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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진
페터 슈테판 지음, 이영아 옮김 / 예담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사진은 온누리를 따스히 감싼다
[찾아 읽는 사진책 15] 페터 슈테판 엮음, 《세상을 바꾼 사진》(예담,2006)
‘세상을 바꾼 사진’이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세상을 바꾼 글’이나 ‘세상을 바꾼 그림’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나라나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대통령선거에서 여당이 뽑히든 야당이 뽑히든 정치는 정치이고 나라는 나라입니다.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대통령으로 누가 뽑히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는데, 대통령으로 누가 뽑혀야 하거나 말거나 나라꼴이나 나라모양이나 나라살림이나 나라꿈이나 나라터가 아름다울 수 없어요.
아름다이 살아가는 나라라 할 때에는, 사람들 누구나 사진 한 장에 깃든 아름다움을 알아보면서, 참말 한 나라가 ‘사진 한 장으로도 크게 거듭나거나 새로워진다’ 할 만합니다. 아름다이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글 한 줄에 서린 사랑스러움을 알아내면서, 참으로 한 나라가 ‘글 한 줄로도 바야흐로 새로 태어나거나 기쁨이 흘러넘칠’ 만합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엮은 사람이나 한글로 옮긴 분이나 ‘사진문화’를 돌아보며 온누리를 읽을 수 있다고 여겼겠구나 싶으나, 사진을 바라보는 눈썰미를 처음부터 이렇게 얄궂게 맞추어 놓으면, 사진이고 사람이고 삶이고 사랑이고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는 ‘세상을 보여주기’나 ‘세상을 말하기’나 ‘세상을 담기’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진으로 찍는다 해서 ‘세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없어요. 사진이란, ‘세상이 아닌 세상 가운데 한 자락’을 보여주면서, 이 한 자락을 바탕으로 우리 삶터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나 스스로 차분히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사진은 ‘세상을 말하지’ 않아요. 사진으로 찍은 모습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얼굴빛 가운데 하나를 살며시 보여주면서, 이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픈 말’이 무엇일까를 나 스스로 곰곰이 살펴보도록 돕습니다.
사진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아름답게 바라볼 모습’을 담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답게 사랑할 사람’을 담습니다. ‘아름다운 꿈’이 아닌 ‘아름답게 가꿀 꿈’을 담아요.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움직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관찰되고 기록된 다이애나 비와 영화스타들의 사진은 수천 장이 넘는 반면, 반인류적 범죄 앞에서 미디어는 침묵을 지키고 나태하다. 사진은 거대 사업이자 생산물이다 … 잡지 《라이프》는 ‘세계의 보도 전선’에 있음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인가? 뉴스는 엔터테인먼트와 치명적으로 얽히게 되었다(들어가는 말).” 같은 대목을 읽으며 거듭 곱씹습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 머리말에 적힌 말마따나, ‘사진 = 거대 사업 = 돈벌이’입니다. 돈을 벌려고 사진기를 만들고 사진을 찍어서 나눕니다. 돈이 되니까 하는 사진찍기이지, 돈이 안 되어도 하는 사진찍기가 아니에요. 돈이 있으니까 하는 사진찍기요, 돈이 없어도 할 만한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돈과 돈이 얽히는 사진밭인 만큼, ‘돈과 얽힌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라 말한다면, 그닥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동 노동 착취’를 까밝힌 사진이란, ‘돈을 돈다이 나누지 않는 나쁜 돈쟁이들 돈벌이’를 밝히면서, ‘돈으로 얼룩진 세상을 바꾸는’ 데에 한몫을 맡았습니다. 슬픈 싸움판을 담은 사진은, ‘돈을 더 거두어들이는 식민지를 거머쥐려고 끔찍한 총칼 따위를 만들어 서로를 죽이도록 내모는 불구덩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돈에 얼룩진 전쟁을 사람들 스스로 미워하도록 이끌어 내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예술사가들은 도로시아 랭의 〈이주노동자 어머니〉, 로버트 카파의 〈어느 스페인 병사의 죽음〉, 조 로렌솔의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세우다〉와 같은 보도사진의 아이콘을 연구해 왔을 따름이다. 하지만 역사는 ‘일요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들어가는 말).” 같은 대목을 읽으며 다시금 되뇝니다. ‘사진 = 이름난 작품’일까요? 아닙니다. ‘사진 = 여느 내 삶’입니다.
도로시아 랭 님이 담은 〈이주노동자 어머니〉에 나오는 아줌마는 ‘우리 이웃 아줌마’이거나 ‘내 어머니’입니다. 잘난 모델이 아닌 수수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곳에서만 마주할 거룩한 모습인 한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할 여느 사람입니다.
사진은 대단한 모습을 찍기에 대단한 문화나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수수하면서 흔하디흔하다 할 여느 삶을 찍기 때문에 아름다운 ‘삶빛’이 됩니다. 아름다운 삶빛이기에 나중에 예술이든 문화이든 새로운 이름을 얻고 다시 태어납니다. 처음부터 문화나 예술인 사진이 아니라, 처음부터 삶인 사진입니다.
“미군 사진사가 찍었을 이 사진은 너무나 전원적인 한국의 시골에 미군이 잔인하게 공격을 퍼부어대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은 냉전기 초반에는 국제연합 군대와 함께 한국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베트남에서 아시아의 정치에 관여했다. 미군의 전략은 점차 시골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폭격에 의존했다. 이 사진에서 군사적 표적으로 여길 만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산과 강이 펼쳐진 풍경 속으로 수백 개의 폭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고요하게 정지된 이 이미지를 보면 그 밑에서 벌어지고 있을 죽음과 파멸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7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 = 고발’이 아닙니다. ‘사진 = 폭로’도 아닙니다. ‘사진 = 나눔’이요, ‘사진 = 어깨동무’입니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벗과 같은 사진입니다. 언제나 우리랑 얼굴을 맞대고 살을 부비는 사진입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을 읽으며 다음 세 군데에 밑줄을 긋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 아니고, 세상을 읽는 사진도 아니며, 세상을 깨우치는 사진 또한 아닙니다. 우리 곁에서 살가이 어우를 사진입니다. 우리 손으로 아낄 사진입니다. 우리 삶으로 녹아내어 나누는 사진입니다. 사진만 따로 똑 떼내어 생각한다면 사진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사진을 높이 추켜세우면 사진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을 애써 가르치거나 배우려 하지 말고, 사진으로 살아가면 즐거우면서 흐뭇합니다.
- 최신 이야기는 항상 옛이야기와 같다. (7쪽)
- 감상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그의 사진들은 자기만족에 빠진 대중을 흔들어 깨우고, 워싱턴의 하원의원들에게 미성년노동법을 강화하도록 촉구했다. (16쪽)
- 알티플라노의 위대한 사진 기록자인 마르틴 참비는 쿠스코와 산기슭에 역사를 세운, 아과스칼리엔테스를 잇는 기차가 생기기 전에 마추픽추를 찾아갔다. 그는 무거운 사진장비를 지고 우루밤바강을 따라 1890년에 생긴 울퉁불퉁한 노새 길을 지나야 했다. (20쪽)
아이를 낳아 아이를 업고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가 ‘아이를 바꾸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제 삶을 찾아 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사진을 좋아하거나 아끼는 우리들이 ‘세상을 바꾸는’ 사진을 찍는다거나 말한다거나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뿐입니다.
이름만 커다랗게 ‘세상을 바꾸는 어쩌고 저쩌고’를 훌훌 털어내면 좋겠습니다. 더 비싼 장비를 갖춘다 해서 ‘세상을 바꿀 만한 사진’이든 ‘아름다울 만한 사진’이든 찍지 못해요. 더 비싸거나 좋은 장비가 아니라 ‘내가 늘 내 곁에 두면서 즐길 장비’롤 갖추어야 합니다. 더 비싸거나 좋은 냄비가 있대서 더 맛난 국을 끓이겠습니까. 내 살림집에 걸맞고 내가 잘 다룰 만한 냄비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마련하여 국을 끓일 때에 맛나면서 즐겁습니다.
편집자는 ‘세상을 바꾼 사진’을 찾느라 괜히 아까운 나날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자는 ‘내가 살아오며 내 하루하루 아름답게 빛내도록 길동무가 되어 준 예쁜 사진’을 찾으면서 기쁘게 웃고 신나게 춤추며 해맑게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웃음이요 사진은 춤이며 사진은 노래입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 세상을 바꾼 사진 (페터 슈테판 엮음,예담 펴냄,2006.8.20./3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