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26] 놀이터읽기
―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놀면 됩니다. 아이 얼굴을 쳐다보고, 아이 손을 잡으며, 아이랑 나란히 뒹굴면 됩니다.


  놀이공원에 가는 일이 놀이가 아닙니다. 놀이공원에 간다면 ‘놀이기구 타러 나들이’를 가는 셈이지, 놀이가 아닙니다. 바깥밥을 먹으러 나간다든지, 놀이터에 간대서 놀이가 아니에요. 함께 놀아야 놀이입니다.


  내가 1975년에 태어나 자란 인천에도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그무렵 인천에 있던 놀이터는 제법 컸습니다. 아이들이 많으니 놀이터도 클밖에 없을는지 모르지만, 예전과 요즈음은 놀이터를 마련하는 어른들 생각이 사뭇 다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전에는 이런저런 놀이기구가 많이 없더라도 좋아요. 널따란 모래밭이나 흙땅이기만 하면 놀이터입니다. 시멘트땅이나 아스팔트땅 아닌 데라면 놀이터예요.


  아이들은 시멘트땅이나 아스팔트땅조차 바닥에 분필이나 돌로 금을 그으며 온갖 놀이 즐기기도 하지만, 참으로 빛나는 아이들 놀이는 바로 모래밭이나 흙땅이나 숲이나 들이나 냇가에서 이루어집니다.


  놀이기구 아닌 흙을 만지고 나무와 나뭇가지를 만지며, 풀잎과 꽃잎을 만지면서 아이들이 놉니다. 놀이기구라 한다면, 철봉에 매달리고 그네를 밟으며 미끄럼틀과 구름사다리를 원숭이처럼 척척 붙어서 옮겨다니면서 놉니다.


  넘어지거나 자빠지더라도 머리가 안 깨질 흙이나 모래로 이루어진 터가 놀이터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풀밭과 숲에서 아이들이 넘어진들 머리가 깨질 일 없습니다. 냇가에서라면 돌에 머리를 박을는지 모르는데, 잘 살피면 아이들은 냇가에서 외려 잘 안 넘어집니다. 냇가에서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지가 젖겠지요.


  손과 발이 흙과 모래와 풀을 느끼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손과 발로 나무를 타고 그네 줄을 붙잡으며 아이들이 큽니다.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저희끼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이 아이들이 큽니다.


  놀이터쯤 되려면, 아이들이 서너 시간 쉬지 않고 놀 만한 데여야 놀이터입니다. 너덧 시간 대여섯 시간,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잊고, 배고픔마저 잊으면서 폭 빠져들 만한 데일 때에 놀이터입니다.


  그럴듯한 놀이기구 덩그러니 놓는대서 놀이터가 되지 않아요. 이런 데는 ‘놀이기구터’예요. ‘놀이터’라 말할 수 없어요. 놀이기구 잔뜩 놓은 놀이기구터에서 아이들이 놀지 못합니다. 궁금하다면 놀이터와 놀이기구터에 아이들을 풀어놓아 보셔요.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부를 때’까지 하염없이 새 놀이를 빚으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놀이기구터에서 몇 분쯤 이것저것 만지고 타고 하다가 이내 따분해 합니다.


  놀이기구터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놀이기구터에는 아이들 스스로 생각날개 펼치도록 이끌 새로움이 없습니다. 어른들이 꽉 짜 놓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놀이기구터에서 아이들이 할 놀이란 없습니다. 무엇을 새로 빚을 수 있나요. 아이들이 놀이기구터에서 무엇을 새로 빛낼 만한가요.


  들판에 나뭇가지 굴러다녀도 이 나뭇가지를 놀잇감 삼아 수많은 놀이를 새롭게 빚는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놀이기구터에는 나뭇가지 없어요. 돌멩이도 없어요. 시늉으로만 바닥에 깐 모래밭에 아무나 아무렇게나 들락거리면, 이런 모래밭에서 아이들이 모래놀이 할 수 없어요. 게다가 놀이기구터 바닥을 모래조차 아닌 인공소재로 깔면, 이런 데에서 아이들이 맡거나 느낄 냄새는 화학약품이 되고 맙니다.


  어른들 스스로 즐겁게 놀며 어울리는 삶이라 한다면, 아이들 놀이터를 엉터리로 만들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어른들 스스로 즐겁게 놀 줄 모르고, 즐겁게 놀지 않는 탓에, 아이들 놀이터를 바보스레 만드는구나 싶어요.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아이하고 신나게 뛰놀아요. 아이들하고 놀이기구터에 엉금엉금 찾아가지 말고, 놀이기구터에 갔더라도 아이들 스스로 놀이기구를 만지도록 하셔요. 이건 어떻게 타고 저건 어떻게 타라고 하나하나 말하지 마셔요. 아이들 스스로 느끼고 생각해서 타도록 하셔요. 그나마 놀이기구터에서조차 아이들 스스로 생각을 짓도록 이끌지 못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야 하나요. 놀이터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을 빛내어 놀이를 찾아내어 개구지게 몸을 놀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이끄는 배움터요 삶터이자 만남터예요. 이 놀이터에 어른들 섣불리 끼어들지 말 노릇이에요. 아이와 똑같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할 마음이 아니라면, 놀이터에 어른들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마셔요.


  걸리적거린답니다. 다른 아이들 노는데, 어른들이 당신 아이 손을 붙잡고 그네를 태우느니 미끄럼틀을 태우느니 하면, 참 걸리적거린답니다. 아이들과 ‘놀아’야지, ‘주말에 놀아 준다’는 생각으로 놀이기구터에 찾아가지 마셔요. 아이들도 재미없어요. 어른인 당신도 재미없지요? ‘아이들과 놀아 주려’고 하니 얼마나 따분하겠어요?


  놀이는 놀이터나 놀이기구터에 가야 할 수 있지 않아요. 놀이는 언제 어디에서나 할 수 있어요. 집에서도 방에서도 이부자리에서도 하지요. 방바닥에서도 마룻바닥에서도 얼마든지 하는 놀이예요. 아이들과 즐길 놀이를 어른들도 생각해야지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떠들며 노래하도록 북돋우는 놀이를 어른들도 생각을 빛내어 하나하나 새롭게 일구어야지요. 4346.7.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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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날아오르는 어린이

 


  놀이터에 갔다. 낯선 미끄럼틀이 있다. 처음에는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다. 가만히 지켜본다. 다른 아이들이 타는 모습을 곰곰이 살피더니, 한 번 올라가서 탄다. 두 번 타고 세 번 타며 익숙해지니 쉬잖고 오르내리며 탄다. 이윽고, 구멍에서 빠져나올 적에 펄쩍 뛰어 날아오른다. 4346.7.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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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을 줍다

 


  순천 시내 어느 놀이터에 갔다. 큰아이가 문득 은행잎 하나 줍는다. 어, 얘는 어쩜 벌써 노랗게 물이 들었지? 잎 끝자락은 푸른 기운 조금 남았지만, 온통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다. 이 잎빛이 예뻐서 주웠구나. 네가 눈이 밝아서 주웠을는지 모르지만, 네 마음속으로 예쁜 꽃을 늘 생각하며 살아가니까, 이런 은행잎 알아차리며 줍는구나. 4346.7.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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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 너무 무거우면 머리가 멈추는구나 싶다. 생각이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쉬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아이들 모두 재우고 나서 1분이든 10분이든 조금이나마 홀가분하게 글을 쓰고픈 생각이 뒤따른다. 그러나, 아이들이 곯아떨어지는 날에는 아버지인 나도 몹시 힘겹게 지낸 날인 터라, 아이들을 새근새근 재웠어도 홀가분하게 내 일을 하지 못하더라.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아이들 사이에서 새근새근 잠드는 것 하나 있다. 무거운 다리를 쉬고, 딱딱하게 굳은 무릎을 풀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얼마나 고단한 하루였을까. 큰아이가 읍내에서 아버지더러 “우리 언제 집에 가요?” 하고 먼저 물었으니, 얼마나 힘들다는 뜻인가. 아버지는 “아버지야말로 빨리 가고 싶지만, 아버지는 너희를 먹여야 하니까 먹을거리도 장만해서 가방에 짊어지고 가야 한단다. 너희는 가방을 등에도 손에도 어깨에도 안 메지만, 아버지는 등에도 손에도 어깨에도 가방을 잔뜩 짊어지고 이렇게 읍내 저자마실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하는 말을 차마 들려주지는 못하고, “응, 이제 곧 집에 가. 조금만 더 참아.” 하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이 말마따나, 아버지 스스로 참는다. 힘든 몸이지만 참는다. 힘든 몸이기에 한 번 더 빙그레 웃으면서 아이들과 복닥거리려 한다. 택시를 불러서 타도 되지만, 군내버스를 기다린다. 버스에서 아이들과 논다. 마을 어귀에서 집까지 다시 기운내어 걷는다. 집으로 돌아와 물을 뎁혀 아이들 씻기고 빨래를 한다. 이러고 나서 아이들 밥을 먹이고, 조금 놀린 뒤 재운다. 참말, 아버지도 느긋하게 눕고 싶구나. 이제 누울게. 너희들 곁에서 너희들 머리카락 쓸어넘기며 누울게. 같이 자자. 우리 함께 잠을 자자. 4346.7.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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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숲 풀빛

 


  국민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다니며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미술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이때에 물감으로 풍경그림 그려서 점수를 받아야 하곤 했는데, 나는 나무를 그리거나 풀을 그릴 적에 몹시 힘들구나 싶어, 나무나 풀은 되도록 안 그리려 했다. 왜냐하면, 풍경이라 하든 정물이라 하든 초상이라 하든, 모두 내 눈으로 바라본 모습을 담는 그림인데, 나무를 보든 풀을 보든, 풀빛이 모두 다르다고 느꼈다. 나무 한 그루라 하지만, 똑같은 잎사귀가 하나도 없고, 똑같은 빛깔이 하나도 없다. 은행나무를 그리려 해도, 은행잎 모양과 빛깔과 무늬가 다 다르다고 느낀 나머지, 차마 은행나무를 그릴 수 없었다. 나무를 그리면서 나뭇잎을 모두 다른 모양과 빛깔과 무늬로 그려야 하는데, 고작 한 시간이나 두 시간밖에 안 되는 미술 수업에서 나무를 그릴 수 없더라.


  더 헤아려 보면, 바다를 그릴 적에도 똑같았다. 물결빛은 똑같지 않다. 코앞에서 마주하는 물결조차 왼쪽과 오른족과 가운데 물결빛이 다르다. 다 다른 빛느낌을 점으로 하나하나 찍어서 모아야 비로소 물결빛 될 텐데, 여러 날 들여도 다 찍지 못할 물결빛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겠나. 언젠가 한 번, 고등학교 적이었지 싶은데, 물결빛을 다 다르게 그린 적 있는데, 미술 선생은 ‘장난하느냐?’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낙제점수를 주었다.


  뭉뚱그린대서 잘못 그린 그림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무 한 그루 잎사귀 빛깔이 모두 다르듯, 들풀 잎빛이 모두 다르다. 모시풀과 부추풀을 똑같이 그릴 수 없다. 콩잎과 깻잎을 똑같이 그릴 수 없다. 동백잎과 후박잎을 똑같이 그릴 수 없다. 해바라기잎과 찔레잎을 똑같이 그릴 수 없다. 감잎과 포도잎을 똑같이 그릴 수 없다. 살구잎과 매실잎을 똑같이 그릴 수 없다. 냉이잎과 씀바귀잎을 똑같은 빛깔로 그릴 수 있을까.


  한여름 시골마을과 시골숲을 가만히 바라본다. 나무마다 잎빛이 모두 다르니, 온통 짙푸른 빛깔로 우거졌다 하지만, 나무를 하나하나 헤아릴 만하고, 수풀에는 어떤 풀이 자라는가 찬찬히 돌아볼 만하다. 칡잎이랑 하늘타리잎이랑 다르잖아. 쑥잎이랑 까마중잎이랑 다르잖아. 이 다른 풀빛을 어떻게 ‘그냥 풀빛’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북적거리는 서울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엇비슷한 옷을 갖춰 입었어도 저마다 다르다. 아이들이 똑같은 학교옷 갖춰 입었다 하더라도 다 다르다. 얼굴과 키와 몸매만 다르지 않다. 생각과 마음이 다르고, 꿈과 사랑이 다르다. 다 다른 나무와 풀이 저마다 아름다우며 애틋하듯이, 다 다른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저마다 아름다우며 애틋하다. 다 다른 책이 저마다 살갑고 반갑다. 다 다른 이야기가 저마다 즐겁고 기쁘다. 여름에는 숲과 들을 마냥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상큼한 기운이 물씬 샘솟는다. 4346.7.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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