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골 다른 시골

 


  깊은 두멧시골 고흥이지만, 읍내에 아파트가 높다랗게 섭니다. 고흥군 도양읍에도 아파트 여러 채 섭니다. 서울이나 큰도시하고 제법 떨어진 시골이라 하더라도, 읍내에는 으레 아파트가 섭니다. 제주섬을 관광지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제아무리 관광지로 이름난 제주섬이라지만 제주시나 서귀포시에는 아파트가 우줄우줄 섭니다. 큰도시는 더 말할 것조차 없이 아파트가 많은데, 크지 않은 도시에도 아파트가 가득하고, 조그마한 시골조차 아파트 없는 데를 찾기 힘듭니다.


  설이나 한가위를 맞이해 시골로 간다는 이들 가운데 참말 시골다운 시골로 가는 이는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합니다. 시골로 가면서 시골버스를 타거나 시골밥 먹는 이는 얼마나 되랴 궁금합니다. 시골로 놀러가는 사람들이 참말 시골집다운 시골집에 깃들어 시골을 느끼는 일은 있을까 슬며시 궁금합니다. 인도 뒷골목 나들이를 가는 사람은 인도 뒷골목 사람들이 살아가는 작고 어두운 집과 닮은 데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을까요. 티벳이나 네팔이나 부탄 같은 나라로 찾아가 ‘눈빛 맑은’ 사람들 만나고 싶은 이들은, 참말 티벳이나 네팔이나 부탄 같은 나라에서 ‘눈빛 맑은’ 사람들이 지내는 살림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을까요.


  “서울하고 멀리 떨어진 곳”을 뜻하던 ‘시골’이지만, 오늘날 시골 가운데에는 “서울하고 빼닮은 곳”이 자꾸 늘어납니다. 시골 읍내나 면내는 서울 한복판을 닮으려고 합니다. 이제, 시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라 하더라도, 시골 아닌 시골이 참 많구나 싶습니다. 흙을 밟지 못하고, 나무를 껴안지 못하며, 풀과 꽃을 흐드러지게 누릴 수 없으면, 어느 곳이라 하더라도 시골일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4346.2.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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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목소리

 


  부드러이 부는 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부드러이 내려앉는 햇살이 온몸에 따사로운 기운 나누어 준다. 부드러이 흐르는 냇물이 맑은 소리 들려준다. 부드러이 피어나는 꽃송이가 밝은 웃음 보여준다. 부드러이 짓는 밥을 고소하게 먹는다. 부드러이 지은 집에서 부드러이 살림 꾸린다.


  사랑은 부드럽다. 삶은 부드럽다. 부드럽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고, 부드럽지 않을 때에는 삶을 누리지 못한다.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들을 어루만질 수 있다. 부드러운 몸짓으로 이야기 한 자락 엮을 수 있다.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책을 넘기며 책시렁 짤 수 있다.


  시골집에서는 풀 잔뜩 차린 밥상으로 아이들과 밥을 나누지만, 할머니 댁에 오면 아이들한테 풀을 먹이기 만만하지 않다. 시외버스 타고 움직이는 길에, 할머니 댁에, 아이 손이 쉬 닿는 과자꾸러미가 많다. 이 아이도 저 아이도 밥보다 과자에 손이 가고, 밥 한 술 떠서 먹이자면 한참 애먹어야 한다. 할머니 댁에는 마루 한복판에 텔레비전이 있다. 아니, 어느 집에 가더라도 가장 너른 마루에 가장 큰 텔레비전이 버틴다. 아이들한테 만화영화를 보여주더라도 이것저것 가려서 보여줄 수 없고, 온갖 광고까지 눈이 아프도록 보아야 한다.


  먼길 나들이를 해서 할머니 댁에 왔는데, 밥은 안 쳐다보고 텔레비전하고 과자에 눈길이 사로잡힌 아이들을 바라보며 괜히 슬퍼, 부드러운 목소리가 좀처럼 안 나온다. 졸리지만 졸음 참고 더 놀려 하는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자장노래를 부를 적에는 스스로 다짐하고 생각하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오지만, 자꾸자꾸 떼를 부리며 안 자려 하는 큰아이한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내 어린 날을 돌이켜본다. 잠 한 숨 멀리하며 조금이라도 더 놀고 조금이라도 할머니 곁에 더 달라붙으려 하는 마음을 느낀다.히유. 어른이 된 마음으로만 아이를 다그칠 수 없다.


  한숨이 흐른다. 더 여러 날 더 느긋이 지낸다면 내 목소리도 내 마음도 부드러이 누그러질 수 있을까. 너덧새쯤, 예닐곱 날쯤, 넉넉히 머물며 이야기꽃 피울 수 있으면, 아이들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밥 맛나게 먹고 놀이 신나게 즐기는 삶을 누릴 수 있을까. 4346.2.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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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색잉꼬 5
테츠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209

 


고흐 그림이 있는 마을
― 칠색잉꼬 5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도영명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2012.4.25./9000원

 


  전남 고흥에서 충북 음성으로 옵니다. 두 아이와 함께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나들이를 합니다. 고흥 시골집에서는 눈을 구경할 일이 거의 없지만, 음성 시골집으로 나들이를 오니, 아침에 새롭게 눈이 내립니다. 아직 한참 꿈나라를 누리는 아이들은 눈이 오는 줄 모를 텐데, 곧 잠에서 깨면 소복소복 내리는 눈이 좋아 까르르 웃고 노래하며 뒹굴겠구나 싶습니다.


  펄펄 내리는 눈은 온 들판을 덮습니다. 눈송이는 지붕을 덮고 숲을 덮으며 찻길을 덮습니다. 아파트도 공장도 하얗게 하얗게 덮습니다. 눈은 어디에나 내립니다. 눈은 어느 곳에나 내려앉습니다. 눈은 가리는 곳이 없습니다. 눈은 따지는 곳이 없습니다. 눈은 싫다 하거나 마다 하지 않습니다. 잣나무 가지에도 밤나무 가지에도 내려앉습니다. 사람들 머리에도 시외버스 지붕에도 찬찬히 내려앉습니다.


  들과 숲에 내린 눈은 천천히 녹습니다. 찻길에 내린 눈은 꽁꽁 얼어붙습니다. 들과 숲에 내린 눈은 흙으로 스며들어 흙을 살찌웁니다. 찻길에 내린 눈은 자동차 다니기 어렵게 얼어붙습니다.


  들과 숲에 내린 눈을 쓸거나 치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햇살이 천천히 녹여 들판을 천천히 살찌우거든요. 찻길에 내리는 눈은 곧장 치우는 사람들입니다. 찻길에 눈이 쌓이면 자동차가 다닐 수 없다면서 바지런히 쓸거나 치웁니다.


- “부모란 존재는 아이의 기분을 모르나 봐요.” “몰라도 괜찮아. 내 부모가 살아 있다고 해도 어차피 반대했을 거야. 학생 주제에 연애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지!” (20쪽)
- “그야 위로금을 받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받는다 해도 마음의 상처는 나아지는 게 아니지요. 그래서 우린 서로 손을 잡고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한달, 반드시 서로 우정으로 감싸 주자고 맹세를 했습니다.” (25쪽)

 

 


  빗물은 들과 숲에 녹아듭니다. 빗물 내리는 들과 숲은 무럭무럭 자라며 푸른 빛깔 흐드러지게 뽐냅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빗물 또한 썩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눈발 날리는 찻길도 빗물 흩날리는 찻길도, 자동차한테는 그저 성가실 뿐입니다. 하나하나 따지면, 도시사람은 눈도 비도 반기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은 햇살이 눈부시거나 햇볕이 따사롭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은 바람이 불거나 자거나 헤아리지 않습니다.


  아파트와 숱한 건물에 깃드는 사람들은 해가 뜨건 말건 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하상가에서 일하거나 지하상가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구름이 흐르거나 말거나 구름을 마주하지 않습니다.


  풀벌레는 찻길에서 살지 못합니다. 들새와 멧새는 찻길에 보금자리를 틀지 못합니다. 들짐승과 멧짐승은 찻길 언저리에 얼씬하지 못합니다. 찻길 빽빽한 도시는 풀벌레한테도 새한테도 짐승한테도 아주 안 좋은 터입니다. 오직 사람만 드나들거나 살아가는 도시입니다. 사람 아닌 목숨은 기웃거리기 힘든 도시요, 같은 사람한테조차 높다란 울타리가 있거나 두꺼운 바위가 턱 가로막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 “전 삼류 이하인 볼 것 없는 떠돌이 배우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선 명배우세요. 이렇게 매일 밤 절 감격하게 만드시는걸요.” (67쪽)
- “이제 그만 좀 하라니까! 너도 마찬가지야. 괜히 멋이나 부리고.” (108∼109쪽)

 

 


  그림쟁이 고흐 님은 어떤 마을에서 그림을 그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림쟁이 박수근 님이나 이중섭 님은 어떤 보금자리에서 그림을 그렸을까요. 시를 쓴 신동엽 님은 어떤 마을에서 삶을 빛내며 시를 썼을까요. 김남주 님이나 박노해 님은 어떤 터에서 이녁 삶을 밝히며 시 한 자락에 꿈 한 자락 살포시 얹었을까요.


  자동차 지나간 자리에는 풀이 돋기 어렵습니다. 자동차 밟은 자리에는 풀이 깔려 죽습니다. 자동차 지나다니는 찻길에서는 논이든 밭이든 잘 되기 어렵습니다. 논이나 밭은 조용한 시골마을 한켠에 있을 때에 잘 되고, 멧새 노랫소리와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어야 기름집니다. 논도 밭도 빗물과 눈송이를 머금으면서 해마다 알찬 곡식과 푸성귀를 베풉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으며 살아갈까 헤아려 봅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을 때에 가장 빛나는 넋이 될까요. 사람은 어떤 먹을거리를 지을 때에 스스로 빛나는 얼이 되나요. 사람은 먹을거리를 어떻게 나누면서 하루를 즐길 적에 서로서로 고운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을까요.


- “이 인형을 조종하는 모습을 한 번 보여주게. 내가 감동할 정도로. 자네가 이 인형에 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냥 넘겨주지! 허나 그렇게 못 한다면 이 녀석은 화장할 거네.” (140쪽)
- “그러니까 가고 싶지 않다고 하잖아. 잉꼬 너한테서 손을 떼는 꼴이 된단 말이야!” “그거 좋지. 그렇게 되면 나도 편해질 테니.” “이 차가운 자식.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대체 나한테 뭘 어찌하라는 건데!” “어떻게든 좀 도와주면 좋잖아.” (160∼161쪽)
- “공포탄이라니. 날 감동시키는군, 형사나리. 이건 돌려주겠어.” (172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칠색잉꼬》(학산문화사,2012) 다섯째 권을 읽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누리는 터전을 보여주는 짤막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람이 서로 사람다운 사랑을 나누는 터전이 어떻게 태어나는가 하는 짤막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꿈을 이루는 길이 어떻게 샘솟아 널리 퍼지는가 하는 짤막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 “어이, 도지에몬. 뭐 하는 거야. 왜 밭을 갈아?” “화단을 만들고 있어요. 저 애랑 약속했잖아요.” “이 순해빠진 녀석아! 정말로 저 애한테 봉사할 생각이야?” “저 불쌍한 애한테 거짓말을 할 셈이요?” (186쪽)
- “이 마을에는 고흐나 세잔느도 있는 반면에, 이런 야비한 인종들도 떼로 몰려다닌단 말이렷다!” (190쪽)


  고흐 그림은 어떤 마을에 있을 때에 어울릴까요. 벨라스케스 그림이나 루벤스 그림은 어떤 마을에 있을 때에 알맞을까요. 고흥에서 태어난 천경자 님을 기려, 고흥군에서는 ‘천경자전시실’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보살피거나 나누지 못했어요. 천경자전시실 옥상 물탱크가 터져 물이 줄줄 새기까지 했어요. 천경자 그림 예순 점 남짓 받아 ‘천경자전시실’을 꾸린 고흥군이었지만, 2012년 12월 끝무렵, 고흥군은 그림들을 모두 그예 돌려주고 전시실을 문닫기로 했어요. 우리 식구는 고흥에 자리를 잡아 살아가지만, 이제 천경자전시실에 마실을 갈 수 없고, 고흥에서는 그림 구경도 할 수 없구나 싶습니다.


  미술관은 어느 곳에 지을 때에 어울릴까요. 박물관은 어느 터에 세울 때에 알맞을까요. 학교는 어느 곳에 지어,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가르치면서 나눌 때에 아름다울까요. 시골마을은 어떤 삶 어떤 사랑 어떤 꿈을 일구는 보금자리가 될 때에 환하게 빛날까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는 무엇이 있을 만한 곳일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고흥 시골마을에는 어떤 문화나 삶이나 예술이나 이야기가 깃들 때에 어울릴까 헤아려 봅니다. 고흥군 고흥읍에는 박지성공설운동장이 있고, 고흥군 금산면에는 김일체육관이 있는데, 고흥군은 이러한 이름을 붙인 시설을 얼마나 건사할 만하거나 얼마나 아낄 만하거나, 얼마나 사랑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곧 겨울바람 그치고 봄바람 온 들판에 가득할 테지요. 머잖아 봄햇살 온 숲에 드리우면서 푸릇푸릇 싱그러운 새 빛 눈부시겠지요. 아이들과 즐길 숲마실과 들마실과 바다마실을 기다립니다. 4346.2.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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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옆 지나가는 고속도로

 


  고흥을 벗어나 순천을 지나고 청주를 거쳐 음성으로 오는 길, 여러 고속도로 곁을 스친다. 시골마을 가운데 어느 곳도 고속도로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모든 시골마을은 이름 그대로 시골이요, 조용한 삶터였으리라. 그런데, 오늘날 시골 가운데 고속도로나 송전탑이나 공장이나 짐승우리나 발전소나 골프장이나 아파트나 4대강 삽질터 같은 거친 손아귀에서 홀가분한 데는 매우 드물다. 홀가분하면서 호젓한 시골마을은 차츰 줄어든다.

  고속도로 곁 시골마을 사람들은 새벽이고 밤이고 아침이고 낮이고 얼마나 시끄러울까 생각하다가, 고속도로 바로 곁에 있는 무덤을 퍽 많이 본다. 저 자리를 처음 잡아서 무덤을 쓸 적에는 고속도로 같은 찻길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겠지. 더없이 좋은 터를 고르고, 볕 잘 들면서 아름다운 숲속에 무덤을 놓았으리라. 그런데, 이런 좋은 터, 무덤 있는 곁에 고속도로가 참 많이 지나다닌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일까. 더 깊이 살피거나 헤아릴 수 없는 노릇일까. 자동차 뜸한 옛날에는 누구나 천천히 걸어 무덤자리 찾아가서 술 한 잔 떡 한 점 올리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웠으리라. 자가용 몰아 붕붕 싱싱 무덤자리 휘 둘러보고 떠나는 요즈음은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울 겨를이나 마음이 크게 줄거나 사라질밖에 없으리라. 4346.2.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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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 재우는 시외버스

 


  옆지기는 작은아이를 맡고, 나는 큰아이를 맡는다. 두멧시골집에서 택시를 타고 읍내로 나와, 고흥읍내에서 순천 버스역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 버스역에서 청주 버스역으로 시외버스를 타며, 청주 버스역에서 음성 버스역으로 시외버스를 탄다. 시외버스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스스로 몸부림을 치면서 온갖 놀이를 하고 싶다. 갑갑한 몸을 풀고 싶어 이래저래 비틀고 꼬물꼬물 노닥거린다. 너희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니.


  고흥읍에서 순천 버스역으로 가는 길, 순천에 거의 닿을 무렵 두 아이가 스르르 잠든다. 순천에서 청주로 가는 길, 세 시간 달리는 버스에서 한 시간 반쯤 되자 두 아이가 사르르 잠든다. 처음에는 두 아이가 따로 앉았으나, 작은아이를 달래려고 나와 큰아이 사이에 앉히고 사진기를 손에 쥐어 주었는데, 이십 분쯤 사진기 들여다보다가 큰아이가 “나 이제 안 볼래. 보라 혼자 보라고 해.” 하더니 아버지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작은아이를 왼허벅지에 앉힌다. 큰아이가 잘 자도록 자장노래를 부른다. 두 가락쯤 불렀을까, 사진기 손에 쥔 작은아이가 꾸벅꾸벅 졸다가 폭 고개를 떨군다. 깊이 잠들어 느긋하게 쉴 수 있기를 빌며 자장노래를 열 가락 남짓 더 부른다. 내 허벅지 둘은 두 아이 눕히는 베개가 된다. 옆지기가 작은아이를 넘기라 말하지만, 옆지기가 한갓지게 쉴 수 있기를 빌며 내가 둘 다 안는다. 한 시간 남짓 두 아이를 허벅지에 앉히고 누여 재운다. 호젓한 길을 널널한 시외버스가 달린다. 나도 눈을 감는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날을 되짚는다. 내 어버이가 나와 형을 어떻게 보살피며 하루를 누렸을까 헤아린다. 이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 지난날을 돌아보는 거울이요, 내 어버이가 살아온 한때를 짚는 발자국이면서, 스스로 씩씩하고 맑은 숨결일 테지. 자는 아이 둘 끌어안고 시외버스를 달리지만, 몸이 힘들거나 허벅지가 저리거나 팔이 아프지 않다.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간다. 4346.2.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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