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아닌 날씨를 보며 산다
― 데오도라 크로버,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



- 책이름 :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
- 글 : 데오도라 크로버
- 옮긴이 : 김정환
-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1981.9.20.)



 이오덕 님이 1984년에 내놓은 책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백산서당) 끝자락을 보면 〈어린이의 마음을 지켰던 마지막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라는 책을 이야기하는 꼭지가 있습니다.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라는 책을 제대로 읽어 제대로 말한 글은 1981년부터 2011년 오늘까지 오직 이 글 하나만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쩌면, 책으로 묶이지 못하거나 신문·잡지 같은 데에 안 실린 채 조용히 적바림한 사랑스러운 느낌글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구태여 누구한테 읽히려고 쓰는 느낌글이 아닌, 일기장에 살가이 적어 놓은 느낌글이 있을 수 있겠지요.


.. 캘리포니아 산기슭 언덕 지방의 샛강이나 하상에 깔린 자갈 속에 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자 처음 이주했을 때는 물방울에 불과했던 것이 강물을 이루어 산맥의 서쪽 면을 쏟아져내리게 되었다 … 그들(백인)은 비록 물방앗간샛강족은 한 명도 못 잡았지만 잡아 죽일 인디안 ‘몇 명’은 발견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 길이 나고 목장이 들어서고, 구릉 지대로 새로 밀려드는 백인 이주민들 때문에 물방앗간샛강 지방은 갈수록 잠식당했던 것이다 ..  (64, 98, 144쪽)


 1981년에 나온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를 쓴 ‘데오도라 크로버’ 님은 1982년에 나온 《마지막 인디언》을 쓴 ‘디오도러 크로버’ 님하고 같은 사람입니다. 어느 책이 옮게 적바림한 이름인지 모를 노릇입니다. 두 책 모두 글쓴이 이름을 알파벳으로 밝히지 않았거든요. 다만, ‘크로버’는 ‘Kroeber’로 적으며, 남편 이름은 ‘알프레드 루이 크로버’라 합니다. 알파벳 이름이 ‘Kroeber’라 한다면, 네덜란드 쪽 이름이 아닌가 싶고, 네덜란드 쪽 이름이라면 이 이름은 ‘끄루베르’로 읽어야 맞는데, 영어 투로 읽는다면 ‘크루버’입니다.

 책에는 안 나오는 이름을 인터넷으로 살펴 가까스로 ‘Theodora Kroeber’라는 알파벳 이름을 찾아냅니다. 이 알파벳 이름으로 다시금 살피니, ‘Theodora Kroeber’ 님은 1897년 3월 24일에 태어나, 1979년 7월 4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더욱이, ‘시오도라 크뢰버’ 님은 딸아이 ‘어슐러 K.르 귄’을 1929년 10월 21일에 낳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어슐러 K.르 귄’은 판타지문학 작품으로 몹시 사랑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 1850년대는 야나족에 있어 고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측면이 적에게 노출되자 그들은 도매금으로 노예 신세가 되거나 납치되었고, 성병으로 인한 극심한 타격 때문에 그 수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이런 인접 지방의 위험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야히족은 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식량을 주워 모으던 땅을 상실하면서, 멀지않아 그들을 굶어죽게 만들 심각한 타격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사슴이나 다른 사냥감들의 수가 감소했음은 물론, 권총을 쏘는 소리(이쉬는 권총이 ‘부서지는’ 소리라고 했다)가 투석기나 활 따위가 지닌 무성무기의 장점을 짓밟아 버렸기 때문에 짐승들이 워낙 조심을 하는 터라 몰래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 인디안들은 가능한 시간, 가능한 장소에서 말·노새·소 그리고 양들을 가져갔다. 그들은 고기는 식량으로 가죽은 걸칠 것으로 만들면서 이 가축들의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았다 … 단지 살기 위해서 훔치거나 죽인 것이지, 가축 수를 늘리거나 재산을 모으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  (88∼90쪽)


 헌책방마실을 하며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를 곧잘 만납니다. 아주 흔한 책은 아니지만 아주 드문 책 또한 아닙니다. 헌책방 책시렁 한켠에 얌전히 꽂힌 모습을 심심찮게 마주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기쁘게 집어드는 사람은 썩 드뭅니다. 인류학을 하는 학자나 학생이 아니라면, 게다가 인류학을 하는 학자나 학생일지라도 책읽기를 몹시 좋아하거나 공부를 깊이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이 책을 집어들지 않습니다.

 북중미 토박이들 말과 삶을 다룬 책이 그럭저럭 팔리거나 읽히곤 합니다. 북중미 토박이들이 살아오며 남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람이 살아갈 슬기’를 얻는다고들 합니다.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라는 책은 ‘사람이 살아갈 슬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북중미에서 마지막 석기사람으로 살았다 할 만한 ‘이쉬’라는 사람을 ‘박물관사람’으로 삼아 ‘보살폈다’고 하는 백인이 곁에서 지켜보고 학문으로 파헤친 이야기를 갈무리한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입니다. 《마지막 인디언》은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을 어린이도 알기 쉽도록 한결 부드러우며 애틋하게 엮은 동화문학입니다.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는 이른바 보고서라 할 만합니다. 북중미 땅에서 ‘야히 겨레’가 어떻게 백인 손아귀에서 괴로워 하다가 그만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는가를 차분히 들려주는 보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쉬’라는 야히 겨레 마지막 사람이 ‘야히 겨레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스스로 적바림해 놓아야 한다는 ‘야히 겨레 옛사람 목소리’를 듣고 나서 스스로 박물관사람으로 지내는 자취와 삶을 곁에서 꼼꼼히 살핀 ‘적이 아니지만 동지 또한 아닌 인류학자(남편)랑 이야기꾼(아내)’이 갈무리하면서 엮어 놓은 ‘야히 겨레 역사를 다른 모습으로 담은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 이쉬는 사냥의 어느 과정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는 화살을 만지지도 않았다. 사슴 사냥을 나갈 때는 다른 의식절차도 첨가되었다. 사슴 사냥을 나가기 전날이면 이쉬는 밤이고 낮이고 생선을 먹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금욕기간은 3일로 연장되는 적도 있었다 ..  (268∼269쪽)


 야히 겨레 마지막 사람 이쉬는 당신 삶을 숱한 글과 사진과 이야기로 남긴 채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야히 겨레 마지막 사람 이쉬 삶을 담은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될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는 1981년에 조용히 태어나 조용히 읽히다가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아직 한국땅에서는 이 책이 책다이 읽히기 어렵다 할 테고, 문화학이나 인류학으로서도 깊이 헤아리기 힘들다 할 테며, 우리 삶을 돌아보는 좋은 길동무로 삼기에도 벅차다 할 테지요. 한국사람은 한국문화와 한국삶조차 살뜰히 돌아볼 겨를이 없을 만큼 몹시 바쁘니까요.

 시계나 달력에 맞추어서 살아간 사람이 아닌 이쉬입니다. 날씨와 철과 바람과 흙과 햇볕에 따라 살아간 사람인 이쉬입니다. 이쉬를 읽으려면 내 삶이 시계 아닌 날씨로 움직여야 하고, 달력 아닌 철에 따라 숨쉬어야 합니다. 돈이 아닌 사랑으로 사람을 사귀며 살아야 합니다. 1978년에 나왔다는 ‘이쉬 이야기 담은 영화’가 어떤 줄거리를 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12달러면 살 수 있다는데, 한국에서 이 영화를 장만할 길을 찾아봐야겠습니다. (4344.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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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쟁이 책읽기
 ― ‘사진책 읽는 즐거움’을 찾는 길



 시를 쓰는 민영 님이 1991년에 내놓은 산문책 《내 젊은 날의 사랑은》(나루)을 읽다 보면, “시야말로 처음 쓸 때의 경건한 마음을 일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한 자 한 자 공들여서 써야 하는 예술입니다. 자기만 알고 남은 모르는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서 독자를 우롱하는 시를 써서도 안 됩니다. 또 시에는 복제품이 없습니다. 예술 중에는 더러 하나의 주제로 창작된 것을 똑같이 만들어 전시해도 되는 것이 있으나, 시는 언제나 새롭게 쓰여져야 합니다. 이 말 저 말을 적당이 꿰어맞춰서 쓰는 일은 용서되지 않습니다(158쪽).” 같은 대목을 마주합니다. 다시없이 옳은 말이요, 그지없이 알맞은 말이며, 더없이 좋은 말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우주소년 아톰》(학산문화사,2001) 7권을 보면, 아톰이 살려 준 ‘홈스판’이라는 사람이 “나를 로봇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부르시오. 그러나 나는 로봇이 된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요. 그것은 로봇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오. 그것은 수술을 받기 전 아톰에게서 배웠소. 인간처럼 욕심도 없고 잘난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올바른 일만 하는 로봇들(107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로봇 아톰은 무슨 일이나 척척 해내는데, 세 가지는 못합니다. 첫째, 거짓말을 못하고, 둘째, 나쁜 일을 못하며, 셋째,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로봇 아톰은 멀디먼 앞날 사람누리에서 사람들이 모조리 잊거나 잃거나 놓는 세 가지인 ‘착함’과 ‘참다움’과 ‘아름다움’을 알뜰히 건사하는 목숨붙이인 셈입니다.

 어린이문학과 교육운동과 우리 말글 바로쓰기를 해 온 이오덕 님이 1984년에 내놓은 책 하나가 《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고인돌,2010)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책인데다 스물예닐곱 해나 묵은 글이지만, 이 책을 지난날부터 옛판으로 열 번 넘게 읽고 새판으로 거듭 읽으면서 언제나 새롭다고 느낍니다. “주제가 없거나 모호한 작품은 감동이 있을 수 없다. 감동이 없으면 죽은 작품이다. 다음에 주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어린이 사회의 절실한 문제를 잡은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한결같이 강요하는 틀에 박힌 교훈을 얘기한 것이라면 이것 또한 작가에게 문학정신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밖에 없다(207쪽).”라든지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밑뿌리로 되어 있어야 하는 문학이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귀여움에 빠져 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깊이 이해하여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 주고, 그들이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려는 정신이 곧 어린이 사랑이다(209쪽).”라든지 “많은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가장 뚜렷한 잘못은 아마도 짐승의 모습, 짐승의 생태를 그릇되게 나타내는 일일 것이다. 참으로 많은 작가들이 의인화를 쓰거나 바로 짐승을 살핀 얘기를 쓰면서 너무나 그 짐승을 모르고 있다. 모르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관찰과 연구에 게으르고 성의가 없이 함부로 쓰고 있는 듯한 것이다(213쪽).”라든지 “소설이든 동화든 문장을 알기 쉽고 올바르게 써야 한다는 것은 문학 수련의 첫걸음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동화작가들이 문장을 이상야릇하게 꾸며 쓰는 취미에 젖어 있다(218쪽).”라든지, 가만가만 읽어 보면, 꼭 어린이문학만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린이문학’이나 ‘동화’라는 낱말을 ‘사진’으로 바꿀 때에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할 말이 없는 사진은 감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동이 없는 사진은 죽은 사진입니다. 주제가 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뼛속 깊은 이야기를 잡지 않고 차갑거나 메마르거나 돈을 밝히는 틀에 박힌 이야기를 다루는 사진쟁이한테는 ‘사진넋’이 없다고 할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사람을 사랑하는 넋이 밑뿌리로 되어야 하는 예술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깊이 살피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가운데 서로 고운 벗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막상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짐승 한살이와 터전을 너무 모릅니다. 모르는 일보다 더 걱정스러운 대목은 알려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사진부터 찍는 일입니다. 사진이든 어떤 예술이든 알기 쉽고 올바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숱한 사진쟁이는 사진을 이상야릇하게 꾸며 찍는 버릇에서 허덕입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수필책 《나의 빨간 수첩에서》(자유문학사,1988)를 읽다 보면, 병 때문에 몸이 여린 미우라 아야코 님을 보살핀 시어머님 얘기가 나옵니다. 당신 시어머님은 당신한테 “얘야, 연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67쪽).” 하고 말씀했답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어머님은 아주 마땅한 삶을 마땅히 살아가며 미우라 아야코 님한테 사랑을 나누었고, 미우라 아야코 님은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이 사랑을 다른 이웃한테 두루 나누었습니다. 여린 사람을 아끼며 사랑하는 매무새란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는 이만 보여줄 매무새가 아닙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 모든 예술쟁이와 문화쟁이들이 골고루 갖출 매무새이기도 합니다. 아니, 문화쟁이나 사진쟁이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이라면, 옹근 한 사람이라면, 씩씩하며 튼튼한 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밑바탕으로 다스릴 몸가짐이에요.

 사진길을 걷는 저는 이런 책을 읽고 저런 책을 읽으며 그런 책을 읽습니다. 따로 어느 갈래 책을 더 좋아하거나 즐겨서 찾거나 찬찬히 살피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이는 책, 제 가슴을 적시는 책, 제 삶을 북돋우는 책, 제 사랑을 쓰다듬는 책, 제 믿음을 살찌우는 책, 제 손길을 맞잡는 책을 좋아합니다. 만화책도 좋고 그림책도 좋습니다. 사진책은 마땅히 좋으며 어린이책과 청소년책과 어른책 두루 좋습니다. 소설책이나 시집이나 산문책도 좋아요. 환경책도 좋아하고 인문책이나 역사책도 즐겨 읽습니다. 과학책이나 철학책이라 해서 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연변조선족 문학책이나 재일조선인 문학책도 즐깁니다. 책마을 일꾼이 쓴 ‘책을 말하는 책’도 좋아하며, 쉰 해나 백 해쯤 묵은 오래된 책도 좋아합니다. 잡지책도 곧잘 뒤적이고, 헌책방에서 《뿌리깊은 나무》를 두 호수 빼놓고 모두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 도서관에 갖추려고 그러모은 사전붙이만 천 권이 넘고, 우리 말글을 다룬 책은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 우리 말글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열매와 꽃봉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거든요. 사진찍기를 하든 사진읽기를 하든, 이리하여 사진이 어떠하다고 이러쿵저러쿵 읊조리는 사진말을 하든, ‘말하는 삶’이 되자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나누는 한국말 얼거리와 속살을 옳고 바르며 참다이 짚으며 헤아려야 합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란 밑앎이지만, 이보다 우리 말투와 우리 말결과 우리 말느낌과 우리 낱말과 우리 상말과 우리 말빛을 차근차근 톺아봅니다. 여성학을 다룬 책이라든지 인류학이나 문화를 다룬 책이라든지 노래나 뜨개를 다룬 책도 가만히 읽습니다. 종이접기 책도 기쁘게 장만하여 읽습니다만, 아직 종이접기는 참 어수룩합니다. 교육책도 꾸준히 읽는 가운데, 요사이는 《아기가 온다》(하늘출판사,1995)라는 책을 틈틈이 읽습니다. 저는 사진쟁이이기 앞서 옆지기한테 남편이요, 딸아이한테 아빠입니다. 집에서는 살림꾼 노릇을 해야 하며, 둘째를 집에서 낳아야 하는 만큼 《아기가 온다》라든지 《티베트 의학의 지혜》 같은 책은 줄거리를 꿸 만큼 꼼꼼히 읽습니다. 실러 키칭거 님이 쓴 《아기가 온다》를 읽으면 “임신은 단순히 출산만을 기다리는 기간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가치관을 키우며, 그것으로 자기들의 아기에게 어떤 세계를 만들어 줄 것인가, 하고 계획하는 기간입니다(40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진은 그저 작품을 만드는 예술이 아닙니다. 나와 나한테 찍히는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가운데 살가이 북돋우면서, 서로서로 새로운 누리를 즐거이 일구는 이야기꽃입니다. 아이를 함께 낳고 같이 보살피면서 아이사랑뿐 아니라 삶사랑과 사진사랑을 배웁니다.

 송명규 님이 쓴 환경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를 읽으며 “요즈음의 내 기분은 거의 그날의 날씨에 좌우된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출근하는 날에는 베란다에 남아서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선인장 생각에 하루가 즐겁다. 그러나 뿌연 황사가 모처럼의 햇빛을 가로채면 나는 봄을 약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숨겨져 있던 공격적인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피해자가 된다(142∼143쪽).” 같은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을 찍어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을 이루는 분들은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고, 더 큰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흙을 밟거나 흙을 아는 사진쟁이는 아주 드뭅니다. 흙을 밟거나 흙을 안달지라도 흙하고 멀리 떨어진 채 보내는 나날이 훨씬 깁니다. 아니,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자가용 아닌 자전거나 두 다리나 시골버스를 즐기는 사진쟁이가 다문 한두 사람이라도 있나 궁금합니다. 밥벌이에 쫓기고 돈벌이에 매이면서 정작 ‘내 사진’을 못할 뿐 아니라 ‘사진’조차 못하는 가운데 ‘사진찍기’에만 너무 바쁜 사람들뿐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새로운 모습을 담아야 사진이라 할 테지만, 새로운 모습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직 아무도 안 찍은 모습이 새로운 모습이려나요. 아직 아무도 안 찍었을 때에도 틀림없이 새로운 모습일 테지만, 아직 아무도 안 다룬 주제라 해서 가장 뛰어나거나 훌륭할 다큐사진 주제가 되지 않을 뿐더러, 멋지거나 놀라울 광고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흔히 찍으며 어디서나 쉽게 마주하는 모습을 담으면서 되레 아름다운 다큐사진을 일군다든지 사랑스러운 광고사진을 얻곤 합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 스스로 새롭게 살아가는 매무새일 때에 날마다 새롭다 싶은 사진을 즐깁니다. 나 스스로 새 넋과 새 말로 새 삶을 돌보지 못한다면, 새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책을 읽습니다. 사진책도 읽고 여느 책도 읽는 가운데, ‘사람책’을 함께 읽어요.

 사람책이란 ‘삶책’입니다. 삶책이란 곧 삶이며 사람이고 사랑입니다. 삶을 읽을 수 있으면 삶책과 사람책과 사진책과 책 또한 즐거이 읽습니다. 사람을 읽을 때에도 매한가지요, 사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기에서는 삶과 사람과 사랑이요, 찍기에서도 삶과 사람과 사랑입니다. 글을 쓰거나 살림을 꾸리거나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하거나 사진을 하거나, 누구이든 무엇보다 이 세 가지 ‘삶·사람·사랑’을 따사로우며 넉넉히 보듬을 줄 알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삶·사람·사랑 세 가지를 곱게 여미고픈 꿈을 꾸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사진을 읽는 사람 모두 ‘사진쟁이’답게 책다운 책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비손합니다. 비손을 올립니다. 비손을 바치며 사진이랑 책이랑 삶이랑 사랑이랑 사람이랑 사진책이랑 어찌저찌 예쁘게 어깨동무하는가 하고 이야기 한 자락 적바림해 봅니다. (4344.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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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 

일산에서 살아가는 옆지기네 동생들이 찾아왔다. 아이는 이모랑 삼촌 손을 잡고 멧길에 발자국 내며 함께 걷는다. 

 

모처럼 손님 찾아오니까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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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도서관


 내 집이 곧 도서관이다. 내가 읽어 내 집에 갖춘 책이 바로 도서관이다. 나는 내 집에 갖춘 책을 새로 읽고 다시 읽으며 거듭 읽는다. 내 아이는 내 집에 갖춘 내 책을 보면서 자라고 크며 생각한다. 내 아이는 제 어버이가 갖춘 책을 좋아해서 이 집 이 도서관 울타리에서 무럭무럭 클 수 있는 한편, 나중에 제 도서관과 제 집을 따로 마련하여 새로운 집과 도서관을 일굴 수 있겠지. 이 조그마한 집 도서관으로도 얼마든지 흐뭇할 만하고, 이 조그마한 집 도서관은 너무 초라하거나 모자랄 수 있다. 어떻든, 이 집 도서관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기쁘게 즐기면 넉넉하다. 집 도서관이 초라하대서 집 도서관에 갖춘 책이 덜 떨어지거나 못날 까닭이 없다. 집 도서관에 갖춘 책이 몇 안 된대서 이 책들이 읽을 값어치가 없을 수 없다. 내 집 도서관에서는 나부터 내 집 도서관을 사랑하며 책을 갖추고, 나중에 내가 이 집 도서관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면, 내 아이가 집 도서관을 물려받아서 ‘내 아이로서는 제 어버이가 살던 때가 아니면 살 수 없던 책’을 살필 수 있다.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는 어버이로서 살아가며 책을 살 때에는 언제나 ‘나는 흔히 보는 책’이지만 ‘아이는 나중에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책’을 사서 읽는다고 느껴야 한다. 나부터 내가 오늘 읽을 책이면서 내가 먼 뒷날 흙으로 돌아가기 앞서 새삼스레 돌아볼 만한 책을 내 집 도서관에 갖추어야 한다. (4344.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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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삶을 고마운 말에 실어 고마운 책으로
― 민영, 《내 젊은 날의 사랑은》



- 책이름 : 내 젊은 날의 사랑은
- 글 : 민영
- 펴낸곳 : 나루 (1991.9.30.)


 시를 쓰는 분들이 쓰는 산문을 즐겨읽습니다. 소설을 쓰는 분들이 쓰는 산문도 즐겨읽습니다. 그런데 산문을 쓰는 이들이 쓰는 시나 소설은 거의 못 봅니다. 어쩌면, 산문쓰기만을 즐기는 이는 퍽 드물지 않느냐 싶고, 산문쓰기를 하는 이들은 다른 갈래 글은 거의 못 쓰지 않느냐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진 한 장에 말 한 마디를 붙일 때에도 산문입니다. 사진과 글이 어울린다는 거의 모든 책들은 산문으로 적은 글이라 할 만합니다. 자서전이나 일기나 편지를 책으로 묶을 때에는 산문으로 쓴 글이라 여길 만하고, 책을 읽고 적바림하는 글 또한 산문으로 적바림하는 글이라 볼 만합니다.

 산문이란 가장 홀가분하게 쓰는 글입니다. 길이를 맞출 까닭이 없으나 길이를 맞추어 써도 됩니다. 줄을 띄어서 적을 까닭이 없지만 줄을 알맞게 띄어서 적을 수 있어요. 산문은 시처럼 써도 되고 소설처럼 써도 됩니다. 산문이라는 테두리에서 산문이라는 알맹이를 건사한다면 모두 산문입니다.

 시 가운데에는 산문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산문 가운데에는 ‘시산문’이란 없습니다. 산문이란 그예 산문이지만, 산문이면서 시 내음이 나기도 하고 소설 빛깔이 나기도 합니다. 산문은 제 얼굴이나 목소리가 없다 할 만한 글인데, 제 얼굴이 없어도 즐겁고 제 목소리가 나지 않아도 즐겁게 나누는 글이라고 느낍니다.


.. 우리가 세든 집은 긴 것이 특색이었다. 버스간처럼 길다랗게 생긴 일자 집을 반으로 나눠 오른쪽에는 주인집 식구들이 살고, 나머지 왼쪽 단간방에는 우리가 살았다. 집 앞에는 빨랫줄에 널린 빨래들이 늘 만국기처럼 펄럭거리고 있었다. 엄마(아내)는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 공동수도로 물을 길러 가야만 했다. 물지게를 지고 돌층계 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며 한참 동안 내려가야 수도가 있는데, 거기에서 물이 담긴 물지게를 지고 집까지 돌아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엄마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서울로 시집오지 말 걸 그랬어요. 시골 있을 때도 이처럼 고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팔자인 모양이죠? 하기야 시골에서는 저보고 서울로 시집가 얼마나 좋으냐고 말들을 하지만, 이거 어디 서울 신랑 얻었다고 좋아할 수 있겠어요?” … 아빠는 이때부터 우리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성실하지 못하여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열심히 살려고 밤잠조차 줄여 가며 노력해도 입에 풀칠을 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동숭동 집에서 평지에 있는 효제동 집으로 이사한 것은 그 이 년 후의 일이었다. 전세값이 해마다 껑충껑충 오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낙산 꼬방동네 인심이 좋았었기 때문이다. 예부터 가난뱅이 사정은 없는 사람만이 안다고, 조선 팔도의 가난한 사람들이 다 모인 꼬방동네 사람들의 마음에는 훈기가 있었다 ..  (22, 24, 31쪽)


 글을 쓰는 사람은 어느 글이든 마음대로 쓰지 못합니다. 내 모든 넋과 기운을 바쳐야 비로소 글 한 줄을 씁니다. 산문 또한 이 글을 쓰는 사람이 모든 넋과 기운을 바쳐야 비로소 한 꼭지 얻습니다. 그런데 모든 넋과 기운을 바쳐서 이루는 산문 한 꼭지이지만, 시를 쓸 때나 소설을 쓸 때나 사진을 찍을 때처럼 어떠한 틀에 매이지 않습니다. 틀에 매일 때에는 산문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사진을 찍든 내 잣대에 따라 내 틀을 마련해야 하기는 하면서도 내 틀에 얽매여서는 열매 하나 이루지 못합니다. 틀을 마련하여 지키지만 틀에 매일 때에는 아무런 문학도 문화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산문은 틀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어느 결에도 매이지 않되, 다른 모든 문학과 문화와 마찬가지로 모든 넋과 기운을 바치는 글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산문쓰기가 다른 시쓰기나 소설쓰기나 사진찍기보다 한결 힘들는지 모릅니다. 틀이 없는 틀이 산문쓰기가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 살아가는 일과 살림살이 가운데 ‘틀이 있는 틀’이란 한 가지조차 없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하면서 쌀알 숫자를 꼭 똑같이 맞추는 일이란 없어요. 그저 쌀자루에 담아 놓은 작은 밥그릇 하나를 푹 박아서 집어올리는 느낌과 무게로 어림합니다. 쌀을 씻을 때에 물을 어느 만큼 부어서 씻은 다음 몇 초에 걸쳐 어떠한 빠르기로 개수대로 버려야 하는가 하는 틀 또한 없습니다. 밥을 안칠 때에 불을 어떠한 불을 넣고 몇 분 몇 초 동안 끓여야 하는가 하는 틀 또한 없어요. 그런데 모두 같은 밥입니다.

 김치를 접시에 담을 때에 몇 조각이 되도록 하나하나 세지 않습니다. 김치를 칼로 썰거나 가위로 자를 때에 크기가 어떻게 되도록 꼼꼼히 살피지 않습니다. 밥술을 뜰 때에도 똑같고, 젓가락질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밥을 먹고 젓가락질을 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님과 입을 맞출 때에 ‘오늘은 몇 초 동안 입을 맞추어야지.’ 하지 않습니다. 더 깊이 입을 맞춘다든지 더 살짝 입을 맞춘다든지 해서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지 않아요.


..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처방전에 약이름을 적어 주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왕진을 해 주실 수 없을까요?” “안 됩니다. 이 약을 갖다 먹이면 곧 나을 겁니다.” 의사는 다소 사무적으로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기야 대학에서 교수직까지 맡으신 분이니, 조바심하는 환자 쪽의 요청을 다 들어줄 수는 없을 것도 같았다 … 그러나 앓는 아이의 아비로서는, 그때 그분이 좀더 차분하게 증세를 설명하며 다급한 자의 물음에 이해와 동정을 베풀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인술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일까? ..  (140∼141쪽)


 아이 손을 잡고 멧길을 오를 때면 아이는 혼자 신나게 달리다가, 아빠 손을 잡다가, 힘들다며 안아 달라 합니다. 어찌 되든 우리들은 멧길을 오르내리고, 즐거이 바깥바람을 쐽니다. 아이는 잠자리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기도 하지만, 엄마 무릎이나 아빠 무릎에 누워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오줌을 잘 가려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가 있는 한편, 잘못해서 바지에 쌀 때면 아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네 나이가 몇인데 이러니 하고 꾸중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꾸중을 듣는 아이가 신나게 뛰놀다가 곯아떨어져 색색대는 곁에서 이불을 덮어 주며 생각합니다. 왜 아빠로서 아이를 조금 더 따스히 돌보지 못하고 꾸중부터 하는가 하고.

 아직 많이 어리니까 잘못할 수 있습니다. 더 개구지게 놀고 싶지만 아빠가 온갖 집일과 글쓰기에 얽혀 온 하루를 마음껏 놀아 주지 못하니까 말썽을 부릴 수 있습니다. 어른으로서 이런 대목쯤 못 봐주는가 싶어 부끄럽습니다.


.. 현실에 안주하여 잠꼬대 같은 풍월을 읊조리긴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가 아닙니다. 시는 치열한 자기성찰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거짓이 끼어서는 안 됩니다. 잘난 체해서도 안 됩니다. 남에게 오래도록 불려지길 바란다면 시는 어머니가 떠 놓고 비는 한 사발의 정한수같이 진실하고 겸허해야 합니다 … 솜씨가 늘면 자만하기 쉽고 이제까지 공들여 쓰던 시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 정도의 글쯤이야’ 하고 시쓰는 작업을 무시하게 될 때, 즉 생각을 깊이하고 시어를 갈고 다듬는 일에 소홀해질 때, 이제까지 빈틈없이 긴장을 유지해 오던 시가 갑자기 맥이 풀려서 헤식은 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  (150, 157쪽)


 시쓰는 민영 님이 내놓은 산문책 《내 젊은 날의 사랑은》을 읽었습니다. 1991년에 나온 이 산문책은 판이 끊어졌습니다. 헌책방마실을 1992년부터 다녔는데, 이때부터 2011년에 이르기까지 이 책 하나를 헌책방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새책으로도 마주해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물 긷고 빨래하러 이오덕자유학교로 천천히 멧길을 걸어올라가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앞서, 지난날 이오덕 선생님이 보시던 책 가운데 이 책이 눈에 뜨이어 빌려서 읽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걸려 스무 해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1970년대 첫무렵부터 1990년까지 쓴 산문을 성글게 그러모은 《내 젊은 날의 사랑은》이라는 책은 민영 님이 당신 글에 곧잘 쓰는 ‘헤식다’라는 말마디처럼 헤식은 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 작은 책에 꽤 길게 담은 ‘민영 님네 아주머님’ 이야기는 더없이 사랑스러우며, 그지없이 애틋합니다. 당신 따님 ‘들레’한테 띄우는 편지도 참으로 좋습니다.

 어쩌면, 민영 님 묵은 책을 읽으며 끄적이는 이 느낌글 하나는, 우리 집 첫딸 사름벼리한테 쓰는 어설픈 ‘아빠 편지’가 될는지 모릅니다. 곯아떨어진 딸아이를 잠자리에 곱게 눕혀 이불을 덮은 다음, 아버지도 많이 졸리며 고단하지만, 졸음과 고단함을 꾸욱 참으면서 글 한 꼭지 붙드는 삶을 오늘 하루치 남겨 놓고, 딸아이가 먼 뒷날 무럭무럭 자라나서 제 아비가 쓴 글을 찬찬히 돌아본다 할 때에 2011년 1월 어느 날 이런 글도 이런 살림을 꾸리면서 썼네, 하고 돌아보아 줄 수 있을까 하고 꿈을 꾸면서 쓰는 편지로 삼을 수 있습니다.

 고마운 삶이기에 고마운 넋을 껴안고 고마운 말을 고마운 책에 담습니다. (4344.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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