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책읽기

 


  굳이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모든 이야기가 술술 흐르기에,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드러누워서, 잠결에, 한손에 과자나 술잔을 들고서, 밥을 먹는 동안,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텔레비전은 혼자서 온갖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줍니다. 귀만 열면 됩니다.


  이리하여, 텔레비전을 보면 볼수록 사람들은 생각을 차츰 잊는데, 나중에는 아예 ‘스스로 삶을 생각하기’를 잃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모두 들려준다고 여겨,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아예 모르거나 믿지 않아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만 알거나 믿어요. 텔레비전 바깥에서 흐르는 삶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들여다보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과 한몸이 되고 말아, 끝내 생각하는 힘이나 마음을 잊거나 잃은 사람이 되면, 책을 읽을 수 없겠지요. 어쩌다가 어떤 종이책 하나 손에 쥔다 하더라도, 생각주머니 없는 사람이 책을 손에 쥘 적에는 줄거리 훑기나 글자 살피기를 넘어서지 않아요. 책읽기란 ‘글쓴이 생각 읽기’인데, 글쓴이가 어떤 넋으로 책 하나를 온 슬기를 그러모아 엮었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하거나 살피지 못해요.

  ‘글쓴이 생각 읽기’인 책읽기이기에, 책읽기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는 길을 천천히 찾습니다. 생각을 스스로 북돋우면서 내 삶을 스스로 살찌우는 길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그런데 ‘생각을 읽는 책’이 아닌 ‘생각을 잊도록 하는 텔레비전’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면, ‘생각을 잊도록 하는 텔레비전’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면, 스스로 깊이 사랑하는 길하고 등을 지고, 스스로 넓게 꿈꾸는 자리하고 고개를 돌려요. 이제 ‘이야기를 엮는 사람’ 삶하고도 멀어집니다. 내 이웃과 동무가 엮는 이야기를 느끼지 못하고, 나 스스로 엮는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해요.


  텔레비전이 사람살이를 망가뜨리듯, 학교교육이 사람살이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배움뜻이라 한다면 사람살이를 북돋우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 학교교육은 아이들한테 ‘대학입시 지식조각’만 열두 해에 걸쳐 집어넣은 다음, 대학교 네 해 동안 ‘도시에서 회사원 되는 지식조각’을 새삼스레 집어넣어요. 곧, 지식조각만 머리에 그득 차는 바람에, ‘스스로 생각하며 일구는 삶’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다가는 그만 ‘내 마음기둥’이나 ‘내 마음밭’이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해요.


  생각이 죽는 사람은 마음이 죽고 사랑이 죽으며 꿈이 죽습니다. 생각이 죽는 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웃음이 죽고 기쁨이 죽으며 신(신나는 놀이)이 죽습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구릅니다. 남이 말하는 대로 듣습니다. 남이 보여주는 대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남’이란 ‘텔레비전’이거나 ‘손윗사람’이거나 ‘권력자’입니다. 생각이 사는 사람은 ‘내’가 마음속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가슴속에서 노래하는 꿈을 듣습니다.


  여러모로 말썽거리가 많아 ‘ㅈㅈㄷ신문 없애기’라든지 ‘방송 뜯어고치기’를 소리높여 외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신문을 없애거나 방송을 뜯어고친다 하더라도 말썽거리는 사라지지 않아요. 가장 큰 말썽거리는 바로 내 마음이거든요. 내 마음이 텔레비전 앞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내 눈길이 신문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해요. 내 마음은 내 삶이 베푸는 기운으로 살아야 해요. 내 눈길은 내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빛나야 해요.


  이것을 없애거나 저것을 몰아내지 않아도 돼요. 나 스스로 새 사람이 되고, 나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으며, 나 스스로 삶을 즐거이 누리면 돼요. 텃밭을 일구면 내 삶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뀌면 마을이 바뀌며, 마을이 바뀌면 나라가 바뀌어요. 내가 내 삶자리에서 내 삶을 아름답게 누리지 못하면, 마을도 나라도 다람쥐 쳇바퀴로 흐를 뿐이에요. 삶을 읽는 책을 느껴야 해요.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