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책읽기


 호들갑을 떨 까닭이란 없습니다. 두려워 한다든지 걱정할 까닭 또한 없습니다. 아쉽다고 여기거나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 아이가 살아갑니다. 나한테 아이가 없으면 이웃에 아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 얼거리는 톱니바퀴와 같아, 톱니로 다루어지는 우리들이 떨어져 나가면 금세 다른 톱니를 갈아끼웁니다. 어느 회사이든 나 하나 없다고 회사가 멈춘다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를 갈음할 새로운 일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를 갈음할 사람이 많다 해서 내가 일을 못한다거나, 내 몫으로 들어온 사람이 일을 못할 까닭이란 없어요.

 시골집에서 논밭을 애써 일구는 동안 논밭은 정갈하게 다듬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골집 사람들이 하나둘 흙으로 돌아가거나 도시로 흘러들면, 정갈하던 논밭에는 갖은 풀이 돋고 나무가 우거집니다. 한 해만 지나도 묵정밭과 같고, 오래지 않아 여느 풀밭 모양새가 됩니다. 나중에 누군가 땅을 사랑할 농사꾼이 이곳으로 찾아온다면 묵정밭은 정갈한 밭으로 탈바꿈하겠지요.

 큰별이 진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큰 어른이 숨을 거두었다고들 말합니다. 큰사람이 맡던 몫을 누가 맡을는지 모르겠다고들 합니다.

 큰별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별이든 작은별이든 똑같은 별입니다. 큰별이 졌으면 어디에선가 새로운 큰별이 뜹니다. 작은별이 졌을 때에도 어디에선가 작은별이 새롭게 떠요. 큰 어른이 숨을 거두었으면, 누군가 큰 어른이 되겠지요. 어쩌면 내가 큰별이 될 수 있고, 큰 어른 노릇을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알뜰히 꾸리면 넉넉합니다. 내 살림을 내 깜냥껏 일구고, 내 이웃은 내 사랑으로 보듬으면 즐겁습니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삼 깨닫고, 잠자리에 들어 홀로 생각하다가 다시금 깨닫습니다. 곰곰이 돌이키자니, 이 땅에서 ‘천재’라 일컬을 만한 글쟁이나 예술쟁이가 참말 있었나 알쏭달쏭합니다. 아마, 천재 글쟁이나 천재 예술쟁이란 한 사람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들을 가리켜 영재라느니 무어라느니 떠들썩하지만, 아이들은 영재나 천재라서 무엇을 아주 잘하지 않습니다. 모차르트가 몇 살 때에 노래를 지었든, 이름난 테니스 선수가 몇 살 적부터 테니스를 배웠든, 이들을 놓고 천재라고는 일컬을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동무가 어김없이 있습니다. 참말 똑똑할 뿐더러 잘생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동무가 천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데에서는 뜻과 마음이 하나라서 옆지기랑 함께 살아가는지 모르겠는데,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걸레질하는 살림꾼 어머니’와 같은 천재는 다시없다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날마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거나 물리지 않을 밥을 날마다 뚝딱뚝딱 세 끼니나 차릴 수 있을까 놀라웠습니다. 날마다 새옷을 헌옷으로 만들며 빨랫감을 잔뜩 쌓아 놓는데 어떻게 날마다 새로 입을 옷이 뚝딱뚝딱 태어나는지 대단했습니다. 살림꾼 어머니를 키운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살림꾼 어머니를 키운 어머니를 키웠을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으레 ‘남자 쪽 어버이’를 좇으면서 족보를 만든다느니 뿌리를 찾는다느니 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뿌리야 있겠지요. 어느 쪽 뿌리이든 살아숨쉬는 사람길일 테지요. 남자 쪽 어버이는 이름이 남아 영의정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벼슬을 하느니 학문을 하느니 하고 적힙니다. 여자 쪽 어버이는 아무런 이야기 하나 안 적힙니다. 그렇지만 여자 쪽 어버이가 살아온 결은 살림꾼 어머니들 손과 몸과 땀과 마음에 알알이 아로새겨지며 오늘날로 이어 왔습니다.

 여자가 집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여자 쪽 어버이가 살림꾼 일을 도맡으면서 일군 삶자락이 그지없이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천재’로구나 싶을 뿐입니다. 여자 쪽 어버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천재로 여기지 않았고, 천재로 여기는 사람이 없었으며, 천재로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그예 삶입니다.

 간장 고추장 된장 담기란 곧 예술입니다. 나물 김치 절임이란 바로 문화입니다. 밥 쌀 나락 모두 자연입니다. 똥지게 낫 호미 한결같이 삶입니다.

 글 잘 쓰고 춤 잘 추며 노래 잘 하는 여느 예술쟁이들은 거의 ‘기술자’처럼 흐릅니다. 오늘날 사진 잘 찍고 그림 잘 그리며 연극 잘 한다는 숱한 예술쟁이들은 으레 ‘전문가’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합니다.

 맛난 요리를 잘해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요리책을 쓸 만큼 무언가 남달리 밥을 차려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림꾼이면 될 삶입니다.

 똑똑하대서 더 잘 쓰는 책이거나 더 잘 읽는 책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대로 쓰는 책이며 살아가는 대로 읽는 책입니다. 내 삶을 담는 책인 만큼,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아름다울 책을 일굽니다. 내 삶으로 읽는 책이기에, 나 스스로 착하게 살아가면서 착하게 스며들 책을 받아들입니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이 그림결을 흉내내어 꼼지락꼼지락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참으로 딱합니다. 다 큰 어른들은 다 큰 어른들 그림을 즐기면서 그려야지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린이 삶을 즐기면서 그림을 그리면 될 뿐입니다.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이든 고차매이든 천재가 아닙니다. 시골 농사꾼 아이로서 제 삶과 삶터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착하게 돌보면서 그림 또한 사랑한 아이입니다. 반 고흐가 천재 그림쟁이였겠습니까. 당신 반 고흐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동안 그림에 온 넋을 바친 어른 하나일 뿐입니다.

 리영희 님 같은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우리 삶자락 앞날을 밝힐 빛’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뒷사람은 리영희 님이 잘한 대목을 톺아보고 아쉬운 대목을 보듬으며 더욱 맑고 밝게 빛나면 됩니다. 아니, 애써 더욱 맑고 밝게 빛날 까닭이 없어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제 마음그릇에 걸맞게 즐거이 살아가면 아름답습니다. 리영희 님은 리영희라는 마음그릇으로 살아갔고, 우리들은 우리들 다 다른 이름과 삶을 담는 마음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소설쓰던 박완서 님을 돌아보면서 똑같이 느낍니다. 박완서 님이 흙으로 돌아갔대서 큰별이 졌다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 박완서 님은 박완서 님 삶대로 문학을 했을 뿐, ‘큰별이 되도록’ 문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박완서 님이 짚지 못한 삶은 수두룩하게 많고, 박완서 님 스스로 살피지 못하거나 헤아리지 않은 사람들 삶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수수한 여느 어머니들 삶을 다루지 못했대서 아쉬운 문학이 아니고, 수수한 여느 살림꾼 어머니들 삶을 다루어야 비로소 참문학이 아닙니다.

 기술자로 꾸릴 내 삶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될 내 꿈이 아닙니다. ‘프로페셔널’이나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그저, 나로서는 내 삶을 내 힘으로 단단히 움켜쥐며 당차게 다스리는 착하며 참답고 고운 ‘살림꾼’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때에 조용히 빛납니다. 나와 내 살붙이가 알아보며 느낄 만한 빛줄기를 얌전히 내뿜으면서 서로 활짝 웃습니다. 기술자가 되려고 책을 읽는 사람은 딱할 뿐 아니라, 스스로 기술자조차 되지 못합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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