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콩콩 책읽기
빨래와 아이 씻기기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 아이는 아빠를 앞질러 저 앞에서 콩콩콩 뛴다. 아이는 그냥 걷지 않는다. 언제나 콩콩콩 뛰면서 걷는다. 조그마한 아이가 콩콩콩 내닫는 소리가 ‘콩콩콩’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아이를 바라볼 때면 내 귀에는 ‘코옹 코옹 코옹’ 하는 소리가 톡톡톡 들린다. 아이는 저렇게 가볍게 콩콩콩 내닫는데, 아빠는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끙끙끙 걷는다. 너무 무겁게 걷나? 아이 외할머니가 “어쩜 벼리는 저렇게 콩콩콩 뛰냐? 하기는, 아이 때는 다 저렇게 뛰더라.” 하고 말씀할 때에 비로소 우리 집 아이가 콩콩콩 뛰는 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아이뿐 아니라 이웃한 어느 집 아이들이건 콩콩콩 뛴다. 때때로 콩콩콩 안 뛰는 아이를 보기도 하는데, 콩콩콩 뛰지 못하거나 않는다면 아이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아이가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갸웃하곤 한다.
콩콩콩 어린이는 집에서 혼자 책을 펼칠 때이든 아빠나 엄마가 곁에서 책을 읽어 줄 때이든 노상 콩콩콩 책읽기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오래오래 그림을 되삭일 때에는 어쩜 이렇게 깊이 빠져들 수 있을까 싶은데, 옆에서 불러도 알아듣지 못한다. 온통 그림에 마음을 쏟는다. 요사이는 글자를 알아본다. 글자가 무엇을 적바림했는지를 알아보지는 않는다. 꼬물꼬물한 ‘구림’이라고 여긴다. 아빠는 늘 수첩이나 공책에 요모조모 쪽글을 쓰니까, 아이는 아빠 곁에서 “아빠 공부해?” 하고 묻는다. 글을 쓰는 일이 마치 ‘공부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는 누구한테서 들었을까. 이 소리도 외할머니한테서 들었던가? 이리하여, 요사이 그림책 글자를 알아보는 아이는 ‘구림’이라고 말하다가는 “구림 아냐. 공부야.” 하고 고쳐 말한다. 아빠가 곰곰이 글을 쓰면, “아빠 공부해? 응, 공부해.” 하다가는 저도 작은 수첩과 볼펜을 들고 아빠 옆에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한’다. 작은 수첩에 꼬물꼬물 글씨를 줄을 가지런히 맞추면서 요모조모 그린다. 게다가 꼬물꼬물 줄맞춘 그림그리기를 한 쪽 가득 하고, 다음 쪽 가득 또 한다.
예전부터 늘 느끼지만,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다면 어버이가 책을 좋아하는 집안이다.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 집안이다. 아이들이 읽는 책을 살피면, 이 집 어버이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지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아이들이 책을 건사하는 매무새를 들여다보면, 이 집 어버이가 책을 어떻게 마주하거나 다루는가를 환히 읽을 수 있다.
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영어를 말하거나 영어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아이를 만날 때면, 이 아이가 더없이 불쌍하지만, 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가 참으로 딱하며 안쓰럽다. 퍽 어린 나이에 일찍부터 갖가지 학원에 다니거나 온갖 지식을 주워섬기는 아이를 마주할 때면, 이 아이가 그지없이 가여우면서, 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그토록 슬프며 안타까울 수 없다.
왜 즐겁게 살아가지 않을까. 왜 즐겁게 사귀지 않을까. 왜 즐겁게 책을 읽지 않을까. 책이란 즐겁게 읽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즐거이 어우러지는 고운 목숨이다. 삶이란 즐거이 태어나서 즐거이 흙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콩콩콩 가벼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하루하루 콩콩콩 맑고 밝은 말마디를 노래하듯 읊으면서 지내면 사랑이요 평화이다. (4344.1.26.물.ㅎㄲㅅㄱ)
이 그림책은 '영어 그림책'이 아닌 '리처드 스캐리' 그림책. 아직 우리 나라에 번역이 안 되었을 때 헌책방에서 찾아낸 아빠 보물. 그러나 아이는 아빠 보물이건 뭐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이 예쁘니까 책이 낡고 닳도록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