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를 말리는 마음

 


  멸치 말리기를 구경한다. 우리 네 식구를 자동차에 태워 고흥마실을 시켜 주는 분이 소록도 다리를 지나고 거금도 다리를 지난 다음, 금산면(거금) 금진마을에서 살짝 멈춘다. 거금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자리라 해서 살짝 멈추는데, 다리보다 다리 곁 작은 집에서 멸치를 삶아 햇볕에 말리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내 눈에 환하게 들어온다. 그동안 멸치는 많이 먹기는 했어도 멸치를 어떻게 말리는지 곁에서 지켜본 적은 없다. 바닷마을 아저씨는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이고 소금을 부은 다음 소금물에 멸치를 삶는단다. 그냥 말린다든지 소금물에 삶지 않고 말리면 멸치가 다 바스라진단다. 아저씨는 ‘값싼 중국 소금’을 안 쓰고 ‘비싼 무안 소금’을 쓴단다. 아저씨 스스로 멸치를 삶아서 먹어 볼 때에 맛이 다르니, 아무 소금이나 쓸 수 없겠지. 내다 팔기만 하는 멸치가 아니라, 집에서도 먹고 이웃한테도 주며 즐겁게 나눌 먹을거리로 여기니까,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소금을 찾아서 쓸 테지.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상큼하다. 바다는 파랗고 멸치는 반짝반짝 빛난다. 햇살은 보드랍고 햇볕은 따스하다. 바다에서 건져 막 삶아 말리는 멸치는 반들반들 어여삐 빛난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바다내음 사이사이 멸치내음이 섞인다. 큰아이가 멸치 하나 슬쩍 집어 입에 넣고는 살살 씹더니 “맛없어!” 하고는 아버지더러 먹으라고 내민다. 아버지가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다. 씹지 않아도 입에서 녹는다. 바다 한 모금 먹으며 파랗게 젖는다.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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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책읽기

 


  굳이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모든 이야기가 술술 흐르기에,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드러누워서, 잠결에, 한손에 과자나 술잔을 들고서, 밥을 먹는 동안,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텔레비전은 혼자서 온갖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줍니다. 귀만 열면 됩니다.


  이리하여, 텔레비전을 보면 볼수록 사람들은 생각을 차츰 잊는데, 나중에는 아예 ‘스스로 삶을 생각하기’를 잃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모두 들려준다고 여겨,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아예 모르거나 믿지 않아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만 알거나 믿어요. 텔레비전 바깥에서 흐르는 삶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들여다보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과 한몸이 되고 말아, 끝내 생각하는 힘이나 마음을 잊거나 잃은 사람이 되면, 책을 읽을 수 없겠지요. 어쩌다가 어떤 종이책 하나 손에 쥔다 하더라도, 생각주머니 없는 사람이 책을 손에 쥘 적에는 줄거리 훑기나 글자 살피기를 넘어서지 않아요. 책읽기란 ‘글쓴이 생각 읽기’인데, 글쓴이가 어떤 넋으로 책 하나를 온 슬기를 그러모아 엮었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하거나 살피지 못해요.

  ‘글쓴이 생각 읽기’인 책읽기이기에, 책읽기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는 길을 천천히 찾습니다. 생각을 스스로 북돋우면서 내 삶을 스스로 살찌우는 길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그런데 ‘생각을 읽는 책’이 아닌 ‘생각을 잊도록 하는 텔레비전’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면, ‘생각을 잊도록 하는 텔레비전’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면, 스스로 깊이 사랑하는 길하고 등을 지고, 스스로 넓게 꿈꾸는 자리하고 고개를 돌려요. 이제 ‘이야기를 엮는 사람’ 삶하고도 멀어집니다. 내 이웃과 동무가 엮는 이야기를 느끼지 못하고, 나 스스로 엮는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해요.


  텔레비전이 사람살이를 망가뜨리듯, 학교교육이 사람살이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배움뜻이라 한다면 사람살이를 북돋우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 학교교육은 아이들한테 ‘대학입시 지식조각’만 열두 해에 걸쳐 집어넣은 다음, 대학교 네 해 동안 ‘도시에서 회사원 되는 지식조각’을 새삼스레 집어넣어요. 곧, 지식조각만 머리에 그득 차는 바람에, ‘스스로 생각하며 일구는 삶’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다가는 그만 ‘내 마음기둥’이나 ‘내 마음밭’이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해요.


  생각이 죽는 사람은 마음이 죽고 사랑이 죽으며 꿈이 죽습니다. 생각이 죽는 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웃음이 죽고 기쁨이 죽으며 신(신나는 놀이)이 죽습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구릅니다. 남이 말하는 대로 듣습니다. 남이 보여주는 대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남’이란 ‘텔레비전’이거나 ‘손윗사람’이거나 ‘권력자’입니다. 생각이 사는 사람은 ‘내’가 마음속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가슴속에서 노래하는 꿈을 듣습니다.


  여러모로 말썽거리가 많아 ‘ㅈㅈㄷ신문 없애기’라든지 ‘방송 뜯어고치기’를 소리높여 외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신문을 없애거나 방송을 뜯어고친다 하더라도 말썽거리는 사라지지 않아요. 가장 큰 말썽거리는 바로 내 마음이거든요. 내 마음이 텔레비전 앞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내 눈길이 신문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해요. 내 마음은 내 삶이 베푸는 기운으로 살아야 해요. 내 눈길은 내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빛나야 해요.


  이것을 없애거나 저것을 몰아내지 않아도 돼요. 나 스스로 새 사람이 되고, 나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으며, 나 스스로 삶을 즐거이 누리면 돼요. 텃밭을 일구면 내 삶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뀌면 마을이 바뀌며, 마을이 바뀌면 나라가 바뀌어요. 내가 내 삶자리에서 내 삶을 아름답게 누리지 못하면, 마을도 나라도 다람쥐 쳇바퀴로 흐를 뿐이에요. 삶을 읽는 책을 느껴야 해요.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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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금도 매생밭 어린이

 


  매생이 홀씨를 받는 매생밭 한켠에서 뛰노는 어린이. 고흥 거금섬 한켠 마늘밭과 매생밭 사이를 걷는다. 아이는 바람을 안고 달린다. 아버지는 천천히 바람을 먹으며 걷는다. 걷는 아버지와 뛰는 아이. 아이는 언제나 달린다. 달리면서 훨훨 날고, 아이가 멈추어 서거나 천천히 거닐 적에는 아이 마음속에서 새로운 놀이가 몽실몽실 자라난다.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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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몽돌 놀이

 


  거금도 익금마을 몽돌밭에 간다. 어른 몸집보다 훨씬 큰 몽돌을 타고 넘으며 놀다가, 어느새 손바닥보다 작은 몽돌을 찾아 손에 쥐며 가볍게 던지면서 논다. 그런데 말야, 코앞에도 돌은 많은데 어쩜 커다란 바위 틈 작은 돌을 꺼내려 하니. 아이들이란 늘 이런가. 하기는, 나도 너만 하던 때에 너처럼 놀았으니까.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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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오월 이삭문고 1
윤정모 지음, 유승배 그림 / 산하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100] 윤정모, 《누나의 오월》(산하,2005)

 


- 책이름 : 누나의 오월
- 글 : 윤정모
- 펴낸곳 : 산하 (2005.5.2.)
- 책값 : 7000원

 


  우리는 권력을 가질 마음 없어요. 우리는 우리 마을 우리 보금자리에서 사랑을 보살피고 사랑을 나누며 사랑으로 웃고 싶어요.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이름값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무슨 대수인가요.


  나는 늘 바람을 마셔요. 골골샅샅 훑으며 저 먼 태평양 깊은 곳부터 불어서 우리 마을 숲을 지나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하는 바람을 마셔요. 햇살 머금은 바람을 마셔요. 풀내음 듬뿍 밴 햇살을 먹어요. 구름이 내려보내는 맑은 빗물을 마셔요. 멧새와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요.


  그런데, 나는 바람을 가지지 않아요. 햇살도 빗물도 풀내음도 노랫소리도 가지지 않아요. 바람은 누구한테나 바람이에요. 나도 마시고 이웃도 마시며 풀잎도 마셔요. 햇살은 누구한테나 햇살이에요. 온 고을 고루 내리쬐는 햇살이요, 시골뿐 아니라 도시로도 드리우는 햇살이에요.


  스스로 누리고 싶을 때에 누리는 바람이요 햇살이고 빗물이에요. 스스로 누리고 싶지 않으니까 누리지 못하는 바람이며 햇살이자 빗물이에요.


  생각해 보면, 손전화 기계는 없어도 돼요. 텔레비전을 왜 봐야 하나요. 신문을 굳이 읽을 까닭이 없어요. 인터넷은 안 켜도 돼요. 눈을 뜨고 바다를 바라봐요. 눈을 살며시 감고는 바람내음을 맡아요. 눈을 다시 뜨고 구름을 바라봐요. 다시 눈을 살며시 감고 햇살이 드리우며 나누어 주는 따순 기운을 온몸으로 느껴요.


.. 그 벌은 고문과도 같았다. 더욱이 우리는 로봇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생명인, 그러니까 10분만 움직이지 않아도 엉덩이에 곰팡이가 슬거나 이끼가 끼거나 땀띠가 돋아 버리는 딱 그 나이의 소년들이었다 ..  (11쪽)


  군대는 평화를 부르지 않아요. 군대는 전쟁을 불러요. 저쪽에서 군대를 만든대서 우리도 군대를 만들어야 평화를 지키지 않아요. 이쪽에서는 저쪽 때문에 군대를 만든다지만, 저쪽에서는 이쪽 때문에 군대를 만들어요. 북녘에 군대가 있으니까 남녘에 군대가 있어야 하지 않아요. 북녘에서는 남녘에 있는 군대를 탓하거든요. 서로서로 탓하면서 군대를 키워요. 서로서로 평화를 외치면서 정작 전쟁으로 나아가요.


  탱크가 평화를 지키는 적은 없어요. 잠수함이나 미사일이 평화를 이루는 적은 없어요. 평화는 낫과 호미와 쟁기가 지켜요. 평화는 따순 햇살 머금는 연필 한 자루가 지켜요. 평화는 맑은 바람 마시는 붓 한 자루가 지켜요. 평화는 바로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어린 손길로 어루만지는 손길로 빚어요.


  군인 아저씨도 군인 아줌마도 평화를 지켜 주지 않아요. 군인 아저씨도 군인 아줌마다 달삯쟁이 공무원이에요. 사내로 태어났기에 군대로 끌려간다면, 불쌍한 넋이에요. 군대로 끌려가서 살아남고 싶다며 똑같이 거친 말을 일삼거나 주먹을 휘두른다면, 똑같이 못난 전쟁질이에요.


  사랑은 사랑을 불러요. 주먹질은 주먹질을 불러요. 꿈은 꿈을 불러요. 돈쟁이는 돈쟁이를 불러요. 그러니까, 평화는 평화를 부르고, 권력은 권력을 불러요.


  권력하고 맞서 싸울 까닭이 없어요. 권력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아요. 봄햇살은 겨울눈을 녹여서 없애지 않아요. 봄햇살은 그저 흙에 깃든 씨앗을 불러서 깨울 뿐이에요. 봄햇살은 봄을 부를 뿐인데, 겨울눈은 어느새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흙으로 스며들고 하늘로 깃들어요. 평화는 전쟁을 몰아내거나 무너뜨리는 데에는 없어요. 평화는 전쟁이 스스로 녹아서 평화한테 한몸으로 스며들어 다시 태어나도록 할 때에 비로소 빛나요.


.. 맛이 기가 막혔다. 라면에 관한 한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서 최고다. 고추장까지 조금 풀어 넣은 라면은 내 입맛에 그만이었다. 내가 국물까지 비우자, 엄마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나냐?” 그럼, 엄마 손맛인데. 이런 대답을 해야 했을 텐데, 내 입에선 딴소리가 튀어나왔다. “다음 올 땐 자장면 사 줘.” “그려, 한가할 때 올라오면 그러더라고.” ..  (25쪽)


  밥 한 그릇 함께 먹어요. 이야기 한 자락 함께 나누어요. 책 한 권 돌려서 읽어요. 이부자리 서로 나누어 누워요.


  내가 마시는 물이 네가 마시는 물이에요. 내가 마시는 냇물은 저 멧골에서 솟아서 이렇게 흘러요. 내가 마시고 내려놓는 물방울 하나는 다시 냇물이 되어 내 동무들 마시는 물줄기로 이어져요.


  꼭지를 트니까 나오는 물은 없어요. 비가 내리고 냇물이 흐르며 바다가 움직이면서 물을 얻어요. 지구별이 아름답게 움직이면서 내 보금자리 한켠에도 맑은 물이 솟아요. 지구별이 어여삐 숨쉬면서 내 마을 샘가에서 맑은 물이 콸콸 솟아요.


  이맛살을 찡그리니 서로 이맛살을 찡그리는군요.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니 저마다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는군요.


  아이들 살살 다독이며 재워요. 코코 자는 아이들은 보드라운 어버이 손길을 느껴요. 어버이 손이 굵다든지 투박하다든지 거칠다든지 못생겼다든지 새까맣다든지 허여멀겋다든지 생각하지 않아요. 아 참 따스하구나 하고 느낄 뿐이에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은 다음, 이 사랑이 차근차근 깊고 넓게 커지면서 새로운 사랑꽃을 피워요.


.. 엄마는 조용조용 타일렀다. “아녀, 너도 이 에미에겐 금덩이여. 하지만 너는 벌써 익은 금덩이고, 기열이는 아직 덜 익은 금덩이잖냐. 그란께 그렇게 꼬집으면 멍이 더 깊이 들제.” 그 뒤 누나와 단둘이 살 때, 누나는 그때 일을 이렇게 되새겨 주었다. “익은 금덩이, 덜 익은 금덩이. 세상에 얼마나 듣기 좋고 또 그럴듯한 소리다냐? 그 말을 듣자 슬며시 반성이 되더란께. 안 그냐?” ..  (55∼56쪽)


  윤정모 님 푸른문학 《누나의 오월》(산하,2005)을 읽습니다. 누나는 어디에서나 누나입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기에 누나가 아니에요. 누나는 경상도 청도에서도 누나요, 강원도 횡성에서도 누나입니다. 1970년 4월에도 누나이고, 2010년 7월에도 누나예요.


  누나는 마음속으로 꿈을 키웁니다. 동생도 가슴속으로 사랑을 키웁니다. 누나는 푸른 들판을 바라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꿈을 가다듬습니다. 동생도 푸른 숲을 바라보고 파란 바다를 내다보면서 사랑을 키웁니다.


  가을날 막 베어 말리는 나락 한 알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놓아 보셔요. 나락 한 알에서 피어나는 가을냄새를 맡아 보셔요. 이윽고 나락 한 알 혀에 살며시 올려놓아요. 혀로 나랏맛을 느껴 보셔요. 가을이 짙게 밴 나락 한 알에는 봄과 여름을 지낸 기운이 서려요. 겨우내 볍씨로 곱게 잠들다가 봄부터 따순 흙땅으로 깃들어 햇살과 바람과 빗물을 먹고 자란 숨결을 느껴요.


  겨를 벗기지 않은 햇나락은 혀에서 살살 녹아요. 깨물지 않아도, 씹지 않아도, 햇나락은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아요.


  햇나락 먹으면서 생각해요. 먼먼 옛날 옛적 사람들은 굳이 불을 피워 밥을 짓지 않아도 나락을 먹으며 숨결을 이을 만했겠다고 생각해요. 더 맛나게 먹으려고 밥을 짓기도 했을 테지만, 모든 곡식은 열매 그대로 입안에서 녹는구나 싶어요.


.. “옴마, 우리 집 밥상!” 누나는 밥상 앞에 달려들어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만은 아닌 듯했다. 집에서 먹어 보는 밥상이 그처럼 그리웠던 모양이다. “우리 집 김치가 참말로 꿀맛이다, 꿀맛!” 엄마는 계란 부친 것도 슬며시 누나 밥그릇 옆으로 디밀었으나, 누나는 김치와 청국장만 정신없이 먹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엄마와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굶었으면 저럴까 싶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묵어라잉.” 그렇게 말해 놓고 엄마는 누른 밥을 긁어 왔다. 누나가 그 누른 밥까지 달게 먹고 있는데, 엄마가 물었다. “인제 다시는 안 나갈 거제?” ..  (85쪽)


  푸른문학 《누나의 오월》에 나오는 누나는 아무런 권력이 없습니다. 이른바 ‘어떠한 주먹힘도 돈힘도 말힘’도 없습니다. 다만, 누나는 꿈을 꿉니다. 스스로 살아가고픈 누리를 꿈꿉니다. 스스로 살아가며 빛내고픈 나라를 꿈꿉니다. 스스로 살아가며 빛낼 사랑을 펼칠 어여쁜 마을을 꿈꿉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군대를 키워 권력을 건사합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졸업장과 자격증을 거머쥐면서 강단과 교단과 법정과 병원에서 이름표를 가슴에 척 붙이고 다닙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경제를 부르짖고 문화를 노래하며 예술을 퍼뜨립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야구공 하나로 수십 억원을 번다고 외치고,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축구공 하나를 꿰매는 이웃나라 아이들 삶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웃나라 아이들이 축구공 꿰매는 삶’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권력자는 이 나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시달리면서 입시기계가 되고 마는가를 들여다보지 못해요.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 가슴에서 꿈이 자라지 못하는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해요. 이 나라 어른들 가슴에서 사랑이 싹트지 못하는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해요.


..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누나는 정말 선생님이 되었을까?” 누나는 그 말에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녀.” “왜?” “가난한 시골 사람들은 딸아이한텐 절대로 공부를 시키지 않은께.” “글믄 어째서 전에는 소를 몰고 나갔단가?” ..  (154쪽)


  누나가 바라는 한 가지는 꿈입니다. 누나를 바라보며 살아가던 동생이 바라는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는 일이 꿈이 아닙니다. 학교를 마치고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는 일이 사랑이 아닙니다.


  삶을 빛낼 때에 꿈입니다. 삶을 누릴 때에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권력을 가지고 싶으면 가지셔요. 권력을 갖고 여든 해 삶이나 아흔 해 삶을 지내 보셔요. 나는 꿈과 사랑을 품에 안고 백 해뿐 아니라 오백 해나 천 해를 즐거이 지낼게요. 내 몸뚱이가 삭아서 사라지더라도 내 넋은 즐거이 온 지구별과 뭇별 사이를 오가며 즐거니 지낼게요. 아니, 내 몸뚱이는 꿈과 사랑을 먹으면서 언제까지나 이어가리라 느껴요. 살결이 몸뚱이가 아니고 뼈가 몸뚱이가 아니거든요. 나는 언제나 나무 한 그루가 될 수 있고, 풀 한 포기가 될 수 있어요. 바람 한 가닥이 될 수 있어요. 햇살 한 조각이 될 수 있어요. 옷을 입는 몸만 몸이 아니에요. 저 잎사귀도 저 풀벌레도 저 멧새도 모두 내 몸이요 내 마음이에요.


  늦가을 들판을 거닐며 풀벌레 가느다란 노랫소리 들었어요. 이제 풀벌레 모두 고요히 잠들었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들판에는 아직 가느다랗게 울리는 풀벌레 노랫소리가 있어요. 아하, 삶을 누리는구나. 즐거이 삶을 누리는구나.


.. 마침내 면 보건소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경운기를 세우고 미친 듯이 보건소 문을 두드렸다. 눈을 비비고 나온 의사는 경운기 위에 누워 있는 누나를 살펴보더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새벽 첫닭이 울 무렵 누나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뒤였다. 경운기에서 옮겨 와 이불에 누이자, 누나는 별안간 아버지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하얀 박꽃처럼 오므려진 그 입술을 들썩이며 말했다. “아부지, 기열이는 꼭 공부시켜 줘요.” ..  (167쪽)


  1980년 5월 광주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보성이나 고흥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여수나 순천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대구나 부산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서울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꿈꾸거나 사랑했을까요. 권력을 무너뜨려 새 권력을 세우고자 했을까요.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했을까요.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했을까요.


  누군가는 군인이 쏜 총알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군인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죽으며, 누군가는 보안사에서 붙잡아서 남영동 지하실에서 두들겨패는 바람에 죽었어요. 누군가는 연좌제이니 무어니 하면서 피가 마르며 죽었고, 누군가는 땅을 빼앗기고 집을 빼앗기며 죽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살아가요.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텅 빈 머리로 살아가요. 누군가는 깊이 생각을 키우며 살아가요. 누군가는 1981년에 태어나고 1991년에 태어나면서 지난 발자국은 모르는 채 새로운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요.


  《누나의 오월》에 나오는 누나는 언뜻 보기에는 쓸쓸하게 죽은 듯해요. 그렇지만, 누나는 그토록 누나가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랑 어머니랑 아버지 곁에서 고요히 눈을 감아요. 가장 아늑한 품에서 가장 따사로운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아요.


  누나는 권력을 바라지 않았어요. 민주주의도 평화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요. 다문 하나 꿈을 바랐어요. 동생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꿈을 잊지 않기를 바랐어요. 언제나 꿈을 아끼면서 살아가기를 바랐어요. 곁에서 누나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은 누나가 품은 꿈을 비로소 느끼면서 스스로 품은 사랑이 꿈하고 만나 어떻게 얼크러지도록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천천히 생각해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그곳에 모이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 한사랑 한삶이리라 느껴요. 너희가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렴,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꿈과 사랑을 흐드러지게 꽃피울 테니까, 하는 한삶이에요.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푸른책 푸른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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