생각한다면, 아이를 키우듯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 한결 즐거우며 빛이 나고 아리땁습니다. 아이를 돌보듯이 글을 여미고 사진을 여미면 더욱 멋스러우며 뜻이 있고 어여쁩니다. 아이를 사랑하듯이 글을 사랑하고 사진을 사랑할 노릇입니다. 아이를 내 품에 따숩게 꼬옥 안아 주듯이 글을 내 가슴으로 꼬옥 안아 주고 사진을 내 온몸으로 꼬옥 안아 줄 노릇입니다. (4343.12.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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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와영희' 출판사에서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라는 책을 내기로 했습니다. 이 책에 넣을 글을 꾸준히 쓰는데, 이제부터 이곳에 하나씩 걸치려 합니다. 이곳에 글을 걸치면서 '이대로 나아가면 좋을까, 더 가다듬으면 한결 나을까' 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널리 헤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이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은 아무쪼록 아낌없이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이 글을 잘 엮어내어 좋은 책 하나로 태어나도록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머리말 : 푸른말·삶말·사랑말


 저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저씨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인천 도화동 골목동네였고,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골목동네에서 골목벗하고 사귀며 지내다가 이때부터 인천 연수동이라는 아파트마을로 옮겨 지냈습니다. 1991년 일인데, 이무렵까지 지내던 골목동네도 아파트이기는 했는데, 5층짜리 아파트였고, 연탄을 때는 살림집이었습니다. 제가 집을 나서며 학교로 가는 길에는 ㅈ이라는 커다란 식품공장이 인천 앞바다로 흘려보내는 쓰레기물이 냇물을 따라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기며 흘렀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는 여름날 시원하게 물을 뿜는 작은 못이 있었고, 예전에 인천에서 시외버스를 타는 곳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있었으며, 기찻길을 따라 색시집이 줄지어 있었어요. 학교로 갈 때면 언제나 연탄공장 뒤쪽 기찻길을 밟으며 하나 둘 셋 …… 백 이백을 셌습니다. 탄을 가득 싣고 까만 먼지를 날리는 기차가 지나갈 때에는 병마개를 철길에 얹어 놓고 납짝쿵을 했습니다.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국민학교를 다닌 해가 1982년부터 1987년입니다. 이동안 국민학생은 버스삯으로 60원을 치르다가(1982년) 90원을 치릅니다(1987년). 그러니까 이때에는 10원짜리 쇠붙이 돈닢 하나조차 몹시 알뜰히 건사해야 했어요. 10원짜리이든 1원짜리이든 철길에 올려놓을 만큼 돈이 넘치는 동무는 없었답니다.

 2011년을 맞이하면서 서른일곱 나이가 된 저는 멧기슭에 자리한 시골집에서 네 살 난 딸아이를 옆지기랑 함께 키웁니다. 옆지기 몸에는 둘째가 자랍니다. 집일은 아이 아버지인 제가 도맡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아파트마을이 싫어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 곧바로 집을 박차고 나와, 대학교가 있는 서울로 갔는데, 충주 멧골마을로 들어가 네 해 반을 지내고서 인천으로 돌아와 세 해 반을 살다가, 다시 충주 멧골마을로 들어와 살아갑니다. 이동안 혼자 살림을 꾸렸는데, 제 조그마한 살림집에는 빨래하는 기계나 텔레비전은 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밖에 자동차라든지 청소기라든지 전자레인지 같은 전기 먹는 물건을 집안에 안 들입니다. 자동차가 없으니 아이하고 읍내에 마실을 갈 때에는 시골버스를 탑니다. 때로는 자전거에 아이수레를 붙이고 낑낑 끙끙 영차영차 하면서 산을 타고 구비를 돌아 읍내 저잣거리 마실을 해요.

 기계로 하는 빨래를 안 하니까 제가 하는 빨래는 마땅히 손빨래일 테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손으로 빨래를 했으니 ‘손빨래’라는 낱말은 없었어요. 이리하여 예전 낱말책, 그러니까 ‘국어사전’에는 ‘손빨래’라는 낱말은 안 실렸는데, 이제는 이 낱말을 낱말책에 실어 놓습니다.

 요즈음 손으로 종이에 글을 적어 띄우는 동무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지난날 손빨래라는 낱말을 쓰지 않았듯이 ‘손글씨’라는 낱말 또한 안 썼어요.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셈틀, 그러니까 ‘컴퓨터’를 켜서 글을 쓰니, 손으로 애써 글을 쓸 때에는 따로 ‘손글씨’라는 낱말로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 낱말 ‘손글씨’는 낱말책에 실렸을까요? 어때요? 실렸으려나요, 안 실렸으려나요?

 두 아이를 돌보며 살아갈 아버지이자, 동무들한테는 아저씨일 제가 하는 일은 글쓰기와 사진찍기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합니다. 널리 팔리는 글을 쓰지 못하고, 사람들이 즐겨찾는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글을 쓰고, 제가 사랑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이 책을 읽을 동무들이 마주할 ‘우리말’ 이야기에다가 ‘책과 헌책방’을 다루는 글입니다. 제가 찍는 사진은 헌책방 사진에다가 골목길 사진이랑 우리 아이 자라나는 모습 사진이에요. 그닥 돈 될 만한 글이 못 되지요. 그렇지만 저는 돈이 될 글보다는 제 삶을 살찌울 글을 좋아합니다. 백만 사람이 찾아 읽어 줄 글을 쓰기보다는 다문 백 사람이나 열 사람이 찾아 읽어 주더라도, 제 글을 읽어 주는 사람들이 스스로 힘을 쓰고 마음을 기울여 삶을 한결 아름다이 가다듬는 기운과 넋과 슬기를 몸소 빚도록 어깨동무하고 싶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나 하고 더듬어 보면, 저도 잘 떠올리지 못합니다. 어쩌면 굳이 떠올릴 만한 이야기는 아닐는지 몰라요. 그래도 한 가지 생각해 보면, 1998년이었나 이오덕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저는 1995년부터 혼자 글을 쓰고 엮어서 ‘우리말 소식지’를 주마다 내놓았고, 이 소식지를 이오덕 선생님한테도 부쳤는데, 어느 날 저한테 전화를 거시더니 만나고 싶다 하셨어요. 이때 저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먹고 살았기에, 일을 쉬는 낮을 틈타 과천으로 전철을 타고 찾아갔습니다. 나어린 젊은이를 마주한 선생님은 두 시간 즈음 조곤조곤 도움말을 들려주었는데, 이리 해라 저리 해라 하는 말은 한 마디 없었습니다. 꼭 두 대목만 짚으면서 앞으로도 기운 내어 잘 해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때 들은 두 대목은, ‘가끔씩’하고 ‘불리다’입니다. ‘가끔’이라는 낱말은 ‘-씩’을 붙이면 겹말이 된다 했고, ‘불리다’는 잘못 쓰는 말일 뿐 아니라 ‘부르다’ 같은 낱말도 아무 자리에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일깨워 주었습니다.

 우리말 소식지를 낸답시고 버둥대던 저로서는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렇지만 고작 스물네 살짜리 앳된 젊은이가 무엇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더군다나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 제도권 학교에서 제도권 교과서를 달달 외면서 제도권 말하고 글에 온통 젖어든 몸과 마음이었는데요.

 늘 그렇지만, 이렇게 큰 어르신을 한 번 만나뵌 뒤로 제 글과 말을 더 찬찬히 헤아리며 지냅니다. 내 어릴 적에 이웃 어른한테서 듣던 말을 곰삭이고, 내 어릴 적에 내 골목동무랑 나누던 말을 돌이킵니다. 내 몸에 나 스스로 아로새긴 살아숨쉬는 말을 곱씹고, 내 둘레 곱고 고마운 분들 몸에 살포시 깃든 싱그러운 말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어쩌면, 1998년 어느 날 이오덕 선생님을 만나뵌 자리에서 더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다 잊었는지 모릅니다. 고작 두 대목만 떠올린다 할 수 있어요.

 이 책을 읽어 줄 반가운 ‘말사랑 푸른벗’ 님들 또한 비슷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저는 ‘청소년’이라는 낱말보다 ‘푸름이’라는 낱말을 좋아하고, 이 책을 읽을 푸름이들은 ‘말사랑 푸른벗’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단출하게 ‘말사랑벗’이라 해도 되겠지요? 아무튼, 이 책에 적바림한 모든 이야기를 샅샅이 머리에 담는다거나 달달 외워야 하지 않으니까요, 즐겁고 홀가분하게 읽어 주면 고맙겠습니다. 앎조각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내 슬기를 가다듬으면서 내 생각힘을 북돋우는 책으로 삼아 주면 기쁘겠어요. 우리 말사랑벗 누구나 좋은 밑말을 다스리면서 밑넋과 밑삶을 알차게 가꾸어 주면 반갑겠어요.

 ‘밑말’이나 ‘밑넋’이나 ‘밑삶’ 같은 말이 좀 낯설려나요. 퍽 어려우려나요. 이 낱말은 낱말책에 안 실린 낱말인데, 가끔 이런 낱말을 써 보곤 해요. ‘밑말’이란 말 그대로 밑이 되는 말, 밑바탕이 되는 말입니다. 내가 하는 말을 새로 태어나도록 이끌거나 새삼스레 일구는 밑바탕이 되는 말이 밑말이에요. 이와 마찬가지로, 밑넋이라 한다면 말사랑벗이 고우면서 참답고 착한 넋을 일구는 밑바탕이 되는 넋이에요. 더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더 고운 사람이 되면 좋겠고, 더 참다우면서 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에 이 책이 길동무가 되도록 힘쓸 생각이에요. 그러면 ‘밑삶’이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만하지요?

 우리 말사랑벗뿐 아니라 모든 푸름이가 쓰는 말을 일컬어 ‘푸른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푸름이를 비롯해 어린이와 어른 모두 쓰는 말이란 ‘삶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들이 서로서로 아끼고 믿으며 기대거나 도우면서 나누는 말이란 ‘사랑말’이라고 생각해요.

 두 아이 아버지이자 아저씨인 저는 이 푸름말, 삶말, 사랑말을 보듬는 매무새를 이 책에 하나둘 담으려 합니다. 잘 따라와 주시면 좋겠어요. 따라오다가 힘들면 쉬엄쉬엄 오셔요. 너무 벅차다면 한참 쉬어도 되고, 다른 데를 들렀다가 다시 찾아와도 돼요. 언제나 곁에 놓고 쓰다듬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요.

 말사랑벗들이 둘레 어른한테서나 다른 동무한테서나 좋은 말과 넋과 삶을 받아들이거나 눈여겨보면서 말사랑벗들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구면 참 기쁘겠습니다. 따순 손길을 내미는 말을 아끼고, 너른 마음을 펼치는 글을 사랑해 주면 더욱 기쁘겠어요. 자, 이제부터 함께 손을 맞잡고 맑으면서 고운 길을 걸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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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과 글쓰기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나절에 글을 씁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새벽녘 고요하며 썰렁한 기운을 느끼면서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쓸 때에 즐겁습니다. 아니, 즐겁다기보다 기쁩니다. 기쁘다기보다, 뭐라 할까요, 내가 살아숨쉬는 한 사람임을 느낍니다.

 집살림을 도맡는 사람으로서 새벽녘과 아침나절이 아니고는 글을 쓸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다른 때에는 집식구하고 아이를 보듬는 데에 온힘을 쏟을밖에 없습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랑 놀면서 하루해를 넘깁니다. 밥하기만으로도 하루해는 짧고 빨래하기만으로도 힘은 쏘옥 빠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에도 저녁나절 까무룩 곯아떨어졌다가도 이듬날 말짱하게 다시 일어납니다. 사람이라는 몸은 참 용하다고 느껴요. 이제 아무 일도 못하겠다 싶어 드러눕지만, 이듬날이 되면 새삼스레 다시 일어나서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거든요.

 어제는 느즈막히 곯아떨어진 아이가 오늘 따라 새벽에 일어납니다. 아빠는 새벽부터 글쓰기를 하려 했으나, 아이가 옆에 찰싹 달라붙으니 아무런 글쓰기조차 하지 못합니다. 하는 수 없이 셈틀을 끄고 쌀을 씻어 불리다가는 밥을 안칩니다. 날밤을 세 알 까서 밥물에 함께 넣습니다. 아이한테 능금 한 알 깎아 줍니다. 다시 셈틀을 켜고 깨작거리니 아이는 아빠 무릎에도 안기고 아빠 사진기를 갖고 놀기도 합니다. 요 몇 분 동안은 아빠 뒤에서 아빠 사진기를 만지작거립니다. 아빠가 글쓰기를 몇 분이나마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주는 셈입니다.

 이제 슬슬 날이 훤히 밝는 아침입니다. 아침을 차려야지요. 아이가 배고플 테니까요. 둘째를 배어 몸이 무겁고 힘든 엄마가 먹을 뜨거운 국도 끓여 놓고, 다 마른 빨래를 개며, 새로 쌓인 빨래를 해야지요. 우체국에 가서 책을 부쳐야 하는데, 우체국에는 언제쯤 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4343.12.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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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과 사랑하며 꾸리는 삶
― 미우라 아야코, 《부부 이야기, 결혼을 앞둔 여성에게》



- 책이름 : 부부 이야기, 결혼을 앞둔 여성에게
- 글 : 미우라 아야코
- 옮긴이 : 조순복
- 펴낸곳 : 부림출판사 (1984.9.20.)



 “결혼이라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신적으로도 독립하는 것이라구요(160쪽).” 하고 말하는 미우라 아야코 님은 “사람의 일생의 중요함을 알고 있다면, 우리들 자신은 내 스스로가 어떤 노인에 대해서도 적어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고 머리를 숙일 정도의 겸허함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165쪽)?” 하고도 말합니다. 어떤 ‘늙은 사람’한테도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는 대목에서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그렇다면 전두환 같은 사람한테마저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인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이 아닌가 하고 되뇌어 보지만, 틀린 말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껴 이 말마디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섣불리 도리질하기는 어렵다고 느낍니다.

 다만, “전두환 할아버지, 이제부터라도 좋으니 착하며 아름답게 할아버지 삶을 마무리해 보셔요. 그동안 했던 일을 돌이킬 수야 없으나, 오늘부터라도 착한 넋으로 착한 일을 하나둘 쌓아 보셔요.” 하고 말하면서 불쌍하고 슬픈 이녁 삶을 토닥일 때에 비로소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땅 이 나라 이 겨레에서는 힘들는지 모르나, 전두환 같은 사람이 이녁을 하나도 모르는 멧골마을이나 시골마을에서 홀로 길을 헤매며 굶주렸다고 떠올린다면, 멧골마을 사람들이나 시골마을 사람들은 아주 스스럼없이 밥을 차려 주고 옷을 입혀 주며 잠을 재워 주리라 봅니다. 우리 집에서 스물아홉 달째 함께 살아가는 딸아이는 전두환 같은 사람을 보면서도 “아야버지(할아버지)!” 하고 외치며 달려들 듯합니다.


.. 분명히 병은 고통스럽다. 그 기분도 우리들은 이해할 수 있다. 또 대학시험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건은 매해 봄이면, 흔히 신문지상에서 보는 바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생에 그러한 고통이나 슬픔은 정말 전혀 없는 편이 좋을까? 특히 결혼한 이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만일, 미우라(남편)만이 가난과 병고를 경험하고, 나에게는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 부부의 나날의 생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게 아니겠는가? ..  (32쪽)


 아픈 몸으로 아프게 살아온 미우라 아야코 님이 쓴 《부부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집 부부살이를 곱씹습니다. 틀림없이 괴롭고 힘들게 몸앓이와 마음앓이를 하는 옆지기와 살아가는데, 나와 내 옆지기가 서로 바뀐 삶이었으면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나는 몸과 마음이 몽땅 아파서 아무것도 못할 뿐더러 그냥 퍼질러 있는다든지 꼼짝을 못한다면, 설거지이고 빨래이고 하지 못하는 몸이라면, 이러면서 병돌봄까지 받아야 한다면, 이때에 내 옆지기는 어떠한 삶 어떠한 넋일까 궁금하고, 모든 돌봄을 받기만 해야 할 내 삶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으레 ‘주는 사랑’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주는 사랑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받는 사랑’만 할 수 없습니다. 받는 가슴이 있기에 주는 가슴이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삶이 있기에 나누는 삶이 있어요.

 남녘땅 사람들은 북녘에 퍼주기를 한다고들 투덜대는데, 남녘땅 사람들은 북녘에 돈을 보낼 수 있는 대목을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거나 굶주리는 북녘을 불쌍히 여겨 돈이나 곡식을 보내지 않습니다. 북녘에서 받아들여 주니 비로소 나눔을 즐길 수 있습니다. 몸져누운 어버이한테 사랑을 퍼주지 않을 딸아들이 있으려나요. 길 잃고 헤매는 딸아들을 내팽개칠 어버이가 있으려나요. 바보스레 나뒹구는 벗님을 모른 척하거나 등돌릴 수 있나요.

 하루하루 지쳐 쓰러지듯 자리에 눕고, 새벽에 가까스로 깨어나 일손을 잡으며, 아침 일찍부터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 돌보는 나날로 눈코 뜰 사이 없을 뿐더러, 다 마른 빨래를 갤 겨를을 제대로 내지도 못하는 삶을 하루하루 꾸리면서 《부부 이야기》를 새삼스레 읽습니다. 아파 보지 않고서는 읽기 어려운 책인데, 아파 보았거나 아프면서도 이 책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아프지 않으면서 읽어내는 사람 드물게 있는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미우라 아야코 님 《부부 이야기》를 눈여겨보지 않으리라 봅니다. 슬프지만, 아프지 않으니까 돈을 더 많이 벌어들여 신나게 놀아나는 데에 눈길을 쏟는 오늘날 도시사람들이 아니랴 싶어요. (4343.1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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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알라딘에도 상품이 떴군요! 

ㅠ.ㅜ 

지난주 월요일에 나왔는데 

책방 배본은 어제오늘 즈음 겨우 되었고, 

다른 책방에는 배본이 아직 까마득한..... -_-;;;;;; 

그래도 종이책으로 태어났으니 더없이 고맙습니다~~ :)

.. 

(책 머리말을 걸쳐 놓습니다. 책이름처럼은 아니지만, 제대로 사랑받을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말을 해야 하니 생각을 해야지요


 아이는 어른이 하는 말을 귀로 듣고 살갗으로 느끼며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제 말을 가다듬습니다. 어른이 하는 말마디만 익히는 아이가 아닙니다. 어른이 들려주는 말투와 말씨와 말결과 말넋과 말무늬와 말높이와 말자리와 말씀씀이와 말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배웁니다. 어른 스스로 따스한 사랑을 말 한 마디에 담는다면 아이는 마땅히 말 한 마디에 따스한 사랑을 담는 결을 배웁니다. 어른 스스로 툭툭 내뱉기만 하는 딱딱하고 차가운 삶을 보내고 있으면 아이는 저절로 툭툭 내뱉기만 하는 딱딱하고 차가운 삶을 좇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다면 내가 먹는 밥을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차리며 어떻게 치워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기에 밥 한 그릇에 어떤 손길이 깃들었고 밥 한 그릇이 되기까지 누가 어느 땅에서 땀흘려 일구었으며 어떠한 흐름을 타고 우리 집까지 찾아왔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한테 먹이는 밥이기 앞서 어른 스스로 먹는 밥을 아무렇게나 차릴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만 나쁜 첨가물 깃든 먹을거리를 내어주면 안 될 뿐 아니라 어른부터 나쁜 첨가물 깃든 먹을거리를 손사래쳐야 합니다.

 우리는 말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밥을 먹기 앞서 밥이 어떠한 밥인가 살펴야 하듯, 말을 하기 앞서 말이 어떠한 말인가 살펴야 합니다.

 사람을 사귈 때에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 살펴야 합니다. 주머니나 가방끈이나 겉모습을 따지라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를 살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착한지 참된지 고운지를 살펴야 합니다. 착한 삶 참된 삶 고운 삶인가를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면 어떤 책을 읽으려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가용을 몰고자 한다면 어떤 자가용을 왜 몰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권정생 할배는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권정생 할배는 자가용뿐 아니라 갖가지 물질문명을 거의 안 쓰며 지냈습니다. 저 또한 권정생 할배처럼 자가용과 갖가지 물질문명을 거의 안 씁니다. 다만, 권정생 할배는 텔레비전을 보셨으나,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빨래기계나 냉장고나 전자레인지나 청소기를 쓰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갈 때에 자가용 없으면 힘들다 하지만, 두 다리를 튼튼히 가누면서 시골버스를 즐기면 모자랄 구석이 없습니다. 한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버스를 타려고 한참 기다린다거나 시골버스 타는 데까지 이십 분이나 삼십 분을 걸어가는 일은 ‘시간 버리기’가 아닙니다. 읍내에 장보러 자전거 타고 한 시간 즈음 달려야 하는 일은 ‘시간 버리고 몸 버리기’가 아닙니다.

 사람들 스스로 땀흘리며 살아갈 때에는 사람들 말마디에 땀내음이 깃듭니다. 땀내음이 깃든 말을 나누는 사람은 화장품내음이라든지 돈내음을 풍기기 어렵습니다. 늘 땀을 흘리는 사람이 화장품으로 몸을 치레할 수 없습니다. 땀을 흘리는 사람은 돈이 아닌 몸을 써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리하여, 땀흘리는 삶을 즐기는 사람은 조금 더 생각하며 말할 수 있고, 한결 살가이 생각을 즐기며 말꽃을 피울 수 있다고 느낍니다. 땀흘리기보다는 머리만을 쓰며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은 생각을 않고, 아니 아예 생각없는 하루하루로 돈을 더 많이 벌면서 아무 말이나 ‘말만 되면 되지(의사소통만 되면 되지)’ 하는 버릇에 젖어든다고 느낍니다. 돈을 더 벌면 된다는 마음이란 바로 말뜻을 얼추 알아듣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옮아갑니다.

 이 땅 살림꾼을 도맡는 어머님들은 밥 한 그릇을 차리든 아이를 갓난쟁이 적부터 돌보든 빨래를 하든 걸레질을 하든 늘 생각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날마다 똑같은 반찬을 차릴 수 없는 노릇이요, 먹는 사람 입맛과 몸을 헤아려서 밥차림을 달리할 노릇입니다. 늘 말끔하며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도록 빨래를 손수 하셨습니다. 집에서 쉴 사람이 더욱 느긋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게끔 집안을 쉴새없이 치우고 닦고 갈무리하셨습니다. 살림거리가 많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살림거리가 많기에 더더욱 생각을 하며 밥하고 빨래하며 쓸고닦는 살림을 맡으셨습니다.

 저는 이 책 《사랑하는 글쓰기》에 담는 글을 처음 쓰고 두세 번 너덧 번 대여섯 번 예닐곱 번 일고여덟 번 …… 자꾸자꾸 손질하고 고쳐쓰면서 우리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제가 갓난쟁이였을 적부터 어떤 말마디로 나를 돌보고 가르쳐 왔을까 떠올렸습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은 눈으로 읽으며 속으로 헤아리실 테지만, 저는 이 글을 쓰고 고치는 동안 늘 입으로 혼자말을 하며 썼습니다. 저로서는 글쓰기가 아닌 말하기로 《사랑하는 글쓰기》 이야기를 엮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않고 사는 바람에 얄딱구리하게 ‘겹말’이 끊이지 않는 슬픈 모습을 조금 더 따스하게 어루만지거나 넉넉하게 보듬고픈 꿈을 담습니다.

 말은 삶입니다. 내 말이란 내 삶입니다. 삶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삶을 가꾸는 말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말씀하셨는데, 삶을 가꾸는 글쓰기란 ‘사람을 가꾸는 글쓰기’요 ‘삶을 가꾸는 말하기’이며 ‘사람을 살리는 말하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는 이름 하나에 얽매이거나 고이거나 사로잡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받아들이며 내 아프거나 튼튼한 몸뚱이를 반갑게 사랑할 노릇입니다.

 곁에서 아픈 삶을 온몸으로 나누어 주는 따스한 살붙이가 있기에 《사랑하는 글쓰기》라는 책 하나 고맙게 일구어 제 좋은 이웃한테 선물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도시에서는 골목동네에서 골목꽃을 껴안으며 즐거웠고, 시골에서는 멧부리 기스락에서 들풀과 들나무와 들벌레하고 부대끼며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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