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미래 - 재앙을 희망으로 바꾸는 녹색혁명
프란츠 알트 지음, 모명숙 옮김 / 민음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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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에서 살면 도시만 알고 만다
 [책읽기 삶읽기 11] 프란츠 알트, 《지구의 미래》



 《생태주의자 예수》(이레,2003)와 《생태적 경제기적》(양문,2004) 두 권이 우리 말로 나온 프란츠 알트 님 새책 《지구의 미래》(민음인,2010)를 읽다. 이 책은 책값이 적힌 자리에 ‘재생 종이로 만든 책’이라는 글월이 적혀 있다. 환경책을 힘껏 펴내는 출판사에서는 굳이 이런 말을 적어 넣지 않는다. 환경책을 애써 엮는 출판사에서는 ‘되씀종이’ 값이 퍽 비싸 엄두를 못 내기까지 한다. 환경책을 가물에 비오듯 선보이는, 어쩌다 한 번 생각난 김에 펴내는 출판사에서 이런 말을 적어 넣는다. 되씀종이로 책을 만들어야 한결 좋다고 여긴다면, 띄엄띄엄 내놓는 환경책만 되씀종이로 만들 노릇이 아니라, 여느 소설책이나 인문책이나 처세책에다가 참고서와 문제집과 교과서까지 되씀종이로 만들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츠 알트라는 분이 쓴 책 가운데 세 권째 읽으며 곰곰이 헤아려 본다. 이분은 생태와 환경 이야기를 늘 정치와 경제 이야기하고 이어서 들려준다. 당신이 정치학자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생태와 환경을 살리는 길이 정치와 경제를 살리는 길이요, 정치와 경제를 살리는 길로 가자면 생태와 환경을 살리는 길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들려준다.


.. 우리는 앞으로 자연과 함께 살고 일하고 경영하는 법을 배우거나, 아니면 이 행성에서 사라질 것이다 ..  (23쪽)


 오늘날 도시사람은 생각할 줄 아는 머리를 스스로 잃거나 버렸다. 오늘날 도시사람들은 구멍가게이든 커다란 마트이든 찾아가서 물건을 살 줄은 알지만, 이 물건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하여 이 자리까지 왔는가를 생각할 줄 모른다. 먹을거리부터 쓸거리까지 어떤 물건을 장만하려 하든지, 땅을 일구는 사람이나 땅을 파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줄 생각하지 못한다. 푸성귀이든 곡식이든 고기이든 햄이든 가공식품이든, 누군가 땅을 일구어야 거두어들인다. 자동차를 굴리는 기름이든 가게와 집과 거리를 밝히든 등불이든 누군가 땅을 파내어야 돌릴 수 있다. 농사꾼과 광부가 없다면, 또 고기잡이와 청소부와 운전기사가 없다면, 그리고 이들 일꾼(거의 모두 남자)한테 밥상을 차려 주는 살림꾼(거의 모두 여자)이 없다면 그 어떤 도시 문명과 문화이든 고작 하루조차 버틸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도시사람은 몹시 바쁘다. 몹시 바쁜 나날을 숨가쁘게 보낸다. 피가 튀는 싸움판에서 나가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한다. 피가 튀는 싸움판에는 벗이든 이웃이든 없다. 누구나 나한테는 맞수일 뿐이다. 내 밥그릇을 지키고자 벗이든 이웃이든 아랑곳해서는 안 된다. 흔히 공무원을 가리켜 쇠밥그릇이라 하지만, 여느 회사원과 군인과 교직자나 성직자 또한 쇠밥그릇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쇠밥그릇이 되고 만다.


.. 몸무게가 보통 70킬로그램에 불과한 인간을 수송하기 위해 1.5톤의 무게가 나가는 자동차를 생산하고 구입한다는 게 정말로 현명한 일일까? … 독일의 도로에서는 날마다 평균 열다섯 명의 사람이 죽고, 1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다. 예전에 탱크가 전쟁터에서 한 짓을 오늘날에는 자동차가 우리의 도로에서 저지른다 ..  (57, 94쪽)


 《지구의 미래》라는 책을 읽으면 갖가지 숫자와 통계가 춤을 춘다. 이런 숫자와 통계는 으레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이 붙는 자리에 쓰인다. 그런데 이 책에서만큼은 이런 숫자와 통계가 생태와 환경을 살리는 길을 돌아보도록 하는 데에 쓰인다.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길의 42퍼센트를 자전거로 다닐 수 있다. 독일의 경우에는 이 비율이 7퍼센트에 불과하다(106쪽).” 같은 숫자와 통계인데, 이 나라 한국은 몇 퍼센트라 할 만할까. 한국에서 자전거길 닦기는 온 나라 지자체마다 유행처럼 벌이는 건설사업인데, 자전거로 학교나 일터를 오갈 수 있도록 하는지 궁금하다. 값싼 자전거를 누구나 손쉽게 탈 수 있도록 제도나 행정이나 시설을 마련하는지 궁금하다. 자전거를 손질할 만한 작은 가게가 곳곳에 알맞게 있는지 궁금하다.

 “14년 전, 독일인들은 수입의 약 40퍼센트를 식품에 지출했다. 오늘날에는 그 비율이 11퍼센트이다. 매달 식품비보다 자동차에 돈이 더 많이 든다(189쪽).” 같은 숫자와 통계도 재미나다. 한국사람은 어떻게 될까. 모르기는 몰라도, 한국사람 또한 자동차한테 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할 테지. 여기에 새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들이는 돈이나 은행에 갚는 빚이 꽤 클 테고.

 잘 모르는 도시사람은 흔히 잘못된 정보로 잘못된 이야기를 나누기 일쑤이다. 이른바 ‘유기농 곡식은 돈 많은 사람이나 먹는 밥’인 줄 잘못 안다. 마땅한 노릇인데, 어마어마하게 비료와 풀약을 써서 어마어마하게 때려짓는 기계농업으로 곡식을 거두면 훨씬 적은 값(적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더 많이 거두어 더 많이 팔아치울 수 있단다. 나라밖에서 사들이는 쌀은 얼마나 값이 눅은가. 그러면, 이렇게 더 값싼 곡식과 푸성귀를 즐기는 오늘날 사람들은 몸이 얼마나 튼튼하려나. 값싸고 좋은 먹을거리를 즐기면서 ‘병원에 갈 일이 없’는지?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갈 까닭이 없다. 지난날 이 나라 사람 가운데 병원을 들락거리던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날 이 나라 농사꾼은 모두 ‘유기농 곡식’만 먹었다. 똥과 오줌으로 거름을 내어 논밭에 뿌렸고, 이렇게 거둔 곡식을 먹으며 눈 똥과 오줌을 다시 거름으로 내어 논밭으로 돌려주며 살았다.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이 나라 농사는 유기농이었다. 유기농이 기계농과 화학농으로 바뀐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 우아한 바덴바덴에서 명성이 자자한 병원의 주치의는 나의 항변에 정색하고 말했다. “음식이 건강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독일과 유럽에서는 의사를 양성할 때 건강한 음식과 건강의 연관성에는 관심도 없고 가르치지도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의 농업이 화학비료 농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예전에 생명을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진 식량 생산이 먹는 수단으로서의 식량 생산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  (178쪽)


 프란츠 알트 님이 《생태주의자 예수》와 《생태적 경제기적》에 이어 《지구의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은 책을 읽는 사람은 우리 삶과 삶터를 얼마나 잘 헤아리거나 파헤칠는지 모르겠다. 책은 신나게 읽지만, 정작 내 삶은 고치지 못한다면 아무리 잘 읽거나 많이 읽었다 한들 무슨 쓸모일는지 알쏭달쏭하다. 책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삶이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읽었으면 나부터 좋은 삶으로 거듭나야 한다. 기껏 70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작은 몸뚱이를 실어 나른다며 1.5톤짜리 쇠붙이를 끌어야 할 까닭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갗으로 느껴야 한다. 무거운 쇠붙이를 사들이는 데에 들인 돈이라면, 도시에서 살면서 네 식구와 함께 스무 해에 걸쳐 유기농 곡식과 푸성귀를 사먹어도 돈이 남는다. 자동차한테 바치는 기름값이나 보험삯, 여기에 환경을 더럽히는 몫까지 헤아린다면, 자동차를 몰지 않으면서 내 살림을 북돋우거나 내 삶터를 살찌우는 값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게다가, 병원이란 어떤 곳인가. 프란츠 알트 님은 더도 덜도 아닌 한 마디로 잘 간추려 보여준다. ‘의사는 밥과 영양을 배우지 않는 지식인’인데, 이런 지식인이 모인 곳이 병원이다. 몸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병원이 아니라, 몸을 자르고 사람을 죽이는 병원이다.


.. 결국 우리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만 보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다. 아름다움의 상실은 우리의 뿌리가 없어지고 무질서가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295쪽)


 밤에 서울 남산 같은 데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예쁘다’고 말하는 도시사람이다. 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시내를 주욱 둘러보면서 수많은 등불이 켜진 모습을 놓고 ‘별이 쏟아진 듯하다’고 읊는 서울사람이다. 하늘에는 별이 한 송이도 없는데, 땅에만 별이 잔뜩 있다면 어딘가 얄딱구리하거나 뒤틀린 삶이 아닌가. 왜 별이 하늘이 아닌 땅에 있을까. 깊은 밤에 잠들지 못하고 땅바닥에 불을 잔뜩 켜 놓는 삶은 땅한테든 하늘한테든 사람한테든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밤에 달콤하게 잠들지 못하고, 새벽에 개운하게 일어나지 못하며, 낮에 신나게 일하지 못한다면, 사람이라는 목숨은 얼마나 목숨답다 할 만한가.

 도시사람은 도시가 예쁜 줄 안다. 예쁘다고 바라보는 눈길이나 마음길이 글러먹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만 보아 왔으니, 무엇이 참 예쁜 줄 겪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도시만 알고, 도시만 생각하며,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를 떠나 본 적 없는 사람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겠는가. 오로지 도시에 파묻히는 삶으로서는 《지구의 미래》 같은 책은 다큐멘터리 방송하고 다를 바 없다. 머리에 차곡차곡 쟁여 놓는 지식덩어리에 머물고 만다.

 삶을 바꾸자고 하는 책인데, 정작 삶을 바꾸자고 하는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못한다. 숫자와 통계에 사로잡히고 만다. 생태와 환경을 지킬 몫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해야 하는 줄 알며, 나부터 해서는 이룰 수 없고 정부나 시민단체 같은 데가 나서야 할 몫이라고 여긴다.

 《지구의 미래》라는 책은 시골사람이 아닌 도시사람 눈높이에 맞추어서 썼다고 느낀다. 시골사람은 굳이 이 책을 읽을 까닭이 없고, 시골사람이 읽을 만큼 손쉽게 쓰지도 않았으며, 번역이 퍽 얄궂다. 도시사람이 읽으며 도시라는 얼거리가 얼마나 엉터리이거나 뒤틀렸는가를 깨달으라고 하는 책 《지구의 미래》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치고 우리 앞날을 참다이 걱정한다든지, 내 앞날을 옳게 꿰뚫어볼 눈썰미를 얻을 만한 분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다. 한 사람쯤은 있으려나. 두 사람쯤은 나오려나.


.. 자연과 함께하는 모든 농업 경영, 즉 지속적이고 생태적인 경영은 지역 경제에 기반을 둔 농업을 전제로 한다. 재생되는 농업이 없으면, 지속적인 경제는 존재할 수 없다 ..  (76쪽)


 생각해 보건대, 쉽고 바르며 알맞으면서 고운 말마디로 새롭게 번역을 해서 내놓는다 하더라도 《지구의 미래》를 올바로 헤아릴 만한 분은 몹시 드물밖에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프란츠 알트 님 스스로 이 책을 써서 내놓을 때에 당신 삶이 묻어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들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뒤통수를 칠 만한 이야기, 사람들이 제대로 못 깨닫는 이야기, 사람들이 잘못 아는 이야기, 사람들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슬픈 삶을 일깨우려는 이야기는 쏠쏠하게 담겼다. 그렇지만, 이러한 슬픔과 아픔과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고이 껴안으면서 사랑과 믿음으로 살가이 보듬는 삶이야기로 뻗지를 못했다.

 지식이 있다고 이 나라를 바꾸지 못한다.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며 ‘환경 살리기’를 들먹이지 않는가. 《신갈나무 투쟁기》 같은 책을 쓴 차윤정 교수 또한 ‘환경 살리기’를 이루고자 4대강 사업 홍보본부장 자리를 꿰차며 뜨겁게 숱한 말을 쏟아붓고 있지 않은가. 차윤정 교수께서 홍보본부장을 맡고 있는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는 2009년부터 2010년 9월까지 홍보비로만 120억 원을 썼단다(2010년을 마무리지으면 올 한 해에만 홍보비로 100억 원이 나가리라 본다). 입과 손으로 홍보를 한다고 해서 죽은 가람이 살아나거나 무너진 메가 일어설는지 아리송한 노릇이다. 어찌 되었든 아직 이태가 되지 않았는데에도 120억 원을 썼고 앞으로 훨씬 많은 돈을 쓸 테니까, 4대강 사업이라는 토목건설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홍보비에만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쏟아붓겠구나 싶다. 1000억이란 어떤 돈일까. 1000억이란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일까. 이 돈을 어떻게 쓸 때에 이 나라 생태와 환경과 삶과 문화와 교육을 살찌울 수 있을까. 《지구의 미래》라는 책은 이 실타래와 실마리를 풀 조그마한 오솔길 하나 어떻게 밝히고 있는가. 이 책을 읽어 준 분들은 당신 스스로 당신 삶에서 얼마나 슬기롭게 실타래와 실마리를 풀면서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는가. (4343.11.1.달.ㅎㄲㅅㄱ)


― 지구의 미래 (프란츠 알트 글,모명숙 옮김,민음인 펴냄,2010.7.12./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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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18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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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일곱 살 푸름이가 비로소 찾은 ‘내 소리’
 [책읽기 삶읽기 22]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18》



 ‘이치노세 카이’라는 열일곱 살 난 푸름이가 피아노 하나에 온넋을 실어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은 《피아노의 숲》 18권이 우리 말로 나오다. 일본에서는 벌써 19권이 나왔다. 만화책은 하루가 아닌 한 시간조차 아닌 퍽 짧은 동안 금세 읽어내고야 만다. 어릴 적에도 늘 그랬다. 주마다 나오던 만화잡지가 없이 다달이 나오는 만화잡지만 있던 1980년대에 국민학생이었던 꼬맹이는 새 만화잡지가 나와 우리 동네 문방구에 들어오는 날에 맞추어 형하고 돈푼을 차곡차곡 그러모아 후다닥 달려가서 사곤 했다. 자칫 조금이라도 늦으면 동이 날까 걱정하면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늘 달음박질이다. 같은 동네 다른 동무들이 벌써부터 나와서 사 갔을는지 모르니까.

 문방구에 닿아 가쁜 숨을 그대로 헉헉거리며 “아저씨 《소년중앙》 나왔어요?” 하고 여쭈고, “이제 막 들어왔단다.”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직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책을 품에 안고 다시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갈 때 느낌이란.

 다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화잡지는 언제나 그날 다 읽어치운다. 형은 동생보다 공부가 늦게 끝나니, 동생은 먼저 형보다 읽어치우는데, 형이 보기 앞서 한 번 다 보고, 형이 한 번 다 본 그날 다시 한 번 더 본다. 형은 동생이 다 보기를 기다린 뒤 다시 한 번 보고, 동생은 또 형이 다시 한 번 더 보고 나서 다시금 더 본다. 하루 사이에 세 번을 본다.

 이튿날이 되어도 다시 보고 또 본다. 여러 날 같은 만화책을 보고 다시 보고 거듭 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핀잔과 꾸중을 쏟아낸다. 내가 어머니이더라도 이럴 만하다. 딸아이 키우는 아버지로서 지난날을 생각할 때에, 내 딸아이가 나만 한 나이가 되어 만화책에 이렇게 흠뻑 빠져 지낸다면 더없이 골이 아플 테지.


.. ‘생각났어. 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라고 피아노를 치는 거였어. 그러니까 나스트루이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도 즐거워. 그걸 잊고 조금 경직이 됐었어 ..  (187∼188쪽)


 만화책 《피아노의 숲》은 열일곱 살 푸름이 이치노세 카이가 오로지 피아노 하나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빛깔 고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이야기는 어느덧 폴란드에서 쇼팽을 기리며 마련한 콩쿠르에 주인공 카이를 비롯한 여러 푸름이가 나와서 피아노 연주를 뽐내는 대목에 이른다. 아직 2차 연주이고 마지막 3차 연주가 남았으니 열 권쯤은 더 나오지 않으랴 싶은데, 1권부터 18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말하는 줄거리는 오직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라”며 피아노를 치는 삶.

 조연으로 나오는 ‘슈우헤이’가 보여준 연주를 놓고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은 “저는 슈우헤이의 심사에는 참가하지 않아서 그의 음악을 즐기기만 했습니다. 큰 실수는 없지 않았습니까(144쪽)?” 하고 말하면서, 슈우헤이네 아버지 마음속을 읽듯이 속으로 ‘뭐야, 이 아마미야라는 남자는. 자식의 성장보다 점수가 더 신경이 쓰이는 건가. 뭐, 콩쿠르니까 그런 건 이해하지만.’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피아노의 숲》이 막바지에 이르며(어쩌면 이 콩쿠르가 끝나도 만화를 더 이어나갈는지 모른다만) 콩쿠르에서 누가 1등을 하고 2등을 하느냐에 눈길이 흩어질 법도 하지만, 그린이 이시키 마코토 님은 ‘등수야 어떻게 나오건’ 고작 열예닐곱이나 열대여섯밖에 안 된 푸른 넋들이 선보이는 피아노란 ‘손가락 놀림이 빼어난 재주 부리기’보다 ‘얼마나 가슴을 사로잡으며 아름다이 노래를 즐길 줄 아느냐’를 바라보아 주기를 꿈꾸는 셈이라고 느낀다.

 슬픈 일인데, 한국땅에서 이만 한 나이인 푸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이만 한 나이인 한국땅 푸름이들 가슴에는 무엇이 꿈틀거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가.

 《피아노의 숲》 18권은 조연인 슈우헤이한테 눈길을 맞춘다. 슈우헤이는 열일곱 해를 살아온 끝에 비로소 ‘피아노 소리는 내가 내는 거야. 그건, 나만의 음색, 즉 지금까지의 17년, 내가 살아온 증거, 나만의 소리다(84∼85쪽)’ 하고 깨닫는다. 자잘한 잘못을 저지르지만 슈우헤이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템포가 빠른가? 지금 미스터치였나? 하지만 이 소리는, 이 소리는 내 소리야. 지금 이 소리를 놓치면 나는 …….’ 하고 이를 악문다.

 그래, 참 좋은 대목이다. 괜찮은 이야기를 조연 슈우헤이를 빗대어 보여준다고 깨닫는다. 그런데 이 아이 슈우헤이는 열일곱이다. 거듭거듭 돌아본다. 우리 나라에서 열일곱 살이라면 한창 대학입시 때문에 목이 졸린 슬픈 목숨이다. 기껏해야 바짓단을 줄인다든지 치마를 짧게 줄인다든지 하는 데에 목이 매여 있을 뿐, 스스로 제 넋을 꽃피울 아름다운 길을 찾지 못한다.

 《피아노의 숲》을 다시 한 번 읽는다. 18권 첫머리를 보면, 주인공 카이가 슈우헤이네 아버지랑 슈우헤이가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정말 귀족 같다(24쪽).’고 느낀다. 만화 《피아노의 숲》에서 주인공인 카이는 귀족이 아니다. 버려진 아이라 할 만하다. 숲에 버려진 아이라 할 텐데, 카이는 버려졌다 할 만하든 아니든 숲에 저처럼 버려졌다 할 만한 피아노하고 살가이 사귄다. 숲에서 피아노하고 한몸이 되었고, 숲과 카이라는 아이는 온통 하나였다. 숲이 카이이고, 카이가 숲이며, 숲이 피아노이고, 피아노가 숲이었다.

 조연 가운데 하나인 ‘아담스키’라는 푸름이는 마음속으로 슈우헤이한테 말을 건넨다. ‘좋아, 아마미야. 실수를 두려워 하지 마. 지금 너는 청중에게 네 마음을 전하고 있어(109쪽)!’ 아담스키 입을 빌어 마음으로 건넨 이 말마디란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라 할 만하다. 사진예술이라 한다면 초점이 어긋나거나 살짝 흔들렸다 할지라도 사람들 가슴을 뭉클하게 움직이는 이야기를 건넨다. 그림과 만화 또한 매한가지이다. 글에서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좀 틀리거나 엉성하더라도 글을 읽는 사람들 가슴에 무언가를 찌르르 하고 울릴 수 있느냐 없느냐인 셈이다. 그림이나 만화 결이 적잖이 엉성하다 할지라도 줄거리와 이야기가 아름답다면 사람들을 웃기거나 울린다. 그림이나 만화 결은 뛰어나다 할지라도 줄거리나 이야기가 없거나 어설프다면 사람들은 등을 돌린다. 이런 그림이나 만화는 딱히 볼 값어치가 없다. 빼어난 재주를 보고자 그림을 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뛰어난 솜씨를 우러르자며 만화를 읽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피아노의 숲》 18권을 덮으며 19권을 기다린다. 19권째에는 누가 나와서 어떤 푸른 삶을 보여주려나. 이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열예닐곱 푸르디푸른 나날을 시멘트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시험 문제 풀기에 꽁꽁 묶여 있느라 숨막히는 판인데, 나라밖 폴란드에서 펼쳐지는 꿈결 같은 맑은 누리 이야기를 19권째에는 어떻게 담아서 나누어 주려나. (4343.10.31.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18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0.10.27./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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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을 포대기에 싼다. 어머니가 이렇게 하니 저도 따라 한다. 그래, 나중에 동생한테도 이렇게 잘 해 주렴. 

- 2010.10.30.

 

 덤 1 : 소리내어 책 읽어 주는 어린이. 엄마랑 아빠가 책을 잘 안 읽어 주었구낭...

 

 덤 2 : 바가지를 뒤집어쓰는 어린이. 오옹.. 

 

덤 3 : 바가지 떨어뜨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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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찻길 옆 골목동네 할매랑 아지매랑 아이랑 함께. 할매는 기찻길 옆에서 일구는 텃밭에서 푸성귀를 딴다. 아이는 기찻길을 밟으며 꽃이랑 논다.

- 2010.10.28. 인천 중구 신흥동3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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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와 글쓰기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새벽 일찍 하루를 열고 저녁 일찍 하루를 닫는다. 도시에서 살아가던 때, 동네 구멍가게가 가까이 있을 뿐더러 밤 열한 시 넘을 때에도 문을 여니까 목이 마르면 보리술을 산다며 아이를 안거나 업거나 손을 잡으며 밤마실을 나오곤 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제 엄마랑 아빠가 잠들 때까지 잠을 안 자려고 하니까.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살림집과 도서관 달삯을 다달이 꼬박꼬박 치르자면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기운이 다 빠지도록 글을 써야 했다. 이렇게 글을 쓴다 한들 돈을 모으기란 어려울 뿐더러, 쉼없이 사진찍기를 한달지라도 돈이 되기란 빠듯했다. 그래도 벅차며 버거운 살림을 어영부영 꾸렸다. 지치며 고단하지만 그럭저럭 입에 풀을 바르며 살았다.

 시골집으로 살림을 모두 옮긴 지 넉 달을 지나는 이즈음, 도시로 볼일 보러 나갈 일을 모조리 없앴다. 앞으로 새로 일거리를 마련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굳이 도시로 나갈 일이란 따로 없다. 그예 시골집 언저리에서 산을 타며 머물면 된다. 달삯 나갈 걱정이 없고, 달삯을 번다며 아둥바둥하며 글을 써대야 할 근심이 없다. 그러나 도시에서 지낼 때이건 시골에서 지낼 때이건 쉼없이 글을 쓴다. 어차피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든 나한테는 내 할 몫이 있으니까. 새벽부터 저녁까지 틈 나는 대로 글을 끄적인다.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글을 한 줄조차 못 쓴다. 아이가 깨어 있을 때에 아이 엄마가 아이랑 놀아 준다면 글을 조금 끄적이겠지만, 아이 엄마는 아이랑 놀아 줄 만큼 몸에 기운이 많지 않다. 아이랑 아이 엄마랑 고요히 잠든 깊은 새벽에 홀로 살며시 일어나 글을 써야 한다. 아이가 아침부터 신나게 뛰어놀다가 낮에 한숨 코 자 준다면, 나 또한 아이랑 복닥이며 지친 몸이지만 눈을 비비며 글 몇 줄 끄적일 수 있다.

 시골집에서 느긋하게 머무는 나날을 맞이하면서, 지난날 도시에서 바삐 지내며 쓰던 글을 돌아본다. 바삐 지내며 쓴 글이라 해서 모자라거나 덜 떨어지지는 않다. 다만 얽매이거나 억눌린 삶결을 느낀다. 얽매이거나 억눌린 삶결로 글을 쓴다고 어줍잖거나 어설플 까닭이 없다. 얽매이면 얽매이는 대로 풀어내면 되는 글이고,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홀가분히 엮으면 되는 글이니까. 이제 시골살림을 탄탄히 뿌리내리는 몇 해 뒤에 오늘을 돌아본다면, 아무래도 오늘 이곳에서 느끼는 내 지난날 발자취가 아쉽거나 안쓰럽다고 바라보듯, 오늘 내 삶 또한 서너 해 뒤에는 적잖이 아쉽거나 안쓰럽겠지. 아이 하나를 키우며 이토록 복닥이는 삶인데, 아이 둘을 키우며 새삼스레 복닥이는 삶을 맞이한다면 어떠한 느낌일까. 요즈음 삶이 얼마나 느긋하며 한갓지다고 느끼려나.

 하루하루 살아가는 만큼 생각하고 느끼며 글을 쓴다. 나는 내 밥그릇만큼 글을 쓴다. 나는 내 마음그릇답게 글을 쓴다. 내 밥그릇은 가득 찬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반쯤 차지도 않는데다가 한 귀퉁이에 젓가락질 한두 번 하면 텅 비는 밥그릇인 채 글을 쓴다. 내 마음그릇은 얼마나 너그러울까. 내 지난날 글을 되새기노라면, 내 마음그릇 또한 내 밥그릇처럼 썰렁한 채 글을 쓰지 않았나 싶다. 요즈음은 그럭저럭 예전보다는 낫다 여길 만하지만, 예전보다 낫다 해서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빛나거나 좋다고 말하기 부끄럽다. 예전보다 낫다며 흐뭇해 할 수 있는가. 예전이랑 오늘을 견주는 마음그릇이 아닌, 오늘 스스로 곱씹을 때에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빛나거나 좋다고 느낄 마음그릇으로 거듭날 노릇이다. 오늘은 새벽 두 시 반부터 글쓰기를 하며 하루를 열었으니, 새벽 다섯 시 반을 지나는 이때 살짝 눈을 붙이자. 일곱 시나 일곱 시 반에 다시 일어나 마무리를 짓고, 아침 밥상으로는 무엇을 차릴까 생각하며 오늘 하루 아이랑 무엇을 하며 어떻게 놀는지를 헤아리자. 아빠가 글쓰기에만 푹 빠져 있으면 아이도 힘들고 아이 엄마도 힘겹다. (4343.10.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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