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 Free 러브 앤 프리 : 자, 떠나버릴까? - 다카하시 아유무, 전설의 세계 방랑 노트
다카하시 아유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에이지21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을 알면 사진찍기는 늘 즐겁다
 [찾아 읽는 사진책 3] 다카하시 아유무, 《LOVE&FREE》


 잘 팔리는 사진책은 몹시 드뭅니다. 제법 팔리는 사진책을 살피면 이른바 ‘정통 사진책’이라 하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정통이든 아니든 똑같은 사진책이고, 한결같이 사진을 이야기합니다.

 가만히 보면, 아직 이 나라에는 ‘참 좋다 싶은 정통 사진책’이 그리 많이는 안 나왔습니다. 나라밖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무척 좋다 싶은 정통 사진책’ 가운데 한국말로 옮겨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살가도라든지 쿠델카라든지 브레송이라든지 드와노라든지 앗제라든지 스티글리츠라든지 아담스라든지 할스만이라든지 …… 한글판으로 알차게 엮은 책이 한 가지라도 있는가 궁금합니다. 예전에 해적판으로 나온 책이 더러 있고, 아주 조그맣게 나온 번역책이 있기는 하지만, ‘사진을 배우는 길에서 아름다운 스승이 된다’는 사람들 작품책은 거의 나오지 못합니다. 팔리기 힘들고, 판권을 사 오자면 돈이 많이 든다는 아우성만 들립니다.

 이 나라에도 문화부가 있고 지역마다 문화재단이 있습니다(없는 곳도 많습니다만). 문화재단이 없더라도 시나 군마다 문화 정책을 다루는 부서가 있습니다. 개인 출판사에서는 돈이 모자라 힘들다면, 시나 군이나 문화부에서 따로 출판사를 차려서 ‘나라 안팎 빼어난 정통 사진책’을 펴내면 됩니다. 사진책 하나 내는 데에 돈이 꽤 많이 든다지요? 그렇지만 해마다 거님길 돌 갈아치우는 데에 쓰는 돈 가운데 1/100만 들여도 해마다 100권이 넘는 놀라운 ‘정통 사진책’을 펴내고 남습니다. 이렇게 펴낸 사진책을 도서관과 학교마다 한 권씩 거저로 줄 만큼 이 나라 건설과 토목과 행정은 엉뚱한 데에 돈을 흘립니다.

 일본사람 다카하시 아유무 님 글과 사진으로 엮은 《LOVE&FREE》를 읽습니다. 2010년 9월에 새로운 판으로 다시 나왔군요. 2002년 판은 책값이 8400원인데 2010년 판은 외려 400원 내린 8000원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예전 책을 펼칩니다. 아유무 님은 처음부터 “돈은 조금 부족하지만 시간만은 무한대로 있는 여행(15쪽)”을 즐기겠다고 밝힙니다. 그래요. 여행이든 동네마실이든 삶이든 ‘돈이 넉넉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마음껏 즐기면 됩니다. 다달이 오백만 원쯤 벌어야 살 만하겠습니까. 달마다 이백만 원을 벌거나 백오십만 원을 벌면 어떠하지요? 한 달에 오육십 만 원 벌이로는 너무 빠듯한가요? 그러나, ‘돈이 없어’도 ‘사랑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모자란 대로 오순도순 지낼 만합니다. 내 아이한테 십만 원짜리 옷을 사 주어야 사랑이겠습니까. 내 옆지기한테 이십만 원짜리 치마를 사 주어야 믿음이 되나요. 텃밭에서 가꾼 무를 뽑아 무채를 만들고 무국을 끓여도 사랑입니다. 돈은 한푼 없으나 아이를 품에 안으며 실컷 놀아도 믿음이에요.

 책 첫머리에서 아유무 님은 당신 넋을 거듭 밝힙니다. 이러한 다짐과 넋이 아름답기에, 《LOVE&FREE》라고 하는 ‘정통 아닌 사진책’이 널리 사랑받을 만하며, 참으로 두루 사랑받는구나 싶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어루만지기보다 한 사람의 가슴을 도려내듯 절절한 표현을 하고 싶다(25쪽).”는 마음가짐으로 “사야카의 웃는 얼굴이 좋다. 무엇인가 끄적거리기 전에 우선 이 여자를 즐겁게 해야지(27쪽).” 하고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믿는 두 사람은 길을 떠날 즈음 “사는 것이 예술이다(26쪽).” 하고 느낀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첫머리에 이렇게 말을 할 줄 안다면 굳이 끝까지 읽지 않아도 이 책 《LOVE&FREE》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알 만합니다. 삶이 곧 예술이라면 사진이 바로 예술이며, 글이 곧바로 예술입니다.


.. 미처 몰랐기에 신선하다 ..  (53쪽)


 아직까지 한국사람은 “아는 만큼 본다”는 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직도 한국사람은 “아는 만큼 보려”고 발버둥입니다. 입문책을 보고 기술책을 보며 참고서를 뒤집니다. 여행 길잡이책이라든지 사진 새내기책은 하나같이 자잘한 손재주와 지식덩어리를 다룹니다. 여행을 하는 마음이나 사진을 찍는 가슴을 다루지 못해요. 나들이를 즐기는 넋이랑 사진을 사랑하는 얼을 보여주지 못해요.

 아유무 님과 짝꿍이 일군 《LOVE&FREE》는 ‘알면 아는 대로 좋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새삼스러우며 싱그러운’ 삶을 즐깁니다. 따지고 보면, 안다고 해 보아야 무엇을 어느 만큼 어떻게 안다 할 수 있나요. 신라를 알고 신라 불상을 안다 하면 신라랑 신라 불상을 얼마나 잘 안다 할 만한가요. 경주를, 안동을, 제주를, 춘천을, 평양을, 백두산을, 하늘못을, 한라산을, 속리산을, 태안을, 부석사를, 해남을, 광주를 …… 사람들은 어느 만큼 어떻게 무엇으로 안다고 말하는지 궁금합니다.

 “피사체가 무엇이든 혹은 누구이든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찍혀 주셔서 고마운’ 것이 아닐까(75쪽).” 하고 비로소 느끼는 아유무 님입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틈틈이 나오는 수많은 ‘정통 사진책’을 비롯하여 ‘만듦사진(메이킹포토)’을 보여주는 숱한 몸짓은 아직까지 ‘찍히는 사람과 사물과 자연한테 고맙다고 느끼는 마음밭’이 지나치게 얕지 않나 싶어요. 찍혀서 대단한 사진이란 없거든요. 찍혀 주어 대단한 사진이랍니다. 찍어서 놀라운 사진이란 없습니다. 찍혀 주었기에 놀라운 사진입니다.

 이리하여, 이런저런 사진쟁이와 여행쟁이가 인도라는 나라를 다녀오며 찍은 사진이 왜 한결같이 볼품없거나 볼썽사나운가를 일깨우는 한 마디가 톡 튀어나옵니다. 한국땅 사진쟁이와 여행쟁이가 이 대목을 잘 깨우치며 삭일 수 있을 때에, 한국땅 사진쟁이 작품과 여행쟁이 이야기를 나라 안팎에서 살뜰히 즐기며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유무 님은 “나는 지금까지 편파와 왜곡으로 일그러진 필터를 통해 인도를 보아 왔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길에서 자는 것도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 길에서 호젓한 낮잠을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냈다 … 인도에는 슬픔과 아픔 대신 수천 년의 역사가 만들어 낸 ‘현실’과 ‘미래’가 있을 뿐이다(70∼71쪽).” 하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도 똑같이 말하고 느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아름답고, 돈있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대로 멋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모자라고, 돈있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대로 꾀죄죄해요. 무엇이 있고 없고는 아랑곳하지 않아도 됩니다. 삶을 바라보면 돼요. 사람을 사람다이 마주하면서 내 사랑을 고이 나누면 넉넉해요. “많이 읽을 필요는 없어. 한 권의 책이라도 책장이 뚫어질 때까지 읽어 보렴. 그 편이 진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145쪽).”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헤아리면 됩니다.

 사람을 많이 사귀면 더 좋을까요? 사람을 더 많이 사귀면, 더 많은 사람을 사귀면, 아는 사람이 많아 내 손전화 기계에 천 사람 넘는 전화번호가 담겼으면 ‘좋은 벗이 많다’ 말할 수 있나요. 인간문화재를 백 사람 취재해서 사진책 하나 내놓으면 그럴싸할는지요? 인간문화재라는 분 가운데 다문 한 사람만 마주하면서 이이 한 사람 삶을 가까이 사귀어 살붙이가 되면서 내놓는 사진은 어떠한가요. 인간문화재가 아니면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동네 이웃 한 사람을 서른 해나 마흔 해 사귄 이야기를 사진하고 글로 엮어서 내놓으면 어떠할까요. 제주 올레길은 멋들어지고, 우리 동네 골목길은 하찮은지요. 서울 북촌은 멋스럽고 우리 동네 골목집은 지저분하나요. 영화배우 아무개는 잘생겼고, 우리 할아버지는 못생겼을까요. 여행쟁이 한비야 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내 어머니와 내 언니와 내 동생과 내 동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얼마나 되는가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다 함께 연속극을 본 적 말고, 텔레비전이 없는 조용한 방에서 커피 한 잔이든 찬물 한 잔이든 앞에 놓고 한두 시간 신나게 수다를 떨어 본 적이 얼마나 있는가요.


.. 소중한 것을 깨닫는 장소는 언제나 컴퓨터 앞이 아니라 새파란 하늘 아래였다 ..  (202쪽)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멋스럽지 않습니다. 깊은 생각을 담은 듯 사진을 찍는들, 싯말처럼 보이는 글을 펼친들 뭔가 남다르다 할 수 없어요. 그예 살아가는 내 모습을 꾸밈없이 드러내면서 따사롭고 부드러이 꼭 감싸안을 수 있으면 됩니다. 멋스럽지 않아도 좋은 사진이요, 남다르지 않아도 기쁜 글입니다. 훌륭해 보여야 하는 사진이 아니고, 재미있어야만 하는 글이 아닙니다. 파란하늘을 어깨동무하며 즐길 줄 아는 몸가짐이면 됩니다. 푸른 들판에서 호미와 낫을 들고 땀흘려 일할 줄 아는 발바닥이면 됩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을 씻어 밥을 안친 다음 국 한 그릇 구수히 끓여 살붙이랑 배불리 먹을 줄 아는 살림꾼 꾸덕살이면 됩니다. 날마다 아기 기저귀를 빨아 빨랫대에 널어 놓고 나서, 이 빨래들이 햇볕에 보송보송 마르는 느낌을 사진으로 한 장씩 담거나 글로 한 줄씩 적바림해 놓아도 좋아요. 이렇게 즐기는 사진 한 장과 글 한 줄이 차곡차곡 모이면 빛깔 고우며 냄새 그윽한 삶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4343.11.7.해.ㅎㄲㅅㄱ)


― LOVE&FREE (다카하시 아유무 글·그림,차수연 옮김,동아시아 펴냄,2002.8.1./8000원·2010년 9월에 ‘에이지21’에서 고침판으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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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 소노 아야코의 경우록(敬友錄)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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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착하며 참다이 살고 있기에 책을 안 읽습니까
 [책읽기 삶읽기 12] 소노 아야코,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님 책을 틈틈이 챙겨 읽는다. 새롭게 옮겨지는 책도 있고, 예전에 한 번 나온 뒤 다시 나오지 못하는 책이 있다. 나는 스물여섯 나이에 《계로록》으로 이분 책을 처음 만났지만, 헌책방에서 《누구를 위하여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두 번 만나 두 번 사서 두 번 읽은 뒤로 곰곰이 헤아려 보니, 훨씬 예전부터 ‘曾野綾子’라는 이름이 새겨진 책을 읽었구나 싶다. 아직 철이 잘 들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만, 훨씬 철이 덜 들었을 무렵에는 ‘曾野綾子’하고 ‘소노 아야코’라는 이름을 맞대어 헤아리지 못했다. ‘三浦綾子’하고 ‘미우라 아야코’ 또한 마찬가지. 두 이름을 한꺼번에 살피지 못하며 책을 읽어 왔다.

 소노 아야코 님이 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은 글자가 꽤 크며 글이 짧다. 하루가 아닌 한 시간이면 읽어치울 만한 책이다(더 빨리 읽어치울 수도 있겠지). 아무래도 나이든 분들을 헤아려 이렇게 큰 글자로 책을 엮었지 싶은데, 여느 젊은 사람이 읽을 만한 글자로 책을 엮었다면 쪽수나 부피가 훨씬 줄겠지. 더욱이, 글자를 꽤 크게 하며 내놓을 만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같은 소노 아야코 님 책은 ‘금세 읽어치우고 덮’으면 뭔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삭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무리를 하면 피곤해져 인간성을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미움을 사면 미워하라고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 잘못된 기억에 의존하여 칭찬을 받는다 한들 또 비난을 받는다 한들 다 부질없는 일이다(22, 26쪽).” 같은 이야기를 꾸밈없이 받아들일 만한 이 나라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잘못 알면서 잘못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재미로 사는 사람마저 있다. 뭐, 한국뿐 아니라 일본부터 엉터리 삶인 사람이 많으니까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은 일본사람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겠지. 미움을 사느니 마느니에 매이는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면 된다는 소리이다. 내가 아름다이 살아가는지, 또는 착하게 지내는지, 아니면 참다이 삶을 꾸리는지는, ‘나를 잘 모르거나 잘못 보는’ 사람이 아닌, 하늘에 계신 분이 굽어살피니까 애써 마음쓸 대목이 없다.

 “자신의 추한 부분, 불쾌한 부분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또 그것에 비애를 느낄 때라야 그 사람의 정신은 자유로워져 정신 자세도 자연히 건전해진다고 여겨진다(55쪽).”는 이야기를 열 살 어린이나 스무 살 젊은이가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서른이나 마흔 나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맞아들이지 못한다고 느낀다. 어쩌면 쉰이나 예순 나이가 되어도 못마땅하게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하지 않을까. 나한테 한 번 주어진 이 삶을 고맙게 섬기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하루하루 재미난 나날이라고 헤아리며 두 손 곱게 모아 비손을 하기란 얼마나 힘들까.

 “나는 잘못된 일 처리나 뇌물 수수, 배임 횡령의 기사 따윈 신문에서도 거의 읽지 않으므로, 별로 그 일을 떠들썩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70쪽).”는 소노 아야코 님인데, 나는 신문을 아예 안 읽는다. 집에 텔레비전을 안 들여놓고 살아온 지 열다섯 해가 넘는다. 도시에서 전철을 탈 때면 책을 읽으며 전철 곳곳에 덕지덕지 붙은 광고판을 안 보려 한다. 눈을 쉬게 하고프다. 손전화 걸고 받으며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에서 홀가분하고 싶어 책을 펼친다. 요사이는 아이랑 씨름하느라 둘레 사람이 떠들든 말든 아랑곳할 겨를이 없다. 아이하고 버스나 전철을 타면 이런 대목이 퍽 쏠쏠하다. 다른 데에 눈이나 마음을 쓸 수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숱하며 자잘한 이야기가 귓결에 스친다. 며칠만 지나고 보면 다 잊는 이야기를 놓고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참말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언론이란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아닌데, 온통 더 큼지막하게 써대려 하고, 된통 더 따갑게 부풀리려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란 무엇이기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기에. 깊어 가는 가을날, 또는 한창 무르익으려는 겨울날, 이리하여 차츰 다가오는 봄날, 앞으로 새삼스레 다시 찾아올 여름날을 그때그때 다 달리 껴안으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알차며 사랑스레 북돋울 이야기를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다루면 장사가 안 되는가. 언론이란 장사가 안 될 이야기를 다루면 안 되는가. 언론이란 삶을 다루는 이야기를 알뜰살뜰 채우면 안 될 노릇인가.

 책을 읽으면서 “좋은 일을 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것은 상행위와도 같다(91쪽).”는 대목에서 자꾸 걸린다. 자꾸자꾸 걸려 넘어진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이 대목을 거듭 곱씹는다. 내가 제아무리 아이하고 신나게 놀아 주었다 생각하더라도, 아이한테 내 사랑이 이어갔다고 여길 수 없다. 난 그저 얼마쯤 아이하고 놀았을 뿐이니까. 내가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밥을 안치고 반찬이며 국이며 마련하여 밥상을 차려 놓는다 해서 아이가 아침과 저녁을 맛나게 받아먹으며 제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느껴야 하지는 않다. 고마움을 느끼라고 차리는 밥상은 아니니까. 사랑은 장사가 아니다. 삶은 장사일 수 없다. 사람을 사귀든 글을 써서 책으로 엮든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자전거마실을 다니든 그예 삶이지, 장사이지 않다.

 “아마도 우리들이 정말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결코 여유 있는 사람도 아니며, 권력자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을 맛본 사람들일 게다(16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소노 아야코 님이 쓴 다른 책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를 떠올린다.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라는 책은 그리 사랑받지 못하고, 잘 읽히지 못한다. 적어도 이 책 하나쯤 찬찬히 헤아려 본다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한결 깊이 돌아볼 수 있을 테지만, 이렇게까지 책을 읽으며 고개를 숙인다든지 삶을 곱씹는 사람은 드물다. 안타깝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책읽기란 ‘처세’와 ‘자기계발’이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책읽기가 삶읽기로 자리잡는다면 책을 읽는 사람은 늘 고개를 숙이면서 고맙게 마음밥을 얻어먹는다고 느낀다. 마음밥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나고, 언제나 새삼스레 거듭난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이 더 아프고, 책을 덮고 나서 삶을 부대끼는 동안 내 몸이 더 슬프면서, 내 두 다리와 두 팔로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좋을까를 곱씹는다.

 “교육적이려면 좀 특별한 화제를 만들어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가정 내 대화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시시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는 거다(278쪽).” 같은 이야기란 누구나 뻔히 안다 할 만큼 시시한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래, 참 시시한 이야기이다. 소노 아야코 님 이 책은 참말 시시한 이야기를 구지레하게 담았다 말해도 좋다. 삶이란 시시하지 대단하지 않다. 수다란 시시하지 대단할 구석이 없다. 책이란 시시하지 거룩하지 않다. 앎이란 시시하지 거룩할 까닭이 없다.

 시시하면서 수수한 삶이다. 시시하기에 홀가분하게 웃고 떠드는 수다이다. 시시하니까 스스럼없이 쥐어들어 마음껏 펼치는 책이다. 시시한 만큼 머리에 가두지 않고 몸으로 신나게 풀어 놓는 앎, 곧 슬기이다.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는 책에는 ‘머리를 쓰며 살아가’라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내 몸을 내가 스스로 더 힘껏’ 쓰면서 ‘좀 어리석거나 바보스레’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다룬다. 뭐 그리 잘난 삶이라고 용을 쓰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뭐 그리 똑똑한 삶이라며 어깨를 우쭐거리며 지내야 하는가. 너무 무거운 내 머리를 가볍게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좋은 소리와 궂은 소리 모두 귀담아들으며 살아가면 넉넉하다. 된장찌개나 미역국 한 그릇으로 얼마든지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다.

 다 아는 이야기, 다 알 만한 이야기를 담은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으레 다 알거나 알 만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또는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다 알거나 알 만하다 말하는 사람은, 이 땅 이 나라 이 터전에서 얼마나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참다이 살아가는가. 몹시 궁금하다. 이까짓 이야기 훤히 꿰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내 삶과 네 삶을 고이 어루만지는가. 참으로 궁금하다. 

 덧말 한 마디 붙인다면, 소노 아야코 님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으로 적어야 했을 텐데. (4343.11.7.해.ㅎㄲㅅㄱ)


―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글,오경순 옮김,리수 펴냄,2005.6.2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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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과 글쓰기 3


 살림을 하는 사람이 글을 얼마나 쓰고 책을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사람이 살림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아이를 무릎에 앉히어 그림책을 읽히면서 ‘밥벌이를 하는 글’을 쓰거나 ‘내 마음밥 채운다는 책’을 읽을 수 있나? 다만, 골목마실이나 헌책방마실을 할 적에는 아이를 안고 한손으로 덜덜 떨며 사진을 찍곤 했다. 숨을 이십 초쯤 멈추고 손이 떨리지 않게끔 다스리면서 살며시 단추를 누른다. 사진 한 장 찍고 나면 히유 한숨이 쏟아지면서, 아이가 포근히 안겨 있는가 살핀다. 시골집에서는 아이랑 놀다가 지쳐 떨어져 방바닥에 드러누운 채 아이가 춤추거나 노래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이마저도 삼십 분이 넘어가면 그냥 곯아떨어진다. 아이는 아이대로 더 신나게 뛰어논다. 이제 아이를 재우고픈 마음에 등불 하나 없이 깜깜한 시골길을 손 잡고 거닐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눈다. 머잖아 동생이 태어날 텐데 언니 된 아이가 밥 잘 먹고 잠 잘 자며 마음껏 뛰어놀면 참으로 좋겠다고. 이렇게 등불 하나 없이 깜깜한 때를 ‘밤’이라 하는데, 이러한 밤에는 다들 코 자니 아이도 코 자야 한다고. 아이가 다리 아프다며 안아 달라 할 때쯤 그만 걷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닿으니 아이는 다시금 뛰어논다. 어른은 아이를 이기지 못한다. (4343.1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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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아침부터 놀던 아이는 늦은저녁이 되도록 잠 없이 논다. 마지막은 춤노래로 마무리를 할 듯하면서 더 논다. 

- 20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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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집 안쪽에 세워 놓은, 그러니까 한 층으로 된 골목집 옥상 자리에 박아 놓은 빨래줄에 빨래집게 잔뜩 집혀 있다. 뒤쪽 빨래줄에는 시래기가 나란히. 

- 2010.10.27. 인천 중구 신흥동2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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