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아파하자


 경상도 안동땅에서 오늘 하루도 두 끼니 밥만 먹으면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권정생 할아버지는 우리들한테 이야기한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다고 보면 안 돼요.” 하고. 이 말을 제대로 곰삭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오는, 이른바 ‘(학교) 선생님’이나 ‘(큰 신문사) 기자’나 ‘(글깨나 쓴다는) 작가’들한테도 한 마디 한다. “나보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기예요. 나 대신 아파 주면 좋겠어요.” 하고. 이 말 또한 얼마나 알아들을까? 아마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리라. 그저 ‘늙은이가 이제 노망까지 들었나? 주책이야, 원!’ 하고 생각할 테지. 아니면 ‘권 선생님이 너무 아프니, 이런 말까지 다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거나.

 뒤엣말을 먼저 생각하겠다. “나 대신 아파 달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가? 이는 바로 “아픈 사람 마음이 되라.”는 소리이다. “아픈 사람처럼 작은 목숨, 작은 일도 고맙고 소중히 여기며 낮은 목소리로 조촐하고 조용하게 살자는 이야기”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도 모르는 말이 없는 큰 깨달음이 있는데,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가고, 어린이처럼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머리로는 알아도 ‘어린이처럼 온몸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지식만으로 살아가는 일이 대단히 걱정스러울 수 있는 줄 뻔히 아는 사람들조차 ‘지식이 아닌 삶’과 ‘지식이 아닌 사랑과 꿈’을 보배처럼 여기지 않는다.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하고 ‘한마음 한몸’이 되지 않고서는 내 이웃을 돕는 손길을 내밀 수 없다. 그저 불쌍해서 동전 몇 닢 던져 주는 사람은 잘난 멋에 불쌍히 여길 뿐이지, 참말로 돕는 손길이 아니다. 한결같이 몸과 마음 모두 아늑하고 폭신한 자리에 있으면서 입과 말로만 시끄럽게 ‘가난한 이를 돕자(서민 복지 대책)’는 이야기만 떠들면 무엇하겠는가? 환경을 지키자는 이야기를 입으로만 떠들거나 외치지 말자. 좋은 환경책을 읽자고 추천하지 말자. 이런 목소리 저런 책 하나 내세우지 말고, 나부터 내 돈벌이와 돈씀씀이를 줄이면 된다. 더 많이 벌 생각을 말고, 더 많이 쓸 생각을 버려야 한다.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다니며, 전기 먹는 기계를 덜 쓰거나 안 쓰면 된다. 자동차를 타야 한다고 해도 한 번 적게 타면 되고, 두 번 적게 타거나 한 주에 하루나 이틀쯤은 타지 않으며, 대중교통을 즐겨 타거나 자전거를 타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공기가 나빠져 걱정이야”라든지 “지구온난화가 근심이야”라든지 “길에 차가 너무 많아”라든지 “공장이 너무 많이 생겨” 따위 헛지랄만 늘어놓으면 무엇하는가? 나 스스로 몸으로 살아내지 않고서 말로만 시끄럽게 늘어놓는 사람들한테, 권정생 할아버지는 곱디곱고 낮디낮은 목소리로 외친다. “여보게 사람들아, 한 달에 50만 원만 가지고도 넉넉히 하고픈 일 다하며 살 수 있는데, 도무지 얼마나 더 욕심을 부려서 많이 벌고 많이 쓰면서 이 땅을 더럽히고, 우리 마음과 몸까지 더럽히려고 하나?” 하고 말이다.

 첫째 이야기로 가자. “동화 몇 편 썼다고 대단히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덧없는 이름값에 놀아나지 말라는 소리이다. 부질없는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어, ‘이름도 감투도 없는 낮고 여린 사람 목소리와 삶’을 놓치거나 쉬 지나치거나 얕보거나 깔보는 못된 버릇을 버리라는 소리이다. 온누리 가장 아름다우면서 훌륭한 이야기는 바로 ‘쓸데없는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거나 머리가 빈 사람’들이 가장 깔보고 짓밟으며 비웃는 ‘못 배우고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구는 삶에서 비롯한다. 이는 바로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수많은 글에 나타난다. 돈있고 이름있으며 힘있는 사람들 이야기 가운데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참다운 이야기는 한 가지라도 있을까? 착하게 돈을 쓰는 부자도 틀림없이 있지만, 착한 부자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착하게 지식을 나누는 사람도 어김없이 있으나, 착한 지식인이란 처음부터 앞뒤가 어긋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한가? ‘권정생’이라고 하는 사람 하나만 볼 뿐, ‘권정생이라는 사람이 글로 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도무지 볼 줄 모른다. 그러니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늘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할밖에 없다. “여보게 사람들아, 훌륭한 스승은 먼 데 있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있지도 않으며 바로 당신들 가까이에, 옆에 있는데, 왜 못 보고들 있는가? 왜 이렇게 죽은 이름에 매달려서 떠돌아다니고 싸돌아다니면서 자네들 덧없는 이름만 애써 쌓으려 하는가?” 하고 아파하면서 이야기한다. (4338.6.7.불.처음 씀/4344.1.17.달.말투 손질.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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