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91 눈을 감고, 눈을 뜨다



  눈을 감은 사람이 눈을 뜹니다. 눈을 뜬 사람이 눈을 감습니다. 참으로 쉬우면서 뚜렷한 말입니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눈을 떠야 바야흐로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을 감지 않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합니다. 눈에 새까만 어둠을 드리우지 않는다면, 눈이 환하게 뜨이지 않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겉모습을 바라보는 눈을 감아야, 비로소 속마음을 바라보는 눈을 뜹니다. 속마음을 바라보는 눈을 뜨는 사람일 때에, 겉모습에 휘둘리면서 오직 겉만 훑어보는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으면서 떠야 합니다. 서로서로 겉치레로 나아가는 눈으로는 삶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속마음을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눈이 되어야 삶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면서 감아야 합니다. 서로서로 사랑을 바라보고 꿈을 마주할 때에 비로소 삶을 짓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꿈 앞에서 눈을 감는다면 아무런 삶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에 달린 눈’을 감는 삶이 될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일곱 가지 눈이 있기 때문에 ‘몸에 달린 눈(첫째 눈)’을 감아야, 비로소 다른 여섯 가지 눈으로 마음을 바라보면서 읽고, 꿈을 바라보면서 읽으며, 사랑을 바라보면서 읽다가,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읽고, 기쁨을 바라보면서 읽을 줄 알며, 노래를 바라보면서 읽는 숨결로 거듭납니다.


  눈을 떠도 장님인 사람이 많습니다. 겉모습에 얽매이기 때문에 겉모습조차 제대로 못 읽기 일쑤입니다. 겉으로는 웃는 사람이 속으로는 꿍꿍이를 숨긴 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눈 뜬 장님’입니다. 이렇게 눈 뜬 장님이라면, 눈을 뜬들 무엇을 볼까요? 눈으로 보는 것 가운데 무엇을 믿거나 알거나 생각할 수 있을까요?


  눈을 감아도 장님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눈을 감은 채 겉모습을 아주 또렷이 읽’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우는 사람이 속으로는 웃는 줄 읽을 수 있어요. 이렇게 ‘눈을 감은 빛살’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지을 만해요.


  내 눈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라고 있는 눈이 아닙니다. 내 눈은 사랑과 꿈으로 나아가는 삶을 보라고 있는 눈입니다. 내 눈은 겉모습이나 몸매나 얼굴을 보라고 있는 눈이 아닙니다. 내 눈은 마음과 생각과 넋을 마주하면서 아름다운 바람처럼 나아가라고 있는 눈입니다.


  눈을 감고 걷는다고 해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걷는다고 해서 안 넘어지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잔다고 해서 고단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잔다고 해서 개운하지 않습니다. 눈을 떠야 할 곳에서 뜰 수 있어야 눈이고, 눈을 감아야 할 곳에서 감을 수 있어야 눈입니다. 눈빛은 눈을 감아도 환하게 온누리를 비춥니다. 눈망울은 눈을 감아도 해맑게 별누리를 감쌉니다. 눈길은 눈을 감아도 따사롭게 온별누리를 어루만집니다.


  사람한테 두 눈이 있는 까닭은, 두 눈으로 이승과 저승을 함께 사랑하고, 너와 내가 한마음인 하느님인 줄 바라보면서, 사랑과 꿈을 나란히 마주하여 어깨동무를 해야 삶이 되는 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4348.3.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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