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는 마음


 일곱 살부터 열대여섯 살 아이들이 빙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들과 어른들한테 들려주던 ‘말을 살리는 글쓰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는 이오덕 선생님 제자가 아니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들어서 꾸린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글쓰기회) 회원도 아닙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신 다음 당신 글을 갈무리한 사람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오덕 선생님보다 이오덕 선생님 글을 훨씬 많이 꼼꼼히 읽어야 한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오덕 선생님이 손으로 원고지나 공책이나 수첩에 꾹꾹 눌러쓴 글을 하나하나 새겨 읽으며 타자로 옮겨야 한 사람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살았을 때 당신이 손수 적바림한 걸그림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정갈하게 글씨를 쓸 수 있다니 놀라우며 아름답습니다. ‘선생님 손글씨’는 어느 분 언제 글씨라 할지라도 이렇게 흔들리거나 치우치거나 날리지 않아야 한다고 새삼 느낍니다. 차분하면서 따스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선생 노릇을 하겠다고 깨닫습니다.

 나이가 열 살씩 벌어진 아이들을 한 자리에 앉히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터넷게임이나 막놀이나 막밥에 익숙한 아이들한테 삶과 말과 꿈과 일과 땀과 흙과 밥과 책이 살가이 얼크러진 글쓰기를 이야기하기란 참 까마득합니다.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른아침부터 낮까지 집일로 쉴 틈이 없습니다. 쌀을 씻어 불리고, 쌀을 냄비에 담아 불을 넣고, 반찬을 마련하고, 밥상을 차리고,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먹은 밥그릇 치우고, 이불을 걷어 털고,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제자리에 놓고, 아이 쉬를 누이고, 아이하고 복닥이고 하다 보니 빨래할 겨를마저 없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깨어나서 저녁에 아이가 잠들 때까지 집일 하는 사람은 책 한 권 한 줄이나마 훑을 말미를 얻지 못합니다.

 아이들 앞에 서서 말문을 엽니다. 한 시간 동안 말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문득, ‘아줌마들 수다’가 떠오릅니다. 아줌마들치고 할 말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할 말이 없을 수 있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할 말이 잔뜩 있을 아줌마들한테서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말뜻을 살피면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을 ‘수다’라 합니다. 아줌마들이 쓸데없이 말수가 많나 하고 갸우뚱갸우뚱하는데, 아줌마들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하지 않는 아저씨들이 엉뚱하게 이런 말을 짓지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다는 수다입니다. 쓸데없이 늘어놓는 말이란 수다입니다. 그러니까, 아줌마들이 터뜨리는 말물결이란 ‘이야기꽃’이라 이름을 붙여야 옳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줌마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들어 주고 제대로 말해 주는 이야기동무를 사귀고 싶습니다. 어찌해야 밥을 한껏 맛나게 차리고, 어찌해야 집 일손을 조금 줄이며, 어찌해야 말썽쟁이 아이들이 착하고 참다이 크도록 돌보면서 어버이로서 더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아버지란 자리에 선 사람치고 집일에 마음쓰거나 몸쓰는 이는 아주 드뭅니다. 그야말로 아주아주아주아주 드뭅니다. 집에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리는 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온 식구 먹을거리를 홀로 맡으며 날마다 차리는 가운데 도시락을 싸고 주전부리를 마련할 줄 아는 아버지란 몇이나 될는지요.

 밥 하나를 놓고도 아버지가 집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빨래는 어떨까요. 청소는 어떻지요? 아이키우기는 어떠한가요?

 아픈 옆지기가 깊은 밤에 혼자 보던 영국연속극 하나를 함께 봅니다. 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얘기입니다. 아이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경찰차가 들이받아 그만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아이 아버지는 바깥일(사진찍기)에만 마음을 썼을 뿐, 네 아이들이 어떤 동무하고 사귀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떻게 지내는지를 거의 알아채거나 헤아리지 못해 왔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보다 큰 날벼락이 없겠지요. 아이들한테 밥을 먹인다든지 집안을 쓸고닦는다든지 옷을 빨아 입힌다든지 하는 일거리 가운데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란 없어요.

 날마다 밥을 차리고 치우며 먹이면서 생각합니다. 아니,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옆지기가 몸이 안 아픈 사람이라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 끔찍합니다. 이럭저럭 집일을 거든다고 깝죽거리지 않았나 싶고, 이냥저냥 집일을 거들기는 할 테지만 ‘내 좁은 속알머리’에서 허덕이는 주제에 잘난 척을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니, 깝죽거림이나 잘난 척은 아닐 테지요. 내 깜냥껏 참말 힘을 쓸 텐데, 막상 ‘아이 어머니’들이 얼마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힘들거나 힘겹거나 슬프거나 아픈지를 하나도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받아들이기는커녕 느끼지조차 못하겠지요.

 반찬 한 가지 수월하게 금세 뚝딱뚝딱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을 들여야 하는지 아는 아버지는 아주 드뭅니다. 아이 기저귀를 눈 감고 척척 후다닥 새로 갈아 주기까지 얼마나 숱한 손길이 가야 하는지 아는 아버지는 몹시 드뭅니다. 걸레 한 장으로 몇 평을 말끔히 훔칠 수 있는지 아는 아버지는 매우 드뭅니다. 한두 시간이 아닌 스물네 시간을 한 해 내내 아이랑 복닥이면서 아이랑 어떻게 놀고 아이랑 어떻게 어울리며 아이랑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좋을는지를 아는 아버지는 너무 드뭅니다. 너무 적고 너무 없으며 너무 모자랍니다.

 글쓰는 아버지 가운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는 분은 몇이나 될는지요. 방송사에서 일하거나 신문사에서 일하는 남자들 가운데 여자들 넋을 살피는 이는 몇이나 있을는지요.

 선거권이 있다 해서 남녀평등인가요. 여자도 대학생이 되고 여자도 중장비 운전을 할 수 있으니 여남평등인가요. 아빠랑 엄마 성씨를 나란히 쓰면 여성해방이 되나요.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여성해방이 이루어지나요. 여성할당제란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가요. 《할아버지의 부엌》 같은 책이 아름다우면서 기쁘고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하기란 일본이든 영국이든 미국이든 프랑스이든 한국이든 꿈 같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할머니 부엌” 이야기를 귀기울인다든지 눈여겨본다든지 얼싸안는다든지 하면서 담아낼 일꾼 또한 없습니다. “할머니 부엌”은 그저 마땅할 뿐이니까 아예 책으로 낼 생각조차 안 합니다. 책으로 낸다 한들 읽을 사람이나 있을까 모릅니다. ‘임금님 밥상’이 아닌 ‘우리 아이 밥상’을 차리는 “할머니 부엌” 이야기책을 엮도록 마음을 들이고 사랑을 쏟을 책마을 남자 편집자는 있기나 하나요. 아니, 여자 편집자 가운데에도 있기나 하나요.

 집살림 도맡으며 첫딸을 서른두 달째 보살피는 나날을 보내며 두 손바닥은 거칠다 못해 뭐에 찔려도 아픔을 못 느낄 만큼 딱딱해집니다. 아이는 아빠가 손바닥으로 제 손을 비비거나 얼굴을 쓰다듬으면 ‘아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빠는 아이한테 “벼리를 먹여살리고 키우느라 아빠도 손이 아파.” 하고 말합니다. 이때 아이는 눈알을 빛내며 “아빠 손 아야 해?” 하면서 앙증맞은 손으로 아빠 손을 쥐고는 자그마한 입을 모아 호호 붑니다. 날마다 아이랑 밥을 먹으면서 자꾸 딴짓을 한다고 골을 부리는 아버지입니다만, 날마다 새롭게 기쁜 마음으로 밥을 차립니다. 애 엄마가 아픈 사람이라 애 아빠가 삶을 비로소 배우며 더없이 고맙다고 느낀다고 말할 때에 내 둘레에서 이 얘기를 알아듣는 사람은 아직 세 사람만 보았습니다. 그나마 세 사람은 모두 할머니입니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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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아파하자


 경상도 안동땅에서 오늘 하루도 두 끼니 밥만 먹으면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권정생 할아버지는 우리들한테 이야기한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다고 보면 안 돼요.” 하고. 이 말을 제대로 곰삭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오는, 이른바 ‘(학교) 선생님’이나 ‘(큰 신문사) 기자’나 ‘(글깨나 쓴다는) 작가’들한테도 한 마디 한다. “나보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기예요. 나 대신 아파 주면 좋겠어요.” 하고. 이 말 또한 얼마나 알아들을까? 아마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리라. 그저 ‘늙은이가 이제 노망까지 들었나? 주책이야, 원!’ 하고 생각할 테지. 아니면 ‘권 선생님이 너무 아프니, 이런 말까지 다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거나.

 뒤엣말을 먼저 생각하겠다. “나 대신 아파 달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가? 이는 바로 “아픈 사람 마음이 되라.”는 소리이다. “아픈 사람처럼 작은 목숨, 작은 일도 고맙고 소중히 여기며 낮은 목소리로 조촐하고 조용하게 살자는 이야기”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도 모르는 말이 없는 큰 깨달음이 있는데,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가고, 어린이처럼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머리로는 알아도 ‘어린이처럼 온몸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지식만으로 살아가는 일이 대단히 걱정스러울 수 있는 줄 뻔히 아는 사람들조차 ‘지식이 아닌 삶’과 ‘지식이 아닌 사랑과 꿈’을 보배처럼 여기지 않는다.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하고 ‘한마음 한몸’이 되지 않고서는 내 이웃을 돕는 손길을 내밀 수 없다. 그저 불쌍해서 동전 몇 닢 던져 주는 사람은 잘난 멋에 불쌍히 여길 뿐이지, 참말로 돕는 손길이 아니다. 한결같이 몸과 마음 모두 아늑하고 폭신한 자리에 있으면서 입과 말로만 시끄럽게 ‘가난한 이를 돕자(서민 복지 대책)’는 이야기만 떠들면 무엇하겠는가? 환경을 지키자는 이야기를 입으로만 떠들거나 외치지 말자. 좋은 환경책을 읽자고 추천하지 말자. 이런 목소리 저런 책 하나 내세우지 말고, 나부터 내 돈벌이와 돈씀씀이를 줄이면 된다. 더 많이 벌 생각을 말고, 더 많이 쓸 생각을 버려야 한다.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다니며, 전기 먹는 기계를 덜 쓰거나 안 쓰면 된다. 자동차를 타야 한다고 해도 한 번 적게 타면 되고, 두 번 적게 타거나 한 주에 하루나 이틀쯤은 타지 않으며, 대중교통을 즐겨 타거나 자전거를 타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공기가 나빠져 걱정이야”라든지 “지구온난화가 근심이야”라든지 “길에 차가 너무 많아”라든지 “공장이 너무 많이 생겨” 따위 헛지랄만 늘어놓으면 무엇하는가? 나 스스로 몸으로 살아내지 않고서 말로만 시끄럽게 늘어놓는 사람들한테, 권정생 할아버지는 곱디곱고 낮디낮은 목소리로 외친다. “여보게 사람들아, 한 달에 50만 원만 가지고도 넉넉히 하고픈 일 다하며 살 수 있는데, 도무지 얼마나 더 욕심을 부려서 많이 벌고 많이 쓰면서 이 땅을 더럽히고, 우리 마음과 몸까지 더럽히려고 하나?” 하고 말이다.

 첫째 이야기로 가자. “동화 몇 편 썼다고 대단히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덧없는 이름값에 놀아나지 말라는 소리이다. 부질없는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어, ‘이름도 감투도 없는 낮고 여린 사람 목소리와 삶’을 놓치거나 쉬 지나치거나 얕보거나 깔보는 못된 버릇을 버리라는 소리이다. 온누리 가장 아름다우면서 훌륭한 이야기는 바로 ‘쓸데없는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거나 머리가 빈 사람’들이 가장 깔보고 짓밟으며 비웃는 ‘못 배우고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구는 삶에서 비롯한다. 이는 바로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수많은 글에 나타난다. 돈있고 이름있으며 힘있는 사람들 이야기 가운데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참다운 이야기는 한 가지라도 있을까? 착하게 돈을 쓰는 부자도 틀림없이 있지만, 착한 부자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착하게 지식을 나누는 사람도 어김없이 있으나, 착한 지식인이란 처음부터 앞뒤가 어긋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한가? ‘권정생’이라고 하는 사람 하나만 볼 뿐, ‘권정생이라는 사람이 글로 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도무지 볼 줄 모른다. 그러니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늘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할밖에 없다. “여보게 사람들아, 훌륭한 스승은 먼 데 있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있지도 않으며 바로 당신들 가까이에, 옆에 있는데, 왜 못 보고들 있는가? 왜 이렇게 죽은 이름에 매달려서 떠돌아다니고 싸돌아다니면서 자네들 덧없는 이름만 애써 쌓으려 하는가?” 하고 아파하면서 이야기한다. (4338.6.7.불.처음 씀/4344.1.17.달.말투 손질.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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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또 오니까 라가와 마리모 단편집 1
라가와 마리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에 담을 세 가지, 사랑·삶·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20] 라가와 마리모, 《아침이 또 오니까》



 (1) 사랑


 만화책에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는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담지 않는 만화는 만화답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사랑을 말할 줄 모르는 만화라면 만화 맛을 살리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 비로소 만화는 만화라는 예술이나 문화로 자리잡는다고 봅니다.

 사랑이란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애틋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어버이와 아이 사이에 느낄 살가운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책사랑이나 영화사랑이나 나라사랑일 수 있고, 회사사랑이나 일사랑이나 살림사랑일 수 있어요. 시골사랑이나 도시사랑이나 자전거사랑일 수 있겠지요.

 사랑이기에 꽃을 아낍니다. 사랑이기에 흙을 보듬습니다. 사랑이기에 날씨를 걱정하고, 사랑이기에 감알 하나 맛나게 먹습니다.

 사랑인 까닭에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립니다. 사랑인 까닭에 집식구를 한 사람씩 꼬옥 부둥켜안거나 쓰다듬습니다. 사랑인 까닭에 좋은 동무랑 손 잡고 길을 걷습니다. 사랑인 까닭에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도서관에서건 즐거이 배우며 내 마음밭을 갈고닦습니다.


- ‘첫눈에 꽂히긴 했지만 그 사람 성격도 전혀 모르고. 알면 어떻게 될까. 휴일에는 뭘 하며 지낼까? 영화를 보러 갈까? 술은 잘 마실까? 어떤 집에 살고 있을까? 목소리를 듣고 싶어.’ (18∼19쪽)
- “아, 내 이름은 아라타 스즈라고 해요.” ‘좋았어!! 말했다.’ (25쪽)



 첫눈으로 반하는 사랑이 있고, 첫눈부터 끌리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무언가 꼼틀거리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찌 되든 좋습니다. 큰 사랑이면 커서 좋고, 작은 사랑이면 작아서 좋습니다. 어설픈 사랑은 어설픈 대로 애틋하고, 빈틈없는 사랑은 빈틈없는 대로 훌륭해요.

 이래야만 하는 사랑이 아니고 저래야만 할 사랑이 아닙니다.

 만화는 만화라는 빛깔로 숱한 사랑을 숱한 이야기로 담습니다. 만화는 만화라는 옷을 입혀 갖가지 사랑을 갖가지 모양새로 펼칩니다.

 눈앞에서 이루어진 사랑을 만화로 그립니다. 눈앞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만화로 보여줍니다. 눈앞에서 이루어지고픈 사랑을 만화로 옮깁니다.

 글이든 사진이든 영화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연극이든, 어떠한 갈래에서도 할 수 없는 일과 이야기를 만화이기 때문에 담아서 내놓습니다. 글은 지식만 담아 책으로도 엮고, 사진은 모습만 찍어 책으로도 엮지만, 만화는 지식이나 모습만 담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나 모습만 담을 때에는 만화가 아닙니다. 만화가 되려면 무엇보다 사랑을 담습니다. 사랑을 담지 못하고, 사랑이야기가 밑바탕에 깔리지 못하면 만화라 할 수 없어요.

 지난날 《꺼벙이》 만화이든, 《아기공룡 둘리》 만화이든 밑바닥에는 사랑을 깔아 놓습니다. 《요정 핑크》이든 《달려라 하니》이든 《머털도사》이든 애틋하며 그윽한 사랑을 밑바탕에 담습니다. 《레드문》이든 《유리가면》이든 사랑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다르고,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다르며, 누가 사랑하느냐가 다른 한편, 누구를 왜 사랑하느냐가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빛으로 사랑을 나누는 삶을 만화에 담습니다.


- “여자친구가 아니었군요.” “섹스만 하는 사이일 뿐입니다.” “넥?” “물론 합의하에 말이죠. ‘그런 관계’라면 몇 사람 정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당신은 그런 관계를 쿨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타입이죠? 그래서 당신의 호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41쪽)
- ‘나는 이 사람의 인생의 일부가 될 수는 없는 걸까.’ (53쪽)


 《아기와 나》를 그린 라가와 마리모 님 짧은만화를 그러모은 《아침이 또 오니까》 또한 사랑만화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만화입니다. 서로 엇갈리는 사랑을 그리고, 서로 어우러지는 사랑을 그리는 만화입니다.

 사랑 가운데에는 착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에는 미운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에는 철없는 사랑과 철든 사랑이 있어요. 사랑 가운데에는 자라나는 사랑과 꺾인 사랑이 있습니다.

 어떠한 사랑이든 서로 따숩게 돌볼 사랑입니다. 아픈 사랑도 돌보고 다치지 않은 사랑도 돌보아야 합니다.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아파도 눈물을 흘린 뒤 다시금 꿋꿋해질 사람들 사랑이에요.


- ‘그것은 가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그의 과거. 한 번 불이 붙자 눈 깜짝할 사이에 퍼졌다. 왠지 지금 정보통에 소문을 좋아하는 하라다 씨와 이이다 씨가 짜증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 계속 알고 싶었던 사실을 이런 형태로 알게 되다니.’ (54∼55쪽)


 사랑하기에 마음이 아프겠지요. 사랑하는 나머지 마음이 저리겠지요. 사랑하는 내 삶인 까닭에 마음이 괴롭겠지요. 아프면서 사랑하는 삶이고, 저리면서 사랑할밖에 없는 사람이며, 괴로우면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을 그리는 만화입니다.

 만화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그려야 만화 소리를 듣습니다. 만화 소리를 들으려면 사랑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만화란 놀라운 문화이면서 예술입니다. 사랑을 첫째로 보배롭게 여기는 만화인 터라, 만화를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착하며 맑은 웃음과 눈물이 샘솟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는 이 고운 만화를 알뜰히 그러모아 보여주고, 어린이와 푸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 또한 이 예쁜 만화를 찬찬히 돌아보며 마음결을 따사롭고 넉넉히 추스른다면 아주 기쁘리라 생각합니다.


 (2) 삶


 만화책에는 삶을 담습니다. 사랑을 담는 가운데 삶을 담아야 비로소 만화입니다. 사랑은 담되 삶을 못 담는다면 만화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습니다. 만화가 만화로 되자면 사랑을 보여주는 삶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이 그린 《우주소년 아톰》이든 《블랙잭》이든, 바로 이 사랑이 어우러진 삶을 그려서 보여줍니다. 자그마치 예순 해가 지났어도 빛나는 데즈카 오사무 님 《우주소년 아톰》 같은 만화는 앞으로 예순 해가 더 지나 2070년이 되더라도 해맑게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이토록 사랑을 아름답게 보여주면서 삶을 어여삐 이야기하는 만화는 퍽 드뭅니다. 사랑과 삶이 한동아리가 되어 내가 선 이 땅에서 씩씩하며 튼튼한 하루를 맞이하도록 손길을 내미는 만화란 꽤 드뭅니다.


- ‘그의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과오를 용서해 줄 사람도 없는 고독한 그를 사랑해도 될까요? 부디 그가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지 않기를. 혼탁한 어둠이 언젠가 아침에 녹아들기를. 부디 그가 걸어갈 길이 그저 평온하기를. 평온하기를.’ (78∼80쪽)


 라가와 마리모 님 짧은만화 《아침이 또 오니까》를 차근차근 읽습니다. 만화를 그린 지 꽤 오래된 분인데 군데군데 살짝 어설프다 싶은 대목이 보입니다. 이이 만화 빛깔이라 해야 할까 싶으면서, 이와 같은 대목이 있어 한결 사랑스러울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대목을 조금 더 손볼 수 있을 텐데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더디지만 차근차근 나아지는 그림결이라 할 만합니다. 앞으로 2020년쯤 내놓을 다른 작품은 오늘하고는 또 다를 테니까요. 어쩌면 이 같은 그림결을 2030년이나 2040년까지도 이을는지 모르지요.

 가만히 생각하면, 어떤 만화쟁이라 할지라도 하루하루 새로워집니다. 좋은 쪽으로 새로워지든 궂은 쪽으로 새로워지든 새로워지는 만화쟁이 삶입니다. 만화쟁이 아닌 우리들 삶도 날마다 어느 쪽으로든 새로워집니다.

 스스로 내 삶을 더 아낄 때에는 좋은 쪽으로 새로워지고, 스스로 내 삶을 더 못 아낄 때에는 궂은 쪽으로 새로워집니다. 힘들거나 고달픈 나머지 오락가락할 수 있을 텐데, 넘어지거나 부딪히면서 차츰 야물딱진 삶이 되기도 합니다.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라가와 마리모 님 또한 어느 모로 보나 빈틈이 없는 만화를 그린다 할 수 없어요. 옹글다 싶은 만화가 아니라 ‘살아가는’ 만화를 그린다 해야 옳습니다. 이 작품 하나를 내놓고 숨을 거둘 만화쟁이가 아니라, 오늘 선보이는 이 작품 하나로 다시 태어나는 만화쟁이라 해야 올바릅니다. 오늘까지 살아낸 하루하루를 이 작품 하나로 갈무리한 다음, 오늘부터 새롭게 살아낼 하루하루는 앞으로 다른 작품으로 태어나겠지요.

 《아침이 또 오니까》는 이 만화책을 내놓을 무렵까지 라가와 마리모 님이 부대끼거나 복닥인 삶자락에서 마주한 사랑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푸르디푸른 사랑 삶일 수 있고, 어느 한켠에서는 아쉽다 싶을 사랑이 춤추는 삶일 수 있어요. 그저 내 삶, 내 오늘, 내 모습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으면서 그릴 때에 아름다운 만화로 태어납니다. 내 온 땀과 마음과 꿈과 넋을 살포시 담을 때에 좋은 만화로 거듭납니다.


- “케이고에게는 장래가 있어요! 소중한 아들을 왜 당신 따위가.” ‘무, 무서워. 지난번의 침착한 태도와는 딴판이다. 뭔가 히스테릭한.’ “잠깐, 엄마, 갑자기 왜 이래? 실례잖아.” “(아들 뺨을 때리면서) 너도 정신차려. 여, 열여섯밖에 안 된 녀석이 나이 많은 여자 집에 드나들기나 하고, 이웃사람들이 얼마나 비웃는지 알기나 해?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야. 엄마 아빠 얼굴에 먹칠할 셈이니?” “내가 언제 먹칠을 했다고 그래?” “지금 하고 있잖아! 안 그래도 다들 우리 집 흠을 잡으려고 안달이 났는데!” “피해 망상이야.” “넌 주부들의 뒷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 “진정해요.” “진정하게 됐어요?” “자꾸 히스테릭해지는 건 당신의 나쁜 버릇이야.” ‘뭐야? 이 부모들, 이상해.’ “리오 씨. 이상해 보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게 보통입니다.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사라져 주십시오.” ‘사라져 달라니.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말을 하는군. 난 더러운 인간이라고. 없애 버려야 할 존재라고. 아멘.’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전 사라지겠습니다.” … “난 네가 좋았어. 진심으로. 처음부터 너의 매력에 푹 빠져서 머리가 이상해지고 말았어. 그만큼 사랑하고 있어. 정말이야.” “나는, 아니, 나도 틀림없이.” “확고한 자신의 의지를 갖도록 해.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자신의 발로 써서 걸어가. 부모님께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안 그러면 너와 사귀는 여자는 모두 울게 될 거야. 네가 ‘자신’을 찾으면 얼마나 멋진 남자가 될지 보고 싶었어.” (144∼149쪽)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만화쟁이 나름대로 삶을 적바림합니다. 만화를 보는 사람은 만화 즐김이 나름대로 삶을 껴안습니다. 만화쟁이는 오늘까지 겪은 삶을 만화로 담고, 만화 즐김이는 오늘까지 맞아들인 삶에 따라 만화를 바라봅니다.

 만화쟁이는 먼 뒷날 새로운 작품으로 더 깊거나 넓어진 삶을 한 올 두 올 보여주고, 만화 즐김이는 똑같은 작품을 먼 뒷날 다시 읽으면서 지난날에는 못 느꼈던 또다른 삶을 남달리 깨닫거나 새롭게 받아들입니다.

 살아숨쉬는 만화쟁이 붓끝으로 살아숨쉬는 만화 하나 길어올립니다.


 (3) 사람


 만화책에는 사랑과 삶을 담아야 하는데, 이 두 가지로는 마무리짓지 못합니다. 만화책에는 사랑과 삶을 담되, 이 사랑과 삶을 부여잡는 사람을 함께 담아야 합니다. 사랑과 삶을 부여잡으면서 흔들리거나 꿋꿋한 사람을 나란히 보여야 합니다. 사랑과 삶을 부여잡는 동안 웃거나 우는 여린 사람을 조용히 드러내야 합니다.

 어쩌면, ‘뭘 그리 딱딱하게 구나? 그냥 그리면 다 만화 아닌가?’ 하고 여길 분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냥 그린다고 다 만화가 되지’ 않아요. ‘그냥 살아간다고 다 같은 사람이 되지’ 않고, ‘그냥 하는 밥이라 해서 다 먹을 만한 밥이 되지’ 않거든요.

 비싼 밥이냐 놀라운 밥이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사랑을 담아 내놓는 밥일 때에 비로소 먹을 만한 밥입니다. 어버이가 아이랑 함께 살아가는 하루임을 느끼며 차리는 밥일 때에 바야흐로 함께 먹는 밥입니다. 어버이가 제 아이를 당신이랑 똑같이 고운 목숨인 사람으로 여기며 밥상에 나란히 둘러앉아야 참말 좋은 밥입니다.

 만화는 사랑과 삶이 사람들 사이에서 얼키고 설킨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시나브로 만화로 녹아듭니다.


- ‘치카가 웃으니까 나도 웃는다.’ (209쪽)
- “치카랑 리키 아빠는 만날 술 마시고 때렸어. 오빠 아빠랑 엄마는?” “나도 몰라. 죽어 버렸거든.” (215쪽)
0 “금방 준비할게. 두고 가지 마. 꼭이야. 치카, 치카, 일어나. 여길 떠난대.” (228쪽)
- ‘춥지만 좋다. 내 손은 형아의 주머니 속에 있다. 저쪽 주머니에는 치카의 손이. 형아의 손은 무척 따뜻하다.’ (230쪽)



 만화책 《아침이 또 오니까》를 세 번 보고 네 번 보면서 생각합니다. 만화책이 만화책이라 이름을 붙이려면, 한 번 보고 그치는 작품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화책을 만화책이라 일컬으면서 내 둘레 살가운 벗님이랑 이야기꽃을 피우려 할 때에는,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다시 보고 또 보는 작품이어야 합니다.

 줄거리를 달달 외고, 만화대사를 종알종알 중얼거릴 만큼 되어야 비로소 이 만화 하나는 내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주인공들 얼굴빛과 몸짓을 내가 연극을 하듯 따라하거나 보여줄 수 있을 때에 바야흐로 이 만화책 하나는 내 마음으로 젖어듭니다.

 후딱 읽어치우고 옆으로 밀어놓는다면 만화책이 아닙니다. 얼른 읽어넘긴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면 만화책 값을 못합니다. 내가 오늘 기쁘게 즐긴 이 만화책을 내가 이듬날 가만가만 떠올리면서 내 하루를 아름다이 빛내는 기운을 얻을 때에 처음으로 만화책 값을 합니다. 하루를 지내고 또 하루를 지내면서 새삼스레 떠올리고 새롭게 되읽으면서 새로운 마음을 살찌울 때에 만화책은 차근차근 만화책 보람을 나눕니다.

 만화책에 담는 이야기는 사랑과 삶과 사람입니다. 만화책에 담는 세 이야기 사랑과 삶과 사람은 아주 대단한 사랑이거나 삶이거나 사람이 아닙니다. “치카가 웃으니까 나도 웃는다”처럼 아주 수수하며 흔한 말에 예쁘게 서린 사랑입니다. “나도 몰라”라는 한 마디처럼 매우 투박하며 너른 말에 아리따이 녹은 삶입니다. “춥지만 좋다” 같은 말마디마냥 몹시 조그마하며 쉬운 마음을 밝히는 사람입니다.


- “난, 거짓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전부 듣고 열심히 싸울 거야. 그러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 (159쪽)


 만화책 이름 그대로 아침은 또 옵니다. 새 하루를 날마다 다시 맞이합니다. 슬픈 어제였지만 슬픈 오늘이지만은 않습니다. 기쁜 어제가 기쁜 오늘로 잇닿지만은 않습니다. 슬프면서 기쁜 삶이고, 기쁘면서 슬픈 삶입니다. 좋으면서 궂고, 궂으면서 좋은 삶입니다.

 사랑은 달콤하면서 쓰라리다는데, 달콤하기만 하거나 쓰라리기만 할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니까 죽고, 죽으니까 새로 태어납니다. 삶과 죽음을 함께 맞이하기에 사람입니다.

 만화책 《아침이 또 오니까》를 아침이 또 오니까 다시금 펼치고, 아침을 또 맞이하니까 거듭거듭 살며시 넘깁니다. 새해에 네 살이 된 우리 첫딸은 앞으로 네 살을 더 살면 이 만화책을 혼자서 처음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르면 일곱 살에도 보고, 늦으면 아홉 살에도 보겠지요. 열두 살에 처음 볼는지 모르고, 스무 살이 되어도 안 볼는지 몰라요. 그러거나 말거나 딸내미 아빠는 서른여섯이던 지난해에 처음 마주한 이 만화책을 앞으로 마흔이나 마흔여섯에도 꾸준하게 다시 볼 생각입니다. (4344.1.17.달.ㅎㄲㅅㄱ)


― 아침이 또 오니까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김진수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1.1.15./5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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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32] 앞마당

 큰도시에 새로 들어서는 커다란 아파트숲에서도 으레 ‘놀이터’라는 이름을 붙이는 줄 압니다만, 아직도 놀이터를 ‘놀이터’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놀이하는 터니까 ‘놀이터’인데, 이 낱말만큼은 고이 사랑하는지 궁금합니다. 자그맣게 꾸민 쉼터이니 ‘작은쉼터’라 하면 되지만, 아파트숲 사이에 낀 좁다란 쉼터는 ‘근린공원(近隣公園)’이라고만 하거든요. 큰도시 아파트숲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분들은 몇 억이니 몇 십억이니 참으로 큰돈을 들입니다. 살 만하기에 이러한 집에서 살림을 꾸리실 텐데, 아파트숲 보금자리 가운데 마당 있는 집은 없습니다. 마당 들어설 수 없고 마당 꾸밀 수 없는 아파트숲이 차츰 넓어지면서, 우리네 살림집이면 꼭 있던 마당이라는 터뿐 아니라 ‘마당’이라는 낱말마저 쓰임새가 확 사라집니다. 동네 골목집 가운데 제법 가멸찬 살림이라면 손바닥 마당쯤 있을 테지만, 마당 있는 집은 시골집만 남겠구나 싶어요. 집 앞이라 앞마당이고, 집 옆은 옆마당이며, 집 뒤는 뒷마당입니다. 마당은 일마당이면서 놀이마당입니다. 잔치를 벌이면 잔치마당, 춤을 추면 춤마당, 노래를 부르면 노래마당인 한마당이었어요. (4344.1.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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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왜 말하는가 돌아보고, 애써 글쓰는 삶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멧골집 둘레에는 가게가 없습니다. 시골집만 있는데, 가까운 이웃집조차 꽤 멉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온 만큼, 우리 집 아이는 때때로 얼음과자나 까까 노래를 부르곤 하며, 애 아빠인 저는 보리술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걸어서 다녀올 구멍가게나 편의점이란 아예 없을 뿐더러, 얼음과자나 보리술을 파는 곳까지 낮에 걸어서 찾아가자면 오가는 데에만 한 시간 반쯤 걸립니다.

 바라보기에 따라 다른데, 우리 살림집은 오늘날 문명하고 동떨어졌다 할 만하지만, 여느 시골은 다 이와 같아요. 굳이 가게에 들러야 할 일이 없고, 집에서 모든 일을 다 봅니다. 가게에 갈 일이란 때때로 오일장에 맞추어 읍내로 가면 넉넉합니다.

 가끔 아이랑 도시로 마실을 나와 보면, 길가에 가게가 끊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눈이 아프다고 느낍니다. 참말 도시에서는 가게를 꾸려야 살아남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야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게마다 간판을 어떻게 붙이는지 찬찬히 살펴보신 적 있나요?

 얼마 앞서 아이하고 둘이 서울마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창전동 골목 한켠에서 ‘커피가게’라는 찻집을 하나 보았습니다. 커피를 파는 집이라 ‘커피가게’일 텐데, 이곳은 아예 이름이 ‘커피가게’였어요. 흔히들 ‘커피숍’이라 하잖아요. 더구나 알파벳으로 ‘coffee shop’이라 적기 일쑤이고요. 어른들이랑, 또 동무들이랑 길거리를 다니면서 커피집 간판을 가만히 살펴보셔요. 하나같이 알파벳으로 간판을 적어 놓는답니다.

 이와 달리, 김밥집 가운데 간판에 알파벳 한 글자라도 적어 놓는 집은 없습니다. 한자조차 적어 넣지 않아요. 국밥집이나 분식집이나 여느 밥집도 마찬가지예요. 여느 밥을 파는 가게 가운데 간판에 영어나 한자를 적어 넣는 곳은 없어요. 그리고, 머리방이라든지 햄버거집이라든지 튀김닭집은 으레 영어를 많이 적어 넣습니다. 그러나, 시골마을 머리방은 오로지 한글로만 적어 놓더군요. 간판에 영어를 적어 넣는 집하고 간판에 한글만 있는 집하고 무엇이 다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셔요. 그리고, 글만 한글인지 속뜻까지 우리말인지를 함께 헤아려 보셔요.

 저는 우리 말사랑벗들이 착한 마음과 참다운 넋과 고운 얼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면 고맙다고 여깁니다. “우리말이 온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말이야.”라든지 “한글만큼 멋지며 알찬 글이란 없지.” 같은 생각으로 말과 글을 생각하거나 아끼려 하지 않으면 고맙겠다고 여깁니다. 그저 내 삶으로 받아들이면서 보듬어 주면 좋겠어요. 그예 내가 사랑할 삶이듯 내가 사랑할 말이라고 헤아리면서 껴안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 스스로 마주하는 이웃이 누구인가에 따라, 또 내가 가게 임자라 할 때에 어떤 손님을 맞이하려 하는가에 따라 말과 글이 달라져요. 시골 읍이나 면에서 시골 농사꾼을 손님으로 맞이할 신집에서 ‘shoe’ 같은 말을 섣불리 간판에 적지 않겠지요. 서울 강아랫마을 같은 데 가게에서는 시골 농사꾼을 손님으로 맞아들일 까닭이 없을 테니까 갖가지 알파벳을 잔뜩 적어 놓겠지요.

 착하게 생각하며 착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착하게 말을 합니다. 참답게 생각하며 참다이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참다이 글을 써요. 곱게 생각하며 고이 살아가고픈 사람이라면 고이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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