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89 ‘두레’와 ‘공동체’



  조선 무렵에 한때 몇몇 곳에서 ‘향약(鄕約)’이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향약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향약’은 중국에서 중국사람이 하던 ‘여씨향약’을 그대로 따랐으니까요. 중국 것을 따랐기에 오래 못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삶을 짓는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한마당을 이루려 한다면, 마땅히 ‘이 땅에서 삶을 짓는 사람들이 쓰는 말’로 ‘이 땅에서 삶을 짓는 사람들이 나눌 생각’을 담아야 제대로 갑니다.


  지식인이나 학자나 임금 같은 사람이 중국 제도나 문물을 받아들이든 말든, 이 땅에서 흙과 풀과 나무를 만지면서 숲과 들과 보금자리를 가꾸던 사람들은, 가장 수수하고 투박한 말로 조촐하게 한마당을 이룹니다. 바로 ‘두레’이고, ‘품앗이’이며 ‘울력’입니다. ‘두레·품앗이·울력’은 남이 시켜서 이루는 한마당이 아닙니다.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은 모두 여느 시골사람 스스로 이루는 한마당입니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살피지 않거나 찬찬히 느끼지 않던 지식인이나 학자나 임금이었으니, 애써 중국 것을 받아들여서 퍼뜨리려 하지요.


  더군다나, 해방 언저리에는 ‘공동체(共同體)’라는 이론이나 철학이나 사상을 다른 나라에서 끌어들이려 합니다. 영어를 앞세운 미국 문화와 사회와 역사를 배운 이들은 ‘커뮤니티(community)’를 말하기도 합니다.


  ‘공동체’에서 ‘共同’이란 무엇일까요? “함께 하나됨”입니다. “함께 하나되는 몸”을 ‘공동체’라 하는데, 시골에서는 늘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으로 함께 하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공동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은 처음부터 시골사람 말과 넋과 삶을 쳐다보지도 않고 들여다보지도 않으며 생각조차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굳이 ‘공동체 정신’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레 넋’이나 ‘두레 얼’이나 ‘두레 마음’을 말할 수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애써 ‘공동체 문화’를 일으켜야 하지 않습니다. ‘두레마을’을 이루고 ‘두레살림’을 가꾸며 ‘두레살이’를 돌보면 돼요. 그리고, ‘두레’라는 낱말도 꼭 앞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마을살림’과 ‘마을살이’를 지으면 됩니다.


  저마다 사랑스러운 보금자리가 있기에, 여러 보금자리가 모여서 마을을 이룹니다. 마을을 이룬 여러 보금자리에서는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서로 아끼고 보살피려는 마음이니, 저절로 두레가 태어나고 품앗이가 깨어나며 울력이 자랍니다. 나라에서 구태여 ‘협동조합’을 북돋운다고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마을마다 있던 두레나 품앗이나 울력은 바로 정치권력이 새마을운동을 앞세워 몽땅 짓밟거나 깨부셨습니다. 시골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어 공장 일꾼이 되도록 몰아세우면서 마을살림도 마을살이도 와장창 깨져야 했습니다. 이렇게 갈기갈기 쪼개진 사람들 삶인데, ‘협동조합 지원’을 한다고 해서 마을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을살림은 나랏돈이 아닌 ‘보금자리 사랑’으로만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고두고 사랑하면서 살다가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두고두고 가꿀 만한 보금자리요 마을이라면, 사람들은 스스로 이 보금자리와 마을을 가꿉니다. 지원금이나 보조금이 있어야 지키는 마을이 아닙니다. ‘경제발전·재개발’ 따위를 함부로 들먹이지 않아야 하고, 정치권력이 없어야 하며, 지방자치조차 아닌 ‘마을사람 스스로 법과 제도가 하나도 없이 스스로 삶을 짓는 하루’가 될 때에, 비로소 참다운 두레이고 품앗이요 울력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두레가 없는 까닭은 도시나 시골 모두 ‘보금자리’로 삼을 집이 없기 때문입니다. 툭하면 개발이고, 툭하면 고속도로이며, 툭하면 시멘트질인데다가, 툭하면 깨부수니, 보금자리도 마을도 남아날 수 없어요.


  사람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해서 ‘마을(동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보조금을 받아서 꾸리기에 두레(협동조합, 공동체)가 서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꿈을 키울 수 있는 곳이라야 비로소 사람들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새롭게 나아갑니다. 4348.3.13.쇠.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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