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 35 | 36 | 3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말·넋·삶 92 물불, 불물



  한국말사전에서 ‘물불’을 찾아보면, 요즈음 사전에는 이 낱말이 나오지만, 옛날 사전에는 이 낱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자사전이나 일본말사전에는 ‘水火’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에도 ‘수화(水火)’가 나오는데, “1. = 물불 2. = 물불 3. 일상생활에서 필요 불가결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4. 큰 재난을 일으키는 물이나 불처럼 그 기세가 대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5. 물과 불처럼 서로 상극이 되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불’ 뜻풀이는 “물과 불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어려움이나 위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나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물불’이라는 낱말을 “물과 불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는 잘 안 씁니다. 물과 불을 나타내려고 하면 ‘물과 불’처럼 씁니다. 거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꼴로 씁니다. 이 쓰임새를 곰곰이 살피면, 한국말사전에서 ‘물불’로 적기는 합니다만, 일제강점기에 일본 한자말 ‘水火’를 ‘수화’처럼 적다가, 해방 언저리부터 ‘물불’로 고쳐서 썼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물과 불은 언뜻 보자면 서로 다르다 할 만합니다. 물이 있으니 불이 꺼지고, 불이 있으니 물이 마릅니다. 그러나, 곰곰이 살피면, 물을 불로 끓여서 따뜻하게 마십니다. 불을 물로 다스리면서 여러 가지 살림이나 기계를 씁니다. 둘은 어긋나서 부딪히는(상극) 것이 아니라, ‘몸(모습)’이 다를 뿐인 하나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람들 넋이 깃드는 몸에는 늘 피가 흐릅니다. 피는 ‘물’입니다. 그런데, 피는 그냥 물이 아닙니다. ‘불을 담은 물’입니다. 피는 먼저 따스한 기운이 있어서 ‘불’과 같습니다. 그리고, 피는 빨간 빛으로 이루어져서 ‘불’과 같아요. 다시 말하자면, ‘피 = 불물’이라고 할 만합니다. ‘불로 이루어진 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몸은 ‘불물’이라고 할 피가 흘러야 몸입니다. 우리 몸에 흐르는 피에서 ‘불과 같은 따스한 기운’이 사라진다면, 몸이 식습니다. 몸이 식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지요. 죽으면 어찌 될까요? ‘불물’이던 ‘피’는 곧바로 마르고 굳어서 사라집니다. 물에서 ‘불 기운’이 없으면 물이 아닌 셈입니다.


  물이 얼음으로 바뀌는 까닭도, 물에서 ‘불과 같은 따스한 기운’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이 김(아지랑이, 수증기)으로 바뀌는 까닭은, 물에서 ‘불과 같은 따스한 기운’이 너무 뜨겁게 달라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곁에서 사람들 삶을 아름답게 돌보도록 하는 ‘피(불물)’가 되거나 ‘물(마시는 물)’이 되자면, ‘고르게 따스한 기운’이어야 합니다. 빗물이든 냇물이든 바닷물이든 모두 ‘한결같이 따스하게 흐르는 기운’이어야 ‘물’로 있을 수 있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같은 말은 왜 생겼을까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수화(물불)’이었을 텐데, 한국에서는 ‘불물’입니다. 그러니까, ‘내 피를 따지지 않는’ 셈입니다. ‘내 목숨(숨결)을 가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내 피가 어떻게 되든 뛰어들기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같은 말을 쓸 수 있습니다.


  물만 넘치거나 불만 넘치면, 끔찍하다는 일이 터집니다. 우리 누리는 온(모든) 것이 오롯이 있을 때에 ‘온누리’입니다. 온누리가 아니라면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곧, ‘물누리·불누리’라 한다면, 물바다와 불바다가 될 테니, 한쪽으로만 치달은 셈입니다. 물로만 치닫거나 불로만 치달으면 어찌 될까요? 모두 죽어요. 어느 쪽으로 치닫든 모두 죽음입니다. 이쪽이 맞거나 옳거나 좋지 않습니다. 저쪽이 맞거나 옳거나 좋지 않습니다. 우리한테는 둘 모두 아름답게 있어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가운데(중도, 중립)’에 있어야 하지 않아요. 둘이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기쁘고 살갑게 나란히 있어야 합니다. 4348.3.13.쇠.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삶 91 눈을 감고, 눈을 뜨다



  눈을 감은 사람이 눈을 뜹니다. 눈을 뜬 사람이 눈을 감습니다. 참으로 쉬우면서 뚜렷한 말입니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눈을 떠야 바야흐로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을 감지 않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합니다. 눈에 새까만 어둠을 드리우지 않는다면, 눈이 환하게 뜨이지 않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겉모습을 바라보는 눈을 감아야, 비로소 속마음을 바라보는 눈을 뜹니다. 속마음을 바라보는 눈을 뜨는 사람일 때에, 겉모습에 휘둘리면서 오직 겉만 훑어보는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으면서 떠야 합니다. 서로서로 겉치레로 나아가는 눈으로는 삶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속마음을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눈이 되어야 삶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면서 감아야 합니다. 서로서로 사랑을 바라보고 꿈을 마주할 때에 비로소 삶을 짓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꿈 앞에서 눈을 감는다면 아무런 삶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에 달린 눈’을 감는 삶이 될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일곱 가지 눈이 있기 때문에 ‘몸에 달린 눈(첫째 눈)’을 감아야, 비로소 다른 여섯 가지 눈으로 마음을 바라보면서 읽고, 꿈을 바라보면서 읽으며, 사랑을 바라보면서 읽다가,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읽고, 기쁨을 바라보면서 읽을 줄 알며, 노래를 바라보면서 읽는 숨결로 거듭납니다.


  눈을 떠도 장님인 사람이 많습니다. 겉모습에 얽매이기 때문에 겉모습조차 제대로 못 읽기 일쑤입니다. 겉으로는 웃는 사람이 속으로는 꿍꿍이를 숨긴 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눈 뜬 장님’입니다. 이렇게 눈 뜬 장님이라면, 눈을 뜬들 무엇을 볼까요? 눈으로 보는 것 가운데 무엇을 믿거나 알거나 생각할 수 있을까요?


  눈을 감아도 장님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눈을 감은 채 겉모습을 아주 또렷이 읽’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우는 사람이 속으로는 웃는 줄 읽을 수 있어요. 이렇게 ‘눈을 감은 빛살’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지을 만해요.


  내 눈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라고 있는 눈이 아닙니다. 내 눈은 사랑과 꿈으로 나아가는 삶을 보라고 있는 눈입니다. 내 눈은 겉모습이나 몸매나 얼굴을 보라고 있는 눈이 아닙니다. 내 눈은 마음과 생각과 넋을 마주하면서 아름다운 바람처럼 나아가라고 있는 눈입니다.


  눈을 감고 걷는다고 해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걷는다고 해서 안 넘어지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잔다고 해서 고단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잔다고 해서 개운하지 않습니다. 눈을 떠야 할 곳에서 뜰 수 있어야 눈이고, 눈을 감아야 할 곳에서 감을 수 있어야 눈입니다. 눈빛은 눈을 감아도 환하게 온누리를 비춥니다. 눈망울은 눈을 감아도 해맑게 별누리를 감쌉니다. 눈길은 눈을 감아도 따사롭게 온별누리를 어루만집니다.


  사람한테 두 눈이 있는 까닭은, 두 눈으로 이승과 저승을 함께 사랑하고, 너와 내가 한마음인 하느님인 줄 바라보면서, 사랑과 꿈을 나란히 마주하여 어깨동무를 해야 삶이 되는 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4348.3.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삶 90 밥끊기, 단식



  때가 되어 밥을 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밥을 넣어 주어야 몸에 기운이 새롭게 돈다고 하지만, 애써 밥을 몸에 넣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단식(斷食)’을 한다고 합니다. 이 한자말은 “일정 기간 동안 의식적으로 음식을 먹지 아니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밥끊기’ 또는 ‘단식’은 왜 할까요? 몸에 밥을 더 넣지 않으면서, 몸을 가볍게 바꾸고, 몸에 따라 마음도 가볍게 다시 태어나도록 하려는 뜻입니다. 몸과 마음이 밥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고, 몸에 쌓였을 찌꺼기를 찬찬히 내보내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몸은 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줄 느끼려는 뜻입니다.


  밥을 끊는 사람은 밥을 안 먹습니다. 이때에 물을 마실 수 있고, 국을 마실 수 있으며, 어떤 단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밥끊기란 밥을 끊는 일입니다.


  밥끊기는 하루를 할 수 있고, 이레를 할 수 있습니다. 보름이라든지 달포 동안 밥을 끊을 수 있고, 때로는 온날(백일)을 끊거나 몇 해 동안 밥을 끊어도 됩니다. 사람은 밥을 끊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물을 마셔도 죽지 않으며, 밥이 아닌 풀만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국만 끓여서 먹어도 죽지 않아요.


  밥을 한동안 끊으려 하는 사람은, 내 삶에서 내가 대수롭게 여기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바라보려는 마음이 됩니다. 그동안 나 스스로 내 삶에서 무엇이 대수로운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고 여겨서 밥을 끊습니다. 밥을 먹어야 몸이 산다고 하는 생각을 끊고, 밥이 아니면 몸에 기운이 돌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을 끊으려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똑같은데, 목숨 있는 것은 밥을 먹어야 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풀과 꽃과 나무도 밥(양분)을 먹어야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뭇목숨은 ‘숨을 살리’려면 무엇을 먹을까요?


  바로 ‘바람’을 먹습니다. 밥끊기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먹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입니다. 늘 마시지만 늘 마시는 줄 제대로 못 느낀 탓에 제대로 못 보고 제대로 모르던 ‘바람’을 제대로 알아내려고 밥을 끊습니다.


  밥은 온날이나 여러 해를 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밥은 얼마든지 끊을 만합니다. 그런데, 밥을 오랫동안 끊으면 ‘몸 많이 쓰는 일’은 하기 어렵습니다. 왜 못 할까요? 스스로 즐겁게 삶을 짓는 일이라면, ‘밥을 안 먹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일을 종(노예)이 되어서 해야 한다면 ‘밥을 많이 먹어야 남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어요. 이리하여, 사회의식에서는 사람들이 밥끊기를 못 하게 막으려 합니다. 사회의식에서는 사람들한테 도시락조차 못 먹이게 하려 듭니다. 왜냐하면, 도시락은 ‘내 몸을 생각해서 스스로 지은 밥’이거든요. 학교나 회사나 감옥이나 군대에서 왜 ‘도시락’을 못 먹게 하고 집단급식만 시키려 하는가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집단급식은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집단급식은 사람을 죽입니다.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몸을 죽여서 마음도 몸을 따라서 죽도록 길들입니다. 사회의식에서는 집단급식을 사람들이 먹도록 내몹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밥을 먹으면서 똑같은 몸이 되고 똑같은 생각만 물려받으면서 똑같은 일을 하는 톱니바퀴(부속품)가 되도록 내몹니다.


  밥끊기는 바로 이 같은 사회의식을 끊는 몸짓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남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바로 내 삶을 짓는 내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내 삶을 바라보면서 내 길을 걸어야 합니다.


  밥을 끊을 줄 아는 사람은, 바람을 맛봅니다. 바람맛을 처음으로 보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기릅니다. 이리하여, 밥을 끊은 뒤 다시 밥을 마주하는 사람은, 이제부터 ‘밥한테 휘둘리지 않’고, ‘밥을 내가 다스리는’ 손길을 익힐 수 있어요. 그러니까, 밥끊기를 제대로 해서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깨달은 사람은, 사회의식에서 집단급식을 시켜도, 이 집단급식을 ‘새롭게 바꾸’는 기운이 생깁니다.


  밥은 많이 먹거나 적게 먹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으면 됩니다.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는 밥일 때에는 언제나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스스로 짓지 않고 스스로 먹지 않는 밥이라면 언제나 괴롭고 고단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바람이 없’으면 바로 죽습니다. 바람이 없는 지구별은 아무런 목숨(생명)이 없는 죽음터입니다. 그래서, 사회의식에서는 자꾸 공장을 지으려 하고, 자꾸 지하자원을 캐내어 바람을 더럽히려 합니다. 아무리 ‘무공해 에너지’가 있고 ‘무한동력 장치’가 있더라도 사회의식은 이를 안 받아들입니다. 돈을 벌려는 권력자가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사회의식이 시키는 짓대로 따르기를 바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사회 제도’에 길들면서 ‘새로운 것을 꿈꾸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도록 내몰려 하기 때문입니다.


  밥을 끊으려 하는 사람은 밥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을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다 잊고, 오직 바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밥을 끊는 까닭은, 오직 바람을 나한테 제대로 맞아들이려 하는 몸짓인 만큼, 나를 둘러싼 바람이 어떠한 결인가 하고 느껴야 합니다. 내가 들이마시는 바람을 어떤 숨결로 녹여서 내 몸으로 태우려는가 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람결이 나한테 깃들면서 숨결이 되고, 이 숨결은 살결로 나타납니다. 바람결은 ‘너’이고, 숨결은 ‘나’입니다. 숨결은 ‘마음’이 되고, 살결은 ‘몸’이 됩니다. 이제, 내가 받아들인 바람은 내 몸에 새로운 씨앗으로 드리워서 내 마음에 새삼스레 깃듭니다.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삭일 수 있는 넋이라면, 새로운 생각을 마음에 심을 수 있습니다. 바람결은 숨결을 거쳐 마음결로 거듭납니다. 새로운 마음결이 될 수 있으면, 내 눈은 바람결을 언제 어디에서나 늘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빛결을 헤아리는 눈결이 되어요. 이때부터 나는 귓결로 흘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모든 소리가 노래인 줄 깨달을 수 있는 생각을 바람결에 새롭게 실어서 날립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으려고 밥을 끊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는 몸이 되도록 밥을 끊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몸으로 거듭나면, 이제 어떤 밥을 어디에서 어느 만큼 먹더라도, 나는 내 몸을 따사롭게 보살피면서, 내 마음을 언제나 넉넉하게 돌봅니다.


  바람이 있어야 물이 흐릅니다. 바람이 있어야 불이 탑니다. 바람이 있어야 숲이 푸릅니다. 바람이 있어야 하늘이 파랗습니다. 바람이 있어야 지구별에서 온 목숨이 깨어납니다. 바람이 있어야 온별누리(모든 은하계)에 이야기가 자랍니다. 바람을 바람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씻습니다. 바람이 우리 몸과 마음을 고루 씻어 주면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바람을 들이켜서 내 몸과 마음을 구석구석 씻는 동안 내 넋은 기쁘게 웃고 노래합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삶 89 ‘두레’와 ‘공동체’



  조선 무렵에 한때 몇몇 곳에서 ‘향약(鄕約)’이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향약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향약’은 중국에서 중국사람이 하던 ‘여씨향약’을 그대로 따랐으니까요. 중국 것을 따랐기에 오래 못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삶을 짓는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한마당을 이루려 한다면, 마땅히 ‘이 땅에서 삶을 짓는 사람들이 쓰는 말’로 ‘이 땅에서 삶을 짓는 사람들이 나눌 생각’을 담아야 제대로 갑니다.


  지식인이나 학자나 임금 같은 사람이 중국 제도나 문물을 받아들이든 말든, 이 땅에서 흙과 풀과 나무를 만지면서 숲과 들과 보금자리를 가꾸던 사람들은, 가장 수수하고 투박한 말로 조촐하게 한마당을 이룹니다. 바로 ‘두레’이고, ‘품앗이’이며 ‘울력’입니다. ‘두레·품앗이·울력’은 남이 시켜서 이루는 한마당이 아닙니다.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은 모두 여느 시골사람 스스로 이루는 한마당입니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살피지 않거나 찬찬히 느끼지 않던 지식인이나 학자나 임금이었으니, 애써 중국 것을 받아들여서 퍼뜨리려 하지요.


  더군다나, 해방 언저리에는 ‘공동체(共同體)’라는 이론이나 철학이나 사상을 다른 나라에서 끌어들이려 합니다. 영어를 앞세운 미국 문화와 사회와 역사를 배운 이들은 ‘커뮤니티(community)’를 말하기도 합니다.


  ‘공동체’에서 ‘共同’이란 무엇일까요? “함께 하나됨”입니다. “함께 하나되는 몸”을 ‘공동체’라 하는데, 시골에서는 늘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으로 함께 하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공동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은 처음부터 시골사람 말과 넋과 삶을 쳐다보지도 않고 들여다보지도 않으며 생각조차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굳이 ‘공동체 정신’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레 넋’이나 ‘두레 얼’이나 ‘두레 마음’을 말할 수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애써 ‘공동체 문화’를 일으켜야 하지 않습니다. ‘두레마을’을 이루고 ‘두레살림’을 가꾸며 ‘두레살이’를 돌보면 돼요. 그리고, ‘두레’라는 낱말도 꼭 앞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마을살림’과 ‘마을살이’를 지으면 됩니다.


  저마다 사랑스러운 보금자리가 있기에, 여러 보금자리가 모여서 마을을 이룹니다. 마을을 이룬 여러 보금자리에서는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서로 아끼고 보살피려는 마음이니, 저절로 두레가 태어나고 품앗이가 깨어나며 울력이 자랍니다. 나라에서 구태여 ‘협동조합’을 북돋운다고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마을마다 있던 두레나 품앗이나 울력은 바로 정치권력이 새마을운동을 앞세워 몽땅 짓밟거나 깨부셨습니다. 시골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어 공장 일꾼이 되도록 몰아세우면서 마을살림도 마을살이도 와장창 깨져야 했습니다. 이렇게 갈기갈기 쪼개진 사람들 삶인데, ‘협동조합 지원’을 한다고 해서 마을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을살림은 나랏돈이 아닌 ‘보금자리 사랑’으로만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고두고 사랑하면서 살다가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두고두고 가꿀 만한 보금자리요 마을이라면, 사람들은 스스로 이 보금자리와 마을을 가꿉니다. 지원금이나 보조금이 있어야 지키는 마을이 아닙니다. ‘경제발전·재개발’ 따위를 함부로 들먹이지 않아야 하고, 정치권력이 없어야 하며, 지방자치조차 아닌 ‘마을사람 스스로 법과 제도가 하나도 없이 스스로 삶을 짓는 하루’가 될 때에, 비로소 참다운 두레이고 품앗이요 울력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두레가 없는 까닭은 도시나 시골 모두 ‘보금자리’로 삼을 집이 없기 때문입니다. 툭하면 개발이고, 툭하면 고속도로이며, 툭하면 시멘트질인데다가, 툭하면 깨부수니, 보금자리도 마을도 남아날 수 없어요.


  사람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해서 ‘마을(동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보조금을 받아서 꾸리기에 두레(협동조합, 공동체)가 서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꿈을 키울 수 있는 곳이라야 비로소 사람들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새롭게 나아갑니다. 4348.3.13.쇠.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삶 88 꽃샘



  ‘꽃샘’은 이른봄에 꽃이 필 무렵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는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합니다. ‘꽃샘추위’라는 낱말도 함께 씁니다. ‘꽃 + 샘’이고, “꽃을 샘하다”를 가리키는 얼거리입니다. 이 얼거리에 따라 ‘책샘’이라든지 ‘밥샘’이라든지 ‘일샘’이라든지 ‘잔치샘’ 같은 낱말도 쓸 만하리라 느낍니다. 무엇을 샘한다고 하면 ‘(무엇) + 샘’처럼 쓸 수 있겠지요.


  그러면, 꽃샘바람이 불고 꽃샘추위가 다가오는 이른봄은 어떤 철일는지 헤아려 봅니다. 이른봄에 땅은 어떻게 달라지고, 꽃이나 겨울눈은 어떻게 바뀌는지 찬찬히 돌아봅니다.


  겨울이 저물면서 따사롭게 바람이 불면 들과 숲마다 푸릇푸릇 새싹이 돋습니다. 새싹은 겨울 끝자락부터 돋습니다. 한겨울에도 볕이 포근하면 딱딱한 땅을 뚫고 어느새 풀싹이 돋습니다. 동백꽃은 한겨울에도 꽃송이를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직 겨울이 다 가시지 않은 때에 돋는 풀싹은 다시 겨울바람이 차갑게 불면 거의 다 시들시들 떨면서 옹크립니다. 일찍 돋은 풀싹은 잎 끝이 싯누렇게 마르기도 해요. 그런데, 이무렵 돋는 냉이나 씀바귀를 나물로 삼습니다. 달래나물도 이무렵에 캐서 먹습니다. 아직 추위가 흐르는 철에 봄나물이자 ‘늦겨울나물’을 먹어요.


  꽃샘바람은 꽃을 샘하는 바람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꽃을 샘하는 바람이 불기에 꽃은 더 기운을 내고, 겨울눈도 새롭게 기운을 냅니다. 마지막 기운을 모두어서, 잎을 더 푸르게 틔우려 하고, 꽃을 더 싱그러이 터뜨리려 합니다.


  찬바람이 불기에 풀과 꽃과 나무는 새롭게 기운을 얻습니다. 아니, 찬바람을 먹으면서 풀과 꽃과 나무는 스스로 더욱 기운을 내면서, 한결 씩씩하고 튼튼하게 이 땅에 섭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이 있기에 겨울이 있는데, 겨울이 있기에 봄과 여름과 가을이 있어요. 고요히 잠들도록 하는 겨울을 누리면서, 목숨 있는 모든 것은 새롭게 기운을 얻어서 활짝 깨어납니다.


  꽃샘은 꽃을 ‘샘하’기도 하지만, 꽃이 새롭게 피어나도록 하는 ‘샘물’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꽃샘은 꽃을 시샘하는 한편, 꽃이 스스로 더 기운을 내도록 북돋우는 샘이 되어 줍니다.


  삶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모든 일은 뜻이 있어서 나한테 찾아옵니다. 이 일은 이러한 뜻이고, 저 일은 저러한 뜻입니다. 이 일을 나쁘게만 여긴다면 나로서는 그저 나쁠 뿐이고, 저 일을 좋게만 여긴다면 나로서는 그저 좋다고 여길 뿐입니다. 이 자리에서 맴돕니다. 좋고 나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늘 제자리걸음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삶을 짓습니다. 좋음도 나쁨도 아닌 줄 알아채면서 마주할 수 있을 때에 삶을 짓는 첫걸음을 씩씩하게 내딛습니다.


  꽃을 시샘하는 추위는, 다른 눈길로 보자면, 꽃이 더 튼튼하고 씩씩하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추위입니다. 이만 한 추위쯤에는 지지 말라고, 이만 한 추위를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봄에도 쌩쌩 모진 바람이 불 수 있으니, 미리 잘 겪고 받아들이면서 한결 기운차게 솟으라고 하는 추위가 바로 ‘꽃샘추위’이지 싶습니다.


  샘물은 겨울에 얼지 않습니다. 샘물은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합니다. 샘물은 여름에는 여름대로 뭇목숨을 살찌우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뭇목숨을 보살펴요. ‘꽃샘’이란 무엇일까요? 꽃샘은 그저 꽃을 시샘하기만 하는 바람이거나 추위일까요? 꽃샘은 우리 삶에서 무엇일까요? 오늘날에는 거의 안 쓰는 옛말 가운데 ‘꽃등’이 있습니다. ‘꽃등’은 “맨 처음”을 뜻합니다. ‘꽃샘’은 봄으로 들어서는 첫 문턱입니다. 꽃샘을 거치면서 비로소 봄으로 나아갑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 35 | 36 | 3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