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숲 18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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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일곱 살 푸름이가 비로소 찾은 ‘내 소리’
 [책읽기 삶읽기 22]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18》



 ‘이치노세 카이’라는 열일곱 살 난 푸름이가 피아노 하나에 온넋을 실어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은 《피아노의 숲》 18권이 우리 말로 나오다. 일본에서는 벌써 19권이 나왔다. 만화책은 하루가 아닌 한 시간조차 아닌 퍽 짧은 동안 금세 읽어내고야 만다. 어릴 적에도 늘 그랬다. 주마다 나오던 만화잡지가 없이 다달이 나오는 만화잡지만 있던 1980년대에 국민학생이었던 꼬맹이는 새 만화잡지가 나와 우리 동네 문방구에 들어오는 날에 맞추어 형하고 돈푼을 차곡차곡 그러모아 후다닥 달려가서 사곤 했다. 자칫 조금이라도 늦으면 동이 날까 걱정하면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늘 달음박질이다. 같은 동네 다른 동무들이 벌써부터 나와서 사 갔을는지 모르니까.

 문방구에 닿아 가쁜 숨을 그대로 헉헉거리며 “아저씨 《소년중앙》 나왔어요?” 하고 여쭈고, “이제 막 들어왔단다.”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직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책을 품에 안고 다시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갈 때 느낌이란.

 다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화잡지는 언제나 그날 다 읽어치운다. 형은 동생보다 공부가 늦게 끝나니, 동생은 먼저 형보다 읽어치우는데, 형이 보기 앞서 한 번 다 보고, 형이 한 번 다 본 그날 다시 한 번 더 본다. 형은 동생이 다 보기를 기다린 뒤 다시 한 번 보고, 동생은 또 형이 다시 한 번 더 보고 나서 다시금 더 본다. 하루 사이에 세 번을 본다.

 이튿날이 되어도 다시 보고 또 본다. 여러 날 같은 만화책을 보고 다시 보고 거듭 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핀잔과 꾸중을 쏟아낸다. 내가 어머니이더라도 이럴 만하다. 딸아이 키우는 아버지로서 지난날을 생각할 때에, 내 딸아이가 나만 한 나이가 되어 만화책에 이렇게 흠뻑 빠져 지낸다면 더없이 골이 아플 테지.


.. ‘생각났어. 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라고 피아노를 치는 거였어. 그러니까 나스트루이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도 즐거워. 그걸 잊고 조금 경직이 됐었어 ..  (187∼188쪽)


 만화책 《피아노의 숲》은 열일곱 살 푸름이 이치노세 카이가 오로지 피아노 하나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빛깔 고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이야기는 어느덧 폴란드에서 쇼팽을 기리며 마련한 콩쿠르에 주인공 카이를 비롯한 여러 푸름이가 나와서 피아노 연주를 뽐내는 대목에 이른다. 아직 2차 연주이고 마지막 3차 연주가 남았으니 열 권쯤은 더 나오지 않으랴 싶은데, 1권부터 18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말하는 줄거리는 오직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라”며 피아노를 치는 삶.

 조연으로 나오는 ‘슈우헤이’가 보여준 연주를 놓고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은 “저는 슈우헤이의 심사에는 참가하지 않아서 그의 음악을 즐기기만 했습니다. 큰 실수는 없지 않았습니까(144쪽)?” 하고 말하면서, 슈우헤이네 아버지 마음속을 읽듯이 속으로 ‘뭐야, 이 아마미야라는 남자는. 자식의 성장보다 점수가 더 신경이 쓰이는 건가. 뭐, 콩쿠르니까 그런 건 이해하지만.’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피아노의 숲》이 막바지에 이르며(어쩌면 이 콩쿠르가 끝나도 만화를 더 이어나갈는지 모른다만) 콩쿠르에서 누가 1등을 하고 2등을 하느냐에 눈길이 흩어질 법도 하지만, 그린이 이시키 마코토 님은 ‘등수야 어떻게 나오건’ 고작 열예닐곱이나 열대여섯밖에 안 된 푸른 넋들이 선보이는 피아노란 ‘손가락 놀림이 빼어난 재주 부리기’보다 ‘얼마나 가슴을 사로잡으며 아름다이 노래를 즐길 줄 아느냐’를 바라보아 주기를 꿈꾸는 셈이라고 느낀다.

 슬픈 일인데, 한국땅에서 이만 한 나이인 푸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이만 한 나이인 한국땅 푸름이들 가슴에는 무엇이 꿈틀거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가.

 《피아노의 숲》 18권은 조연인 슈우헤이한테 눈길을 맞춘다. 슈우헤이는 열일곱 해를 살아온 끝에 비로소 ‘피아노 소리는 내가 내는 거야. 그건, 나만의 음색, 즉 지금까지의 17년, 내가 살아온 증거, 나만의 소리다(84∼85쪽)’ 하고 깨닫는다. 자잘한 잘못을 저지르지만 슈우헤이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템포가 빠른가? 지금 미스터치였나? 하지만 이 소리는, 이 소리는 내 소리야. 지금 이 소리를 놓치면 나는 …….’ 하고 이를 악문다.

 그래, 참 좋은 대목이다. 괜찮은 이야기를 조연 슈우헤이를 빗대어 보여준다고 깨닫는다. 그런데 이 아이 슈우헤이는 열일곱이다. 거듭거듭 돌아본다. 우리 나라에서 열일곱 살이라면 한창 대학입시 때문에 목이 졸린 슬픈 목숨이다. 기껏해야 바짓단을 줄인다든지 치마를 짧게 줄인다든지 하는 데에 목이 매여 있을 뿐, 스스로 제 넋을 꽃피울 아름다운 길을 찾지 못한다.

 《피아노의 숲》을 다시 한 번 읽는다. 18권 첫머리를 보면, 주인공 카이가 슈우헤이네 아버지랑 슈우헤이가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정말 귀족 같다(24쪽).’고 느낀다. 만화 《피아노의 숲》에서 주인공인 카이는 귀족이 아니다. 버려진 아이라 할 만하다. 숲에 버려진 아이라 할 텐데, 카이는 버려졌다 할 만하든 아니든 숲에 저처럼 버려졌다 할 만한 피아노하고 살가이 사귄다. 숲에서 피아노하고 한몸이 되었고, 숲과 카이라는 아이는 온통 하나였다. 숲이 카이이고, 카이가 숲이며, 숲이 피아노이고, 피아노가 숲이었다.

 조연 가운데 하나인 ‘아담스키’라는 푸름이는 마음속으로 슈우헤이한테 말을 건넨다. ‘좋아, 아마미야. 실수를 두려워 하지 마. 지금 너는 청중에게 네 마음을 전하고 있어(109쪽)!’ 아담스키 입을 빌어 마음으로 건넨 이 말마디란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라 할 만하다. 사진예술이라 한다면 초점이 어긋나거나 살짝 흔들렸다 할지라도 사람들 가슴을 뭉클하게 움직이는 이야기를 건넨다. 그림과 만화 또한 매한가지이다. 글에서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좀 틀리거나 엉성하더라도 글을 읽는 사람들 가슴에 무언가를 찌르르 하고 울릴 수 있느냐 없느냐인 셈이다. 그림이나 만화 결이 적잖이 엉성하다 할지라도 줄거리와 이야기가 아름답다면 사람들을 웃기거나 울린다. 그림이나 만화 결은 뛰어나다 할지라도 줄거리나 이야기가 없거나 어설프다면 사람들은 등을 돌린다. 이런 그림이나 만화는 딱히 볼 값어치가 없다. 빼어난 재주를 보고자 그림을 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뛰어난 솜씨를 우러르자며 만화를 읽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피아노의 숲》 18권을 덮으며 19권을 기다린다. 19권째에는 누가 나와서 어떤 푸른 삶을 보여주려나. 이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열예닐곱 푸르디푸른 나날을 시멘트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시험 문제 풀기에 꽁꽁 묶여 있느라 숨막히는 판인데, 나라밖 폴란드에서 펼쳐지는 꿈결 같은 맑은 누리 이야기를 19권째에는 어떻게 담아서 나누어 주려나. (4343.10.31.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18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0.10.27./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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