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70 숲에서 살리는 말
내가 쓰는 말을 손수 지을 때에, 나는 늘 가없는 곳으로 새롭게 나아갑니다. 내가 쓰는 말을 손수 짓지 못할 때에, 나는 늘 똑같은 곳에서 쳇바퀴를 돌듯이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나는 남이 만든 말만 쓰면서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남이 만든 울타리에서 아무 걱정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남이 만든 쳇바퀴를 타면서 밥을 안 굶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남이 만든 이야기에 폭 사로잡혀서 내 이야기는 하나도 안 지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쓸 말을 손수 짓는 사람은, 내가 먹을 밥을 손수 짓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웃과 주고받을 말을 손수 짓는 사람은, 내가 입을 옷을 손수 짓는 사람입니다. 내가 곁님과 아이하고 나눌 말을 손수 짓는 사람은, 내가 머물 집을 손수 짓는 사람입니다. 내가 꿈꾸려는 말을 손수 짓는 사람은, 내가 걸어갈 이 길을 손수 열어서 내 삶을 손수 짓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숲에서 삽니다. 사람이 숲을 지었을 수 있고, 숲이 사람을 지었을 수 있으며, 숲과 사람은 서로 한꺼번에 스스로 지어서 태어났을 수 있습니다.
숲은 지구별 모든 목숨이 깃드는 터전입니다. 지구별이 통째로 숲입니다. 겉으로 보자면, “나무가 우거진 곳”을 일컬어 ‘숲’이라 하는데, 숲은 그저 “나무가 우거진 곳”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온 목숨이 깃들어 사는 터”가 바로 ‘숲’입니다. 지구별이 통째로 새로운 숲이요, 지구별처럼 다른 별도 오롯이 새로운 숲입니다. 별과 별이 어우러진 별누리(은하)도 옹글게 새로운 숲입니다. 별누리와 별누리가 어우러진 온누리(우주)도 하나로 새로운 숲입니다. 이리하여, 사람은 숲에서 말을 짓습니다. 사람은 숲을 살리면서 말을 살립니다. 사람은 스스로 제 목숨을 살리면서 제 숨결을 터뜨리는 말을 터뜨립니다.
숲사람은 숲말을 짓습니다. 숲사람이 지은 숲말에는 숲결이 드러나고, 숲내음이 묻어나며, 숲노래가 흐릅니다. 숲에서 바람이 붑니다. 숲바람입니다. 숲바람은 지구별을 골고루 돌면서 어느 곳에서나 새로운 숨으로 깃듭니다. 벌레도, 풀과 꽃도, 나무도, 짐승과 새도, 물고기와 사람도, 다 함께 ‘바람이 숲에서 일으킨 숨’을 마시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숲에서 지은 말은 바로 사람 스스로 살리는 말입니다. 숲에서 지은 말은 바로 사람 스스로 생각을 드러내는 숨결입니다. 숲에서 지은 말은 바로 사람 스스로 ‘머리에서 생각을 짓고 마음에 씨앗을 심어 몸으로 삶을 이루는 하루’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숲사람은 스스로 ‘숲’이라는 낱말을 짓고, ‘사람’이라는 낱말을 지으며, ‘흙·해·바람·물·꽃·나무’ 같은 낱말을 짓습니다. ‘님·곁·우리·너·나’ 같은 낱말과 ‘밥·옷·집’ 같은 낱말을 짓습니다. 이윽고 ‘사랑·꿈·따스함·봄·겨울·추위’ 같은 낱말을 지으면서, 새롭게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숲사람은 새로운 말을 스스로 끝없이 짓습니다. 숲사람은 새로운 말을 손수 가없이 지으면서, 그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숲을 등돌리거나 등집니다. ‘숲에서 살리는 말’이 아닌 ‘문명과 권력과 종교로 만드는 말’을 세워서 ‘너와 나 사이’에 ‘종(노예)’을 둡니다. 네가 나를 종으로 삼고, 내가 너를 종으로 부립니다. 새로운 말이 태어나지 않으면서, 쳇바퀴 삶이 됩니다. 새로운 말이 막히면서, 톱니바퀴처럼 구를 뿐입니다. 새로운 말을 잊으면서, 문명과 권력과 종교는 커집니다. 새로운 말을 잃으면서, 사람다운 사랑과 꿈을 함께 잃습니다.
오늘날 지구별에서는 ‘새말’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숲말’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유행말’이 떠돌고 ‘영어 권력’이 자랍니다. 홀가분한 넋이 숨을 쉬지 못하고, 아름다운 숨결이 퍼지지 못합니다. 스스로 숲을 저버리기에 스스로 숲말을 저버리는 셈입니다. 스스로 숲을 가꾸지 못하기에 스스로 숲말을 못 가꾸는 셈입니다.
틀에 박힌 말은 우리 생각이 못 자라도록 막습니다. 제도권과 사회제도는 우리가 스스로 못 자라도록 찍어 누릅니다. 씨앗 한 톨이 너른 숲이 되고 온누리로 퍼지듯이, 말씨 하나를 마음에 심어서 너른 사랑이 되고 온누리에서 눈부시게 깨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숲과 내가 한몸이면서 한마음인 줄 바라볼 때에 비로소 숲말을 손수 짓는 아름다운 삶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8.3.6.쇠.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