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아직 안 죽었습니다
나는 ‘중학교 자퇴’하고 ‘고등학교 자퇴’를 못 한 채 억지로 여섯 해를 버텼다. 게다가 어머니가 들려주신 “십이년이나 학교를 다녔는데 대학교를 안 가면 아깝지 않아?” 하는 말씀에 흔들렸다. ‘열두 해 감옥살이’가 아깝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국민학교만 겨우 마쳤다. 어머니는 가시내라서 눈물을 삼키며 중학교에 못 갔단다. 우리 아버지는 ‘사범학교’를 ‘입주과외’를 하며 다녔고, 요새로 치면 푸른씨 나이에 국만학교 교사 노릇을 했다. 가난한 집안 맏아들이라서, 어려서 남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돈벌이를 하여 집안을 먹여살리고 세 남동생을 대학까지 보냈는데, 정작 아버지 이녁은 ‘고졸’도 아닌 ‘사범출신’에다가 대학 구경도 못 한 삶을 언제나 푸념과 하소연과 고래술로 터뜨리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머니랑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인 ‘대학생’이 되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감옥이자 지옥인 곳을 더 참아내기로 하면서, 인천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골라서 붙었다.
대학교에 붙은 종이(합격통지서)를 받은 두 분은 눈물바람이었고, 나는 한숨바람이었다.
처음 보고 겪는 대학교는 애들 장난보다 못해 보였다. 길잡이책도 낱말책(네한사전)도 변변히 없이 이웃말(외국말)을 가르친 지 서른 해가 넘은 듯싶었다. 너털웃음이 나왔다. 한 해를 또 어거지로 버티는데, 이제 안 되겠다. “어머니, 대학교를 들어갔으니 됐죠? 한 해를 버텼으니 됐죠? 이제 그만둘게요.” “뭐? 졸업을 해야지! 어떻게 들어간 대학교인데!” “대학교라는 데는 그냥 허울이고 엉망이에요. 저는 고졸로 살려고 합니다.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면 됐잖아요?” “얘가 무슨 말을 해? 네가 그만두면 엄마가 얼마나 섭섭한지 아니? 너희 아버지는 되게 섭섭해할걸. 맨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으니 더 화를 낼거야. 넌 아버지 화를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니?”
대학교 2학년이던 때에 군대를 갔다. 둘레에서 나더러 미쳤다고 했다. 서울에서 이만한 대학교에 들어갔다면 군면제나 뒤로 빠지는 길이 수두록하다고 여기저기서 알려준다. 장학퀴즈 출신자 어느 윗내기는 “이 바보야. 우리 공장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그러며 알바비도 벌고 공부하며 졸업장을 따야지. 넌 왜 멍청하게 구니?” 하며 타박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더러 군대 가지 말고 아무튼 네 해를 참고 견뎌서 마치면, 나를 장학사로 넣을 수 있고, 장학사 아니어도 교육청에 자리 하나 마련해서 밀어넣으면 군생활 안 해도 된다고 버럭버러 윽박질렀다.
삶이란 뮐까? 대학교와 졸업장은 뭘까? 그냥 고졸이나 중졸이나 무학자이면 안 되나? 군대는 왜 빼야 하나? 서로 돈주고 돈받기로 어지러운 판이면, 민주나 정의나 교육하고는 다 동떨어진 불바다이지 않나? 온나라 곳곳이, 우리집과 또래와 둘레 모두 “또다른 전두환”이라고 느꼈다.
아버지하고 크게 두 판쯤 싸우고서 집을 나왔다. 아주 마땅히 대학교를 그만두었다. 1999년까지 새벽일꾼(신문배달부)으로 지냈고, 이해 여름에 펴냄터(출판사)에 책팔이(영업부)로 자리를 얻었다.
지난 2010년에 낸 작은 혼책(독립출판물)이 있다. 이 혼책은 내가 2007년부터 꾸리는 책마루숲(사전 짓는 책숲)을 돕는 이웃한테만 우편으로 부쳤다. 어러 이웃 가운데 경기문화재단에서 일한 분이 있다. 그분은 이제 정년퇴직을 했겠지. 그런데 그분은 그때 ‘함께살기 혼책’을 재단 책꽂이에 남겨두셨나 보다. 2025년에 비정규직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어느 분이 이 혼책을 보았고, 이 혼책을 쓰고 낸 사람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어찌저찌 알아보니, “최종규 씨가 아직 죽지 않았”고, “아직 죽지 않으셔서 만날 수 있어서 놀라워서, 경기 안양에서 부산으로 날아와서, 부산 〈책과 아이들〉에서 하는 수업을 꼭 듣고 싶었다”고 얘기한다.
빙그레 웃는다. 그렇구나. 나는 안 죽었구나. 안 죽고 멀쩡히 살아서 이렇게 새롭게 낱말책(국어사전)을 쓰고, 곁님하고 두 아이랑 시골살림을 짓는구나.
고등학생 적에 곁일(알바)을 하며 번 돈으로 바지 한 벌을 산 적 있다. 벌써 서른다섯 살 묵은 바지는 낡고 해졌다. 처음에는 긴바지였으나 기장을 잘라서 튿어진 데를 덧대고 손질하노라니 어느새 깡똥바지로 바뀌었다. 바지도 멀쩡하고 사람도 말짱하다. 하루하루 고맙게 삶길을 잇는다. 풀꽃나무를 곁에 두면서, 해바람비를 실컷 마시면서, 늘 파란노래로, 손수 가꾸고 나누면서. 2025.11.10.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