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목소리

 


  부드러이 부는 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부드러이 내려앉는 햇살이 온몸에 따사로운 기운 나누어 준다. 부드러이 흐르는 냇물이 맑은 소리 들려준다. 부드러이 피어나는 꽃송이가 밝은 웃음 보여준다. 부드러이 짓는 밥을 고소하게 먹는다. 부드러이 지은 집에서 부드러이 살림 꾸린다.


  사랑은 부드럽다. 삶은 부드럽다. 부드럽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고, 부드럽지 않을 때에는 삶을 누리지 못한다.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들을 어루만질 수 있다. 부드러운 몸짓으로 이야기 한 자락 엮을 수 있다.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책을 넘기며 책시렁 짤 수 있다.


  시골집에서는 풀 잔뜩 차린 밥상으로 아이들과 밥을 나누지만, 할머니 댁에 오면 아이들한테 풀을 먹이기 만만하지 않다. 시외버스 타고 움직이는 길에, 할머니 댁에, 아이 손이 쉬 닿는 과자꾸러미가 많다. 이 아이도 저 아이도 밥보다 과자에 손이 가고, 밥 한 술 떠서 먹이자면 한참 애먹어야 한다. 할머니 댁에는 마루 한복판에 텔레비전이 있다. 아니, 어느 집에 가더라도 가장 너른 마루에 가장 큰 텔레비전이 버틴다. 아이들한테 만화영화를 보여주더라도 이것저것 가려서 보여줄 수 없고, 온갖 광고까지 눈이 아프도록 보아야 한다.


  먼길 나들이를 해서 할머니 댁에 왔는데, 밥은 안 쳐다보고 텔레비전하고 과자에 눈길이 사로잡힌 아이들을 바라보며 괜히 슬퍼, 부드러운 목소리가 좀처럼 안 나온다. 졸리지만 졸음 참고 더 놀려 하는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자장노래를 부를 적에는 스스로 다짐하고 생각하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오지만, 자꾸자꾸 떼를 부리며 안 자려 하는 큰아이한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내 어린 날을 돌이켜본다. 잠 한 숨 멀리하며 조금이라도 더 놀고 조금이라도 할머니 곁에 더 달라붙으려 하는 마음을 느낀다.히유. 어른이 된 마음으로만 아이를 다그칠 수 없다.


  한숨이 흐른다. 더 여러 날 더 느긋이 지낸다면 내 목소리도 내 마음도 부드러이 누그러질 수 있을까. 너덧새쯤, 예닐곱 날쯤, 넉넉히 머물며 이야기꽃 피울 수 있으면, 아이들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밥 맛나게 먹고 놀이 신나게 즐기는 삶을 누릴 수 있을까. 4346.2.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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