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와 글쓰기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새벽 일찍 하루를 열고 저녁 일찍 하루를 닫는다. 도시에서 살아가던 때, 동네 구멍가게가 가까이 있을 뿐더러 밤 열한 시 넘을 때에도 문을 여니까 목이 마르면 보리술을 산다며 아이를 안거나 업거나 손을 잡으며 밤마실을 나오곤 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제 엄마랑 아빠가 잠들 때까지 잠을 안 자려고 하니까.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살림집과 도서관 달삯을 다달이 꼬박꼬박 치르자면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기운이 다 빠지도록 글을 써야 했다. 이렇게 글을 쓴다 한들 돈을 모으기란 어려울 뿐더러, 쉼없이 사진찍기를 한달지라도 돈이 되기란 빠듯했다. 그래도 벅차며 버거운 살림을 어영부영 꾸렸다. 지치며 고단하지만 그럭저럭 입에 풀을 바르며 살았다.

 시골집으로 살림을 모두 옮긴 지 넉 달을 지나는 이즈음, 도시로 볼일 보러 나갈 일을 모조리 없앴다. 앞으로 새로 일거리를 마련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굳이 도시로 나갈 일이란 따로 없다. 그예 시골집 언저리에서 산을 타며 머물면 된다. 달삯 나갈 걱정이 없고, 달삯을 번다며 아둥바둥하며 글을 써대야 할 근심이 없다. 그러나 도시에서 지낼 때이건 시골에서 지낼 때이건 쉼없이 글을 쓴다. 어차피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든 나한테는 내 할 몫이 있으니까. 새벽부터 저녁까지 틈 나는 대로 글을 끄적인다.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글을 한 줄조차 못 쓴다. 아이가 깨어 있을 때에 아이 엄마가 아이랑 놀아 준다면 글을 조금 끄적이겠지만, 아이 엄마는 아이랑 놀아 줄 만큼 몸에 기운이 많지 않다. 아이랑 아이 엄마랑 고요히 잠든 깊은 새벽에 홀로 살며시 일어나 글을 써야 한다. 아이가 아침부터 신나게 뛰어놀다가 낮에 한숨 코 자 준다면, 나 또한 아이랑 복닥이며 지친 몸이지만 눈을 비비며 글 몇 줄 끄적일 수 있다.

 시골집에서 느긋하게 머무는 나날을 맞이하면서, 지난날 도시에서 바삐 지내며 쓰던 글을 돌아본다. 바삐 지내며 쓴 글이라 해서 모자라거나 덜 떨어지지는 않다. 다만 얽매이거나 억눌린 삶결을 느낀다. 얽매이거나 억눌린 삶결로 글을 쓴다고 어줍잖거나 어설플 까닭이 없다. 얽매이면 얽매이는 대로 풀어내면 되는 글이고,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홀가분히 엮으면 되는 글이니까. 이제 시골살림을 탄탄히 뿌리내리는 몇 해 뒤에 오늘을 돌아본다면, 아무래도 오늘 이곳에서 느끼는 내 지난날 발자취가 아쉽거나 안쓰럽다고 바라보듯, 오늘 내 삶 또한 서너 해 뒤에는 적잖이 아쉽거나 안쓰럽겠지. 아이 하나를 키우며 이토록 복닥이는 삶인데, 아이 둘을 키우며 새삼스레 복닥이는 삶을 맞이한다면 어떠한 느낌일까. 요즈음 삶이 얼마나 느긋하며 한갓지다고 느끼려나.

 하루하루 살아가는 만큼 생각하고 느끼며 글을 쓴다. 나는 내 밥그릇만큼 글을 쓴다. 나는 내 마음그릇답게 글을 쓴다. 내 밥그릇은 가득 찬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반쯤 차지도 않는데다가 한 귀퉁이에 젓가락질 한두 번 하면 텅 비는 밥그릇인 채 글을 쓴다. 내 마음그릇은 얼마나 너그러울까. 내 지난날 글을 되새기노라면, 내 마음그릇 또한 내 밥그릇처럼 썰렁한 채 글을 쓰지 않았나 싶다. 요즈음은 그럭저럭 예전보다는 낫다 여길 만하지만, 예전보다 낫다 해서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빛나거나 좋다고 말하기 부끄럽다. 예전보다 낫다며 흐뭇해 할 수 있는가. 예전이랑 오늘을 견주는 마음그릇이 아닌, 오늘 스스로 곱씹을 때에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빛나거나 좋다고 느낄 마음그릇으로 거듭날 노릇이다. 오늘은 새벽 두 시 반부터 글쓰기를 하며 하루를 열었으니, 새벽 다섯 시 반을 지나는 이때 살짝 눈을 붙이자. 일곱 시나 일곱 시 반에 다시 일어나 마무리를 짓고, 아침 밥상으로는 무엇을 차릴까 생각하며 오늘 하루 아이랑 무엇을 하며 어떻게 놀는지를 헤아리자. 아빠가 글쓰기에만 푹 빠져 있으면 아이도 힘들고 아이 엄마도 힘겹다. (4343.10.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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