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책 함께 읽기 (Brian Lanker)

 


  사진책을 살 적마다 ‘이 사진책을 언제부터 아이하고 함께 들여다볼 만할까’ 하고 헤아린다. 어린 우리 아이들도 들여다볼 만한 사진책이 될는지, 어린 우리 아이들한테는 보여줄 만하지 않은 사진책이 될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상을 받았다고 하는 다큐사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 함부로 보여줄 수 없다. ‘끔찍한 죽음’을 담은 사진이기에 아이들한테 함부로 못 보여주지는 않는다. 보여줄 뜻이나 값이나 보람이 없으면 보여줄 까닭이 없다. 게다가, 다큐사진이라 하면 사람들이 으레 ‘어두운 이야기’만 떠올리는데, 다큐사진은 하나도 어두울 까닭 없다. 밝든 어둡든 대수롭지 않다만,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을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있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라 할 수 있다.


  ‘Brian Lanker’라 하는 미국 사진쟁이 사진책 하나를 장만한 지 한 달 즈음 되는데, 집일에 치여 한 쪽조차 못 펼친 채 마루 한켠에 덩그러니 얹어놓기만 했다. 엊저녁 비로소 책을 펼친다. 처음 장만할 적에는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중에 언제 다시 보겠느냐’ 생각하며 장만했는데, 사진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살피고 보니, 무척 뜻깊은 사진이면서, 매우 마음 기울여 담은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낀다. 혼자서 사진을 죽 넘기다가 큰아이를 부른다. 다섯 살 큰아이더러 “여기 할머니들 사진 볼래. 할머니들이 뭐를 하는 모습일까.” 하고 말하면서 함께 들여다본다. 사진만 보더라도 사진으로 찍힌 이들이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헤아릴 만하다. 사진에 붙인 글을 읽어도 발자국을 알 만하고, 사진에 붙인 글을 애써 안 읽어도 사진으로 삶을 읽을 만하다.


  그러고 보면, 글책이건 그림책이건 사진책이건, 이러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날개를 펼 수 있도록 이야기를 담아야 비로소 ‘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구나 싶다. 겉모양이 책이라서 ‘책’이 되지는 않는다. 알맹이가 어여삐 책이 되어야 ‘책’이다. 밥도, 삶도, 사람도, 사랑도, 꿈도, 믿음도, 겉껍데기로는 따지지 않는다. 모든 자리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속알맹이로 따진다. 가슴 깊이 사랑할 노릇이다. 마음 깊이 아끼며 꿈꿀 노릇이다. 4345.12.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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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지키는 길 (도서관일기 2012.12.16.)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도시에서 살아가든 시골에서 살아가든 비닐봉지가 참 많이 나온다. 장바구니와 가방을 챙기며 저잣거리 마실을 다니더라도 비닐봉지 몇 장씩 받을밖에 없고, 택배를 받을 적에도 이웃들은 으레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서 보낸다. 비닐봉지는 잘 펴서 갠다. 까만 비닐봉지는 쓰레기통처럼 쓰고, 조금 큰 비닐봉지는 따로 건사해서, 먼 마실 다닐 적에 식구들 옷가지 담을 때에 쓴다. 속 비치는 비닐봉지는 차곡차곡 모아, 서재도서관에 갈 때에 챙긴다. 서재도서관 책꽂이마다 곰팡이가 올라오기에, 이 곰팡이한테서 책을 지키려고 책을 비닐봉지로 싼다. 따로 어찌저찌 손을 쓰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하자고 생각한다. 우리 서재도서관은 사진책도서관인 만큼, 어느 책보다 먼저 사진책을 비닐로 싼다.


  한낮 빛살이 스며든다. 겨울철에는 창문을 닫으면 교실 안쪽이 퍽 따숩다. 유리창은 바람을 막으면서 햇볕이 곱게 들어오도록 해 준다. 아이들은 따순 교실을 이리저리 내달리면서 논다. 두 아이는 서로 술래잡기를 한다. 작은아이는 아버지 다리에 붙으며 숨는다고 애쓴다. 큰아이는 스티커책에서 종이딱지를 하나하나 떼어 손가락에 붙인다. 이러다 문득, 손가락에 붙인 종이딱지가 스티커책에 나오는 그림하고 똑같다고 깨달아, 스티커책에 종이딱지를 옮겨 붙인다.


  서재도서관에 깃든 책은 내가 이제껏 살아오며 건사한 책이다. 내가 즐겁게 읽으며 장만한 책이요, 두 번 열 번 백 번 되풀이해서 읽은 책이다. 오늘 내가 이 책을 알뜰히 돌보며 지킨다면,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이 책을 누릴 수 있으리라. 종이책이 차츰 줄어들 앞날이 될 테고, 새 도서관이 선다 하더라도 ‘갓 나오는 책’을 두는 흐름으로 갈 뿐, ‘예전에 나온 책’을 새삼스레 그러모으는 몫은 안 한다. 나는 새로 나오는 책도 꾸준히 사서 읽지만, 예전에 나온 책도 바지런히 사서 읽는다. 우리가 읽을 책이란 ‘새로 나오는 책’이 아니라 ‘삶과 사랑이 감도는 이야기가 있는 책’일 테니까.


  여느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언제나 ‘새로 나오는 책’만 다룬다. 도서관 일꾼조차 아직 ‘삶과 사랑이 감도는 이야기가 있는 책’을 알려주거나 다루지 못한다. 우리 아이나 이웃한테는 ‘읽을 만한 책’을 알려줄 일은 없다. 읽을 만한 책은 사람들 스스로 찾으면 된다. 책지기 노릇을 하는 사람이 할 몫이란, ‘삶을 밝히는 이야기’와 ‘사랑을 꽃피우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환하게 깨달아, 즐겁고 예쁘게 아이들과 이웃들한테 나누어 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지키자면 책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된다. 곧, 도서관이라는 시설이 따로 없더라도, ‘책에 깃드는 삶’을 사랑하는 매무새 되어 하루하루 스스로 곱게 누린다면, 여느 사람 누구나 책을 지키는 일꾼, ‘책지기’가 된다. (ㅎㄲㅅㄱ)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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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 결과를 보며 슬퍼 할 이웃한테...

 


노랫소리 (사운드 오브 뮤직)

 


  꿈과 사랑과 이야기가 넘치는 나라 오스트리아에 제국주의 그늘이 드리우면서 모든 평화와 평등과 평안을 짓밟으려는 독재자가 아귀를 벌린다. 어떤 이는 재빠르게 제국주의 독재자 곁에 빌붙으면서 ‘새끼 제국주의자’나 ‘새끼 독재자’가 되고, 어떤 이는 시나브로 ‘고개숙인 사람’이 되어 입을 다문다. 어떤 이는 제국주의도 독재도 싫어 조용히 숨어 지내고, 어떤 이는 제국주의 독재 나라를 씩씩하게 떠난다.


  영화 〈노랫소리〉, 그러니까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 일곱 아이와 두 어른은 집도 돈도 이름도 모두 ‘제국주의 독재 나라’에 고스란히 남기고, 이녁 몸뚱이만 홀가분하게 건사하면서 높은 멧골을 넘는다. 제국주의 독재 나라가 된 ‘통합 독일 제국’에서 준다는 훈장이나 계급이나 신분이란, 내 이웃이랑 동무를 밟아죽이는 끔찍한 짓일 뿐 아니라, 나 스스로를 밟아없애는 못난 짓인 줄 알기 때문이다.


  아홉 사람이 오스트리아 멧골을 타고 스위스로 넘어가는 영화 마지막 대목에서 눈부시게 흐르는 ‘아름다운 숲’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넋으로 살아가고 싶기에 아름다운 숲을 누비면서 아름다운 새터를 찾아간다. ‘내빼는’ 일이란 어리숙하거나 모자란 짓이라고 누군가 말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내빼는’ 일이야말로 더없이 ‘씩씩한’ 삶이라고 느낀다. 제국주의 독재가 되어 버린 나라에 꿋꿋하게 남아서 싸우거나 버티는 일도 대단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몸으로 ‘떠나는’ 일 또한 스스로 다부진 기운을 드러내지 않고서야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독재 나라를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서 텅텅 비도록 한다면, 어떤 독재자나 권력자라 하더라도 아무것 못한다. 나폴레옹이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 간다고 할 적에, 러시아가 한 일은 무엇인가. 싸우지 않고 ‘마을을 통째로 비우기’였다. 이때 나폴레옹 군대가 무엇을 할 수 있던가. 지친 군대는 밥도 옷도 집도 없이 헐벗는다.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러시아를 차지했다고 소리높이 외치지만, 막상 널따란 러시아에서 아무것 못하며 쓸쓸하고 힘겹게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으며,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에는 ‘숨어 지켜보던 러시아 병사’한테 떼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제국주의 독재 나라에는 노랫소리가 흐르지 않는다. 아니, 노랫소리가 흐를 수 없다. 2012년 12월 19일을 발판 삼아, 한국을 떠나는 이들 모두한테 아름다운 노랫소리 흐르기를 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은 ‘서울을 떠나’고 ‘도시를 떠나’면서, 제국주의 독재 기운을 아무리 펼치려고 해도 펼치지 못하도록 한다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날마다 만 사람씩 서울이나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갈 수 있으면, 이리하여 한 달 지나 삼십 만, 석 달 지나 백만, 한 해 지나 삼백육십오만 사람이 ‘제국주의 독재 꼴’을 안 보면서 시골에서 스스로 흙이랑 풀이랑 햇살이랑 바람이랑 냇물을 사랑하며 조용히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어여쁠까. 숲을 누리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노래를 부른다. 푸른 기운 받아먹는 사람이라야 푸른 사랑을 노래한다. 햇살은 숲을 푸르게 빛내고, 푸르게 빛나는 숲에 깃든 사람은 따사로운 꿈을 노래한다. 4345.12.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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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봄꽃 책읽기

 


  지난 시월 고흥 발포 바닷가에서 ‘새로 핀 벚꽃’을 보았다. 지난 십일월에는 우리 고흥 동백마을에도 석류꽃이 다시 피었다. 석류는 가을날 좀 일찍 열매를 맺는데, 열매를 다 떨군 석류나무에 석류꽃 두어 송이 작다랗게 맺힌 모습을 보았다. 십이월 접어들며 찬바람과 찬눈이 살짝 찾아드니 십일월에 새로 돋은 감잎이며 매화잎이며 석류잎이며 우수수 떨어지는데, 찬바람과 찬눈이 지나가고 나서 겨울비가 내리고 따순 햇볕 여러 날 비추니, 이른봄에 맨 먼저 피어나는 봄꽃 세 가지가 나란히 핀다. 광대나물꽃·봄까지꽃·별꽃. 오늘은 다시 찬바람이 분다. 찬바람 불면 애써 피어난 봄꽃은 봉오리를 꼭 닫는다. 따숩게 찾아드는 볕과 바람이 없으면, 이들 봄꽃은 아마 겨우내 봉오리를 꼭 닫은 채 겨울나기를 할 테지. 동백꽃은 찬눈 맞으면서도 봉오리를 닫지 않으나, 이른봄 들꽃은 찬바람 조그만 불어도 아이 추워 하면서 옹크린다. 그런데 이런 봄 들꽃들이 가장 먼저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 야무지다고 할까, 씩씩하다고 할까, 참으로 싱그럽다.


  따사로운 겨울볕에 빨래는 잘 마르고, 모처럼 이불도 해바라기를 시킨다. 아이들과 자전거마실을 하며 겨울에 핀 봄꽃을 즐거이 마주하며 인사한다. 며칠 찬바람 불고 나서 다시 마실을 하면 이들 어여쁘고 앙증맞은 자그마한 봄 들꽃 다시 만날 수 있겠지. 4345.12.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2012년 12월 16일 낮에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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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기
― 보고 싶은 대로 찍는다

 


  보고 싶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은 사진으로 못 찍습니다. 안 찍는다고 해야 할까요.


  나누고 싶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나누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면 애써 바라보지 않을 뿐더러, 딱히 사진으로 담을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사랑스레 느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좋다 느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그러나,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한다면, 보고 싶지 않거나 나누고 싶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좋다 느끼지 않더라도, 사진을 찍어야 할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사진관에서 일한다거나 스튜디오에서 일하면 이런 사진도 찍을밖에 없습니다.


  한국에는 무기공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군대가 있거든요. 군인이 입을 옷을 만드는 공장이 있고, 군인이 먹는 밥을 만드는 공장도 있어요.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은 모두 ‘전쟁에 이바지하는 일’을 하는 셈입니다. 탱크를 만들거나 전투기를 만들거나 군함을 만드는 일도 모두 ‘전쟁놀이’라 할 만합니다. 아마, 누군가는 ‘군대가 있어야 평화를 지킨다’는 생각일 테고, 누군가는 ‘군대가 있으니 평화가 없다’는 생각이지만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냥 공장 일꾼으로 지내리라 봅니다.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진입니다. 보고 싶은 모습을 스스로 즐겁게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내가 이 사진을 바라보면서 빙긋 웃기’도 하지만, 내 이웃이나 동무도 이 사진을 바라보면서 빙긋 웃을 만해요. 그렇지만, 내가 썩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지만 돈을 벌어야 해서 찍는 사진일 때에는, 겉보기로는 퍽 그럴싸하거나 예쁘장해 보인다 하더라도, 빙긋 웃을 만하지 않아요. 꾸몄거든요. 치레했거든요. 꾸미거나 치레한대서 잘못이지는 않은데, 꾸미거나 치레하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 넋과 삶과 꿈과 사랑’이 담기지 못해요.


  시골집에서 두 아이와 살아가며 두 아이 담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내가 찍은 내 사진을 내가 가만히 바라봅니다. 엊저녁 조용히 사진을 바라보다 보니, 내 사진에 두 아이가 나란히 담기는 사진이 나날이 늘어나는구나 싶습니다. 작은아이가 돌을 지나 한참 걷고 뛰고 하느라 부산할 적에는 큰아이 따로 작은아이 따로 찍곤 했는데, 요즈음은 두 아이가 나란히 담기는 사진이 퍽 많아요. 아무래도, 내 삶이란, 내가 느끼는 하루란, 두 아이가 서로 사이좋게 놀고 어울리면서 빛내는 모습이기 때문일까요. 둘이 활짝 웃으며 놀고 어깨동무하기를 바라니까, 이 바람이 내 사진에 살포시 담길까요. 모두모두 어여쁩니다. 4345.12.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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