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책’은 다른 책


 일본이 독도를 일본땅으로 밝힌다고 한 일은 퍽 오래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언론에 뜰 때면 사람들이 크게 성을 내거나 목청을 돋운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한테 제대로 따졌다거나 앞으로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꾸짖었다는 이야기는 딱히 들은 적이 없다. 일본은 진작부터 정치에서뿐 아니라 교과서나 지도책에서 독도를 일본땅으로 적곤 했다. 한두 해 일이 아니라 쉰 해나 예순 해쯤 된 일이다. 젊은 일본사람뿐 아니라 나이든 일본사람이라면, 역사를 한결 깊이 들여다보면서 올바르게 깨우치자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여느 일본사람으로서는 독도라는 섬이 일본땅 아닌 한국땅이라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아니, 여느 일본사람이라면 독도 같은 섬이 일본땅인지 아닌지를 살피지도 않겠지.

 일본은 참 무서운 나라이다. 이와 맞물려 한국도 참 두려운 나라이다. 무서운 나라 옆에서 두려운 짓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나라일을 똑바로 하라고 뽑아서 비싼 일삯 주면서 일을 맡기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독도 말썽을 한결같이 들어야 할까.

 아이들 그림책을 살피다가 《꾸러기 곰돌이》(웅진출판사)가 눈에 뜨여 오랜만에 들여다본다. 1985년에 처음 나온 《꾸러기 곰돌이》하고 ‘다른 책’이라 하는 《꾸러기 깐돌이》(지경사)는 1988년에 한국말로 옮겨졌지 싶다. 일본에서는 1976년에 《ノンタン》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왔다. 지난 2009년에는 《개구쟁이 아치》(비룡소)라는 이름으로 《꾸러기 깐돌이》가 새로 나왔다. 《꾸러기 곰돌이》는 1996년을 끝으로 ‘웅진출판사(웅진닷컴)’에서는 더 펴내지 않은 듯하고, 1998년부터 ‘세상모든책’이라는 출판사에서 새롭게 내놓는데, 2005년에 새판을 찍는다.

 나는 우리 아이한테 어떤 그림책을 보여주어야 좋을까 생각해 본다. 《꾸러기 곰돌이》를 읽혀야 할까, 《꾸러기 깐돌이》를 읽혀야 할까, 《ノンタン》을 읽혀야 할까, 《개구쟁이 아치》를 읽혀야 할까. 《꾸러기 곰돌이》는 곰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세 가지 ‘다른 그림책’은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네 가지 그림책은 ‘다른 책’이면서 다른 책이 아니다. 네 가지 그림책을 내놓은 사람들은 다 다른 마음이었고,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사람들한테 다 다르게 팔리면서 다 다르게 사랑받는다. 일본에서 《ノンタン》은 28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아직도 널리 잘 팔린다니까, 어쩌면 30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할 만한지 모른다. 내가 가진 2003년 판 《ノンタン》 낱권책 하나는 300쇄를 훌쩍 넘는다. 내가 가진 《꾸러기 곰돌이》 1990년 판은 12쇄인데, 나중에 20쇄를 찍었다는 말을 들었으며, 더 찍었는지 모르고, 출판사를 옮기며 얼마나 더 찍었는지는 잘 모른다.

 한국사람이 먹는 웬만한 과자나 가공식품은 일본에서 나온 웬만한 과자나 가공식품을 베꼈거나 훔쳤다. 한국사람이 어린 날 읽던 숱한 만화는 일본 만화를 베끼거나 훔쳤다. 한국사람이 아이한테 읽히던 예전 그림책은 으레 일본 그림책을 베끼거나 훔쳤고, 요사이는 저작권삯을 치르며 일본에서 사서 옮긴다. 2011년이라는 오늘날, 아직 이 나라 한국에서는 ‘다른 책’이 다르다고 하면서 나온다.

 하기는, ‘새우깡’은 ‘캇빠세우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한국에서 ‘새우스넥’이 나왔을 때에 ‘새우스넥’은 베끼기(표절)라면서 판매중지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일본이 무섭고 한국이 두렵다. 일본사람이 ‘김치’를 ‘기무치’라고 팔아먹는다고 호들갑이지만, ‘초코파이’는 ‘엔젤파이’가 아니었던가. ‘초코파이’는 일본이고 중국이고 ‘초코파이’라는 이름으로 잘도 팔지 않는가. (4344.4.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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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끼 도룡뇽


 집식구가 다 함께 마실을 나선다. 새벽 여섯 시 오십 분에 읍내에서 나오는 첫 시골버스를 타려고 부산을 떨며 길을 나선다. 사람이나 자동차가 거의 안 다니는 우리 집 앞쪽 길을 걷는다. 비가 그치며 맑게 갠 길을 걷는다. 길바닥에 점점이 무언가 보인다. 버스 때를 놓칠까 봐 바지린히 걷다가 밑을 내려다본다. 개구리가 또 자동차에 밟혀 죽었나 하고 들여다보다가 뭔가 다른 생김새에 고개를 갸웃한다. 한 마리 두 마리 …… 열 마리 남짓 들여다본 때에 문득 깨닫는다. 이런, 도룡뇽이잖아?

 아직 조그마한 도룡뇽, 그러니까 도룡뇽 새끼들, 아니 새끼 도룡뇽들이 잔뜩 밟혀 죽었다. 자동차가 거의 안 다니는 이 시골길에서마저 이렇게도 많은 새끼 도룡뇽들이 차바퀴에 깔려 죽었다.

 자동차가 거의 안 다니는 시골 안쪽이기 때문에, 이 둘레 논자락에서 도룡뇽이 알을 깨겠지. 알을 깬 도룡뇽이 먹이나 물이나 보금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그 느리며 더디고 작은 걸음은 뜸하게 다니는 자동차라 하더라도 그예 납짝쿵이 되도록 밟힐밖에 없겠지.

 죽은 도룡뇽보다 산 도룡뇽이 많기를 비손한다. 아니, 몇 마리라도 살아남았으면 올 한 해 고이 지내면서 이듬해에 새 새기 도룡뇽이 태어나도록 둘레 논자락에 알을 풀겠지. 사람이 살아갈 터가 늘어나며 도룡뇽이 살아숨쉴 터는 더 줄어든다. 도룡뇽을 마주하기 힘드니 도룡뇽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고, 도룡뇽을 그림으로 그린다든지 도룡뇽을 노래한다든지 도룡뇽 한삶을 글로 적어 보려는 사람 또한 없다. (4344.4.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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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4.9. 

인천 중구 신포동. 

봄꽃을 피워 함께 나누는 시장골목 사람들 마음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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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파랑새 청소년문학 7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예령 옮김, 박형동 그림 / 파랑새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아이를 왜 학교에 보내는가
 [책읽기 삶읽기 49] 르 클레지오,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파랑새,2003)



 우리 집은 시골마을 멧골자락에 있습니다. 우리 살림집이 깃든 멧골자락 위쪽에는 멧골학교인 이오덕학교가 있습니아. 이 멧골학교 이오덕학교에서는 여섯 살 어린이부터 열네 살 푸름이까지 복닥복닥 어우러지면서 학교살이를 합니다. 올해로 네 살 난 우리 아이는 지난주부터 혼자서 집부터 학교까지 걸어 올라가 언니 오빠하고 놀곤 합니다.

 나와 옆지기는 우리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우리 아이를 학교에 넣을 마음이 없습니다. 어느 학교이든, 학교라는 데가 삶과 꿈과 사랑과 믿음을 배우거나 나눌 만한 터전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괜찮다 싶은 배움터는 ‘아이를 대학교에 넣을 생각이 없도록 맞춘 틀’에 따라 지식을 가르치는 곳에서 머뭅니다. 한국땅에서 대학교는 대학교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굳이 대학교에 갈 까닭이 없습니다. 한국땅에서 대학교가 대학교 노릇을 안 하는데 이런 곳에 큰돈을 들이면서까지 젊은 나날을 보내야 한다면, 아이들은 누구나 젊은 삶과 꿈과 사랑과 믿음을 어여삐 펼칠 수 없습니다.

 ‘88만 원 세대’이니 ‘한 해 등록금 천만 원’이니 하기 때문에 대학교가 말썽거리일 수 없습니다. 대학교는 이름 그대로 ‘큰 배움터’ 몫을 안 하니까 말썽거리입니다.

 학교라는 곳은 ‘배움터’입니다. ‘배우는(學) 터(校)’인 학교입니다. 애써 토박이말로 풀어서 써야 하는 이름 ‘배움터’가 아니라, 삶을 삶 그대로 또렷하게 바라보며 환하게 살펴야 하니까, 이름 그대로 곱씹는 배움터입니다.

 교과서 지식이든 책 지식이든, 온갖 지식을 머리에 넣는 일이 배움이나 가르침이 되지 않습니다. 밥하기 지식이란 밥하기 지식이지 밥하기 삶이 되지 않습니다. 지난날 ‘실과’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교과서로 지식을 외우도록 시켜서 시험문제 풀이를 하는 일이란 배움이나 가르침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그저 ‘시험’입니다. ‘입시’예요. 실과가 실과 노릇을 하자면, 아이들이 수업 때에 손수 밥을 하고 반찬을 하며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급식을 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밥때에 스스로 밥을 해야 합니다. 남이 해 주는 밥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을 아이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어린 아이라면 제 어버이나 다른 어른이 밥을 차려 주어야겠지요. 그렇지만 여느 학교에 들 나이라면, 적어도 설거지는 손수 해야 하며, 밥상을 스스로 차릴 줄 알아야 하고, 열 살 무렵이면 스스로 밥을 해야 합니다. 무상급식도 좋고 친환경무상급식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상급식이건 무슨무슨 급식이건, 급식은 교육, 곧 배움이나 가르침이 되지 않아요. 질서나 통제나 관리는 될 테지만, 배움이나 가르침이 될 수 없는 급식입니다. 아이들은 내가 먹는 밥이 누가 농사짓거나 길러서 내가 얻을 수 있으며, 이 먹을거리를 어떻게 손질하거나 다루어 고맙게 먹는가를 몸으로 부대끼며 깨우쳐야 합니다. 날마다 두세 끼니 먹는 밥을 차리느라 날마다 어느 만큼 품과 땀과 겨를을 들여야 하는가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밥을 차렸으니, 고맙게 밥을 먹습니다. 고맙게 밥을 먹었으니, 즐겁게 설거지를 합니다. 설거지를 마친 다음에는 밥을 먹은 곳을 치워야겠지요. 늘 옷을 입으며 살아가니까 내 옷을 내가 빨아야 합니다. 저녁이면 언제나 잠자리에 드니까 이부자리는 내가 개거나 마련하는 한편, 아침에 이불을 털거나 말리는 몫 또한 나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이불빨래 또한 아이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학교버스에 태우는 일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버스가 아닌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스스로 타며 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배우러 다니는 일이란, 집과 학교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러 다니는 일이 아닙니다. 내 살림집(보금자리)과 배움집(학교) 사이에 놓인 숱한 이웃과 마을과 자연을 두루 맞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가는 길’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학교 둘레나 집 둘레에는 ‘나쁜 가게나 시설이나 공장’이 있어서는 안 돼요. 우리 스스로 ‘나쁜 가게나 시설이나 공장’을 집이나 학교 둘레에 마련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처음부터 나쁜 가게나 시설이나 공장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공장이 없으면 물건을 어떻게 쓰느냐 할 텐데, 끔찍한 환경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쓰레기를 낳으며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물건을 안 쓰거나 적게 쓰면서 수수하고 예쁘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옳고 좋은 우리 터전입니다.


.. 밖을 내다보니 햇빛이 환했다. 몸을 조금 숙이자 한 조각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 륄라비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바위 틈에는 아무도 없었다. 륄라비는 계속 제 갈 길을 갔다. 바위를 기어오르고, 다시 내려가고, 갈라진 틈새를 뛰어넘고, 그렇게 해서 마침내 다다른 곶의 끝자락에서 륄라비가 발견한 것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고원과 그리스식 집 한 채였다 ..  (7, 31쪽)


 청소년문학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를 읽습니다. 르 클레지오 님이 쓴 청소년문학이라 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청소년 ‘륄라비’는 둘레 어른이나 동무 누구한테도 딱히 말하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은 륄라비는 학교에서 지냈더라면 느낄 수 없던 ‘눈부신 햇살’을 느낍니다. 학교에 머무는 동안 느낄 수 없는 ‘바다와 자연과 길’을 느낍니다.

 학교를 다니는 거의 모든 아이들은 ‘눈부신 햇살’을 비롯해서 구름이나 달이나 바람이나 흙이나 풀이나 꽃이나 나무나 개구리나 참새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거의 모든 아이들은 교과서와 문제집과 참고서만을 느끼며 맞아들여야 합니다. 교사와 칠판과 교과서만을 바라보아야 하고, 창밖을 바라본다든지, 졸려서 엎드려 잔다든지, 딴생각을 하느라 꿈결을 헤매는 일을 할 수 없는 학교입니다. 시험문제를 잘 풀어 등수가 높은 아이일 때에 사랑받는 학교요, 꿈과 마음씨가 아름답대서 사랑받는 학교가 아닙니다.


.. 차창을 닫은 신형 자동차 속 사람들의 표정이 자못 바빠 보인다 … 륄라비는 자신의 모든 눈으로 모든 곳을 바라보았다 … 륄라비는 먼지 때문에 눈을 반쯤 감고 성큼성큼 거리를 걸었다 ..  (14, 46, 74쪽)


 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돈을 법니다. 학교를 나와서 돈을 버는 일자리를 얻습니다. 학교를 나오며 돈벌이를 찾습니다.

 고마운 목숨을 얻어 태어난 아이들은 갓난쟁이와 어린이와 푸름이를 거쳐 젊은이로 무럭무럭 크는 동안 아름다움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믿음이라든지 나눔이라든지 꿈이라든지 느끼기 어렵습니다. 손수 흙을 일군다든지 맨발로 흙을 밟는다든지 싱그러운 봄바람과 차가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든지 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날에는 예닐곱 살부터 지식 외우기를 했다면, 오늘날에는 두어 살부터 지식 외우기를 하고, 아이들은 먼 뒷날 ‘돈을 얼마나 잘 많이 크게 벌어 돈을 얼마나 잘 많이 크게 쓰면서 물질문명을 누리는가’에 따라 길들여지기만 합니다.


.. 이곳엔 저 혼자뿐이지만, 전 아주 재미있게 놀고 있어요. 이제 학교엔 가지 않을래요. 이미 결심했으니 다 끝난 얘기예요.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 때문에 감오에 가게 된다고 해도요. 따지고 보면 감옥이 학교보다 나쁠 것도 없고요 … 륄라비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륄라비가 말했다. 고함을 지른 것도 아닌데, 교장은 마치 륄라비가 그러기라도 한 듯 매우 강경한 어조로 대응했다. “그 녀석 이름을 대라!” “전 사귀는 남자 친구 같은 거 없어요.” ..  (28, 85쪽)


 학교에 가지 않기로 했던 륄라비는 다시 학교에 갑니다. 다시 학교에 간 륄라비는 (아마 예전에도 비슷했으리라 느끼는데) 그닥 사랑받지 못합니다. 주어진 틀에 맞추어 주어진 지식을 얻으려 하지 않은 륄라비이기 때문입니다. 시키는 틀에 스스로를 맞추지 않은 륄라비는 어른들이 시키는 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삶도 사랑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제 삶을 일구는 길을 가르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이들이 저마다 아끼며 사랑하는 길 또한 가르치지 못합니다. 참사랑이든 짝사랑이든 풋사랑이든 무슨무슨 사랑이든, 사람이 살아가며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나날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그동안 어떤 학교를 왜 다녔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어떤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과서를 조금 더 훌륭하거나 예쁘거나 멋지거나 좋게 엮으면 학교교육이 나아질까요. 한 반 아이들 숫자를 더 줄여 교사 한 사람이 맡을 아이를 줄이면 학교교육이 좋아질까요. 교사들한테 달삯을 더 주고 자질구레한 행정서류를 줄이면 학교교육이 거듭날까요.

 교육노동자라 하는 교사는 얼마나 ‘교육 + 노동’을 사랑하는 길을 걷는지 궁금합니다. 교사 자리에 선 어른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말하거나 보여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교과서에 갇힌 지식을 넘어서며 내 삶을 스스로 일구며 사랑하는 길을 아이들하고 스스럼없이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청소년문학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학교에 가지 않기로 다짐했던 아이 륄라비가 한동안 학교 바깥에서 맴돌며 지낸 나날을 짤막하게 들려줍니다. 이러다가 학교로 돌아가 어른들한테서 시달리는 모습을 살짝 곁들입니다. 이러며 끝맺습니다. 더도 덜도 없습니다. 륄라비한테 삶이란 무엇일까요. 륄라비를 둘러싼 어버이와 교사 같은 어른한테 삶이란 무엇인가요.

 무언가 살포시 짚을 듯 말 듯하면서 끝내 아무런 실타래를 건드리지 못하며 마무리지은 청소년문학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어른들부터 그닥 재미나거나 신나게 살아가지 않기에, 아이들한테 재미나거나 신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어렵습니다. 어른들부터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나날을 북돋우지 않는데, 아이들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나날을 북돋우겠습니까. 지식과 학력에 따라 돈과 계급을 나누는 사회 틀거리에 그저 몸을 맞추는 어른들부터 아주 뻔한 굴레에 길들여졌는데, 아이들이 스스로 굴레를 풀거나 홀가분하게 날아오르기란 몹시 힘듭니다. 갑갑한 사회에 갑갑한 푸름이입니다. 답답한 학교에 답답한 소설입니다. (4344.4.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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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재우기


 새근새근 잠든 아이와 냠냠짭짭 밥먹는 아이를 바라볼 때에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낀다. 아침에 깨어나는 아이와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를 바라볼 때에 똑같이 어여쁘다고 느낀다. 아이는 제 어버이를 닮아 잠을 쫓으며 조금이라도 더 놀고파 하지 않을까 하고 느낀다. 제 어버이 되는 사람부터 온몸이 무너질 듯 고단한 나날이더라도 빈책을 펼치건 셈틀을 켜건 글조각 하나를 건사하려고 애쓰니까.

 하룻밤만 자고 돌아오는 인천마실은 몹시 힘들다. 시골집에서 새벽에 길을 나서며 서울로 들어선 다음에 전철을 여러 차례 갈아타고 인천으로 간다. 하루만에 이 길을 거꾸로 되짚으며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시골 버스역에서 시외버스를 마지막으로 내린 다음 택시를 타기로 한다. 아이도 힘들고 옆지기도 힘들다. 애 아버지 혼자 마실을 하고 돌아올 때에는 택시를 타는 일이 없다. 애 아버지는 몸이 아무리 고단해도 택시삯 1만 원을 아끼고 싶어서 시골버스를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기다리다가 꾸역꾸역 논둑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아이는 옆지기와 마찬가지로 몸이 참 고단하다. 그러나 쉽사리 잠들려 하지 않는다. 잠자리에 눕힌다. 잠자리에 눕히기까지 참 여러 차례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한다. 아이는 같은 말을 수없이 들은 끝에 겨우 눕는다. 그런데 오늘도 어김없이 기저귀를 차고 이불을 여미고 나서 다시금 “쉬 마려.” 하고 말한다. 쉬를 누고 누웠는데 이런다. 기저귀를 풀고 변기에 앉히면 쉬를 안 눈다. 나올 쉬가 없으니까. 쉬 마려운 느낌이 나니까 그럴까. 조금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럴까. 일부러 그럴까.

 잠들기 앞서 이것저것 다 챙기더라도 꼭 되풀이하도록 일을 곱으로 늘린다. 아버지는 머리가 터질 듯하다. 힘든데다가 지쳐서 눈이 무겁게 감기는데, 아이하고 자리에 함께 누워도 결리는 허리를 다시 펴며 일어서야 한다.

 왜 곱게 잠들지 않을까. 왜 곱게 잠자려 하지 않을까. 이러면 제 어버이가 뻔히 힘든 줄을 모를까. 이러는 동안 제 어버이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가를 못 느낄까.

 바깥일을 하느라 바쁜 오늘날 여느 어버이들은 이런 ‘아이 재우기’를 잘 모르거나 거의 못 느끼겠지. 바깥일을 하며 돈을 벌어 집안을 꾸린다는 거의 모든 웬만한 아버지 되는 이들은 이 같은 ‘아이 재우기’를 몸소 겪을 일이 드물 테지. 집에서 집일과 집살림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를 토닥토닥 얼른 재우지 못할 때에, 그러니까 아이가 더 놀려 하거나 칭얼거릴 때에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일까. 나는 내가 집일과 집살림에다가 아이키우기를 도맡지 않는 나날을 보내는 여느 남자였다면, ‘아이 재우기’를 얼마나 헤아리거나 느끼거나 살피거나 돌아볼 수 있었을까. 아니, 나부터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깊이 두루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아이는 참말 고단하고 졸리면서도 잠자리에서 여러 차례 뒤척인다. 아까 진작에 재웠으면 이렇게 여러모로 칭얼거리지 않았을 수 있다. 생각해 보니, 아이가 꽤 졸립다 할 적에 불을 끄고 다 함께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구나 싶다. 아이는 여러모로 같은 일을 되풀이 시키면서 ‘제 어버이가 겨우 잠이 들려 할’ 때에 “엄마, 손!”이나 “아빠, 손!”을 외친다. 손을 잡아 주며 잠이 다시 달아났다가 가까스로 다시 잠이 들려 할 때에, 몸을 이래저래 뒤척이며 잠이 제대로 못 들도록 한다. 누운 채 손을 잡고 자기 힘들어 손을 놓고 몸을 좀 돌리거나 허리를 만지려 하면 또 “엄마, 손!”이나 “아빠, 손!”을 외친다. 이런 실랑이를 삼십 분쯤은 한다.

 그래그래, 너는 예쁜 아기이고 착한 아기이지. 너는 고마운 아기이며 사랑스러운 아기이지. 아무쪼록 밤새 고운 꿈결을 누비면서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렴. (4344.4.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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