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12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00

 


서로 사랑하며 집을 일구는 사람
― 불새 12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2002.6.25./4500원

 


  공장을 세우는 사람은 공장을 세우려 하는 터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만들 물건을 도시로 쉽게 실어 날라서 더 빨리 더 많이 팔 수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립니다. 공장이 선 곳이 매연과 쓰레기 때문에 얼마나 어떻게 더러워지는가를 헤아리지 않아요.


  공장이 한 번 서면, 이 둘레에서는 냇물이나 샘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공장이 한 번 서면, 이 둘레에서는 바람 한 자락 홀가분하게 들이켜지 못합니다. 공장이 한 번 서면, 커다란 짐차가 끝없이 드나듭니다. 공장이 한 번 서면 기나긴 전깃줄이 커다란 송전탑에 달라붙어 들어섭니다.


  그런데 공장 한두 군데 아닌 공단이 들어서면, 이 공장터에 푸른 싹이 다시 트기까지 몹시 오래 걸려요. 미국 군대가 머물다 떠난 ‘주한미군 기지’ 터를 떠올려 봅니다. 주한미군이 떠났다는 자리는 숲으로 가꾸지 못하고, 논이나 밭으로 일구지 못합니다. 군부대가 있는 동안 더러워진 땅을 되살리자면 몹시 기나긴 해를 지내야 한다고 해요. 공장이 있던 터나 공장단지가 있던 터도 이와 같아요. 시멘트덩어리에 쓰레기덩어리가 들어선 자리는 모든 목숨을 죽입니다.


  공장이나 회사나 공공기관이 있어야 일자리가 있고, 일자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다고들 이야기하곤 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틀리지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올바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공장이 있거나 회사가 있기에 먹고살지 않아요. 사람들은 흙이 있기에 먹고살아요. 바람이 맑게 흐르고 물이 싱그러이 흐르기에 먹고살 수 있습니다. 햇볕이 따사로이 내려쬘 때에 먹고살 수 있어요. 나무가 푸른잎 한껏 벌리고, 들판이 누렇게 익을 때에 비로소 먹고살 수 있습니다.


  세무서 없어도 누구나 먹고삽니다. 법원이나 병원 없어도 누구나 먹고삽니다. 학교나 청와대 없어도 누구나 먹고살아요. 군대나 전쟁무기 없어도 누구나 먹고살지요.


  우리들이 즐거우며 아름다운 삶을 누리고 싶다면, 들과 숲과 바다와 냇물과 멧자락과 갯벌과 못이 골고루 있어야 합니다. 냇가에 시멘트로 둑을 쌓아야 먹고살 수 있지 않아요. 아파트를 세워야 먹고살 수 있지 않아요. 지하철이나 고속도로가 나야 먹고살 수 있지 않아요.

 

 


- “그래, 그렇게 가고 싶냐! 그렇게 가고 싶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 봐. 지옥이든 어디든 실컷 가라구! 너 같은 건 타이라 씨 놈들과 함께 죽어 버려!” (11쪽)
- “그렇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니까. 벤타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 “벤타가 그립긴 해요. 하지만, 이미 먼 옛날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31쪽)


  공장에서 만드는 가공식품이라 하더라도, 숲과 들이 있을 때에 밑감을 거두어 만들 수 있습니다. 숲과 들이 없고서야 가공식품 밑감인 밀가루이든 감자이든 설탕이든 소금이든 얻을 길이 없어요.


  숲은 대학교 졸업장으로 키우지 못합니다. 햇볕은 토플 점수로 살찌우지 못합니다. 들판은 권력이나 명예로 돌보지 못합니다. 바다와 냇물은 은행계좌로 살리지 못해요.


  무엇으로 살리거나 돌보거나 키우는 숲이거나 햇볕이거나 들판이거나 냇물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 때에 싱그럽게 빛날 숲이거나 햇볕이거나 들판이거나 냇물일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숲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정치를 이야기하고 경제를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우리 학교에서는 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학입학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를 놓고 참고서와 교과서에서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에서는 멧자락이나 냇물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연봉이 얼마이고, 신분이 어떠하며, 재산이 얼마인가 하는 대목만 들먹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늘 매한가지입니다. 도시 학교에서 숲을 말하지 않아요. 시골 학교에서조차 숲을 사랑하지 못해요. 도시 학교는 도시 학교대로 더 물질문명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시골 학교는 시골 학교대로 자꾸 도시 물질문명 꽁무니를 좇습니다.

 


- “난 요시나카의 적이 아닌데. 왜 내가 도망쳐야 하는 거지?” “그, 그래도 기소 요시나카는 포악하기 그지없는 자라 사람을 파리 죽이듯. 게다가 그 부하라는 자들은 냉혹하고 잔인한 무리랍니다.” “군대가 지나간 민가와 절은 완전히 쑥대밭이 됐어요.” “그건 아마 헛소문일 게다. 요시나카는 도성을 공격해 들어올 정도의 인물이야. 난 한 번 이야기를 나눠 보련다. 너희는 무섭냐? 도망치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28∼29쪽)
- “네가 정말 죽고 싶은 거냐, 묘운.” “그런 꿈 같은 걸 찾아다니는 짓은 그만두세요. 불로불사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바람일 뿐입니다. 생이 있기에 죽음이 있는 법.” (38쪽)


  서로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집을 일굽니다. 돈이 넉넉하기에 집을 일구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교사와 학생이 즐겁게 가르치며 배웁니다. 지식이 넉넉하기에 배움이나 가르침을 이루지 않아요. 서로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마을이 살아나고 나라가 살아납니다. 전쟁무기 잔뜩 만들어 군대를 키우거나 경찰을 늘린대서 평화를 지키거나 안보를 이루지 않아요.


  사랑이 없다면 중앙정부나 지자체는 덧없습니다. 공무원은 이웃을 사랑할 일꾼이지, 이웃을 부려먹거나 이웃 어깨를 밟고 올라서는 권위자가 아닙니다. 면장도 읍장도, 구청장도 시장도, 군수도 도지사도,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그야말로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을 할 정치꾼이지, 어떤 정책을 꾀할 정치꾼이 아니에요.


  아마, 적잖은 분들은 정치꾼이나 공무원이 ‘정책이 없어야 한다’는 대목에 고개를 갸우뚱하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은 ‘심부름을 해야’지, ‘스스로 정책을 만들’ 까닭이 없어요. 사람들한테 모자라거나 아쉬운 대목을 조곤조곤 이야기 듣고 알뜰살뜰 꾸리는 심부름을 할 정치꾼이나 공무원이에요. 새로 무슨 잔치를 마련하거나 어떤 시설을 지어야 하지 않아요. 야구장이나 축구장을 굳이 지을 까닭이 없어요. 들판이 축구장이나 야구장이에요. 숲이 배드민턴장이고, 냇물이 수영장이에요. 논둑과 멧골이 육상경기장입니다.


  돈을 들여 설계해서 돈을 들여 시멘트 퍼부어 지을 때에 경기장이 되지 않습니다. 마을마다 넓게 펼치는 마당이 운동장이요 경기장입니다. 농약과 풀약으로 더럽히지 않은 정갈한 숲이 쉼터이자 공원이요 놀이터입니다.


  한 마디로 간추리면, 공무원도 정치꾼도 스스로 흙을 일구어야 합니다. 스스로 제 먹을거리를 흙을 일구어 지으면서 심부름꾼 구실을 할 공무원이자 정치꾼이에요. 느긋하게 월급 챙기고 연금을 받을 쇠밥그릇이라면 공무원이랑 정치꾼은 모두 없애도 돼요. 사람들은 세금을 낼 까닭이 없고, 정부는 세금을 걷을 까닭이 없어요. 공무원과 정치꾼한테 돈을 주려고 세금을 거두는 일이란 부질없습니다. 전쟁무기를 만들거나 군대를 늘리려고 세금을 거두는 일이란 뜻없습니다. 대학입시로만 치닫는 초·중·고등학교를 지어 아이들한테 입시교육만 시키는데, 교육비라면서 세금을 거두는 일이란 값없습니다.


  어른은 누구나 스스로 삶을 일굴 줄 알아야 합니다.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누구나 어른과 함께 살아가며 삶을 물려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 아닌 밥을 배우고, 정보가 아닌 옷을 배우며, 돈이나 권력이나 이름값 아닌 집을 배울 수 있어야 해요.

 


- “얼마 안 있으면 추수철이라, 그렇게 급하게 갈 수는 없다고 했잖아, 대장.” “바보야! 전쟁은 농사와는 달라. 출병은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구.” “대장,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전쟁 체질이 아니야. 이번엔 그냥 남을게. 추수도 끝내야겠고.” (49쪽)
- “대장님, 전 천성적으로 못된 여자라 이 나이를 먹도록 한 번도 사람답게 살아 보지 못했어요. 그러다 벤타를 만나 이렇게 보통 여자의 행복을 느끼게 되었죠. 지금 벤타와 헤어지면 전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말 거예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저의 행복을 빼앗아 가지 말아 주세요!” “전쟁을 위헤서다.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럼 왜 전쟁을 하는 거야! 전쟁은 무사들이 멋대로 만든 거잖아!” “타이라 일족을 멸하기 위해서다. 타이라 일족을 멸망시켜야 우리의 시대가 오니까.” “거 봐! 무사가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벌이는 게 전쟁이잖아! 우리는 우리대로 행복이란 게 있다구!” (50∼51쪽)


  바람이 붑니다. 봄이라 봄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겨울이라 겨울바람이 붑니다. 봄에는 봄나물을 먹습니다. 겨울에는 가으내 갈무리한 곡식이나 나물을 먹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쓰다듬어 아이를 낳습니다. 사랑이 열매를 맺어 태어난 아이들은 사랑을 누리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이녁 어버이가 저희한테 했듯이 사랑을 새로 일구고 나누어 새 아이를 새 사랑으로 낳습니다.


  성교육은 없어도 됩니다. 왜냐하면, 성교육 아닌 ‘사랑삶’이어야 맞거든요. 성별과 성행위나 성기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지식은 그만둘 노릇이에요. 사랑을 보여주고 사랑을 나누며 사랑을 가르칠 노릇입니다. 가시내가 사내를 사랑하고, 사내가 가시내를 사랑합니다. 어른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어른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들짐승과 푸나무를 사랑하고, 들짐승과 푸나무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오직 사랑이 있을 때에, 사람삶이 빛나고 지구별이 환하며 온누리가 해맑을 수 있어요.


  봄볕을 누리면서, 겨울볕을 즐기면서, 여름내음 맡으면서, 가을내음 받아먹으면서, 천천히 천천히 삶을 생각합니다.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은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불새》(학산문화사,2002) 열두째 권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 “평생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이군. 사람을 죽이는 게 토끼나 들쥐를 잡는 것도 아니고 원. 그보다는 살려 주는 편이 빠르겠다. 물 좀 떠 와!” “적을 살려 주다니, 이건 규칙 위반이야!” “대장의 명령이다. 당장 물과 헝겊을 가져와!” (70쪽)
- “내가 적의 동정을 사게 된 걸 알면, 요시나카도 부끄러워 할 것이다.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편이 나아. 베어라.” “당신도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 기껏 치료해 줬는데 죽이면 아무 소용없잖아.” (72쪽)


  예나 이제나 전쟁을 일으키는 이는 권력자와 군인입니다. 흙을 일구는 여느 사람이 전쟁을 일으킨 일은 없어요. 권력자가 흙일꾼을 짓밟고 죽이며 들볶기에 흙일꾼이 낫이랑 쟁기를 들고 일어선 적은 있지요. 그러니까, 전쟁이 있다면 권력자와 군인 때문에 있어요. 적군 때문에 전쟁이 있은 적은 없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이는 이웃한 나쁜 나라가 아니에요. 전쟁은 바로 내 나라 권력자와 군인이 일으켜요. 이웃나라에서도 이웃나라 권력자와 군인이 전쟁을 일으켜요. 그런데 두 나라가 전쟁이 붙으면, 죽는 사람은 흙일꾼입니다. 권력자와 군인은 외려 안 죽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엉뚱하다 생각할 텐데, 전쟁터에서 군인이 죽지 왜 ‘흙일꾼(민간인)’이 죽느냐고 묻겠지요. 그러나, 전쟁터에서 죽는 ‘군인’은 바로 시골에서 끌려온 흙일꾼이에요. 전쟁에 미친 군인들, 그러니까 ‘군 간부’와 권력자들은 책상에 지도를 펼쳐 놓고 이래라 저래라 떠들며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이웃나라 땅을 빼앗든 내 나라 땅을 빼앗기든 아랑곳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 누가 죽고 살든 따지지 않아요. ‘군 간부’와 권력자 머릿속에는 군사전략이 있을 뿐이에요. 군사전략에 따라 치고받으며 ‘놀이(게임)’를 해대요.


- “이 근처 민가에 불을 붙여라. 7∼8채만 태워도 낮처럼 환할 거야.” “그건 안 돼, 대장.” “뭐야, 벤타.” “아무 상관없는 집을 태우다니, 그건 너무해. 우리 집도 무사가 불태워 버렸단 말이야.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어쩌라고!” “누구든 성가스럽게 굴면 모두 죽여버려. 전투에 방해만 될 뿐이니.” “뭐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끔찍한 짓을?” (115쪽)
- “당신들은 처음에는 사이좋게 서로 도와가며 살아갈 거예요. 하지만 결국 싸우다 서로를 죽이게 될 겁니다. 그게 숙명이에요.” “대체 왜?” “권력을 얻기 위해서요!” (235쪽)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서로 권력을 노리는 사람은 전쟁을 일으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마을을 일굽니다. 서로 돈을 바라는 사람은 경쟁을 일으킵니다.


  나는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아이들아, 우리 아이들아, 우리 어여쁜 아이들아, 너희는 사랑을 물려받기를 빈다. 너희와 살아가는 어버이인 나는 너희와 함께 사랑을 빛내고 싶다. 사랑을 길어올리고, 사랑을 품에 안으며, 사랑을 곱다시 퍼뜨리고 싶다.’


  구수한 밥 한 그릇에서 사랑이 샘솟습니다. 깨끔하게 빨아서 다린 옷 한 벌에서 사랑이 피어납니다. 정갈히 건사하며 돌보는 집에서 사랑이 싹틉니다. 목소리 곱게 가다듬어 노래를 부릅니다. 손길에 따순 마음 담아 아이들이랑 놀이를 즐깁니다. 멧새가 먹이 찾아 들판을 부산스레 날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구름 지나가는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그늘빛을 바라봅니다. 시골 밤하늘은 별과 달이 가득해서 환합니다. 삶은 바로 내 가슴속에서 자라납니다. 삶은 바로 내 가슴속 예쁜 빛줄기 모양으로 기다립니다. 오늘도 해가 지며 땅거미가 드리웁니다.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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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에 Historie 5
이와키 히토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199

 


서로 죽이고 죽는 삶에서
― 히스토리에 5
 이와아키 히토시 글·그림,오경화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2009.5.25./4500원

 


  마당에서 뭔가 우당탕 넘어지며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마침 내 곁 작은아이도 잠에서 깨며 웁니다. 얼마나 깊은 밤인가 어림합니다. 작은아이 기저귀를 만집니다. 살짝 촉촉합니다. 쉬를 누었구나.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풉니다. 새 바지를 입히고 새 기저귀를 댑니다. 기저귀가 안 젖었으면 쉬를 누일 만한데, 어제는 밤오줌을 잘 가렸으나 오늘은 기저귀에 그냥 누었습니다. 작은아이 스스로 기저귀에 쉬를 누며 밤잠을 깨면 으앙 하고 웁니다.


  여러 날 따스하더니 다시 추위가 찾아오는 듯합니다. 이제는 먼 옛말이라 하지만, 한겨레는 예부터 ‘사흘 춥고 나흘 따숩다’는 날씨를 누렸다고 합니다. 모진 겨울이라 하더라도 이레 가운데 사흘이 춥고 나흘이 따숩기에 긴긴 겨울을 날 수 있었다고 해요. 가만히 보면, 겨울이라서 늘 춥기만 하지 않아요. 여름이라서 늘 덥기만 하지 않아요. 후끈후끈 무덥기도 하지만, 시원시원 서늘하기도 합니다. 오들오들 춥기도 하지만, 포근포근 따사롭기도 해요.


  추위에는 잔뜩 옹크립니다. 추운 날이기에 서로 꼭 안고 지냅니다. 사람도 참새도 풀도 나무도 서로 가까이 살을 맞댑니다. 내 몸이 네 몸을 지키고, 네 몸으로 내 몸을 지킵니다. 추위가 한풀 꺾여 따스해지면 기지개를 켜며 돌아다닙니다. 따순 햇살 받으려고 봄꽃은 봉오리를 벌리고, 따순 햇볕 누리려고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하거나 이불널기를 합니다. 나무는 가지를 한껏 벌리고, 풀은 잎사귀를 푸르게 빛냅니다.


- “히에로뉴모스, 난 칼데아에 돌아오면 테레시라 마님, 어머닐 만나 두 가지 사실을 전해 드리려고 했어. 하나는 내가 비록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 후에도 전혀 불행하지 않았단 것. 곧 자유를 되찾아 평화로운 삶을 영위했고, 가난하지만 즐겁게 보낸 세월이었지. 그리고 지금 내 두 발로 걸어 고향 칼데아에도 돌아왔다고. 또 하나는, 그 헤어지던 날 ‘이제까지 잘도 속였겠다’라며 소리쳤던 것. 그걸 사죄하고 싶었어.” (21∼22쪽)
- “여기엔 뭐하러 돌아온 거냐?” “‘뭐 하러’라니. 여긴 내 고향인데. 그래도 뭐 볼일은 거의 다 봤어. 이제 마케도니아인들 사일 뚫고 나가는 일만 남았지.” “보복하러 온 거 아냐?” “보복? 내가? 누구한테? 뭐 때문에?” (46∼47쪽)


  내가 살기에 네가 살아가는 누리입니다. 네가 살며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누리입니다. 내가 죽으면 네가 살기 좋은 누리가 아닙니다. 네가 죽을 때에 내 살림이 나아지는 누리가 아닙니다.


  서로 어깨동무하는 누리입니다. 들짐승도 들풀도 들사람도 서로 돕고 얼크러지며 살아가는 누리입니다. 들짐승은 저희만 살겠다고 숲을 짓밟지 않습니다. 들풀은 저희만 살겠다며 숲을 저희 씨로 뒤덮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만큼은 저희끼리, 사람끼리만 살겠다며 숲을 짓밟습니다. 숲을 무너뜨리고 숲을 망가뜨리며 숲을 부수고야 맙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서로 이웃이 되기보다는 저 홀로 살아남으려는 뜻으로 이웃마을을 넘보곤 합니다. 내 마을에는 내 보금자리 곁으로 고속도로 지나가도록 하는 도시는 없지만, 시골마을 한복판으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요. 시골 숲자락과 멧자락 한복판에 고속도로를 놓는다며 구멍을 숭숭 뚫어요. 발전소를 도시 변두리나 시골 한복판에 지은 다음, 도시와 읍내로 전기를 보내려고 우람한 송전탑을 논이며 밭이며 살림집 옆이며 잔뜩 세워요.


  사람은 들짐승 삶터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은 푸나무 삶터를 무너뜨립니다. 사람은 이웃사람 삶터를 부숩니다.


  문득 돌아보면, 사람은 스스로 사람인 줄 잊었구나 싶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운 숨결인 줄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빛낼 넋이 어떠한가를 못 깨닫는구나 싶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이요, 물을 마시는 사람이며, 바람을 들이켜는 사람입니다. 밥·물·바람이 없으면 어느 사람이고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 스스로 밥이 더러워지도록 흙을 더럽힙니다. 물이 더러워지도록 온 땅에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퍼붓습니다. 바람이 더러워지도록 자동차를 끝없이 만들어 굴리고, 공장을 수없이 짓습니다.


- “하나만 물어 봐도 될까?” “뭔데?” “카론은 장래의 꿈이 뭐야?” “무슨 소리야? 노예한테 뭔 장래의 꿈? 나 참 어이없어서.” (31쪽)
- “그럼 된 거야. 히에로뉴모스, 무리할 것 없어. 사람들은 저마다 석연치 않은 뭔가를 몇 개씩 끌어안고 살고 있지. 그게 정상이야. 마음에 상처가 있어도 즐겁게 살 수 있어.” (94쪽)


  오늘날 지구별은 서로 죽이고 스스로 죽는 삶터로구나 싶어요.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서로 죽이면서 스스로 죽는 쳇바퀴와 같구나 싶어요. 그러나, 이 슬픈 굴레를 깨달으려 하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쳇바퀴이니까 쳇바퀴에 올라타야 살아남을 수 있는 줄 잘못 알아요. 쳇바퀴이니까 쳇바퀴에서 벗어나야 살아남을 텐데, 외려 서로서로 쳇바퀴에 올라타려고 아웅다웅 다퉈요. 쳇바퀴에서조차 서로 돕지 않아요. 쳇바퀴에서 밀려나면 죽는 줄 생각해요.


  값비싼 아파트를 건사한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값비싼 자가용을 간수한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대학졸업장이나 여러 자격증이나 토플점수 뽐낸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삶은 삶입니다. ‘살아가기’이지 ‘살아남기’가 아닙니다. 이웃하고 등지거나 동무하고 고개 돌린 채 홀로 살아남으려 한다면, 스스로 죽고 맙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면서 동무하고 손을 맞잡을 때에 비로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은 삶일 뿐, ‘겨룸(경쟁)’이 아닙니다. 삶은 삶이지, ‘다툼(전쟁)’이 아닙니다. 겨뤄서 등수를 매긴들 무슨 뜻이 있나요. 다투거나 싸워서 누군가 이긴들 무슨 보람이 있나요.


  등수를 매긴다면, 등수 높은 사람이 등수 낮은 사람을 돌보라는 뜻입니다. 다투거나 싸운다면,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을 보살피라는 뜻입니다.


  힘은 힘이 센 사람이 힘이 여린 사람을 보듬으라는 힘입니다. 슬기란 슬기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품에 따사롭게 안으라는 슬기입니다. 돈은 돈이 있는 사람이 돈이 없는 사람하고 나누라는 돈입니다. 집은 집이 있는 사람이 집이 없는 사람하고 나란히 지내라는 집입니다.


  함께 하는 삶이고, 함께 누리는 삶입니다. 함께 즐기는 삶이고, 함께 빛내는 삶입니다. 서로 사랑하기에 스스로 사랑할 수 있어요. 서로 죽이려 할 때에는 스스로 죽고 말지만, 서로 아끼려 하기에 스스로 아끼면서 환하게 웃어요. 서로 따순 손길 내밀며 어깨동무하기에, 서로 맑은 눈빛으로 만나 두레를 이룹니다.


- “성벽 바깥 세계는 다양한 변화가 넘쳐나 재미있어. 하지만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지. 넌 괜히 무리해서 성벽 밖으로 나갈 필요 없다고 생각해. 잘 있어, 형.” (103쪽)


  이와아키 히토시 님 만화책 《히스토리에》(서울문화사,2009) 다섯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천 해쯤, 또는 이천 해쯤, 어쩌면 삼천 해나 사천 해쯤 앞서까지도 적잖은 권력자는 삶 아닌 죽음을 생각했구나 싶습니다. 삶을 함께 누리자고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이녁이 권력을 누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구나 싶어요.


  돈을 생각한다면, 지식을 생각한다면, 학력이나 무슨무슨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그저 스스로 무너질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생각하고, 꿈을 생각하며, 믿음을 생각할 때에는, 그예 스스로 싱그러이 빛나면서 산뜻하게 거듭날 수 있어요.


  나 스스로 죽을 까닭 없듯이, 내 이웃이나 동무 또한 죽을 까닭 없습니다. 내가 아는 이웃이건 내가 모르는 이웃이건, 서로 아끼며 돌볼 때에 즐겁습니다. 내 곁 사람들이건 나하고 한참 먼 데 있는 사람들이건, 서로 사랑하며 보살필 때에 기쁩니다.


  한국이든 모잠비크이든, 네덜란드이든 에콰도르이든, 캐나다이든 라오스이든, 저마다 고운 삶 누리면서 고운 빛 나눌 때에 이 지구별이 환하게 빛나요.


- “아군 1만 명의 군사들 중 3천이 죽었다고 치자? 그럼 난, 왠지 그 3천 중에 용감무쌍한 네 목이 들어 있을 것 같거든? 반면, 에우메네스 군 1만 명 중 9천을 친다 해도, 그 안에 녀석의 목은 없을 거다.” (126쪽)


  만화책 《히스토리에》는 죽이고 죽는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줄거리로는 ‘죽이고 죽는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할 테지만,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도 어느 누구도, 죽음 아닌 삶을 누리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려 합니다.


  생각하면 돼요. 죽음 아닌 삶을 생각하면 돼요. 미움 아닌 웃음을 생각하면 돼요. 돈·이름·힘 아닌 꿈·사랑·빛을 생각하면 돼요. 어깨동무를 하면 되고, 품앗이를 하면 돼요. 두레를 하면 되고, 울력을 하면 돼요. 스스로 보금자리를 예쁘게 일구고, 아이들과 까르르 웃음꽃 노래꽃 이야기꽃 흐드러지게 피우면 돼요.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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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에 나왔다고 하는데, 2012년 12월에 왜 품절일까 궁금하다. 벌써 다 팔리고 더 안 찍을까. 아니면 뭔 문제가 있을까. 이와아키 히토시 님 작품이 한국에 몇 권 번역되지 않았는데, 부디 이 책이 다시 나오기를 빌고, 다른 책들이 사랑스레 번역되기를 빈다.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유레카 Heureka- 단편
히토시 이와아키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2년 7월
5,000원 → 4,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원(5% 적립)
2012년 12월 1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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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7] 아이읽기
― 아이와 할 수 있는 숱한 일놀이

 


  아이들은 즐겁게 웃으며 놉니다. 뛰놀다 넘어진대서 아이들이 우는 일은 없습니다. 아프다고 울지는 않거든요.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며 근심과 걱정에 휩싸인 어른들이 ‘어머나!’라든지 ‘어떡해!’ 하며 낯빛이 달라지니까, ‘아하, 울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끼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이가 넘어지거나 말거나, 피가 나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면서 “그래, 넘어졌네. 괜찮아. 무릎한테 괜찮다고 말하렴.” 하고 이야기하면 아이는 안 웁니다. “아프겠네. 아프겠구나. 그래, 아픈 데는 곧 나아. 자, 손가락아 얼른 나으렴.” 이렇게 말하면 아이도 따라서 말하면서 어느새 손가락 아픈 줄 잊습니다. 그러고는 아픈 손가락이 어느새 나아요.


  날마다 하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집일을 하고 글쓰기를 하느라 자칫 잊거나 힘들다며 ‘아이랑 글씨 쓰기’하고 ‘아이랑 그림 그리기’를 넘어가곤 합니다. ‘아이랑 숲마실 하기’도 곧잘 넘어가곤 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저희끼리 놀이를 생각해 내고, 저희 나름대로 다투거나 사이좋게 얼크러지면서 놀이를 즐깁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보살피며, 아이들과 부대낍니다. 아이랑 함께 글씨를 써 보거나 그림을 그려 보면, 이 아이가 날마다 새로운 손길과 눈썰미로 새 모습을 빚는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아마, 학교 교사라면 ‘여러 아이들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낄 테지요. 이 보람이 있기에 고된 공무원 노릇을 견딜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합니다. 교사가 학교에서 느끼는 보람이란, 따지고 보면 모든 어버이가 여느 보금자리에서 늘 누려야 하던 모습 아닌가 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을 때에 여러모로 도움돈을 줍니다. 2012년 12월에 새 대통령 뽑히고 2013년이 되면 서울을 비롯한 크고작은 도시마다 ‘어린이 보육시설’이 부쩍 늘어나리라 봅니다. 맞벌이 집안을 헤아리는 보육시설이 늘고, ‘전일제’로 아이를 맡는다는 곳도 늘어난다고 해요. 이른바 ‘보건 복지’와 ‘교육 문화’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보육시설’이 늘어나는데요, 나는 이 대목이 여러모로 못마땅합니다. 제대로 된 보건 복지요 교육 문화라 한다면, 어버이들이 ‘돈을 벌러 회사에 나가거나 가게를 지키는 품’을 줄이도록 해 주어야 옳기 때문입니다. 맞벌이 집안이라 아이들을 ‘전일제’로 늦게까지 보육 시설에 두는 일이 즐거울까요. 아이를 둔 어버이라면 회사에서 ‘일을 더 적게 해도 되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올바르지 않을까요. 보육 시설을 늘려야 할 노릇이 아니라, ‘회사 정규직을 더 늘려’서, ‘아이 둔 어버이가 다른 일꾼보다 조금 더 일을 마친 다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아이 어버이가 적게 맡은 일 몫’만큼 다른 사람이 ‘일을 나누어 하도록’ 할 때에 일자리가 저절로 느는 한편, 굳이 어떤 돈을 더 들여 시설을 만들지 않아도 한결 적은 돈과 품으로 ‘복지’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사나 가게에서 일을 조금 더 적게 할 수 있는 어버이는, 더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하고 어울릴 수 있어요.


  아이를 돌보거나 가르치는 몫은 바로 어버이가 맡아야 올바릅니다. 어버이가 회사일이나 가게일로 바쁘다고 하니까,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보육 시설을 마련하기는 합니다만, 교사에 앞서 어버이예요. 어버이는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돌보는 몫에다가, 아이를 가르치고 사랑하고 아끼고 북돋우는 몫을 맡습니다. 왜냐하면, 어버이잖아요. 이리하여, 교사란 지식과 정보를 아이 나이(발달 높낮이)에 맞추어 가르치는 일꾼이 아닙니다. 교사란,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이자, 아이 삶을 곁에서 지키고 보살피는 어버이입니다. 어른이면서 어버이 구실을 할 교사이지, 지식과 정보를 건네는 일꾼 구실을 할 교사는 아니에요. 지식과 정보를 건네는 노릇은 ‘책’으로 넉넉해요. 그러나, 책이라 하더라도 지식과 정보를 쌓으려고 읽힐 때에는 빛이 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살찌우고 생각을 이끄는 구실을 할 때에 책은 책답게 빛이 나요.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어른 또한 날마다 자랍니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어른도 몸과 마음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나는 첫째 아이를 2008년 8월 16일에 낳은 뒤, 하루 서너 시간 느긋하게 잠든 적이 없습니다. 첫째 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까지 밤마다 한두 시간에 한 차례씩 깨어 기저귀를 갈고 밤오줌 누이는 한편, 칭얼대는 아이 다독이며 지냈어요. 첫째 아이가 세 살을 지나 네 살이 될 무렵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제 좀 밤잠을 자 볼까 싶던 삶’이 더 짧아졌어요. 두 아이를 나란히 보듬어야 하니까요. 아이가 하나일 적에는 아이가 낮에 곯아떨어질 때에 곁에 나란히 누워 숨을 돌릴 만했지만, 아이가 둘이다 보니, 두 아이가 나란히 곯아떨어져 낮잠 자는 일은 거의 없어요. 하나가 잘 놀다 곯아떨어진다 해도, 다른 아이는 기운차게 놀아요. 다른 아이가 졸린 낌새 가득해서 살살 달래며 재우면, 그동안 자던 아이가 깨어나 기운차게 뛰놀려고 해요.


  그런데, 이렇게 두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를 보내고 보면, 나로서는 여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하지 못한 대목을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두 아이와 지내며 아이 어르거나 달래거나 보듬는 마음길과 손길을 새롭게 다스립니다. 어린이노래를 새삼스레 다시 부르고, 어린이책을 새삼스레 다시 읽습니다. 어린이 눈길이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되짚습니다. 내 옷가지와 옆지기 옷가지 손빨래에다가 두 아이 옷가지 손빨래를 하며 내 손가락이랑 손바닥이랑 손목이랑 팔뚝이랑 등허리 모두 한결 튼튼하게 거듭납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니니 내 허벅지와 어깨는 더 튼튼하게 거듭납니다. 두 아이 먹을 밥을 날마다 새롭게 차리자니, 내 밥솜씨는 부쩍 늘어납니다. 두 아이가 졸리면 안고 업고 보듬고 해야 하니, 내 팔힘이나 어깨힘도 남달리 씩씩해지곤 합니다.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 자라요. 어른은 어른 깜냥껏 새로 태어나요.


  아이와 함께 해바라기나 별바라기나 꽃바라기를 합니다. 아이와 함께 숲길을 거닙니다. 아이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들길을 걷습니다. 아이 눈길을 생각합니다. 내 눈길은 무엇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숱한 일놀이를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다닐 만하지 않은 데라면, 어른인 나부터 다닐 만하지 않다고 깨닫습니다. 아이한테 보여줄 만하지 않은 만화나 영화라 할 때에도, 어른인 내가 얼마나 볼 만한 만화나 영화인가 하고 깨우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수많은 어버이들은 아이하고 더 오래 지내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즐거이 더 오래 지내지 못하니까, 정작 ‘당신 아이’가 얼마나 넓고 깊으며 따사로운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이를 일찍부터 보육 시설에 집어넣기 때문에, 아이와 당신이 누릴 아름다운 삶을 잃거나 빼앗깁니다. 참다운 복지일 때에는 ‘어버이가 회사나 가게에 덜 얽매이고 돈벌이에 덜 붙들리도록’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다운 교육일 때에는 ‘어버이가 아이와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즐거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육 시설은 없어도 돼요. 보육 시설은 아예 없어도 돼요.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아이 낳은 집안마다 ‘아이 살림돈’을 맞돈으로 도와주면 돼요. 보육 시설 없으면 걱정된다고요? 하나도 걱정스럽지 않아요. ‘아이 품앗이’를 짜면 되거든요. 이웃 여러 집하고 품앗이를 짜서, 아이를 따로 맡겨야 할 때에는 아이들끼리 ‘어느 이웃 한 집’에 모여 즐거이 뛰놀도록 하면 돼요. ‘공동육아’라고도 할 텐데, 시설이 아닌 보금자리(살림집)를 누려야 할 아이요 어른이에요. 시설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한글을 더 일찍 가르치지 않아도 돼요. 아이는 마음껏 놀아야 아이예요.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는 아이하고 신나게 놀면서 스스로 몸을 쉬고 마음을 다스릴 때에 삶을 넉넉히 일굴 수 있어요.


  아이 눈빛을 맑게 읽어요. 아이 마음을 슬기롭게 읽어요. 아이 사랑을 따숩게 읽어요. 아이 꿈과 이야기를 기쁘게 읽어요.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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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림 읽기
2012.12.16. 큰아이―모자 쓴 애


  밤이 깊으나 두 아이 모두 잘 낌새가 없다. 이래서는 안 될 노릇이지 하고 생각하며 그림종이를 꺼낸다. 두 아이한테 하나씩 주고 나도 하나를 맡아 그림을 그린다. 큰아이가 “아버지, 벼리하고 보라하고 어머니하고 그려 줘.” 하고 말한다. “벼리는 벼리가 그리고 싶은 모습을 그려. 아버지는 아버지 그리고 싶은 모습을 그릴게.” 그래도 나더러 제 모습을 그려 달라 하기에 누워서 슥슥 삭삭 그린다. 이렇게 아이 모습을 그리면서 “그럼 벼리도 아버지 모습을 그려 주렴.” 하고 말하니, 아버지 얼굴이라며 머리카락까지 까맣게 그려 준다. 그러고는 이제껏 그린 적 없는 사람 얼굴에 몸통 붙인 모양을 그린다. 뭘까. “무슨 그림이니?” “응, 모자 쓴 애야. 애.” 모자 쓴 애를 어디에서 봤을까.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보았으니 그렸겠지. 그러고는 모자 쓴 애 곁에 다른 ‘애 동무’를 잔뜩 그린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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