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를 사랑한 산
앨리스 맥레런 지음, 김동미 옮김, 최효애 그림 / 꽃삽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책에 담는 삶, 삶을 담는 책
 [책읽기 삶읽기 35] 앨리스 맥레런, 《새를 사랑한 산》



 한국에서 옮겨진 《새를 사랑한 산》은 스물다섯 나라째 옮겨졌다고 합니다. 스물다섯 나라째 옮길 만큼 《새를 사랑한 산》은 대단한 책이라 할 만하고, 우리 나라는 드디어 스물다섯째 나라가 되었다 할 만큼 퍽 늦쟁이라 할 만합니다.

 《새를 사랑한 산》을 쓴 앨리스 맥레런 님 다른 작품으로는 《록사벅슨》(고슴도리,2005) 하나가 있습니다. 나라밖에서는 이름있을는지 모르나, 나라안에서는 이름없는 사람이요 책이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은 이름값으로 읽지 않습니다. 책은 삶으로 읽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나 (사진)찍은이 삶으로 읽는 책입니다. 이름난 분이 썼다 해서 대단한 책이 아닙니다. 잘 팔리거나 많이 읽힌다 해서 좋은 책이 아닙니다. 오래도록 사랑받는다 해서 반드시 훌륭한 책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책과 사람과 삶’을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곤 하는데, 지난날 일본강점기 식민지 부역을 했으면서 ‘문학만은 아름다웠다’고 하는 책이 있고, 기나긴 독재 때에 독재정권 부역을 했으면서 ‘문학만은 다르다’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달팽이,2007)라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좋아하며 아낍니다. 1935년에 태어나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살림꾼 노릇을 하며 남편한테 밥해 먹이고 집일을 꾸리며 아이를 낳아 키운 분이 조물조물 적바림한 삶글을 그러모은 책입니다. 이 책을 쓴 할머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첫 책을 내놓았습니다. 2011년 1월 22일에 흙으로 돌아간 박완서 님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 소설쟁이로 이름을 올렸다는데,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쓴 할머님은 자그마치 일흔두 살에 비로소 ‘글쓴이’ 이름을 얻습니다.

 일흔두 살에 첫 책을 낸 할머니가 쓴 삶글은 말 그대로 삶글입니다. 살아오고 살림하며 겪고 부대끼며 생각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습니다. ‘우리들을 낳고 키운 어버이’를 낳고 키운 할머니들이라면 으레 알거나 겪거나 맞아들인 삶이 글이라는 옷을 입었을 뿐입니다. 우리들 누구나 마음을 먹고 품을 들여 말미를 낸다면, 내 할머니한테서든 이웃 할머니한테서든 넉넉히 들을 만한 이야기예요. 나물을 다듬는다든지 장을 담근다든지 아이를 바라보며 마지막말을 남긴다든지 하는 이야기하고, 여기에 집일을 하는 동안 ‘농사꾼 마음으로 아깝다 여긴’ 똥오줌을 도시에서도 되쓸 수 있는 뒷간을 마련하고 싶다는 꿈을 발명품으로 만든 이야기를 담은 조촐한 책인 《지는 꽃도 아름답다》입니다. 이 조촐한 책을 알아보며 즐길 수 있는 가슴이라면, 그림책 《록사벅슨》이라든지 시그림책 《새를 사랑한 산》에 품은 사랑과 믿음을 조곤조곤 읽을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밤이나 낮이나 산이 볼 수 있는 건 하늘뿐이었습니다. 산은 구름이 떼를 지어 흐르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지요. 산은 낮하늘엔 해가 뜨고 지는 길을, 밤하늘엔 달이 그리는 길을 훤히 알았습니다 ..  (11쪽)


 책에 담는 삶입니다. 책에는 삶을 담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 또한 책에 담은 삶을 읽습니다.

 지식을 담는 책이 아니라 삶을 담는 책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내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을 내 책에 담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 또한 내 지식을 넓히려는 마음이 아닌, 내 삶을 따뜻하게 돌보면서 북돋우려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땅에서 태어나는 숱한 책은 처음부터 지식을 담습니다. 요즈음 이 나라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처음부터 지식쌓기를 할 마음입니다. 글쓴이도 삶을 담지 못하고, 읽는이도 삶을 읽지 못합니다. 글쓴이부터 내 삶을 헤아리지 못하며, 읽는이 또한 내 삶을 살피지 못합니다.

 먼 데에 있는 좋은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한테 있는 좋은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먼 데에 있는 좋은 이야기란 곧 나한테 있는 좋은 이야기하고 한동아리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먼 데에 있는 좋은 이야기를 깊이 받아들이자면 먼저 나한테 있는 좋은 이야기를 널리 껴안을 수 있어야 하는 줄 잊습니다.


.. 다음해 봄, (새) 조이가 돌아왔습니다. 조이의 입에는 조그마한 씨앗이 물려 있습니다. 산은 여전히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조이는 촉촉한 물기를 한껏 머금을 수 있도록 개울 근처 단단한 바위 틈에 씨를 떨어뜨립니다 ..  (34쪽)


 삶을 말하는 책이고, 삶을 밝히는 책이며, 삶을 나누는 책입니다. 사람이 책을 빚은 까닭은 사람 삶을 아끼거나 사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임금님 이름을 적바림하려고 책을 빚지 않습니다. 임금님 발자취를 적바림한 사람은 ‘임금님 이름’이 아니라 ‘임금이라는 사람이 보여준 모습’을 뒷사람한테 꾸밈없이 내보이면서 ‘좋은 보기’가 되도록 하려는 마음입니다.

 역사는 연표나 도표나 통계가 아닙니다. 역사는 연표나 도표나 통계에 깃든 삶을 읽는 눈길입니다. 밥이란 밥알 숫자가 아니라, 밥그릇에 담은 사랑과 따스함입니다. 밥을 푸는 살림꾼은 밥알을 헤아리며 주걱으로 밥을 푸지 않습니다. 이 밥을 먹고 기운내라는 따스한 사랑을 담습니다.

 적잖은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삶이 아닌 지식으로 다루고 맙니다. 역사읽기란 지식읽기가 아니지만 자꾸만 지식읽기로 치우칩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만 이와 같지 않습니다. 사회학이든 경제학이든 정치학이든 과학이든 매한가지요, 문학마저 똑같습니다. 글솜씨를 부리는 글이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글재주란 문학이 아닙니다. 사람들 삶을 글로 엮어 이룬 꽃이 문학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 네 삶을 아끼는 넋을 그러모아 열매를 맺을 때에 문학입니다. 문화란 연예인 춤과 노래와 영화가 아닙니다. 문화란 여느 사람들이 하루하루 일구는 삶입니다. 예술이란 예술쟁이 신선놀음이 아닙니다. 예술이란 여느 사람들이 날마다 부대끼면서 빚은 살림살이입니다.


.. 세월이 흘렀습니다. 개울은 산 주변의 평지에 온갖 생물들을 모아들였습니다. 산은 초록으로 덮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땅에서 그리고 지평선 너머에서, 갖가지 작은 동물들이 산을 찾아왔습니다. 온갖 생물들이 산의 몸에서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습니다 ..  (48쪽)


 새를 사랑한 산은 아직 많이 어리숙하던 철부지 때에는 새가 민둥산에 둥지를 틀 수 없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새한테는 먹이와 보금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나무 한 그루 풀섶 하나 없는 민둥산에서 새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새 또한 민둥산을 알뜰히 아끼거나 사랑하지 못합니다. 새는 열매를 따먹고 나서 민둥산에다가 신나게 똥을 누면, 열매에 깃들던 씨앗이 톡톡 똥덩어리와 함께 민둥산 거친 흙으로 떨어져 언젠가는 뿌리를 내려 풀이나 나무로 자라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새라든지 벌이라든지 나무라든지, 언제나 숲을 가꾸고 산을 푸르게 하는 징검다리 노릇을 오래도록 저도 모르게 하는 이음새입니다. 산한테서 사랑을 받은 새는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아 이 새끼들이 다시금 새로운 새끼를 낳고 낳은 끝에야 비로소 ‘민둥산이 산다움을 갖추어야 새도 산을 즐거이 사랑하고 산도 새를 기쁘게 사랑할 수 있는’ 줄 알아챕니다. 민둥산은 오래고 오랜 나날 눈물을 흘린 끝에 비로소 민둥산이 할 몫을 느낍니다.

 사랑한다면 껴안아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입발린 소리를 늘어놓는 삶이 아니라, 몸으로 움직이며 함께 땀흘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말이 아닌 삶으로 껴안는 사랑이고, 입이 아닌 손과 발을 써서 함께 살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새를 사랑한 산》이라는 책마냥, 이 땅 이 나라 할머님들은 이 땅 이 나라 어머님들을 돌보며 키웠고, 이 땅 이 나라 어머님들은 딸아들을 알뜰히 사랑하며 돌봅니다. 어머니 사랑은 더없이 크다 하고, 할머니 사랑은 그지없이 깊다 합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 사랑’으로 살아가려는 아버지는 드뭅니다. ‘할머니 사랑’으로 살아내려는 지식인이나 교사나 정치꾼은 얼마나 될까요.

 ‘어머니 지구’라 말하는 분들은, 지구별이 얼마나 넉넉하고 따스하며 사랑스러운가를 밝히고픈 마음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지구는 왜 ‘어머니’ 지구여야 하고, 왜 넉넉하고 따스하며 사랑스러운 품은 어머니한테서만 찾아야 할는지요. 우리는 ‘어머니 지구’이기 앞서 ‘사람 지구’를 살필 줄 알아야 하고, ‘사람 지구’이기 앞서, ‘지구다운 지구’를 톺아볼 줄 알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내 몫을 찾고, 내 길을 밝히며, 내 삶을 일구어야 즐겁습니다. 내 꿈을 아끼고, 내 넋을 돌보며, 내 사랑을 나누어야 아름답습니다. “새를 사랑한 산”은 “어떠한 새이든 벌레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기쁘게 어우러질 터전을 스스로 마련하는 삶”에 접어들고서야 비로소 참다이 사랑꽃을 피웁니다. (4344.1.23.해.ㅎㄲㅅㄱ)


― 새를 사랑한 산 (앨리스 맥레런 글,최효애 그림,김동미 옮김,꽃삽 펴냄,2008.9.25./8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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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녘 책읽기


 시골집에서 새벽에 일어나면 맨 먼저 달빛과 별빛이 반깁니다. 까만 하늘이 차츰 파란 빛깔로 바뀌면서 닭이랑 멧새랑 우는 소리가 이 다음으로 반깁니다. 겨울날 차가운 바람이 이들과 함께 시골사람을 반깁니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내리 바라보던 나무는 겨울에 들어서며 옷 벗은 나무가 되었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추장스러운 짐을 내려놓고 새봄을 기다리는 나무입니다. 또다시 살펴보면 거추장스러운 짐이라기보다 새봄에 새힘으로 새삶을 일굴 나무가 되도록 스스로 잎을 모조리 떨구어 흙을 살찌우려고 옷을 벗은 나무요, 알몸이 된 나무이며, 빈털털이가 된 나무입니다.

 멧골자락에서는 하늘과 흙과 나무와 눈밭과 달과 해를 마음껏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겁습니다. 시끌벅적한 자동차 소리라든지, 싸구려라 외치는 물건 파는 소리라든지, 철따라 유행이 바뀌는 대중노래 소리라든지, 사람들 싸우거나 멱따는 소리라든지, 하나도 귀로 스며들지 않습니다. 식구들 움직이는 소리와 아이가 떠드는 소리를 듣는 조그마한 보금자리입니다.

 밤나절 잠자리에 들면 언제나 허리가 쑤시고 결립니다. 이제 아이도 잠들었으니, 아빠는 아빠 하고픈 일을 하거나 책 좀 손에 쥘 수 있나 하고 헤아립니다. 무거운 눈꺼풀을 낑낑 인 채 책을 쥡니다. 이때에라도 읽지 않으면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책이기에, 손 덜덜 떨면서 책을 쥡니다.

 새벽녘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어제 잠들기 앞서 읽던 책을 만지작거립니다. 참말 이토록 고단한 나날에 내가 읽을 만한 책을 읽었는지,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내 곁에 둘 만한 책을 사랑하는지 곱씹습니다. 밤나절 잠자리에 들 무렵에는 이런 책이든 저런 책이든 손에 쥐지만, 막상 하루가 지나 새벽녘이 되면 엊그제 읽은 책은 덧없다고 느낍니다.

 책은 종이뭉치에 있지 않은 줄 알면서 종이뭉치에 깃든 책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않나 곱씹습니다. 글을 쓰는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걸상에 앉아 글을 쓰도록 할 수 있지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글을 쓰는 일도 즐겁습니다. 어쩌면, 겨울날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따스한 기운을 느껴서 한결 좋고, 무릎을 꿇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한편, 내 마음결을 차분히 다스리니까 글쓰기에는 한결 나을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식구들 끼니를 어떻게 마련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가늘게 쉬다가는, 다 읽은 책 읽다 만 책 읽으려 하는 책 거듭 읽는 책 들을 하나하나 돌아봅니다.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며 잎사귀 하나 없는 두릅나무에 머잖아 새잎이 돋으며, 이 새잎과 새싹을 칼로 살살 잘라서 냠냠짭짭 먹을 새봄이 곧 올 테지, 하고 꿈을 꿉니다. (4344.1.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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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66] Giftishow기프티쇼

 ‘Giftishow’라 적은 밑에 작은 글씨로 ‘기프티쇼’라 적어 줍니다. 참으로 마음이 넓기 때문인가 싶으면서도, ‘Giftishow’는 ‘기프티쇼’가 될 수 없으나, 이러한 말마디가 찬찬히 퍼지면서 스며듭니다. ‘Gifti’란 무엇일까요. 또, ‘기프티쇼’이니 ‘기프티콘’이니 하면서 읊는 말이란 무슨 소리일까요. ‘선물쇼’인지 ‘선물콘’인지, 무언가를 즐거이 나누려는 마음이라 할 때에도 이렇게 해야만 즐거움이나 나눔이 되거나, 또는 돈이 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한국사람은 영어를 배워서 이런 데에서 쓰는군요. (2011.1.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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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14] 커뮤니티

 사람들 작은 힘으로 온누리를 조금씩 바꾸면서,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예전 같으면, 아니 요즈음도 어슷비슷하지만, 으레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같은 말마디만 썼다면, 이제는 “케이블카 없는 지리산” 같은 말마디를 쓸 줄 압니다. 다만, ‘케이블카’는 ‘하늘차’로 고쳐써야 하지만, 이렇게 고쳐쓰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떤 잘못된 일을 가로막겠다 할 때에는, 여느 사람들이 익히 쓰는 말투대로 외침말을 적어서 가로막으려고 힘써야겠지요. 옳게 다듬을 말투는 ‘하늘차’이지만, 이렇게 다듬어서 이야기하면 여느 사람들은 말투를 다듬으려고 애쓰지 않는 만큼 못 알아듣습니다. 이리하여 사회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정치운동이든 교육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슬프거나 딱하거나 아쉬운 말마디로 일을 할밖에 없어요. 그리고, 좋은 뜻으로 좋은 모임을 꾸려 이야기를 나누는 누리집 게시판 이름을 ‘커뮤니티’처럼 붙이고야 맙니다. ‘사랑방’이라든지 ‘이야기터’라든지 ‘회원 한마당’이라든지 ‘열린마당’이라든지 ‘쉼터’라든지 ‘우물가’라든지, 예쁘며 살가이 이름을 붙이는 데까지 마음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4344.1.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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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13] 배송비 페이백

 읍내책방을 다니든, 도시에 깃든 작은책방이나 헌책방을 다니든, 요즈음에는 책을 사면서 퍽 쓸쓸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저로 그날 집으로 보내 주는 책’에 자꾸 길들기 때문입니다. 머잖아 전자책이 나오면 이렇게 할 일조차 없을 테지만, 종이에 찍은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는 매무새가 좀 달라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침묵의 봄》이나 《모래 군의 열두 달》이나 《우리들의 하느님》 같은 책마저 이렇게 ‘거저로 그날 집으로 보내 주는 책’, 아니 ‘거저로 그날 집으로 보내 주는 물건’으로 삼는다면, 이러한 물건을 받아쥐어 펼치는 사람한테 어떠한 사랑씨앗이 자라나는지 궁금합니다. 게다가, 책 몇 권 부치는 누리책방에서는 ‘돌려받으세요’라고도 하고 ‘페이백’이라고도 하는 제도까지 마련했답니다. 그러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돌려받는다는 우편삯은 누가 내는가요. 누리책방에서? 출판사에서? 어쩌면 책 읽는 내가? (4344.1.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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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24 21:48   좋아요 0 | URL
보통은 책값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요^^;;;

파란놀 2011-01-25 07:06   좋아요 0 | URL
네, 그렇지요.

시골 읍내 책방에는 없는 책이 너무 많고,
책방마실 하러 도시 나가기 만만하지 않아,
이제는 인터넷책방에서도 책을 사야 하는데,
이런 쓸데없는 정책들 때문에
정작 출판사들과 독자들이
피해를 입는데,
스스로 제살 깎아 먹는 줄 너무 모르거나 잊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