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우리말 생각 ㉤ 새말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라는 책을 읽다가 “향기 나는 문장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14쪽).”라는 글월을 보았습니다. 이 같은 글월이 잘못되었다거나 얄궂다거나 할 수 있는 한편, 이러한 글월은 오늘날 어디에서나 어렵잖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글을 쓰고 싶으면 이와 같이 쓸 일이지만, 저보고 이 글을 다시 쓰라 한다면,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더없어 좋다.”처럼 쓰겠어요. 이 글월을 쓰신 분은 토박이말 ‘향긋하다’보다 한자말 ‘향기(香氣)’를 좋아하지만, 저는 ‘향기’라는 한자말보다 토박이말 ‘향긋하다’를 좋아해요. 그리고 ‘-일 것이다’ 같은 말투는 달가이 여기지 않아요. ‘것’이라는 말투는 아무 데나 쓰면 안 될 뿐더러, 이곳저곳에 함부로 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금상첨화(錦上添花)’ 같은 한자말을 꼭 써야 하는지 궁금해요. 바르고 알맞으면서 쉽게 글을 쓸 수 있잖아요. “비단에 꽃을 더한다”는 뜻이라는 ‘금상첨화’인데, 쉽게 말하자면 “더 좋다”는 이야기예요. “참 좋다”나 “한결 좋다”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말사랑벗들은 이렇게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금상첨화’라는 한자말은, 한자를 쓰며 살아가는 중국사람이 ‘새롭게 지은 낱말’이에요. 우리는 한글을 쓰며 살아가는 한국사람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서로서로 살가이 나눌 만한 우리말을 새롭게 지을 만하지 않을까요?

 낱말책에 싣기는 어렵겠지만, ‘더좋다’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어요. 새 낱말이 아니더라도 ‘더 좋다’ 같은 말마디를 써 볼 수 있어요. 학문하는 낱말로 관용구라고 하는데, ‘더 좋다’나 ‘한결 좋다’를 관용구로 삼아도 넉넉합니다. 또는 ‘비단에꽃’이라든지 ‘비단꽃’ 같은 낱말을 빚을 만해요.

 이렇게 보면, 이 글월은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비단꽃이 아닐까.”처럼 새로 적어 볼 수 있습니다.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비단에 꽃을 얹는 셈이다.”처럼 새롭게 적을 수 있어요.

 학교를 다니는 말사랑벗이라면 “학교에서 입는 옷”인 ‘교복(校服)’을 입기도 하겠지요. 이 낱말을 그대로 써도 나쁘지 않으나 “학교에서 입는 옷”이라는 뜻 그대로 ‘학교옷’이라는 새 낱말을 빚어 써도 괜찮아요.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는 ‘교가(校歌)’ 아닌 ‘학교노래’가 되고, 나라에서 부르는 노래는 ‘국가(國歌)’ 아닌 ‘나라노래’가 돼요.

 저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간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하는 일을 가리켜 ‘아이키우기’라고 이야기해요. 이 낱말도 낱말책에 없을 뿐더러 ‘육아(育兒)’라는 낱말만 실리는데, 낱말책에 실리든 안 실리든 즐거이 쓸 만하다고 느낄 뿐더러, ‘아이키우기’라는 말을 쓰는 분이 나날이 부쩍 늘어나요.

 지난날에는 ‘독서(讀書)’라고만 얘기했으나 오늘날에는 ‘책읽기’라고도 함께 얘기해요. 어쩌면, 이제는 ‘독서’보다 ‘책읽기’라는 낱말을 훨씬 자주 많이 이야기할 텐데, 아직까지 이 낱말은 낱말책에 안 실려요. 낱말책에 안 실린 낱말은 우리나라 맞춤법으로는 띄어서 적도록 하지만, 사람들이 새로 빚는 낱말로 여기며 즐겁게 쓰면 좋아요. ‘책읽기’와 맞물려 ‘삶읽기’나 ‘마음읽기’나 ‘글읽기’나 ‘시읽기’나 ‘영화읽기’나 ‘정치읽기’나 ‘사회읽기’ 같은 새말을 마음껏 빚어도 되고요. ‘사랑읽기’라든지 ‘믿음읽기’처럼 새말을 빚어도 됩니다.

 새말이란 하늘에서 똑 하고 떨어지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며 저절로 일구는 낱말이에요. 내 삶을 북돋우며 알맞게 빚는 낱말이 새말이고, 내 넋을 곱게 여미면서 슬기롭게 짓는 낱말이 새말이에요. 이리하여, ‘꿈날개’나 ‘꿈나래’도 새말이고, 아저씨가 말사랑벗을 일컫는 ‘푸름이’도 새말이랍니다. 밤에 올려다보는 하늘을 놓고 ‘밤하늘’이라 일컬으면, 이때에도 새말이에요. 동무들이랑 걷는 길이 좁아 ‘좁은길’이라 해 보아도 새말이고,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바라보며 ‘큰나무’라 가리킬 때에도 새말이에요. ‘글쓰기’도 새로 태어난 말이고, ‘그림그리기’나 ‘노래부르기’나 ‘사진찍기’ 또한 새말이랍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지을 수 없는 말이니까요, 새롭게 빚은 낱말을 듣는 이웃과 벗을 헤아리면서 아기자기하면서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하나둘 곱씹어 보셔요.

 ‘새말’이 있으니 ‘새글’이 있고,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대서 ‘새사람’이며, 새로 사귀는 벗은 ‘새벗’이요, 새로 한 밥은 ‘새밥’이에요. 새로 내놓아서 ‘새책’이고, 새롭기에 ‘새뜻’인 가운데, 새롭게 맞아들여 ‘새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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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와 연필 쥔 예쁜 이웃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4] 《山に生かされた日日》(民族文化映像硏究所,1984)



 삶도 사람도 온누리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집니다. 날마다 새로운 물건이 쏟아지고 새로운 소식이 퍼지며 새로운 기계가 태어납니다. 새로운 물건이 쏟아지면서 얼마 되지 않은 물건마저 낡거나 뒤떨어지거나 버려야 할 것으로 삼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퍼지며 지난날 소식은 파묻힙니다. 지난날 소식이 너무 많다 보니, 소식더미에서 허우적거릴 뿐, 무엇을 귀담아듣고 무엇을 눈여겨보며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잊습니다. 새로운 기계가 자꾸 태어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손과 몸과 마음을 기울여 가다듬는 일거리가 스러집니다.

 제가 쓰는 디지털사진기는 캐논 회사에서 만든 450디입니다. 지난 2010년 여름에 이 사진기가 스스로 목숨을 다해 더는 쓸 수 없어 550디를 장만해 보았는데, 새 사진기는 온갖 솜씨를 더 부릴 만한 기계였으나 제 눈결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되팔았습니다. 망가진 450디를 목돈 들여 고쳐서 다시 씁니다. 어쩌면 2011년 여름에 다시금 덜컥덜컥거려 또 고쳐야 할는지 모르고, 2012년 여름에는 그예 맛이 갈는지 모릅니다. 필름을 쓰는 사진기는 잘 안 망가진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살살 건사하더라도 오래도록 쓰다 보면 자잘히 낡고 닳아 못 쓰기 마련입니다. 필름사진기 한 대가 스스로 목숨을 다해 사진벗한테서 하나 얻어 쓰는데, 이 녀석이 목숨을 다할 때에 고칠 수 있는 가게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새로운 장비와 새로운 솜씨가 나타나면서 새롭게 사진을 찍거나 새롭게 사진이야기 일구는 사람 또한 많이 나타납니다. 바야흐로 사진예술이 흐드러지게 꽃핀다고 느낍니다. 이와 함께,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온누리이다 보니, 나라나 지자체에서 큰돈 들여 ‘지역 생활문화유산 기록 사업’을 곧잘 벌이곤 합니다. 현대 도시 물질문명하고 적잖이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과 동영상과 글로 적바림하는 일을 퍽 자주 봅니다.

 이를테면 소한테 쟁기를 얹혀 논갈이를 하는 농사꾼 삶이라든지, 그물로 고기잡이하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멧골에서 나물을 캐는 멧사람 삶이라든지, 바다에서 물질하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나무를 깎고 다듬어 집짓는 사람 삶이라든지, 우리 악기나 그릇을 만드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찾아다니고 살펴보며 적바림하곤 합니다. 글을 쓰는 분은 으레 대학교수나 대학원 석·박사 과정 학생이나 조교나 강사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냥 사진기 쥔 대학교수나 대학생이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마을사람 스스로 마을사람 삶을 담는 일은 드뭅니다. 아주 드물게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서는 ‘마을 이야기책’을 엮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뺀 이 나라 어느 곳에서도 마을사람 스스로 ‘우리 이야기가 참 보배롭지.’ 하고 여기며 적바림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스스로 적바림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을사람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을 바깥’에서 살아가며 ‘마을 구경’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을에서 일거리를 찾아 마을사람하고 이웃으로 지내며 스스로 마을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인문학 지식이나 인류학 지식은 빈틈없을 뿐더러 ‘마을 이야기책 엮는 솜씨’라든지 ‘사진기 다루는 재주’는 빼어납니다. 글과 사진은 뛰어납니다. 글과 사진은 훌륭하거나 뜻있다 할 만합니다. 다만, 글이든 사진이든 사랑스럽다거나 살갑다거나 따스하다거나 너그럽다거나 포근하다거나 즐겁다거나 애틋하다거나 좋다거나 하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누군가는 이야기합니다. 딸아이 키우는 어버이가 딸아이를 찍는 사진보다 둘레 사람이나 사진관 사람이 딸아이를 찍는 사진이 한결 ‘객관’이지 않겠느냐고. 내 어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딸아들이 찍을 때보다 낯선 사람이 찍을 때에 ‘객관’을 지키지 않겠느냐고. 인간문화재를 담을 때에 제자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전문 사진쟁이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사진기자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견주면 전문 사진쟁이나 사진기자가 ‘객관’ 테두리에서 찍지 않겠느냐고.

 일본 사진책 《山に生かされた日日》를 봅니다. “新潟縣朝日村奧三面の生活誌”라는 이름이 붙은 ‘민속문화 생활기록’이라 할 만한 책입니다.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에서 장만한 《山に生かされた日日》은 1984년에 1쇄를 찍고 1996년에 3쇄를 찍습니다. 열두 해 만에 3쇄라니 참 더디 팔리는 책일 텐데, 어찌 되었든 깊은 멧골 조그마한 마을사람 이야기책이 3쇄를 찍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멧마을 사람들 삶이야기를 담은 책이 이렇게 사랑받은 적이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이처럼 사랑받기는 힘들다고 느낍니다. 하나같이 도시로만 몰리고 도시 살림만 헤아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민속문화 생활기록’을 왜 하고 어떻게 하며 누가 하는가를 살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 찍은 사진을 담아야 잘 엮은 사진책이 아닙니다. 잘 쓴 글을 실어야 잘 빚은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어깨동무하는 삶으로 사진을 담아야 하고, 너나들이 같은 이웃이 되어 글을 실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예쁘장하게 찍은 딸아이 사진이라 한들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초점 어긋나고 흔들린데다가 빛조차 안 맞았을지라도 ‘아이를 사랑하는 어버이가 따사로운 넋과 손길’로 찍은 사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山に生かされた日日》에 실린 사진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따스합니다. 좋습니다. 즐겁습니다. 머나먼 도시에서 학자님들이 ‘행차’해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머나먼 도시에서 찾아온 학자님들일지라도 마을사람하고 고이 어우러지면서 저절로 얻은 사진으로 책을 일구었습니다.

 지역문화를 살피든 민속문화를 톺아보든 생활문화를 파헤치든 전통문화를 다루든, 학자나 교수나 학생 된 사람은 ‘사진기를 쥔 예쁜 이웃’으로 마주서야 합니다. ‘연필을 쥔 고운 동무’로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사진기와 연필을 때때로 내려놓고 함께 호미를 쥐는 살붙이’로 두레를 하고, ‘술잔과 수저를 함께 드는 마을지기’로 웃고 울어야 합니다. (4344.1.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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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농할멈과 나
Mizuki Shigeru 지음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이야기 있는 만화, 이야기 깃든 삶
 [만화책 즐겨읽기 18] 미즈키 시게루, 《농농 할멈과 나》



 국민학교 5학년이던 1986년 8월과 10월과 12월, 중앙일보사에서 내던 〈소년중앙〉이라는 잡지에서 낱책부록을 하나씩 딸려 베풀었습니다. 8월에는 《세계 귀신 100가지 이야기》를 베풀고, 10월에는 《세계 요정 100가지 이야기》를 베풀며, 12월에는 《요정의 세계는 어떨까?》를 베풉니다.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담은 세 가지 낱책부록은 그때부터 오늘까지 고이 건사해 놓습니다. 언제나 책꽂이 아주 좋은 자리에 꽂아 놓았으며,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읽었고, 이 책을 펼친 날은 꿈자리가 무섭기는 하지만 온갖 부푼 꿈으로 생각날개를 펼쳤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이던 1986년부터 얼마 앞서까지 이 ‘귀신 그림’과 ‘요정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뿐더러, 누구인가 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난 2009년 여름, 《만화 공화국 일본여행기》를 읽으며 비로소 이 ‘귀신 그림’과 ‘요정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알아챕니다. 일본 돗토리에서 나고 자라며 만화를 그린 ‘미즈키 시게루’ 님 작품이었습니다. 돗토리라는 곳은 미즈키 시게루 님 ‘귀신 그림’이랑 ‘요정 그림’으로 커다랗게 ‘만화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본에서는 만화를 문화로뿐 아니라 삶으로 여기면서 고운 이야기 뿌리를 내리고,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만화를 문화로나 삶으로나 여기지 못하면서 만화 하나로 고운 이야기 뿌리를 못 내린다고 느낍니다.


- “게게, 어디 갔었어?” “엄청 찾았잖아.” “요나고까지 도너츠 먹으러 간다.” “도너츠? 그게 뭔데?” “무지 맛있는 거래.” “맛있는 거?” “친구 말로는, 외국사람들이 먹는 꼭 튜브처럼 생긴 과잔데 그게 혀가 녹을 정도로 맛있다는 거야.” “한 개 3전.” “10전 있으니까 세 개 살 수 있어.” “그럼 기차는 어떡하구. 요나고까지 5리(약 2킬로)나 되는데.” “걸어가자!” “좋아!” (141∼142쪽)


 만화책 《농농 할멈과 나》를 읽습니다. 《농농 할멈과 나》는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만화로 담은 미즈키 시게루 님이 어떠한 어린 나날을 보냈는가를 담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누구한테서 들으며 컸고, 당신한테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들려주던 ‘농농 할멈’은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어떠한 넋과 마음으로 알려주었는가 찬찬히 되새깁니다.

 농농 할멈은 어린 미즈키 시게루 님한테 차분한 얼굴과 목소리로 노상 이야기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줄 알면 큰일나는 거야(20쪽).” 하고. 눈에 보이기에 더욱 잘 살피면서 사랑하거나 마음쓸 줄 알아야 하고,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한결 잘 살피면서 사랑하거나 마음쓸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특히 고양이는 요사스러워서, 살아 있을 때부터 미물이거든. 십 년 이상 묵은 고양이는 꼬랑지가 갈라지면서 불여우가 된단다.” “불여우!” “어떤 뼈건, 모두 흙으로 돌려줘야 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혼백이 영영 이승을 떠돌게 돼.” (20, 43쪽)
- “계속 도망칠 건가? 그런 상처를 입고 어두운 곳만 찾아다닐 게 가엾어서 그래. 아직 젊으니 인생 다시 시작해 봐. 어머니 눈물짓게 하지 말고.” (126쪽)
- “그럼 치구사를 데려가지 말라고 말해 주면 안 돼?” “그건 안 된다.” “맨날 나쁜 짓만 하지 말고 가끔은 착한 일도 좀 해 봐.” “인간이란 참 자기 멋대로야.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해 돌아가는 줄 안다니까.” (158쪽)


 미즈키 시게루 님이 어린 나날을 보내던 무렵은 “쇼와 6년(1931년)” 즈음이고,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인 그때에 “소년들은 매일같이 싸움에 빠져 살았다(3쪽).”고 합니다. 하기는, 1931년 그무렵 일본은 일찌감치 한국땅을 식민지로 삼았고, 중국이며 동남아시아며 식민지로 잡아먹으려고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군대를 크게 북돋았고, 아이들한테 착하고 바른 넋보다는 치고받는 다툼을 즐기도록 이끌었어요.

 생각해 보면, 이런 끔찍한 나날이어야 하던 일본 제국주의 회오리바람에서 조금은 비껴난 시골마을에서 농농 할멈하고 함께 크며 ‘자연이랑 사람하고 벗삼는 귀신과 요정’ 이야기에 눈길을 둔 셈입니다. ‘그림이야기(만화)’를 신나게 그리며 어머니와 동무들한테 읽히던 미즈키 시게루 님은 대단하다 할 만합니다. 어쩌면 농농 할멈은 귀여운 ‘게게(미즈키 시게루 님을 부르는 귀여운 이름)’가 전쟁놀이에 휘둘리지 말고, ‘그림이야기꾼’으로 크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뒷배를 한 멋쟁이인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데즈카 오사무 님 또한 일본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깃발을 드날리던 때부터 만화를 신나게 그려서 어머니하고 동무들한테 읽혔어요. 데즈카 오사무 님 어머님 또한 데즈카 오사무 님이 전쟁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말고 ‘네(데즈카 오사무)가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렴’ 하며 기운을 복돋았습니다. 일본 만화밭에서 큰 기둥이라 할 두 분은 ‘평화로운 나날이던 때’에도 평화를 사랑하는 한편, ‘평화롭지 못한 전쟁통이던 때’에도 평화를 사랑하면서 만화를 그린 셈입니다. 일본 만화밭 큰 기둥 두 분 곁에는 훌륭한 할머니와 아름다운 어머니가 있은 셈입니다.

 “인간이란 참 자기 멋대로야.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해 돌아가는 줄 안다니까(158쪽).” 같은 이야기는 도깨비가 미즈키 시게루 님한테 들려준 말일 뿐 아니라, 미즈키 시게루 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지면서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떠한 매무새로 살아가야 아름다운가 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멋대로 군대를 만들고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며 함부로 ‘여린 이웃과 나라’를 들볶는 짓이란 얼마나 몹쓸 일이며 나쁜 짓인가를 되새기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 (그로부터 일 년.) “마쓰는 왜 안 와?” “홍역으로 죽었다.” “홍역으로?” “2∼3일 됐어.” (이렇게 첫사랑을 잃었다.)  (24쪽)
- “너, 아까 내가 귀신인 줄 알았지?” “아, 아니.” “거짓말 안 해도 돼. 어차피 곧 귀신이 될 텐데, 뭐.” “아가씨, 무슨 그런.” “난 버림받았어. 도쿄에도 가까운 병원이 있는데, 이런 먼 시골까지 보내 버렸잖아. 다들 내 곁에 있기 싫은 거야. 할머니도 돈 준대서 붙어 있는 거잖아.” “그게 뭐 어쨌단 거야?” (93쪽)
- “맞죠, 할머니?” “저, 그건 말이다.” “그래서 나 죽는 건 슬프지만 이제 무섭지 않아요.” “시게루의 그림이야기처럼 신비한 섬을 모험하러 가는 것 같아서 하나도 무섭지 않은걸. 나, 시게루한테 ‘십만억토’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162쪽)

 



 1986년에 〈소년중앙〉 낱책부록으로 귀신 이야기 요정 이야기 만화책을 곁달아 주기 앞서부터 미즈키 시게루 님 작품은 한국땅에 퍽 자주 ‘무단도용(몰래 훔쳐 그리기)’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미즈키 시게루 님 작품임을 밝히지 않았고, 일본 만화쟁이한테 저작권삯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미즈키 시게루 님 작품을 한국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돈을 벌었어요.

 한국 어른들은 몰래 훔쳐 내놓는 책으로 돈은 벌지만, 정작 이러한 만화 작품에 무슨 얼과 넋이 스몄는가를 이 나라 아이들한테 심거나 나누는 데에는 젬병이었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더 재미있는 만화’나 ‘더 뜻있는 작품’이나 ‘더 알찬 이야기’나 ‘더 잘 그린 그림’보다 ‘더 사랑스러우’면서 ‘더 믿음직’한 삶을 보여주어야 하는 줄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워낙 무시무시한 군사독재였기에 이렇게 할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댄다면, 오늘날에는 어떠한 나날이라 아이들한테 ‘꿈과 사랑 이야기를 살포시 담는’ 만화나 문학이나 그림이나 이야기를 베풀지 못한다 할까요.

 이 나라 아이들한테는 박찬호·박세리·박지성·김연아·박태환으로 이어지는 운동선수 이야기들만이 꿈이어야 하고 사랑이어야 하는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아이들한테는 더 돈을 벌거나 더 이름을 얻거나 더 힘이 세지는 일이 아름다운 삶이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아이들은 모조리 대학생이 되어야 하는데, 더군다나 손꼽히는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교 학생이 되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삶을 사랑하면서 다 다른 이야기꽃을 피우는 꿈을 보듬도록 이끌지 못해도 괜찮은지 궁금합니다.


- “염불이나 해 주는 걸론 이젠 먹고살기가 힘들어졌어. 그래서 오늘부터 시게네 집에 간다.” “우리 집에서 살 거야?” “그래.” “신난다. 그럼 매일 밤마다 요괴 얘기 들을 수 있겠네.” (30쪽)
- “어허, 잠깐 나를 없애도 되겠어?” “신동이 다시 5점짜리 꼴찌로 돌아가면 창피할 텐데. 전보다 훨씬 더 바보 취급 당할걸.” “정말 그렇겠네.” “지금 이대로 신동 대접받는 게 좋잖아. 이 나라는 시험만 잘 보면 팔자가 피니까 말야.” “하긴 그래. 시험 한 번 잘 봤다고 대접이 확 달라졌으니. 인생은 실력이 아냐.” (59쪽)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4대강 반대’나 ‘국가보안법 없애기’나 ‘한미자유무역협정 막기’ 같은 일을 큰힘 모아 하자고 외치곤 합니다. 다른 한켠에서는 ‘미국은 우리 나라를 먹여살린 고마운 나라’라 외치거나 ‘연봉 얼마 아파트 얼마 자가용 얼마’ 같은 이야기를 외칩니다.

 우리 어른들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아이들 앞에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농사짓는 즐거움부터 빨래하고 밥하는 기쁨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붙잡은 일거리를 당신 딸아들한테 스스럼없이 물려줄 만한지 아닌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온 집안 사람들이 다 함께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사람한테도 보람과 웃음꽃 나누는 놀이감을 톺아보지 않아요.

 미즈키 시게루 님은 《농농 할멈과 나》에서 1930년대 첫무렵 일본에서도 “시험만 잘 보면 팔자가 피니까 말야(59쪽).” 하는 이야기를 곁들이는데, 한국 또한 2011년이 되어도 이런 흐름은 매한가지이거나 더 슬프게 뒤틀린 채 뿌리내렸습니다. 아이들이 참답고 착하며 고운 슬기를 빛내도록 하는 배움터가 아니라, 아직까지 자율학습과 0교시와 보충수업과 두발단속 따위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야 하는 슬픈 배움터입니다. 핀란드 배움터가 어떠하고 스웨덴 배움터가 어떠하며 영국 배움터가 어떠하다고 떠들기 앞서, 이 나라 아이들이 학교라는 데가 참다운 배움터 노릇을 하도록 애쓰지 않아요. 시험성적 잘 나오도록 하는 학원에 아이들을 보낼 뿐입니다. 교과서 달달 외우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어린이문학을 한 이원수 님은 1969년에 내놓은 《시가 있는 산책길》(경학사)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더 나은 것, 좀더 바른 것만을 갈망하며, 그러므로 해서 일생을 고독한 나는, 내 소망과 내 기쁨을 시나 소설이나 동화를 통해 발표하고 외치고 그 속에서 사랑과 미움을 노래해 왔다.”고 밝힙니다. 이원수 님은 “아동문학을 내 꽃동산으로 생각해 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결로, 미즈키 시게루 님한테는 만화가 꿈과 기쁨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만화로 빚은 ‘꽃동산’입니다.


- “대부분은 그렇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의 마음에 조금씩 남는 법이거든. 하지만 조금 있으면 그 무게에 익숙해지게 돼. 걱정할 건 없다.” “흐음.” “몸은 음식을 먹고 커다래지지. 사람의 마음은 여러 영혼이 보태지면서 성장한단다. 시게루도 어렸을 적부터 많은 것을 보고 만지면서 컸지. 돌에는 돌의 혼이 있고, 벌레에는 벌레의 혼이 있거든. 그런 수많은 혼들이 들어와 보태 줘서 시게루가 이렇게까지 큰 거란다.” (202쪽)
- “하지만 농농할머니가 별로 나쁜 짓은 안 한다고 그랬어. 자기 마음이 비치는 거야. 무섭다고 생각하면 무서운 얼굴이 되고, 무섭지 않으면 부드러운 얼굴이 된대.” (239쪽)



 누군가는 만화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이라면, 누군가는 사진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입니다. 글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을 이룹니다. 노래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을 일굽니다. 농사짓기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을 이루고, 작은 가게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을 일굽니다. 자전거를 몰거나 청소부 일을 하거나 우유랑 신문을 돌리며 이야기 꽃동산을 가꿉니다. 아이를 가르치거나 살림을 하면서 이야기 꽃동산을 보듬습니다.

 내 삶을 찾는 데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삶을 아끼는 데에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내 삶을 살찌우는 데에서 이야기가 자라납니다.


- “앞으론 평화주의로 가려고 해.” “평화주의?” “그게 뭔데?” “계급을 폐지하는 거야?” “대장이 명령하고 부하가 따르고 하는 건 이제 안 한다. 동네 대장도 다 없애고 싶지만, 뭐 어려운 일 있을 때 얘기 상대 정도로나 생각하고, 앞으론 다들 하고 싶은 거 하며 놀아. 뜀박질이든 딱지치기든 개무시도 없어. 갓파랑도 맘대로 놀아도 돼.” “그럼 질서는 어떻게 잡을 건데?” “안 잡으면 어때.” “옆동네에서 전쟁 걸어 오면 어떡하고?” “그땐 그때 생각하자. 맨날 모여 군사훈련이나 하는 건 시간낭비야. 우린 본래 신나게 놀기 위해 모인 거잖아.” (398∼399쪽)


 우리는 이 땅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즐거이 어깨동무하려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동무랑 이웃을 믿고 좋아하며 함께 일하거나 놀려고 태어났습니다.

 돈을 벌려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이름을 드날리려고 태어날 아이는 없습니다. 기운센 장사나 우두머리가 되려고 태어나야 할 아이는 없어요.

 따순 한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넉넉한 한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고운 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착한 한 사람으로 지냅니다. 슬기로운 한 사람으로 꿈꿉니다. 살가운 한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농농 할멈과 나》는 온삶을 걸쳐 만화쟁이 한길을 걸어온 한 사람 밑바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밝힌 곱고 멋스러운 ‘옛이야기’입니다. 보드라운 삶이야기요, 예쁘장한 꿈이야기입니다. (434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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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걱별


 밤과 새벽에 일어나 아이 오줌기저귀를 갈아 준 다음, 아빠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쉬를 눕니다. 찬겨울 찬새벽이지만 꽤 따스하다고 느낍니다. 모처럼 시골집에 아이 이모랑 삼촌이 찾아와서 하룻밤 함께 자기 때문일까요.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 별을 보다가 굵직한 일곱 별이 반짝이는 북두칠성을 올려다봅니다. 저 별을 어릴 적에 무슨 별이라고 들었던가. 주걱별이었나? 국자별이었나? 물바가지별이었나?

 손잡이가 달린 물바가지처럼 생겼다 했고, 도시에서도 쉽게 알아보았을 뿐더러, 늦게까지 동무들하고 놀다 보면 어김없이 올려다보던 별입니다. 국자별만큼은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도 밝은 빛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우리 아이한테도 저 국자별인지 주걱별인지 물바가지별인지를 보여주었던가? 아빠가 아이한테 저 별 이름을 국자별이라 가르쳐 준다면 아이는 국자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크겠지요. 아빠가 아이한테 요 별은 이름이 주걱별이라 이른다면 아이는 주걱별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새기면서 자라겠지요.

 아빠 마음대로 아무 이름이나 붙일 수 있습니다. 아빠 마음대로 아무 이름이나 붙이는 일은 자칫 두렵습니다. 아빠는 아빠가 살아온 마음에 따라 가장 살가우면서 아름답다 느끼는 이름을 곱새기면서 고운 이름으로 별 하나 이름을 붙여 아이하고 즐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쉬를 눈 텃밭에는 마당에 쌓인 눈을 눈삽으로 퍼서 뿌립니다. (434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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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1-03 08:47   좋아요 0 | URL
저에겐 칠형제 별이었어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파란놀 2011-01-03 08:49   좋아요 0 | URL
네, 바라보는 곳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생각했을 테니까, 다 다른 이름들이 저마다 예쁘리라 생각해요.

새해에 즐거우며 반가운 일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새해와 글쓰기


 이제껏 새해를 새해라고 여기며 맞은 적은 없다. 글을 쓰고 나서 끝에 붙이는 날짜가 조금 달라진다고 여길 뿐, 새해라 해서 헌해가 아쉽거나 새해가 반갑거나 하지 않다. 헌해가 그립거나 새해가 애틋하지 않다. 아무래도 여태껏 걸어온 내 삶이란 내 길만 헤아린 삶이었기 때문에 굳이 내 나이라든지 새해라든지 돌아볼 까닭이 없는지 모른다. 바깥에 눈길을 돌린다거나 보배스러운 삶을 남들한테서 찾는다면 새해를 새삼스레 느끼겠지만,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야말로 보배스러운 삶이라고 여긴다면 새해라 해서 달라질 느낌은 없다. 다짐을 하건 일을 하건 놀이를 하건 사람을 만나건 ‘바로 오늘’부터 할 뿐이기 때문이다.

 2011년 1월 1일을 맞이하여 아이가 네 살이고, 오뉴월에 둘째가 태어난다. 첫딸하고 어느새 네 해(서른 달)째 함께 살아가는 셈이요, 둘째랑 첫 해를 살아가는 셈이다. 둘째는 엄마 배속에서 자라니까 지난해부터 함께 살아왔다고 해야 옳겠지. 아이가 엄마 배속에 고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나날부터 우리 집은 네 식구 살림이니까.

 아빠는 새해 첫날을 맞이했어도 떡국을 끓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력설 아닌 음력설을 쇠니까 양력설에 굳이 떡국을 낼 까닭이 없는지 모르나, 생각조차 못했다. 네 식구 복닥이는 나날로 노상 빙글빙글 돌기 때문이다. 옆지기 동생들이 양력설 맞이 마실을 와 주면서 떡국떡을 들고 왔기에, 이 떡국떡을 국을 끓이며 넣을 때에 비로소 ‘새해 첫날이니 떡국을 차려서 먹네.’ 하고 깨달았다.

 밥을 하면서 만화책을 들여다본다. 다른 때에는 책 들출 겨를이 없으니, 밥을 안치고 찌개를 끓이며 다른 이것저것을 하는 틈에 조금이나마 책을 들춘다. 아이는 불가에서 서성이며 논다. “이거 뜨거워?” 하고 묻기에 “응, 뜨거워. 가까이 가지 마.” 하고 얘기할 뿐, 아빠는 아이도 즐길 만한 일거리를 나누어 주지 않는다. 모처럼 어른 넷에 아이 하나 밥차림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아이가 부엌에서 거치적거린다고 여길 뿐, 아이한테 무어 하나 심부름이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이 바보, 아이는 저랑 놀아 주거나 저한테도 뭔가를 시키지 않으니 얼마나 심심하겠니.’ 하고 떠오른다. 내 어릴 적, 언제나 일만 하느라 바쁜 어머니는 당신 아이한테 따로 말을 걸거나 놀아 줄 틈이 없었다. 아이인 나는 어머니 곁에 촐랑촐랑 따라붙으며 다녔고, 어머니는 퍽 귀찮아 하시기는 했으나 이것저것 심부름이나 잔일을 시켰으며, 심부름이나 잔일을 하며 즐거워 하곤 했다. 쓰레기 하나 내다 버리든 밥상을 닦든 아주 조금이라도 집일을 거든다면서 더없이 뿌듯했고, 밥값을 했다고 느꼈다.

 옆지기 남동생한테 ‘아빠가 설거지한 그릇을 모시천으로 닦는 일’을 시키다가, ‘설거지한 그릇을 옆지기 남동생한테 건네주는 몫’을 아이한테 맡긴다. 아이는 차분한 얼굴로 그릇을 착착 받아 넘긴다. 마치 어린 날 제 아버지 얼굴하고 같다.

 깊어 가는 밤나절, 아이는 잠들지 않는다. 제 손수건에 침을 발라 빈 밥그릇을 닦는 시늉을 한다. 아까 설거지를 할 때에 외삼촌이 모시천으로 그릇 물기를 닦는 모습을 따라한다. 아이가 유리잔을 꽤나 많이 깨뜨리기는 했으나, 웬만해서는 놓쳐서 깨뜨리지는 않으니까, 아이한테도 이 일을 좀 시킬까. 엄마는 아이한테 밥상 닦는 일을 시켜 주라 얘기한다. 아빠 혼자 다 하기만 한다면 힘들기도 힘들고, 아이한테 한두 가지 시킨들 일거리가 줄지 않으나, 아이로서 무언가 겨울날 집안에서 오래오래 보내야 하는데, 자잘하더라도 일거리를 느끼며 함께 하도록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아이는 자꾸자꾸 제 어버이 말을 안 들을는지 모른다.

 아이는 제 엄마랑 아빠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며 제 말을 배우고, 아이는 제 엄마랑 아빠가 하는 일을 거들며 제 몸을 가꾼다. 아이가 손을 다칠까 걱정하거나 아이가 물건을 떨어뜨려 망가뜨릴까 근심한다고 해서 나쁜 일이 아니다. 이런 일도 걱정하고 근심하는 한편, 아이가 심심해 할까 걱정하고, 아이가 무엇을 배우며 마음을 가다듬어야 좋을까를 근심해야지 싶다. 아이가 깨어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아이가 혼자 책읽기나 그림그리기에 빠져들지 않는 만큼, 아이 앞에서 되도록 책읽기를 하지 말아야겠다. 아니, 책읽기를 못하겠지. 아이한테 자꾸 말을 걸고, 심부름을 시키며, 아주 살짝이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놀려야겠다. 엊그제까지 이 일을 옳게 못했으니, 오늘부터 이 일을 옳게 하도록 한결 마음을 기울이자. (434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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