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콩콩 책읽기


 빨래와 아이 씻기기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 아이는 아빠를 앞질러 저 앞에서 콩콩콩 뛴다. 아이는 그냥 걷지 않는다. 언제나 콩콩콩 뛰면서 걷는다. 조그마한 아이가 콩콩콩 내닫는 소리가 ‘콩콩콩’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아이를 바라볼 때면 내 귀에는 ‘코옹 코옹 코옹’ 하는 소리가 톡톡톡 들린다. 아이는 저렇게 가볍게 콩콩콩 내닫는데, 아빠는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끙끙끙 걷는다. 너무 무겁게 걷나? 아이 외할머니가 “어쩜 벼리는 저렇게 콩콩콩 뛰냐? 하기는, 아이 때는 다 저렇게 뛰더라.” 하고 말씀할 때에 비로소 우리 집 아이가 콩콩콩 뛰는 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아이뿐 아니라 이웃한 어느 집 아이들이건 콩콩콩 뛴다. 때때로 콩콩콩 안 뛰는 아이를 보기도 하는데, 콩콩콩 뛰지 못하거나 않는다면 아이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아이가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갸웃하곤 한다.

 콩콩콩 어린이는 집에서 혼자 책을 펼칠 때이든 아빠나 엄마가 곁에서 책을 읽어 줄 때이든 노상 콩콩콩 책읽기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오래오래 그림을 되삭일 때에는 어쩜 이렇게 깊이 빠져들 수 있을까 싶은데, 옆에서 불러도 알아듣지 못한다. 온통 그림에 마음을 쏟는다. 요사이는 글자를 알아본다. 글자가 무엇을 적바림했는지를 알아보지는 않는다. 꼬물꼬물한 ‘구림’이라고 여긴다. 아빠는 늘 수첩이나 공책에 요모조모 쪽글을 쓰니까, 아이는 아빠 곁에서 “아빠 공부해?” 하고 묻는다. 글을 쓰는 일이 마치 ‘공부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는 누구한테서 들었을까. 이 소리도 외할머니한테서 들었던가? 이리하여, 요사이 그림책 글자를 알아보는 아이는 ‘구림’이라고 말하다가는 “구림 아냐. 공부야.” 하고 고쳐 말한다. 아빠가 곰곰이 글을 쓰면, “아빠 공부해? 응, 공부해.” 하다가는 저도 작은 수첩과 볼펜을 들고 아빠 옆에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한’다. 작은 수첩에 꼬물꼬물 글씨를 줄을 가지런히 맞추면서 요모조모 그린다. 게다가 꼬물꼬물 줄맞춘 그림그리기를 한 쪽 가득 하고, 다음 쪽 가득 또 한다.

 예전부터 늘 느끼지만,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다면 어버이가 책을 좋아하는 집안이다.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 집안이다. 아이들이 읽는 책을 살피면, 이 집 어버이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지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아이들이 책을 건사하는 매무새를 들여다보면, 이 집 어버이가 책을 어떻게 마주하거나 다루는가를 환히 읽을 수 있다.

 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영어를 말하거나 영어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아이를 만날 때면, 이 아이가 더없이 불쌍하지만, 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가 참으로 딱하며 안쓰럽다. 퍽 어린 나이에 일찍부터 갖가지 학원에 다니거나 온갖 지식을 주워섬기는 아이를 마주할 때면, 이 아이가 그지없이 가여우면서, 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그토록 슬프며 안타까울 수 없다.

 왜 즐겁게 살아가지 않을까. 왜 즐겁게 사귀지 않을까. 왜 즐겁게 책을 읽지 않을까. 책이란 즐겁게 읽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즐거이 어우러지는 고운 목숨이다. 삶이란 즐거이 태어나서 즐거이 흙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콩콩콩 가벼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하루하루 콩콩콩 맑고 밝은 말마디를 노래하듯 읊으면서 지내면 사랑이요 평화이다. (4344.1.26.물.ㅎㄲㅅㄱ)
 

 

이 그림책은 '영어 그림책'이 아닌 '리처드 스캐리' 그림책. 아직 우리 나라에 번역이 안 되었을 때 헌책방에서 찾아낸 아빠 보물. 그러나 아이는 아빠 보물이건 뭐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이 예쁘니까 책이 낡고 닳도록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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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69] 주폭(酒暴)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걱정이라면, 술집을 없애거나 술을 없애면 될까. 술을 마구 마시는 사람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니까, 술꾼들 보라며 걸개천을 내걸면 될까. 술꾼들 읽으라고 걸개천을 내걸었을 텐데, 술꾼들은 ‘주폭(酒暴)’ 같은 말을 알아들으려나. 술꾼들이 이런 글을 읽으면 무엇을 생각할까.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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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19] 체크아웃 럭키투데이

 한 번 쓰면 두 번 쓰고, 세 번 쓰면 네 번 씁니다. 뚱딴지 같은 사람들이 함부로 쓰는 영어가 아니고, 이명박 대통령이 바보스럽기 때문에 영어나라를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영어를 써야 멋있다고 여기니까 자꾸 씁니다. 나부터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멋을 부리니까, 아주 쉬운 여느 자리 수수한 말마디를 영어로 가득가득 채웁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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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진
페터 슈테판 지음, 이영아 옮김 / 예담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사진은 온누리를 따스히 감싼다
 [찾아 읽는 사진책 15] 페터 슈테판 엮음, 《세상을 바꾼 사진》(예담,2006)



 ‘세상을 바꾼 사진’이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세상을 바꾼 글’이나 ‘세상을 바꾼 그림’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나라나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대통령선거에서 여당이 뽑히든 야당이 뽑히든 정치는 정치이고 나라는 나라입니다.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대통령으로 누가 뽑히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는데, 대통령으로 누가 뽑혀야 하거나 말거나 나라꼴이나 나라모양이나 나라살림이나 나라꿈이나 나라터가 아름다울 수 없어요.

 아름다이 살아가는 나라라 할 때에는, 사람들 누구나 사진 한 장에 깃든 아름다움을 알아보면서, 참말 한 나라가 ‘사진 한 장으로도 크게 거듭나거나 새로워진다’ 할 만합니다. 아름다이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글 한 줄에 서린 사랑스러움을 알아내면서, 참으로 한 나라가 ‘글 한 줄로도 바야흐로 새로 태어나거나 기쁨이 흘러넘칠’ 만합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엮은 사람이나 한글로 옮긴 분이나 ‘사진문화’를 돌아보며 온누리를 읽을 수 있다고 여겼겠구나 싶으나, 사진을 바라보는 눈썰미를 처음부터 이렇게 얄궂게 맞추어 놓으면, 사진이고 사람이고 삶이고 사랑이고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는 ‘세상을 보여주기’나 ‘세상을 말하기’나 ‘세상을 담기’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진으로 찍는다 해서 ‘세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없어요. 사진이란, ‘세상이 아닌 세상 가운데 한 자락’을 보여주면서, 이 한 자락을 바탕으로 우리 삶터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나 스스로 차분히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사진은 ‘세상을 말하지’ 않아요. 사진으로 찍은 모습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얼굴빛 가운데 하나를 살며시 보여주면서, 이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픈 말’이 무엇일까를 나 스스로 곰곰이 살펴보도록 돕습니다.

 사진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아름답게 바라볼 모습’을 담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답게 사랑할 사람’을 담습니다. ‘아름다운 꿈’이 아닌 ‘아름답게 가꿀 꿈’을 담아요.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움직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관찰되고 기록된 다이애나 비와 영화스타들의 사진은 수천 장이 넘는 반면, 반인류적 범죄 앞에서 미디어는 침묵을 지키고 나태하다. 사진은 거대 사업이자 생산물이다 … 잡지 《라이프》는 ‘세계의 보도 전선’에 있음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인가? 뉴스는 엔터테인먼트와 치명적으로 얽히게 되었다(들어가는 말).” 같은 대목을 읽으며 거듭 곱씹습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 머리말에 적힌 말마따나, ‘사진 = 거대 사업 = 돈벌이’입니다. 돈을 벌려고 사진기를 만들고 사진을 찍어서 나눕니다. 돈이 되니까 하는 사진찍기이지, 돈이 안 되어도 하는 사진찍기가 아니에요. 돈이 있으니까 하는 사진찍기요, 돈이 없어도 할 만한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돈과 돈이 얽히는 사진밭인 만큼, ‘돈과 얽힌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라 말한다면, 그닥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동 노동 착취’를 까밝힌 사진이란, ‘돈을 돈다이 나누지 않는 나쁜 돈쟁이들 돈벌이’를 밝히면서, ‘돈으로 얼룩진 세상을 바꾸는’ 데에 한몫을 맡았습니다. 슬픈 싸움판을 담은 사진은, ‘돈을 더 거두어들이는 식민지를 거머쥐려고 끔찍한 총칼 따위를 만들어 서로를 죽이도록 내모는 불구덩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돈에 얼룩진 전쟁을 사람들 스스로 미워하도록 이끌어 내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예술사가들은 도로시아 랭의 〈이주노동자 어머니〉, 로버트 카파의 〈어느 스페인 병사의 죽음〉, 조 로렌솔의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세우다〉와 같은 보도사진의 아이콘을 연구해 왔을 따름이다. 하지만 역사는 ‘일요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들어가는 말).” 같은 대목을 읽으며 다시금 되뇝니다. ‘사진 = 이름난 작품’일까요? 아닙니다. ‘사진 = 여느 내 삶’입니다.

 도로시아 랭 님이 담은 〈이주노동자 어머니〉에 나오는 아줌마는 ‘우리 이웃 아줌마’이거나 ‘내 어머니’입니다. 잘난 모델이 아닌 수수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곳에서만 마주할 거룩한 모습인 한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할 여느 사람입니다.

 사진은 대단한 모습을 찍기에 대단한 문화나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수수하면서 흔하디흔하다 할 여느 삶을 찍기 때문에 아름다운 ‘삶빛’이 됩니다. 아름다운 삶빛이기에 나중에 예술이든 문화이든 새로운 이름을 얻고 다시 태어납니다. 처음부터 문화나 예술인 사진이 아니라, 처음부터 삶인 사진입니다.

 “미군 사진사가 찍었을 이 사진은 너무나 전원적인 한국의 시골에 미군이 잔인하게 공격을 퍼부어대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은 냉전기 초반에는 국제연합 군대와 함께 한국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베트남에서 아시아의 정치에 관여했다. 미군의 전략은 점차 시골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폭격에 의존했다. 이 사진에서 군사적 표적으로 여길 만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산과 강이 펼쳐진 풍경 속으로 수백 개의 폭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고요하게 정지된 이 이미지를 보면 그 밑에서 벌어지고 있을 죽음과 파멸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7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 = 고발’이 아닙니다. ‘사진 = 폭로’도 아닙니다. ‘사진 = 나눔’이요, ‘사진 = 어깨동무’입니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벗과 같은 사진입니다. 언제나 우리랑 얼굴을 맞대고 살을 부비는 사진입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을 읽으며 다음 세 군데에 밑줄을 긋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 아니고, 세상을 읽는 사진도 아니며, 세상을 깨우치는 사진 또한 아닙니다. 우리 곁에서 살가이 어우를 사진입니다. 우리 손으로 아낄 사진입니다. 우리 삶으로 녹아내어 나누는 사진입니다. 사진만 따로 똑 떼내어 생각한다면 사진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사진을 높이 추켜세우면 사진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을 애써 가르치거나 배우려 하지 말고, 사진으로 살아가면 즐거우면서 흐뭇합니다.


- 최신 이야기는 항상 옛이야기와 같다. (7쪽)
- 감상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그의 사진들은 자기만족에 빠진 대중을 흔들어 깨우고, 워싱턴의 하원의원들에게 미성년노동법을 강화하도록 촉구했다. (16쪽)
- 알티플라노의 위대한 사진 기록자인 마르틴 참비는 쿠스코와 산기슭에 역사를 세운, 아과스칼리엔테스를 잇는 기차가 생기기 전에 마추픽추를 찾아갔다. 그는 무거운 사진장비를 지고 우루밤바강을 따라 1890년에 생긴 울퉁불퉁한 노새 길을 지나야 했다. (20쪽)


 아이를 낳아 아이를 업고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가 ‘아이를 바꾸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제 삶을 찾아 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사진을 좋아하거나 아끼는 우리들이 ‘세상을 바꾸는’ 사진을 찍는다거나 말한다거나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뿐입니다.

 이름만 커다랗게 ‘세상을 바꾸는 어쩌고 저쩌고’를 훌훌 털어내면 좋겠습니다. 더 비싼 장비를 갖춘다 해서 ‘세상을 바꿀 만한 사진’이든 ‘아름다울 만한 사진’이든 찍지 못해요. 더 비싸거나 좋은 장비가 아니라 ‘내가 늘 내 곁에 두면서 즐길 장비’롤 갖추어야 합니다. 더 비싸거나 좋은 냄비가 있대서 더 맛난 국을 끓이겠습니까. 내 살림집에 걸맞고 내가 잘 다룰 만한 냄비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마련하여 국을 끓일 때에 맛나면서 즐겁습니다.

 편집자는 ‘세상을 바꾼 사진’을 찾느라 괜히 아까운 나날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자는 ‘내가 살아오며 내 하루하루 아름답게 빛내도록 길동무가 되어 준 예쁜 사진’을 찾으면서 기쁘게 웃고 신나게 춤추며 해맑게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웃음이요 사진은 춤이며 사진은 노래입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 세상을 바꾼 사진 (페터 슈테판 엮음,예담 펴냄,2006.8.20./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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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와 책읽기


 호들갑을 떨 까닭이란 없습니다. 두려워 한다든지 걱정할 까닭 또한 없습니다. 아쉽다고 여기거나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 아이가 살아갑니다. 나한테 아이가 없으면 이웃에 아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 얼거리는 톱니바퀴와 같아, 톱니로 다루어지는 우리들이 떨어져 나가면 금세 다른 톱니를 갈아끼웁니다. 어느 회사이든 나 하나 없다고 회사가 멈춘다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를 갈음할 새로운 일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를 갈음할 사람이 많다 해서 내가 일을 못한다거나, 내 몫으로 들어온 사람이 일을 못할 까닭이란 없어요.

 시골집에서 논밭을 애써 일구는 동안 논밭은 정갈하게 다듬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골집 사람들이 하나둘 흙으로 돌아가거나 도시로 흘러들면, 정갈하던 논밭에는 갖은 풀이 돋고 나무가 우거집니다. 한 해만 지나도 묵정밭과 같고, 오래지 않아 여느 풀밭 모양새가 됩니다. 나중에 누군가 땅을 사랑할 농사꾼이 이곳으로 찾아온다면 묵정밭은 정갈한 밭으로 탈바꿈하겠지요.

 큰별이 진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큰 어른이 숨을 거두었다고들 말합니다. 큰사람이 맡던 몫을 누가 맡을는지 모르겠다고들 합니다.

 큰별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별이든 작은별이든 똑같은 별입니다. 큰별이 졌으면 어디에선가 새로운 큰별이 뜹니다. 작은별이 졌을 때에도 어디에선가 작은별이 새롭게 떠요. 큰 어른이 숨을 거두었으면, 누군가 큰 어른이 되겠지요. 어쩌면 내가 큰별이 될 수 있고, 큰 어른 노릇을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알뜰히 꾸리면 넉넉합니다. 내 살림을 내 깜냥껏 일구고, 내 이웃은 내 사랑으로 보듬으면 즐겁습니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삼 깨닫고, 잠자리에 들어 홀로 생각하다가 다시금 깨닫습니다. 곰곰이 돌이키자니, 이 땅에서 ‘천재’라 일컬을 만한 글쟁이나 예술쟁이가 참말 있었나 알쏭달쏭합니다. 아마, 천재 글쟁이나 천재 예술쟁이란 한 사람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들을 가리켜 영재라느니 무어라느니 떠들썩하지만, 아이들은 영재나 천재라서 무엇을 아주 잘하지 않습니다. 모차르트가 몇 살 때에 노래를 지었든, 이름난 테니스 선수가 몇 살 적부터 테니스를 배웠든, 이들을 놓고 천재라고는 일컬을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동무가 어김없이 있습니다. 참말 똑똑할 뿐더러 잘생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동무가 천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데에서는 뜻과 마음이 하나라서 옆지기랑 함께 살아가는지 모르겠는데,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걸레질하는 살림꾼 어머니’와 같은 천재는 다시없다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날마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거나 물리지 않을 밥을 날마다 뚝딱뚝딱 세 끼니나 차릴 수 있을까 놀라웠습니다. 날마다 새옷을 헌옷으로 만들며 빨랫감을 잔뜩 쌓아 놓는데 어떻게 날마다 새로 입을 옷이 뚝딱뚝딱 태어나는지 대단했습니다. 살림꾼 어머니를 키운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살림꾼 어머니를 키운 어머니를 키웠을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으레 ‘남자 쪽 어버이’를 좇으면서 족보를 만든다느니 뿌리를 찾는다느니 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뿌리야 있겠지요. 어느 쪽 뿌리이든 살아숨쉬는 사람길일 테지요. 남자 쪽 어버이는 이름이 남아 영의정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벼슬을 하느니 학문을 하느니 하고 적힙니다. 여자 쪽 어버이는 아무런 이야기 하나 안 적힙니다. 그렇지만 여자 쪽 어버이가 살아온 결은 살림꾼 어머니들 손과 몸과 땀과 마음에 알알이 아로새겨지며 오늘날로 이어 왔습니다.

 여자가 집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여자 쪽 어버이가 살림꾼 일을 도맡으면서 일군 삶자락이 그지없이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천재’로구나 싶을 뿐입니다. 여자 쪽 어버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천재로 여기지 않았고, 천재로 여기는 사람이 없었으며, 천재로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그예 삶입니다.

 간장 고추장 된장 담기란 곧 예술입니다. 나물 김치 절임이란 바로 문화입니다. 밥 쌀 나락 모두 자연입니다. 똥지게 낫 호미 한결같이 삶입니다.

 글 잘 쓰고 춤 잘 추며 노래 잘 하는 여느 예술쟁이들은 거의 ‘기술자’처럼 흐릅니다. 오늘날 사진 잘 찍고 그림 잘 그리며 연극 잘 한다는 숱한 예술쟁이들은 으레 ‘전문가’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합니다.

 맛난 요리를 잘해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요리책을 쓸 만큼 무언가 남달리 밥을 차려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림꾼이면 될 삶입니다.

 똑똑하대서 더 잘 쓰는 책이거나 더 잘 읽는 책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대로 쓰는 책이며 살아가는 대로 읽는 책입니다. 내 삶을 담는 책인 만큼,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아름다울 책을 일굽니다. 내 삶으로 읽는 책이기에, 나 스스로 착하게 살아가면서 착하게 스며들 책을 받아들입니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이 그림결을 흉내내어 꼼지락꼼지락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참으로 딱합니다. 다 큰 어른들은 다 큰 어른들 그림을 즐기면서 그려야지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린이 삶을 즐기면서 그림을 그리면 될 뿐입니다.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이든 고차매이든 천재가 아닙니다. 시골 농사꾼 아이로서 제 삶과 삶터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착하게 돌보면서 그림 또한 사랑한 아이입니다. 반 고흐가 천재 그림쟁이였겠습니까. 당신 반 고흐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동안 그림에 온 넋을 바친 어른 하나일 뿐입니다.

 리영희 님 같은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우리 삶자락 앞날을 밝힐 빛’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뒷사람은 리영희 님이 잘한 대목을 톺아보고 아쉬운 대목을 보듬으며 더욱 맑고 밝게 빛나면 됩니다. 아니, 애써 더욱 맑고 밝게 빛날 까닭이 없어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제 마음그릇에 걸맞게 즐거이 살아가면 아름답습니다. 리영희 님은 리영희라는 마음그릇으로 살아갔고, 우리들은 우리들 다 다른 이름과 삶을 담는 마음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소설쓰던 박완서 님을 돌아보면서 똑같이 느낍니다. 박완서 님이 흙으로 돌아갔대서 큰별이 졌다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 박완서 님은 박완서 님 삶대로 문학을 했을 뿐, ‘큰별이 되도록’ 문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박완서 님이 짚지 못한 삶은 수두룩하게 많고, 박완서 님 스스로 살피지 못하거나 헤아리지 않은 사람들 삶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수수한 여느 어머니들 삶을 다루지 못했대서 아쉬운 문학이 아니고, 수수한 여느 살림꾼 어머니들 삶을 다루어야 비로소 참문학이 아닙니다.

 기술자로 꾸릴 내 삶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될 내 꿈이 아닙니다. ‘프로페셔널’이나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그저, 나로서는 내 삶을 내 힘으로 단단히 움켜쥐며 당차게 다스리는 착하며 참답고 고운 ‘살림꾼’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때에 조용히 빛납니다. 나와 내 살붙이가 알아보며 느낄 만한 빛줄기를 얌전히 내뿜으면서 서로 활짝 웃습니다. 기술자가 되려고 책을 읽는 사람은 딱할 뿐 아니라, 스스로 기술자조차 되지 못합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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