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차리는 밥



  한국 사회에는 평등이 없다. 평화도 민주도 없다. 그래서 집집마다 살림살이를 살피면 예나 이제나 ‘부엌데기 가시내’가 넘실거린다. 살림을 함께 맡거나 도맡으려는 사내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아이키우기를 가시내한테 떠넘기는 사내만 많을 뿐, 아이와 함께 누리는 삶을 생각하거나 그리는 사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언제부터 사내는 바보가 되었을까. 언제부터 사내는 밥도 못 짓고 옷도 못 짓고 돈만 버는 바보가 되었을까. 언제부터 사내는 가시내가 차리는 밥만 얻어 먹고, 가시내가 빨래하는 옷을 얻어 입으며, 가시내가 마련한 잠자리에 드러눕는가.


  아이와 함께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을 줄 아는 사내가 매우 드물다. 인문책은 읽을 줄 알아도 어린이책은 읽을 줄 모르는 사내만 득시글거린다. 이런 사내가 벼슬아치가 되어 복지나 문화나 교육 행정을 맡는다면 어떤 정책을 선보일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는 평등도 평화도 민주도 없기에, 집일을 하는 거룩한 사람은 ‘부엌데기’가 되고 ‘부엌일’을 몹시 힘들거나 싫어하기 마련이다. 가장 맛있는 밥은 언제나 손수 지어서 먹는 밥이건만, 날마다 밥을 차리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밥짓기는 어느새 고단한 ‘일거리’가 되고 만다.


  사다가 먹는 밥이 맛있을까? 전화를 걸어서 시켜 먹는 밥이 맛있을까? 자가용을 몰아 호텔이나 고급식당에 가면 밥이 맛있을까? 지구별 어떤 밥도, 손수 지어서 먹지 않는다면 맛있을 수 없다. 손수 씨앗을 심어서 거둔 뒤 지어서 먹는 밥처럼 맛있는 밥이란 없다.


  가시내도 사내도 제 밥은 제 손으로 차려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제 밥은 제 손으로 차려서 먹을 줄 알아야 하고, 아이들한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밥을 차려서 줄 수 있어야 한다. 손맛 깃든 집밥을 언제나 맛있게 먹을 수 있으려면, 우리 사회에 평등과 평화와 민주가 뿌리를 내려야겠지. 이 나라 수많은 ‘어머니’와 ‘여자’가 “남이 차리는 밥이 맛있다”고 말한다면, 참으로 까마득하다. ‘아버지’와 ‘남자’는 무언가 깨달아야 한다.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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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10-17 01:22   좋아요 0 | URL
갑자기 아~하는 한숨이 나옵니다. 전 아니지만 제 딸은 제발 하는 맘이네요

숲노래 2014-10-17 06:09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 님이 오늘 즐겁게 삶을 지으시면 다 되어요.
미래는 언제나 현재이기에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누리면서
아이와 이야기꽃을 피우면
아이는 모두 잘 받아먹어요~
 

아이들 잠자리 긴옷



  올 2014년 10월 14일 밤부터 아이들을 재울 적에 긴옷을 입히기로 한다. 이제부터 한낮에도 집안이 23∼24도에서 오락가락한다. 밤에도 이 온도가 거의 그대로 간다. 바야흐로 깊은 가을이요, 머잖아 겨울이로구나. 겨울로 접어들면 한두 차례 눈발이 날릴까. 눈발이 날릴 즈음 우리 집 마당 한쪽 동백나무에도 붉은 꽃송이가 환하게 터질까. 해가 뜨면 마당에서는 따스하고, 해가 지면 집에서도 썰렁하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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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76] 여기, 시골에서 놀아요

― 놀이터가 삶터가 될 때에



  자동차가 드물었을 적에,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아이들은 마음껏 뛰면서 놀았습니다. 자동차가 없었을 적에, 도시라는 곳은 따로 없이 서울도 똑같은 시골이었고, 이때에는 어디에서나 모든 아이들이 신나게 뛰면서 놀았습니다.


  자동차가 아주 많다 못해 넘치는 요즈음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아이들이 뛰놀기 어렵습니다. 시골은 도시와 대면 자동차가 없다 여길 만하지만, 경운기와 트랙터와 콤바인이 쉴새없이 지나다니고, 오토바이가 꽤 많습니다.


  얌전히 앉아서 놀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온몸을 개구지게 놀려야 튼튼하게 자랍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야 할 아이들이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 튼튼하게 자라면서 씩씩하고 아름다운 넋을 가꿀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집에서고 마당에서고 길에서고 언제나 뛰거나 달립니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뛰거나 달립니다. 기운이 늘 넘치고, 기운이 다하도록 놀았으면 새로운 기운을 뽑아내어 놉니다.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어른들은 길에서 자동차를 치워 주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자동차를 끌고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을 섣불리 자동차에 태우지 말고, 두 다리로 걷거나 달리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어른들도 두 다리로 걷거나 달리기를 바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는 고샅이나 골목에서 일거리를 찾고 하루를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까지 가야 하는 곳은 어른한테도 안 알맞은 일터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녀야 여행이나 나들이가 아닙니다. 아이와 손을 잡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에서 즐거운 숨결과 노래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보금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숲을 찾지 말고, 우리 보금자리와 둘레가 아름다운 숲이 되도록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극장이나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어야 합니다. 고속도로나 발전소를 새로 닦아야 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보듬어 숲을 돌보아야 합니다. 궁궐을 짓지 않고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던 지난날에는 사람들 누구나 나무로 집을 짓고 땔감으로 삼았어도 나무가 모자랄 일이 없었고, 숲이 망가질 일이 없었습니다. 큰 건물을 세우고 고속도로와 발전소와 온갖 문화시설을 만드는 오늘날에는 기름만 뽑아서 쓰지만 나무가 아주 빠르게 사라지고 숲이 허물어집니다.


  우리가 두 다리로 딛고 선 어느 곳이나 시골이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아이도 어른도 바로 오늘 이곳에서 놀고 일하며 쉴 수 있기를 꿈꿉니다. 놀이터가 삶터로 되고, 삶터가 일터인 나라를 모든 사람이 누리기를 꿈꿉니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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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꾸러미 선물



  오늘 아침과 낮에 도서관에 가서 ‘이야기 나누는 일’을 해야 했기에, 새벽 일찍 밥을 끓였고, 아침 일곱 시 즈음부터 배고프다 노래하는 아이들한테 여덟 시 살짝 넘어서 밥상을 차려서 먹인다. 이러구러 집일을 마치고 나서 아침 열 시 반 즈음 도서관으로 나와 책걸상을 맞추면서 자리를 잡는다. 비가 샌 곳은 걸레질을 해서 바닥을 훔친다. ‘이야기 나누는 일’은 세 시 즈음에 마친다. 손님을 모두 떠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손님들이 ‘아이들 주라’면서 빵을 두 꾸러미 선물로 주셨다. 집에 닿아 빵꾸러미를 펼치니 두 아이가 달라붙는다. 작은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빵을 한 조각이라도 더 먹겠다면서 낮잠을 버틴다. 그리고, 낮잠 버티기는 저녁까지 이어진다.


  아침 열한 시부터 낮 세 시까지 이야기를 했으니 몸이 좀 고단했을까. 등허리가 결려 자리에 드러누워 허리를 펴려는데 쉬 펴기 어렵다. 빵꾸러미 선물이 아니었으면 오늘 샛밥을 어째 먹였을까 싶다. 다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머니 손님이었으니 이런 선물을 챙겨 주셨구나 싶기도 하고, 나도 아이들 옆에서 몇 조각 집어먹으면서 새삼스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저녁 여덟 시 이십 분이 되어 겨우 두 아이를 자리에 눕힌다. 작은아이는 눕자마자 곯아떨어진다. 큰아이도 거의 곯아떨어지려 하는데 쉬 잠들려 하지 않다가, 자장노래를 두 가락 뽑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니 느긋하게 꿈나라로 간다. 4347.10.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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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먹으려고 열매를 딴다



  집에서 얻는 열매를 딴다. 한집에서 함께 사는 고운 숨결들과 나누려고 열매를 딴다. 집에서 따는 열매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먹음직스러울 때에 톡 따면 된다. 입에 군침이 돌 적에 톡 따면 된다. 조금 맺혔으면 조금 따고, 넉넉히 맺혔으면 넉넉히 딴다. 신나게 딴다. 웃으면서 딴다. 노래하면서 헹구고, 흥얼흥얼 부엌으로 불러 밥상맡에 둘러앉아 한 점씩 날름날름 집어서 먹는다. 아, 더 먹고 싶다, 하는 소리가 나오면 더 따도 되고, 더 익어야 한다면 이튿날에 따든 며칠 뒤에 따면 된다.


  집집마다 나무 몇 그루씩 건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집집마다 ‘우리 집 열매나무’를 건사하면서, 이 가울에 열매 하나 톡 따서 오순도순 나누어 먹는 즐거움과 사랑을 누릴 수 있기를 빈다. 스스로 나무를 아끼고 스스로 나무를 돌볼 적에 삶이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낀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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