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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에 Historie 5
이와키 히토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만화책 즐겨읽기 199
서로 죽이고 죽는 삶에서
― 히스토리에 5
이와아키 히토시 글·그림,오경화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2009.5.25./4500원
마당에서 뭔가 우당탕 넘어지며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마침 내 곁 작은아이도 잠에서 깨며 웁니다. 얼마나 깊은 밤인가 어림합니다. 작은아이 기저귀를 만집니다. 살짝 촉촉합니다. 쉬를 누었구나.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풉니다. 새 바지를 입히고 새 기저귀를 댑니다. 기저귀가 안 젖었으면 쉬를 누일 만한데, 어제는 밤오줌을 잘 가렸으나 오늘은 기저귀에 그냥 누었습니다. 작은아이 스스로 기저귀에 쉬를 누며 밤잠을 깨면 으앙 하고 웁니다.
여러 날 따스하더니 다시 추위가 찾아오는 듯합니다. 이제는 먼 옛말이라 하지만, 한겨레는 예부터 ‘사흘 춥고 나흘 따숩다’는 날씨를 누렸다고 합니다. 모진 겨울이라 하더라도 이레 가운데 사흘이 춥고 나흘이 따숩기에 긴긴 겨울을 날 수 있었다고 해요. 가만히 보면, 겨울이라서 늘 춥기만 하지 않아요. 여름이라서 늘 덥기만 하지 않아요. 후끈후끈 무덥기도 하지만, 시원시원 서늘하기도 합니다. 오들오들 춥기도 하지만, 포근포근 따사롭기도 해요.
추위에는 잔뜩 옹크립니다. 추운 날이기에 서로 꼭 안고 지냅니다. 사람도 참새도 풀도 나무도 서로 가까이 살을 맞댑니다. 내 몸이 네 몸을 지키고, 네 몸으로 내 몸을 지킵니다. 추위가 한풀 꺾여 따스해지면 기지개를 켜며 돌아다닙니다. 따순 햇살 받으려고 봄꽃은 봉오리를 벌리고, 따순 햇볕 누리려고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하거나 이불널기를 합니다. 나무는 가지를 한껏 벌리고, 풀은 잎사귀를 푸르게 빛냅니다.
- “히에로뉴모스, 난 칼데아에 돌아오면 테레시라 마님, 어머닐 만나 두 가지 사실을 전해 드리려고 했어. 하나는 내가 비록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 후에도 전혀 불행하지 않았단 것. 곧 자유를 되찾아 평화로운 삶을 영위했고, 가난하지만 즐겁게 보낸 세월이었지. 그리고 지금 내 두 발로 걸어 고향 칼데아에도 돌아왔다고. 또 하나는, 그 헤어지던 날 ‘이제까지 잘도 속였겠다’라며 소리쳤던 것. 그걸 사죄하고 싶었어.” (21∼22쪽)
- “여기엔 뭐하러 돌아온 거냐?” “‘뭐 하러’라니. 여긴 내 고향인데. 그래도 뭐 볼일은 거의 다 봤어. 이제 마케도니아인들 사일 뚫고 나가는 일만 남았지.” “보복하러 온 거 아냐?” “보복? 내가? 누구한테? 뭐 때문에?” (46∼47쪽)
내가 살기에 네가 살아가는 누리입니다. 네가 살며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누리입니다. 내가 죽으면 네가 살기 좋은 누리가 아닙니다. 네가 죽을 때에 내 살림이 나아지는 누리가 아닙니다.
서로 어깨동무하는 누리입니다. 들짐승도 들풀도 들사람도 서로 돕고 얼크러지며 살아가는 누리입니다. 들짐승은 저희만 살겠다고 숲을 짓밟지 않습니다. 들풀은 저희만 살겠다며 숲을 저희 씨로 뒤덮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만큼은 저희끼리, 사람끼리만 살겠다며 숲을 짓밟습니다. 숲을 무너뜨리고 숲을 망가뜨리며 숲을 부수고야 맙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서로 이웃이 되기보다는 저 홀로 살아남으려는 뜻으로 이웃마을을 넘보곤 합니다. 내 마을에는 내 보금자리 곁으로 고속도로 지나가도록 하는 도시는 없지만, 시골마을 한복판으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요. 시골 숲자락과 멧자락 한복판에 고속도로를 놓는다며 구멍을 숭숭 뚫어요. 발전소를 도시 변두리나 시골 한복판에 지은 다음, 도시와 읍내로 전기를 보내려고 우람한 송전탑을 논이며 밭이며 살림집 옆이며 잔뜩 세워요.
사람은 들짐승 삶터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은 푸나무 삶터를 무너뜨립니다. 사람은 이웃사람 삶터를 부숩니다.
문득 돌아보면, 사람은 스스로 사람인 줄 잊었구나 싶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운 숨결인 줄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빛낼 넋이 어떠한가를 못 깨닫는구나 싶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이요, 물을 마시는 사람이며, 바람을 들이켜는 사람입니다. 밥·물·바람이 없으면 어느 사람이고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 스스로 밥이 더러워지도록 흙을 더럽힙니다. 물이 더러워지도록 온 땅에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퍼붓습니다. 바람이 더러워지도록 자동차를 끝없이 만들어 굴리고, 공장을 수없이 짓습니다.
- “하나만 물어 봐도 될까?” “뭔데?” “카론은 장래의 꿈이 뭐야?” “무슨 소리야? 노예한테 뭔 장래의 꿈? 나 참 어이없어서.” (31쪽)
- “그럼 된 거야. 히에로뉴모스, 무리할 것 없어. 사람들은 저마다 석연치 않은 뭔가를 몇 개씩 끌어안고 살고 있지. 그게 정상이야. 마음에 상처가 있어도 즐겁게 살 수 있어.” (94쪽)
오늘날 지구별은 서로 죽이고 스스로 죽는 삶터로구나 싶어요.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서로 죽이면서 스스로 죽는 쳇바퀴와 같구나 싶어요. 그러나, 이 슬픈 굴레를 깨달으려 하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쳇바퀴이니까 쳇바퀴에 올라타야 살아남을 수 있는 줄 잘못 알아요. 쳇바퀴이니까 쳇바퀴에서 벗어나야 살아남을 텐데, 외려 서로서로 쳇바퀴에 올라타려고 아웅다웅 다퉈요. 쳇바퀴에서조차 서로 돕지 않아요. 쳇바퀴에서 밀려나면 죽는 줄 생각해요.
값비싼 아파트를 건사한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값비싼 자가용을 간수한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대학졸업장이나 여러 자격증이나 토플점수 뽐낸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삶은 삶입니다. ‘살아가기’이지 ‘살아남기’가 아닙니다. 이웃하고 등지거나 동무하고 고개 돌린 채 홀로 살아남으려 한다면, 스스로 죽고 맙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면서 동무하고 손을 맞잡을 때에 비로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은 삶일 뿐, ‘겨룸(경쟁)’이 아닙니다. 삶은 삶이지, ‘다툼(전쟁)’이 아닙니다. 겨뤄서 등수를 매긴들 무슨 뜻이 있나요. 다투거나 싸워서 누군가 이긴들 무슨 보람이 있나요.
등수를 매긴다면, 등수 높은 사람이 등수 낮은 사람을 돌보라는 뜻입니다. 다투거나 싸운다면,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을 보살피라는 뜻입니다.
힘은 힘이 센 사람이 힘이 여린 사람을 보듬으라는 힘입니다. 슬기란 슬기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품에 따사롭게 안으라는 슬기입니다. 돈은 돈이 있는 사람이 돈이 없는 사람하고 나누라는 돈입니다. 집은 집이 있는 사람이 집이 없는 사람하고 나란히 지내라는 집입니다.
함께 하는 삶이고, 함께 누리는 삶입니다. 함께 즐기는 삶이고, 함께 빛내는 삶입니다. 서로 사랑하기에 스스로 사랑할 수 있어요. 서로 죽이려 할 때에는 스스로 죽고 말지만, 서로 아끼려 하기에 스스로 아끼면서 환하게 웃어요. 서로 따순 손길 내밀며 어깨동무하기에, 서로 맑은 눈빛으로 만나 두레를 이룹니다.
- “성벽 바깥 세계는 다양한 변화가 넘쳐나 재미있어. 하지만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지. 넌 괜히 무리해서 성벽 밖으로 나갈 필요 없다고 생각해. 잘 있어, 형.” (103쪽)
이와아키 히토시 님 만화책 《히스토리에》(서울문화사,2009) 다섯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천 해쯤, 또는 이천 해쯤, 어쩌면 삼천 해나 사천 해쯤 앞서까지도 적잖은 권력자는 삶 아닌 죽음을 생각했구나 싶습니다. 삶을 함께 누리자고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이녁이 권력을 누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구나 싶어요.
돈을 생각한다면, 지식을 생각한다면, 학력이나 무슨무슨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그저 스스로 무너질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생각하고, 꿈을 생각하며, 믿음을 생각할 때에는, 그예 스스로 싱그러이 빛나면서 산뜻하게 거듭날 수 있어요.
나 스스로 죽을 까닭 없듯이, 내 이웃이나 동무 또한 죽을 까닭 없습니다. 내가 아는 이웃이건 내가 모르는 이웃이건, 서로 아끼며 돌볼 때에 즐겁습니다. 내 곁 사람들이건 나하고 한참 먼 데 있는 사람들이건, 서로 사랑하며 보살필 때에 기쁩니다.
한국이든 모잠비크이든, 네덜란드이든 에콰도르이든, 캐나다이든 라오스이든, 저마다 고운 삶 누리면서 고운 빛 나눌 때에 이 지구별이 환하게 빛나요.
- “아군 1만 명의 군사들 중 3천이 죽었다고 치자? 그럼 난, 왠지 그 3천 중에 용감무쌍한 네 목이 들어 있을 것 같거든? 반면, 에우메네스 군 1만 명 중 9천을 친다 해도, 그 안에 녀석의 목은 없을 거다.” (126쪽)
만화책 《히스토리에》는 죽이고 죽는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줄거리로는 ‘죽이고 죽는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할 테지만,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도 어느 누구도, 죽음 아닌 삶을 누리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려 합니다.
생각하면 돼요. 죽음 아닌 삶을 생각하면 돼요. 미움 아닌 웃음을 생각하면 돼요. 돈·이름·힘 아닌 꿈·사랑·빛을 생각하면 돼요. 어깨동무를 하면 되고, 품앗이를 하면 돼요. 두레를 하면 되고, 울력을 하면 돼요. 스스로 보금자리를 예쁘게 일구고, 아이들과 까르르 웃음꽃 노래꽃 이야기꽃 흐드러지게 피우면 돼요.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