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12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00

 


서로 사랑하며 집을 일구는 사람
― 불새 12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2002.6.25./4500원

 


  공장을 세우는 사람은 공장을 세우려 하는 터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만들 물건을 도시로 쉽게 실어 날라서 더 빨리 더 많이 팔 수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립니다. 공장이 선 곳이 매연과 쓰레기 때문에 얼마나 어떻게 더러워지는가를 헤아리지 않아요.


  공장이 한 번 서면, 이 둘레에서는 냇물이나 샘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공장이 한 번 서면, 이 둘레에서는 바람 한 자락 홀가분하게 들이켜지 못합니다. 공장이 한 번 서면, 커다란 짐차가 끝없이 드나듭니다. 공장이 한 번 서면 기나긴 전깃줄이 커다란 송전탑에 달라붙어 들어섭니다.


  그런데 공장 한두 군데 아닌 공단이 들어서면, 이 공장터에 푸른 싹이 다시 트기까지 몹시 오래 걸려요. 미국 군대가 머물다 떠난 ‘주한미군 기지’ 터를 떠올려 봅니다. 주한미군이 떠났다는 자리는 숲으로 가꾸지 못하고, 논이나 밭으로 일구지 못합니다. 군부대가 있는 동안 더러워진 땅을 되살리자면 몹시 기나긴 해를 지내야 한다고 해요. 공장이 있던 터나 공장단지가 있던 터도 이와 같아요. 시멘트덩어리에 쓰레기덩어리가 들어선 자리는 모든 목숨을 죽입니다.


  공장이나 회사나 공공기관이 있어야 일자리가 있고, 일자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다고들 이야기하곤 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틀리지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올바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공장이 있거나 회사가 있기에 먹고살지 않아요. 사람들은 흙이 있기에 먹고살아요. 바람이 맑게 흐르고 물이 싱그러이 흐르기에 먹고살 수 있습니다. 햇볕이 따사로이 내려쬘 때에 먹고살 수 있어요. 나무가 푸른잎 한껏 벌리고, 들판이 누렇게 익을 때에 비로소 먹고살 수 있습니다.


  세무서 없어도 누구나 먹고삽니다. 법원이나 병원 없어도 누구나 먹고삽니다. 학교나 청와대 없어도 누구나 먹고살아요. 군대나 전쟁무기 없어도 누구나 먹고살지요.


  우리들이 즐거우며 아름다운 삶을 누리고 싶다면, 들과 숲과 바다와 냇물과 멧자락과 갯벌과 못이 골고루 있어야 합니다. 냇가에 시멘트로 둑을 쌓아야 먹고살 수 있지 않아요. 아파트를 세워야 먹고살 수 있지 않아요. 지하철이나 고속도로가 나야 먹고살 수 있지 않아요.

 

 


- “그래, 그렇게 가고 싶냐! 그렇게 가고 싶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 봐. 지옥이든 어디든 실컷 가라구! 너 같은 건 타이라 씨 놈들과 함께 죽어 버려!” (11쪽)
- “그렇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니까. 벤타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 “벤타가 그립긴 해요. 하지만, 이미 먼 옛날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31쪽)


  공장에서 만드는 가공식품이라 하더라도, 숲과 들이 있을 때에 밑감을 거두어 만들 수 있습니다. 숲과 들이 없고서야 가공식품 밑감인 밀가루이든 감자이든 설탕이든 소금이든 얻을 길이 없어요.


  숲은 대학교 졸업장으로 키우지 못합니다. 햇볕은 토플 점수로 살찌우지 못합니다. 들판은 권력이나 명예로 돌보지 못합니다. 바다와 냇물은 은행계좌로 살리지 못해요.


  무엇으로 살리거나 돌보거나 키우는 숲이거나 햇볕이거나 들판이거나 냇물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 때에 싱그럽게 빛날 숲이거나 햇볕이거나 들판이거나 냇물일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숲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정치를 이야기하고 경제를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우리 학교에서는 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학입학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를 놓고 참고서와 교과서에서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에서는 멧자락이나 냇물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연봉이 얼마이고, 신분이 어떠하며, 재산이 얼마인가 하는 대목만 들먹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늘 매한가지입니다. 도시 학교에서 숲을 말하지 않아요. 시골 학교에서조차 숲을 사랑하지 못해요. 도시 학교는 도시 학교대로 더 물질문명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시골 학교는 시골 학교대로 자꾸 도시 물질문명 꽁무니를 좇습니다.

 


- “난 요시나카의 적이 아닌데. 왜 내가 도망쳐야 하는 거지?” “그, 그래도 기소 요시나카는 포악하기 그지없는 자라 사람을 파리 죽이듯. 게다가 그 부하라는 자들은 냉혹하고 잔인한 무리랍니다.” “군대가 지나간 민가와 절은 완전히 쑥대밭이 됐어요.” “그건 아마 헛소문일 게다. 요시나카는 도성을 공격해 들어올 정도의 인물이야. 난 한 번 이야기를 나눠 보련다. 너희는 무섭냐? 도망치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28∼29쪽)
- “네가 정말 죽고 싶은 거냐, 묘운.” “그런 꿈 같은 걸 찾아다니는 짓은 그만두세요. 불로불사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바람일 뿐입니다. 생이 있기에 죽음이 있는 법.” (38쪽)


  서로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집을 일굽니다. 돈이 넉넉하기에 집을 일구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교사와 학생이 즐겁게 가르치며 배웁니다. 지식이 넉넉하기에 배움이나 가르침을 이루지 않아요. 서로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마을이 살아나고 나라가 살아납니다. 전쟁무기 잔뜩 만들어 군대를 키우거나 경찰을 늘린대서 평화를 지키거나 안보를 이루지 않아요.


  사랑이 없다면 중앙정부나 지자체는 덧없습니다. 공무원은 이웃을 사랑할 일꾼이지, 이웃을 부려먹거나 이웃 어깨를 밟고 올라서는 권위자가 아닙니다. 면장도 읍장도, 구청장도 시장도, 군수도 도지사도,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그야말로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을 할 정치꾼이지, 어떤 정책을 꾀할 정치꾼이 아니에요.


  아마, 적잖은 분들은 정치꾼이나 공무원이 ‘정책이 없어야 한다’는 대목에 고개를 갸우뚱하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은 ‘심부름을 해야’지, ‘스스로 정책을 만들’ 까닭이 없어요. 사람들한테 모자라거나 아쉬운 대목을 조곤조곤 이야기 듣고 알뜰살뜰 꾸리는 심부름을 할 정치꾼이나 공무원이에요. 새로 무슨 잔치를 마련하거나 어떤 시설을 지어야 하지 않아요. 야구장이나 축구장을 굳이 지을 까닭이 없어요. 들판이 축구장이나 야구장이에요. 숲이 배드민턴장이고, 냇물이 수영장이에요. 논둑과 멧골이 육상경기장입니다.


  돈을 들여 설계해서 돈을 들여 시멘트 퍼부어 지을 때에 경기장이 되지 않습니다. 마을마다 넓게 펼치는 마당이 운동장이요 경기장입니다. 농약과 풀약으로 더럽히지 않은 정갈한 숲이 쉼터이자 공원이요 놀이터입니다.


  한 마디로 간추리면, 공무원도 정치꾼도 스스로 흙을 일구어야 합니다. 스스로 제 먹을거리를 흙을 일구어 지으면서 심부름꾼 구실을 할 공무원이자 정치꾼이에요. 느긋하게 월급 챙기고 연금을 받을 쇠밥그릇이라면 공무원이랑 정치꾼은 모두 없애도 돼요. 사람들은 세금을 낼 까닭이 없고, 정부는 세금을 걷을 까닭이 없어요. 공무원과 정치꾼한테 돈을 주려고 세금을 거두는 일이란 부질없습니다. 전쟁무기를 만들거나 군대를 늘리려고 세금을 거두는 일이란 뜻없습니다. 대학입시로만 치닫는 초·중·고등학교를 지어 아이들한테 입시교육만 시키는데, 교육비라면서 세금을 거두는 일이란 값없습니다.


  어른은 누구나 스스로 삶을 일굴 줄 알아야 합니다.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누구나 어른과 함께 살아가며 삶을 물려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 아닌 밥을 배우고, 정보가 아닌 옷을 배우며, 돈이나 권력이나 이름값 아닌 집을 배울 수 있어야 해요.

 


- “얼마 안 있으면 추수철이라, 그렇게 급하게 갈 수는 없다고 했잖아, 대장.” “바보야! 전쟁은 농사와는 달라. 출병은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구.” “대장,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전쟁 체질이 아니야. 이번엔 그냥 남을게. 추수도 끝내야겠고.” (49쪽)
- “대장님, 전 천성적으로 못된 여자라 이 나이를 먹도록 한 번도 사람답게 살아 보지 못했어요. 그러다 벤타를 만나 이렇게 보통 여자의 행복을 느끼게 되었죠. 지금 벤타와 헤어지면 전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말 거예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저의 행복을 빼앗아 가지 말아 주세요!” “전쟁을 위헤서다.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럼 왜 전쟁을 하는 거야! 전쟁은 무사들이 멋대로 만든 거잖아!” “타이라 일족을 멸하기 위해서다. 타이라 일족을 멸망시켜야 우리의 시대가 오니까.” “거 봐! 무사가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벌이는 게 전쟁이잖아! 우리는 우리대로 행복이란 게 있다구!” (50∼51쪽)


  바람이 붑니다. 봄이라 봄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겨울이라 겨울바람이 붑니다. 봄에는 봄나물을 먹습니다. 겨울에는 가으내 갈무리한 곡식이나 나물을 먹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쓰다듬어 아이를 낳습니다. 사랑이 열매를 맺어 태어난 아이들은 사랑을 누리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이녁 어버이가 저희한테 했듯이 사랑을 새로 일구고 나누어 새 아이를 새 사랑으로 낳습니다.


  성교육은 없어도 됩니다. 왜냐하면, 성교육 아닌 ‘사랑삶’이어야 맞거든요. 성별과 성행위나 성기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지식은 그만둘 노릇이에요. 사랑을 보여주고 사랑을 나누며 사랑을 가르칠 노릇입니다. 가시내가 사내를 사랑하고, 사내가 가시내를 사랑합니다. 어른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어른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들짐승과 푸나무를 사랑하고, 들짐승과 푸나무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오직 사랑이 있을 때에, 사람삶이 빛나고 지구별이 환하며 온누리가 해맑을 수 있어요.


  봄볕을 누리면서, 겨울볕을 즐기면서, 여름내음 맡으면서, 가을내음 받아먹으면서, 천천히 천천히 삶을 생각합니다.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은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불새》(학산문화사,2002) 열두째 권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 “평생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이군. 사람을 죽이는 게 토끼나 들쥐를 잡는 것도 아니고 원. 그보다는 살려 주는 편이 빠르겠다. 물 좀 떠 와!” “적을 살려 주다니, 이건 규칙 위반이야!” “대장의 명령이다. 당장 물과 헝겊을 가져와!” (70쪽)
- “내가 적의 동정을 사게 된 걸 알면, 요시나카도 부끄러워 할 것이다.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편이 나아. 베어라.” “당신도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 기껏 치료해 줬는데 죽이면 아무 소용없잖아.” (72쪽)


  예나 이제나 전쟁을 일으키는 이는 권력자와 군인입니다. 흙을 일구는 여느 사람이 전쟁을 일으킨 일은 없어요. 권력자가 흙일꾼을 짓밟고 죽이며 들볶기에 흙일꾼이 낫이랑 쟁기를 들고 일어선 적은 있지요. 그러니까, 전쟁이 있다면 권력자와 군인 때문에 있어요. 적군 때문에 전쟁이 있은 적은 없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이는 이웃한 나쁜 나라가 아니에요. 전쟁은 바로 내 나라 권력자와 군인이 일으켜요. 이웃나라에서도 이웃나라 권력자와 군인이 전쟁을 일으켜요. 그런데 두 나라가 전쟁이 붙으면, 죽는 사람은 흙일꾼입니다. 권력자와 군인은 외려 안 죽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엉뚱하다 생각할 텐데, 전쟁터에서 군인이 죽지 왜 ‘흙일꾼(민간인)’이 죽느냐고 묻겠지요. 그러나, 전쟁터에서 죽는 ‘군인’은 바로 시골에서 끌려온 흙일꾼이에요. 전쟁에 미친 군인들, 그러니까 ‘군 간부’와 권력자들은 책상에 지도를 펼쳐 놓고 이래라 저래라 떠들며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이웃나라 땅을 빼앗든 내 나라 땅을 빼앗기든 아랑곳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 누가 죽고 살든 따지지 않아요. ‘군 간부’와 권력자 머릿속에는 군사전략이 있을 뿐이에요. 군사전략에 따라 치고받으며 ‘놀이(게임)’를 해대요.


- “이 근처 민가에 불을 붙여라. 7∼8채만 태워도 낮처럼 환할 거야.” “그건 안 돼, 대장.” “뭐야, 벤타.” “아무 상관없는 집을 태우다니, 그건 너무해. 우리 집도 무사가 불태워 버렸단 말이야.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어쩌라고!” “누구든 성가스럽게 굴면 모두 죽여버려. 전투에 방해만 될 뿐이니.” “뭐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끔찍한 짓을?” (115쪽)
- “당신들은 처음에는 사이좋게 서로 도와가며 살아갈 거예요. 하지만 결국 싸우다 서로를 죽이게 될 겁니다. 그게 숙명이에요.” “대체 왜?” “권력을 얻기 위해서요!” (235쪽)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서로 권력을 노리는 사람은 전쟁을 일으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마을을 일굽니다. 서로 돈을 바라는 사람은 경쟁을 일으킵니다.


  나는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아이들아, 우리 아이들아, 우리 어여쁜 아이들아, 너희는 사랑을 물려받기를 빈다. 너희와 살아가는 어버이인 나는 너희와 함께 사랑을 빛내고 싶다. 사랑을 길어올리고, 사랑을 품에 안으며, 사랑을 곱다시 퍼뜨리고 싶다.’


  구수한 밥 한 그릇에서 사랑이 샘솟습니다. 깨끔하게 빨아서 다린 옷 한 벌에서 사랑이 피어납니다. 정갈히 건사하며 돌보는 집에서 사랑이 싹틉니다. 목소리 곱게 가다듬어 노래를 부릅니다. 손길에 따순 마음 담아 아이들이랑 놀이를 즐깁니다. 멧새가 먹이 찾아 들판을 부산스레 날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구름 지나가는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그늘빛을 바라봅니다. 시골 밤하늘은 별과 달이 가득해서 환합니다. 삶은 바로 내 가슴속에서 자라납니다. 삶은 바로 내 가슴속 예쁜 빛줄기 모양으로 기다립니다. 오늘도 해가 지며 땅거미가 드리웁니다.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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