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하는 글쓰기

― 이승철, 홍일선, 이재무 그대들은 잘 계신가?



  1998년이었지 싶다. 그해에 대학교를 그만두었는데, 동아리에서 늦도록 즐거운 이야기잔치를 누렸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술병을 앞에 놓고서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돌아가면서 했다. 숨기려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술잔을 비우기로 하고서 한 사람씩 ‘털어놓기’를 돌아가면서 하는데, 아무도 ‘속마음 드러내기’를 못했다. 돌고 돌아 나한테 오기 앞서 다른 이들 모습을 볼 적에 ‘왜 이렇게 다들 속마음을 못 드러내지?’ 싶었으나, 정작 내 몫이 되니 나도 내 속마음을 못 드러냈다. 달이 가고 해가 흘러 2018년에 새삼스레 생각한다. 이제는 굳이 가슴에 묻어둘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지 싶다. 말하지 않으니 서로 모른다. 말하지 않기에 안 달라진다. 이름을 숨기니까 다들 모를 뿐 아니라, 그 이름인 사람도 스스로 달라질 낌새가 없다. 좋은 님한테 “난 네가 좋아” 하고 말할 수 있어야겠지. 궂은 이한테 “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할 테고. 나는 1999년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가면서 ‘책으로만 보던 숱한 작가나 문인’을 ‘얼굴로도 보고 목소리로도 듣고 술자리에서나 일터에서나 으레 마주했’다. 출판사 막내였기에 모든 술자리에 ‘술 따르는 젊은 사내’로 불려갔고, 문단뿐 아니라 책마을 ‘어른’이라 일컫는 이들은 ‘젊은 가시내’뿐 아니라 ‘젊은 사내’가 따라 주는 술이 아니고는 마실 생각을 안 했다. 더구나 막내인 내가 술자리가 힘들어 그만 집에 가야 한다고, 전철 끊어지니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문단 어른이나 책마을 어른은 으레 한 마디를 했다. “야 임마, 너희 출판사 사무실에서 자면 되잖아. 사무실 바닥에 신문지 깔고 자면 되지.” 이러면서 밤을 지나 새벽에 이르도록 붙잡으니 매우 고되었다. 그때에는 몰랐지. 참으로 몰랐지. 왜 나이든 ‘문단 어른·책마을 어른’이라는 이들이 젊은 가시내뿐 아니라 젊은 사내 손이나 허리나 볼이나 허리나 엉덩이나 허벅지를 쓰다듬거나 만지는 줄 까맣게 몰랐지. 그러나 속으로는 되게 더러웠다. 그래서 그때에는 짜증스럽고 싫어서 막술을 마시면서 그런 더러운 손길을 잊으려 했다. 그들은 몰랐으리라. 그들이 더러운 손길로 내 볼을 살살 쓰다듬는 짓이 싫어서 술잔을 한칼에 털어넣은 까닭을. 그들은 그저 내가 술을 잘 마시는 젊은 사내인 줄로만 여겼겠지. 이제 나는 그런 짜증스럽고 싫고 더럽던 이들 손길을 잊고자 막술을 마시지 않는다. 맛난 술을 가끔 알맞게 즐기려 한다. 이러면서 한 가지를 생각한다. 지난날 어떤 ‘어른들께서’ 어떤 짓을 했는지, 문득문득 떠오르면 ‘그분들 이름’을 하나하나 털어놓을 만하구나 싶다.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 이야기를 들추는 시를 썼다는 얘기를 듣고 곧장 1999년 그해부터 2004년까지 보고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참 지저분한 고은 시인이라서 그이 시집은 안 쳐다본다고 하는 ‘책마을 여자 어른’이 많았다. 최영미 시인을 비아냥댄 이승철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이이는 2004년에 나를 해코지한 사람이다. 이승철이라는 시인이 나를 해코지할 적에 이녁 곁에 홍일선 시인이 나란히 앉아 이죽거리면서 “야, 왜 너 안 받아 줘? 네가 받아 줘야지? 이 xx가 말이야?” 하면서, 이승철하고 홍일선 이 두 사람은 성추행을 손사래치는 나한테 “문단이나 출판계에서 너 같은 놈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따위를 읊었다. 이 둘 곁에 이재무 시인이 있었고, 이재무 시인은 “난 소주만 있으면 돼.” 하면서 이승철·홍일선 두 사람이 나를 해코지하는 짓을 흘려넘겼다. 이른바 방관자. 이들이 하는 짓이 참 터무니없기도 했지만, 2004년 이날 뒤로 문단 어른이나 책마을 어른이라는 분, 또는 작가나 평론가라는 이들을 굳이 만나지 않기로 했다. 이들이 있는 모임이나 자리에 누가 나를 데려가려고 해도 몽땅 손사래쳤다. 그들이 나를 문단이나 책마을에 못 들어오게 막든 말든, 나 스스로 문단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하고, 이들이 권력을 부리는 큰 출판사하고는 등돌리기로 했다. 이 때문에 앞으로 열 해쯤 먹고살 길이 막혀 굶을 수 있었으나, 이쯤 얼마든지 견디면서 헤쳐나가자고 여겼다. 황해문화 김명인 편집위원이 매체와 만나서 한 말을 기사로 읽어 보는데, ‘절대다수 남자 문인이나 평론가’는 ‘동조자나 방조자’라는 그럴싸한 말은 하되, 그런 짓을 한 사람들 이름은 하나도 안 밝힌다.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서, 어떤 잘난 문단 어른이 잘난 짓을 하셨는지 하나도 안 밝히고 그대 가슴에만 묻어둔다면, ‘절대다수 남자 문인이나 평론가는 동조자이자 방조자’ 따위 말은 읊지도 말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이라면 평론질도 대학교수질도 그만두기를 바란다. 작품을 비평할 적에만 작가 이름을 들지 말 노릇이다. 막짓이나 막말을 일삼은 이들을 나무랄 적에도 그들 이름을 들기를 바란다. 이제는 말하는 글쓰기가 되기를 바란다. 청소 좀 하자. 먼지가 너무 오래 쌓여서 더께가 되었다. 더께를 벗기자니 아주 박박 문질러야 한다. 다들 소매를 걷어붙이자. 지저분한 집을 참말로 말끔히 치우는 글쓰기를 하자. 2018.2.1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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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글쓰기 / 숲노래 글꽃


누구나 글꽃

4 풀꽃나무처럼



  사람이 가지치기를 할 적에 나무가 반길까요?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꽃줄기를 꺾으면 꽃이 좋아할까요? 어떻겠습니까? 멀쩡히 있는 풀밭을 마구 밟는다든지 삽차로 까뒤집으면 풀이 기뻐할까요? 우리는 사람이라는 몸을 입었습니다만, “내가 나무라면? 내가 꽃이라면? 내가 풀이라면?”처럼 마음으로 스며들어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요.


  적잖은 어른들은 잿집(아파트)을 마련해서 살아가는데, 골목집(구도심·원도심)을 ‘안 깨끗하다’거나 ‘어수선하다·어지럽다’ 같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집 한 채가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넘으면 ‘뒤떨어졌다(낙후)’ 같은 말로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팔만대장경’을 품은 절집은 뒤떨어졌을까요? 빛살(전기)이 없더라도 즈믄해(1000년) 넘게 나무판을 정갈하게 지켜준 ‘나무와 흙과 돌과 짚으로 지은 집’은 얼른 허물어 잿더미(시멘트)로 다시 지어야 할까요?


  숲에는 푸른지붕집(청와대)이 없습니다. 숲에는 싸울아비(군인)가 없고, 싸움날개(전투기)가 없습니다. 숲에는 풀꽃나무가 있고, 풀벌레가 살고, 벌나비가 춤추고, 곰에 범에 토끼에 늑대에 오소리에 숱한 짐승이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어느 숨결도 ‘금(구역)’을 긋지 않아요.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알맞게 누리고 나누면서 어우러집니다. 사람들이 멋모르고 건드리거나 파헤치기에 숲이 죽거나 그만 불타고 말아요. 숲은 사랑이 없이 메마른 사람들이 함부로 망가뜨리려는 탓에 시름시름 앓다가 사라집니다.



 ㄱ. 꽃을 함부로 꺾는다면, 사람으로서는 목을 함부로 자르는 셈입니다. 나뭇가지를 함부로 친다면, 사람으로서는 팔다리를 함부로 자르는 셈입니다. 들풀을 함부로 뽑거나 갈아엎으면, 어린이를 마구 밟거나 때리는 셈입니다.


 ㄴ. 모든 풀꽃나무는 다 다른 풀과 꽃과 나무라는 결을 고스란히 이으면서 숲빛으로 피어나고 어우러질 적에 아름답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다른 숨결이라는 빛을 고이 건사하면서 즐겁게 펼 적에 사람답고 사랑스럽습니다.


 ㄷ. 남보다 좋아 보이도록 글을 매만진다면, 어느 글이든 글빛이 사라집니다. 남이 쓴 글보다 돋보이도록 글을 꾸민다면, 이런 글은 이미 글결을 잃어 ‘글시늉(겉은 글이되 정작 글이 아닌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ㄹ. 풀을 푸르게 품듯 글 한 줄을 품습니다. 꽃을 곱게 고루 곰곰이 고요히 보듯 글 두 줄을 씁니다. 나무 한 그루를 한 아름 안으며 서로 숨결을 나누듯 글 석 줄을 씁니다.



  풀꽃나무처럼 씁니다. 풀빛으로 쓰고, 꽃빛으로 쓰고, 나무빛으로 씁니다. ‘비유법·은유법·활유법·직유법·의인법·대유법·강조법·변화법’ 같은 꾸밈짓(수사법)은 꾸깃꾸깃 접어서 치울 노릇입니다. 글도 말도 얼굴도 몸매도 땅도 집도 옷도 모든 길도 ‘꾸미면 꾸밀’수록 겉치레로 기웁니다. 꾸미지 말고 가꿀 줄 알 노릇이고, 풀꽃나무 숨결을 그대로 맞아들여 사랑을 노래하는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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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글쓰기 / 숲노래 글꽃


누구나 글꽃

3 글 말고 말을 새로



  요즈음 둘레를 보면 ‘글쓰기 배움(강좌·수업)’이 아주 흔합니다. 나라 곳곳에 ‘글쓰기 배움밭’이 있어,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많더군요. 그런데 글쓰기는 따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는 일이에요.


  생각해 볼까요? 말하기를 배우면서 말을 하지 않아요. “말을 더 잘 하기”라든지 “말을 솜씨있게 하기”를 가르치는 자리가 있더군요. ‘스피치법·대화법’을 가르치던데요, ‘스피치법·대화법’은 ‘말하기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스피치법·대화법’은 오로지 ‘소리내기를 가르칩’니다.


  소리내기를 배우는 일은 나쁘지 않아요. 다만, 소리내기를 배우시더라도 ‘말하기’부터 배워야지요. 말하기는 안 배우면서 소리내기만 배운다면, 우리는 ‘벙긋쟁이’일 뿐이에요. “소리내기만 배우면 = 남이 하는 말을 외워서 그대로 따라하는 굴레”에 스스로 갇힙니다.


 ㄱ. 소리내기(스피치법·대화법)를 배워도 나쁘지는 않지만, 말하기부터 배웁시다.


 ㄴ. 소리내기만 배우면, 남이 하는 말을 외워서 그대로 따라하는 버릇이 들기에, 그만 스스로 굴레에 갇힙니다.


 ㄷ. 소리내기를 배우려면, 우리 몸·입·혀·이가 어떻게 다른지 스스로 느낄 노릇이에요. 말더듬이는 말솜씨꾼처럼 소리를 낼 수 없어요. 다 다른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소리를 내는 길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습니다.


 ㄹ. “말하기 = 마음밝히기”입니다. 마음을 누구나 알아듣도록 소리로 옮기기에 ‘말하기’입니다. ‘말하기’를 배우는 길이란, “마음을 밝히는 길”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ㅁ. ‘글쓰기 = 말을 옮기기’이고, ‘말하기 = 마음을 밝히기’라면, ‘마음 = 삶을 느끼고 바라보고 헤아려 담아낸 생각’이요, ‘생각 = 다 다른 우리 넋이 삶을 스스로 겪고 누리고 맛보고 해보면서 깨달은 빛이자 씨앗’입니다. “글쓰기 = 삶쓰기”인데, ‘글 = 말 = 마음 = 생각 = 삶’인 얼거리이거든요. 우리는 저마다 다르면서 빛나는 넋(숨결)이니, 우리 넋(숨결)을 그대로 나타내듯 말을 하면 되고, 이 말을 그대로 옮기는 글을 누리면 됩니다.


 ㅂ. “말하기를 배우기 = 삶을 배우기”입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삶·살림·사랑·숲에서 태어났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모든 사람들이 하루를 돌아보고, 숲을 바라보고,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길에, 이 모든 삶을 그대로 소리로 옮겨서 나타내던 마음이 ‘말’로 태어났습니다. ‘말하기 = 삶짓기’인 셈이에요.


  쉬운 우리말 ‘하늘’은 왜 ‘하늘’일까요? 쉬운 우리말 ‘집’이나 ‘밥’이나 ‘옷’은 어떤 말밑(어원)일까요? ‘몸·마음’은 어떤 말밑이고, ‘글·그림’은 어떤 말밑일까요? ‘가다·하다·날다·보다·심다’ 같은 쉬운 우리말은 무슨 뜻이고 어떤 말밑이면서 어떤 삶을 그린 말일까요?


  말하기를 배울 노릇이라는 이야기는, 우리말을 처음부터 새롭게 하나씩 배운다는 뜻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쉽고 흔한 여느 우리말을 하나하나 새롭게 짚으면서 서로 엮어서 차근차근 바라본다면, 말이 왜 말이고, 말이 어떤 삶을 담았는가를 스스로 알아차리겠지요.


  오늘날은 거의 서울말(표준말)이지만, 얼마 앞서까지 누구나 사투리(고장말·마을말·시골말)를 썼습니다. 사투리란,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은 삶을 나타낸 말”입니다. 사투리를 쓰던 아스라히 오랜 옛날 옛적 사람들은 글을 몰랐어요. 글은 모르되 늘 말을 하고, 손수 살림을 지었고, 말도 지었어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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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글쓰기 / 숲노래 글꽃


누구나 글꽃

2 글을 쓰기 힘들면



  입으로 말을 하기는 어렵지 않은데, 막상 셈틀이나 손전화를 켜고서 글을 쓰려면 턱 막힌다고 말씀하는 분이 많더군요. 글길이 막히는 까닭은 늘 하나예요. “글부터 쓰려고 달려들기” 때문에 글길이 막혀요.


  글부터 쓸 생각은 접으시기를 바라요. 살림부터 하면 되고, 삶을 노래하면 되고, 사랑을 속삭이면 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뛰놀고, 푸름이는 푸름이답게 꿈꾸고, 어른은 어른답게 일하면서 보금자리를 돌보면 넉넉해요.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우리 삶입니다. 우리가 쓸 모든 글은 참말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쓸 모든 글은 언제나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삶이나 이야기나 마음을 글로 옮기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우리는 다른 삶이나 이야기나 마음을 굳이 글로 풀어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살아가고 살림하고 사랑하는 오늘을 글로 여미면 되어요. 구경한 모습을 글로 옮기려 하지 마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림으로 익힌 우리 하루를 글로 옮기기로 해요.


 ㄱ. 입으로 천천히 말해 보기.

 ㄴ. 입으로 천천히 말하는 대로 종이에 옮겨적기.

 ㄷ. 손글씨로 종이에 옮겨적자니 손이 느리다면, 더 천천히 말하기.

 ㄹ. 손으로 종이에 내 말을 옮겨적을 수 있는 빠르기를 찾고 느끼기.

 ㅁ. 스스로 말을 하고 스스로 글로 옮겨적을 수 있는 빠르기가 익숙하도록 매무새를 가다듬고서, 늘 글꾸러미(수첩)를 챙기면서 지내기.


  글을 쓰기 힘들면, 말을 하면 됩니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옮기면 됩니다. 스스로 말이 너무 빨라서 천천히 하기가 힘드시다면, 손전화에 소리담기(녹음)를 하셔요. 손전화에 소리담기로 옮긴 말을 느긋하게 다시듣시를 하면서 손으로 옮겨적으면 됩니다.


  말을 옮겼기에 글입니다. 글은 따로 있지 않아요. 우리가 여느때에 늘 쓰는 말을 담았기에 글입니다. 글만 하늘에서 똑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서로 주거니받거니 듣고 들려주는 모든 말이 고스란히 글입니다.


  글만 따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어요. 우리가 스스로 하는 말을 스스로 옮기면 모두 글꽃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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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인천 16] 방학숙제 ‘식물채집’

― 사랑 없이 더미만 안긴 그곳



  국민학생이던 때, 방학이면 늘 어마어마하게 쌓이는 방학숙제에 짓눌립니다. 방학 동안 우리가 해내야 하는 짐(숙제)은, 첫째 일기, 둘째 탐구생활, 셋째 과목에 따라 멧더미 같은 베껴쓰기, 넷째 만들기·독후감·여행감상문 쓰기 들이었습니다. 일기는 이레 가운데 나흘은 꼭 써야 했고, 탐구생활은 빼곡하게 채워야 했습니다. 탐구생활을 하자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을 반드시 들어야 했기에, 탐구생활 방송이 나오는 20분 남짓을 맞추자면, 밖에 나가서 논다든지 어머니 심부름을 한다든지 그즈음 뭔가를 해야 하면 못 풀고 지나칩니다. 과목 숙제는 여느 때에도 늘 있는 숙제이지만, 방학을 맞이하면 길잡이(담임 교사)는 과목마다 무슨무슨 숙제를 해야 한다고 잔뜩 적어서 아예 표를 만든 뒤 나눠 주는데, 방학하는 날 나누어 주는 숙제표를 받을 때마다 동무들은 괴로운 소리를 뱉어냅니다. 다른 숙제도 숙제이지만 과목 숙제를 하자면 날마다 몇 시간씩 숙제에만 매달려도 빠듯하거든요. 만들기 숙제는 으레 ‘과학 만들기’입니다. 저는 다른 숙제는 그리 내키지 않아도 종이와 빨대 따위를 오리고 자르고 붙여서 집을 만든다든지 석유 캐는 배를 만든다든지 하면서 조물딱조물딱 하기를 즐겼습니다. 독후감 숙제야 여느 나날에도 한 달에 몇 벌씩 하는 숙제입니다. 걱정거리라면 여행감상문인데, 어디 여행을 다녀올 수 없는 살림일 때에는 ‘가까운 동무’한테 찾아갔다가 온 이야기를 이렁저렁 살을 붙여서 씁니다. “이게 무슨 여행감상문이야?” 하고 길잡이가 꾸짖으면, “어디 멀리 나갔다가 와야지만 여행인가요. 어느 곳을 다녀오든 새롭게 느끼고 생각하면 여행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면서 대꾸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대꾸를 할 적마다 출석부로 신나게 얻어맞았습니다.


  국민학교 낮은학년을 마감하고 높은학년으로 접어드는 4학년이 되니 새로운 방학숙제가 하나 생깁니다. 바로 ‘곤충채집’이나 ‘식물채집’ 한 가지 하기. 여기에 ‘취미활동 결과’ 하나 내기.


  그리 길지 않은 방학 동안 우리들한테 숙제만 하라고 들볶는 학교라 할 만한데, 따지고 보면 여느 나날에도 언제나 짐더미를 안기던 학교였습니다. 학교라는 곳은 숙제와 성금과 체벌과 시험과 단속과 검사와 훈련과 강요가 넘치는 곳이었어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무엇인가 알차고 즐겁게 ‘배운다’고 느낀 적은 하루조차 없었습니다. 무언가에 길들도록 우리를 내몰고, 그들(교사)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사납고 무시무시한 주먹과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4학년이 되어 맞이하는 여름방학 날, 과목 숙제와 탐구생활 따위와 함께 더 얹은 숙제를 길잡이가 알려줍니다. 다른 동무들은 죽겠다는 소리를 지르며 “방학 때 하루도 놀지 말라는 얘기예요?” 하고 따집니다. 책상을 치고 걸상을 끌며 대꾸합니다. 길잡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짐이 참 많다고 느끼지만, 동무들이 대꾸하는 꼴이 적이 짜증스러운 듯 “왜 이리 시끄러워? 방학 첫 날부터 맞아 봐야겠어?” 하며 굵직한 몽둥이로 교탁을 내리치며 조용히 시킵니다.


  새로운 방학숙제가 더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던 저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다른 짐이라면 모르지만 곤충채집이나 식물채집은 제가 늘 즐기는 일이고, 취미활동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형하고 우표모으기를 해왔거든요. 과목 숙제가 너무 많아 늘 힘들지, 다른 덤짐(추가 숙제)은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숙제가 없어도 이런 일은 언제나 으레 하며 살았으니, 으레 하던 그대로 짐으로 엮기만 하면 됩니다.


  곤충채집도 함께 할까 하다가, 벌레를 아무렇게나 잡아서 죽여 모으는 일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더군요. 언제나 나비에 잠자리에 딱정벌레에 개미에 거미에 사슴벌레에 베짱이에 사마귀에 방아깨비에 잘 잡으면서 놀았지만, 곤충채집장에 가느다란 못으로 쿡 찔러서 죽여서 담는 곤충채집을 며칠 해보다가 “잠자리를 잡고 손가락에 끼우고 놀다가 놔주는 일하고 채집은 너무 다르구나. 차마 이 아이들을 못으로 찔러 죽이지 못 하겠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을을 다니며 낯선 풀을 모조리 뽑아 모으는 일을 하자고 생각합니다. 벌레 한 마리도 살아숨쉬는 목숨이라면 풀 한 포기도 살아숨쉬는 목숨입니다. 다만, 어릴 적에는 이 대목까지 생각하지는 못 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본다면, 곤충채집은 풀벌레를 못으로 찔러죽이는 짓을 시키는 셈이요, 식물채집은 풀꽃을 뿌리까지 캐내어 말려죽이는 짓을 시키는 셈이에요.


  어린 앵두나무를 캐다가, 곧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텐데 싶은 들딸기를 캐다가, 씨앗을 맺어 퍼뜨리려던 제비꽃을 캐다가, 아직 자그마한 해바라기를 캐다가, 속으로 자꾸 뜨끔했습니다. 어릴 적에 식물채집을 하면서 “내가 자꾸 잘못을 하는구나. 바보 같은 나를 봐주렴.” 하고 속삭였어요. 얼핏 풀꽃나무가 제 마음으로 스며들어 “넌 풍뎅이를 못으로 찔러죽일 적에는 뜨끔하거나 못할 짓이라고 여기면서, 나를 뿌리째 캐내어 무거운 책더미에 짓누르고 말려서 죽이는 짓은 안 뜨끔하거나 안 못할 짓이라고 여기니?” 하고 따지는 듯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따지는 마음소리를 내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떡하니. 식물채집 숙제를 안 내면, 또 그놈(담임 교사)이 우리를 먼지 나게 두들겨패는걸? 또 맞기 싫어.” “네가 그놈한테 볼기를 얻어맞는다고 네 목숨이 사라져? 한동안 따끔하고 붓겠지만 네 목숨이 사라져? 아니잖아? 그런데 네가 우리를 뿌리를 안 남기고 모조리 뽑아내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어. 뿌리를 남겨 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이야.” “그렇지만 식물채집을 할 적에는 뿌리까지 캐라고 했어.” “이그, 너는 그놈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구나? 너한테 말을 건 내가 잘못이네.” “아,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내가 어리석어.”


  여름방학 동안에는 꽃삽이나 호미랑 비닐자루랑 책을 챙겨서 다녔습니다. 풀꽃을 캐면 흙을 털고 잎을 반듯하게 펴서 책 사이에 끼웠습니다. 처음 이 짐을 하라고 시키는 말을 듣던 1985년(4학년) 여름날에는 모처럼 ‘할 만한 짐’이라고 여겼으나, 풀꽃을 모으면 모을수록 속으로 켕겼습니다.


  그래도 4학년과 5학년과 6학년 세 해를 보내는 동안, 동무들하고 놀다가 틈틈이 풀을 뽑아서 그러모읍니다. 뿌리까지 알뜰히 캐야 하는데, 밖에서 뛰놀 적에는 호미 같은 연장은 미처 못 챙기기 마련이니, 놀다가 풀을 캘 적에는 손으로 땅을 파서 풀포기를 한 뿌리 두 뿌리 모읍니다. 


  뽑아서 집으로 가져온 풀포기는 뿌리와 잎에 묻은 흙을 잘 털어낸 다음 신문 사이에 누르고 두꺼운 책들, 이를테면 전화번호부를 위에 올리고 눌러 놓습니다. 적어도 이레쯤 눌러 놓아 납작쿵이 됩니다. 셀로판테이프(비치는 테이프)를 가늘게 잘라서 두꺼운 그림종이 하얀 쪽에 붙입니다. 뿌리가 길면 뿌리는 잘라서 옆에 붙입니다. 뽑거나 캔 풀마다 이름이 무엇인가는 거의 어머니가 알려줍니다. 방학을 하기 앞서 제 ‘식물채집장’은 일찌감치 서른 쪽이든 쉰 쪽이든 꽉꽉 찹니다. 방학 동안 제 식물채집장을 꾸미려고 하는 일이란, 겉에 글씨를 종이로 파서 예쁘게 붙이기라고 할 만합니다. 여느 때에 이미 식물채집을 다 해놓았기에, 여름방학에는 껍데기를 얼마나 더 예쁘고 돋보이도록 할까에 마음을 썼습니다. 어쩌면 너무 마땅할는지 모르는데, 제 식물채집장은 방학이 되기 앞서 다 마쳐 놓았기에, 다른 동무하고 견주어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밖에 없고, 5학년 때 식물채집장은 학교를 통틀어 가장 잘한 방학숙제라며 ‘최우수’를 받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식물채집이든 곤충채집이든 방학이라는 짧은 동안에 하라고 시킬 짐이어서는 안 될 노릇이지 싶습니다. 풀이든 벌레이든 사람들이 함부로 갈무리해서는 안 되기도 하지만, 이를 짐으로 여기도록 하면서 애먼 목숨을 죽이도록 길들여서는 안 돼요. 참다이 숲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풀을 들여다보고 벌레를 살펴보는 마음을 길러 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채집장’이 아닌 ‘그림묶음’을 내도록 하는 길이 옳다고 느낍니다. 풀벌레나 풀꽃을 ‘잡아죽여 모으’는 채집장이 아니라, 풀벌레나 풀꽃을 지켜보고서 그림으로 담는 ‘그림묶음’을 하도록 북돋울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학에 반짝 힘겹게 시키는 짐더미가 아닌, 여느 때에 이처럼 스스로 둘레를 살피고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어야 할 테지요. 따로 ‘방학숙제’란 이름으로 시켜서 짜맞추는 굴레가 아닌, ‘언제나 즐겁게 누리고 해온 아이만 내도록’ 해야 할 테고요. 이제는 배움터에서 어린이를 사납게 두들겨패거나 막말을 일삼는 길잡이가 사라졌을 테지만, 참말로 이러한 ‘채집이나 모으기나 만들기’를 안 했다고 해서 두들겨패거나 점수를 깎아서는 안 됩니다. 지난날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팬 그들은 그들이 일삼은 주먹질(학교폭력)을 조금이라도 뉘우칠까요?


  우리는 짐더미가 아닌 사랑으로 커 나갈 저마다 곱고 어여쁜 어린이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눈길을 익히고 고운 손길을 다스리며 착한 마음길을 북돋울 어린이입니다. 어린이가 신나게 뛰놀면서 마음을 가꿀 적에 아름답게 철드는 어른으로 설 수 있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2010년에 써둔 글이다.

조금 손질했다.

그무렵에 인천을 떠나기 앞서

몇 꼭지를 썼는데

틈나는 대로 마저 더 쓰자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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