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말꽃삶 38 글을 잘 쓰고 싶다면
― ‘문학’을 내려놓아야 한다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이웃님이 꽤 많습니다만, 제발 글을 잘 안 써도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글을 써야 하지 않고, 더더구나 누구나 글을 잘 써야 하지 않은데, 먼저 말부터 즐겁게 할 노릇이거든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소리’인 ‘말’을 두런두런 오순도순 나눌 줄 알면 됩니다. 마음을 말로 차근차근 차곡차곡 주고받을 적에 비로소 숨결을 틔우고 생각을 열어요.
다만, 말도 굳이 잘 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을 찬찬히 펴면 됩니다. 내 마음을 너한테 펴고, 네 마음을 내 귀로 가만히 들으면 되어요. ‘나누다’하고 ‘주고받다’하고 ‘오가다’라는 낱말을 곱씹을 노릇인데, 이 세 낱말은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밀어대는 길이 아닙니다. 이쪽에서 부드럽고 상냥하게 저쪽으로 띄우고, 저쪽도 이쪽으로 보드랍고 사근사근 건네는 길입니다.
나누다 + 주고받다 + 오가다
혼자만 떠들 적에는 재미없습니다. 한 사람만 말할 적에는 고단하고 괴롭고 지칩니다. 함께 이야기하기에 나란히 웃고 같이 걸어가는 길을 찾습니다. 서로 마음을 말로 나누기에, 여태 모르거나 놓치거나 지나치거나 잊은 마음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종잇조각도 나누어 들면 한결 가볍다고 합니다. 가벼운 종이라서 더 가볍지 않아요. 작든 크든 ‘나누’려는 마음을 먼저 세우기에 함께 느긋하면서 즐겁다는 뜻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매한가지예요. 도둑질을 자꾸 하니, 어느새 바늘뿐 아니라 소까지 대놓고 훔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아주 조그마한 일부터 나누고 주고받고 오가는 마음을 북돋울 적에, 나중에는 어떤 큰일이건 홀가분하면서 넉넉하게 나누고 주고받고 오갈 수 있습니다.
잘 쓰고 싶다는 마음 → 자랑하고 싶다는 글
어느 누구도 굳이 글을 잘 써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대목을 좀 짚어야 합니다. 누가 글을 “잘 쓴다”고 여긴다면, 반드시 어느 누구는 글을 “못 쓴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못 쓴 글”이 있기에 “잘 쓴 글”이 있어요.
“잘 쓴 글”이란 으레 “널리 보이고 싶은 글”입니다. “자랑하고 싶은 글”이지요. “못 쓴 글”이란 늘 “안 보이고 싶은 글”입니다. “감추거나 숨기고 싶은 창피한 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 삶을 옮긴 말이나 글이 창피할 수 있을까요? 오늘 어떤 밥을 차려서 먹고서 어떻게 설거지를 했다고 담는 수수한 글이 창피하거나 감출 이야기일까요? 늦잠 탓에 하루를 그르쳤다는 이야기가 부끄럽거나 못난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길에서 돌에 걸려 자빠졌든, 누구한테 크게 속아서 돈을 잃든, 누가 나를 때리거나 괴롭혀서 아프고 슬프든, 이웃을 도우면서 온마음에 환하게 별빛이 쏟아졌든, 그냥그냥 아무 일을 안 하고 하루를 보냈다고 느끼든, 또 뭔가 어지르거나 엎어지면서 고달팠든, 이 모든 다 다른 삶을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손으로 옮기면 넉넉합니다.
못 쓴 글이라는 마음 → 나와 남을 빗댄 굴레
못 쓴 글하고 잘 쓴 글은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못 쓴 글”을 굳이 꼽아 본다면, “나와 남을 자꾸 빗대느라, 스스로 제살을 갉고 깎는 굴레”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 나는 내 삶을 쓸 뿐이기에,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대단하거나 뛰어난 남하고 나를 빗대거나 견주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저 사람처럼 훌륭하거나 놀라워야 “글을 잘 쓰”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떤 보람(문학상)을 받았기에 “잘 쓴 글”이지 않습니다. 어떤 보람을 받은 글은 “보람을 받은 글”일 뿐입니다. 띄어쓰기나 맞춤길이 틀린 글이라면 “띄어쓰기나 맞춤길이 틀린 글”일 뿐입니다. 그러나 띄어쓰기나 맞춤길은 반듯하되, 아무런 줄거리나 이야기가 없다면 ‘시늉글’이에요. ‘겉글·겉멋글’이라 여길 만합니다.
우리는 띄어쓰기를 꼼꼼히 맞출 수 있으나, 말을 하면서 “또박또박 띄어쓰기를 하며 말하지는 않”습니다. 말을 하다가 더듬을 수 있고, 소리가 샐 수 있습니다. 어물어물 중얼중얼 갈팡질팡 헤매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듬더듬 어물어물 말을 하더라도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말로 옮기”면 반갑고 사랑스럽고 고맙습니다. 물처럼 줄줄줄 흐르는 말씨이되, 도무지 알맹이도 줄거리도 없이 혼자 떠들기만 한다면, 이런 말에는 아무 마음이 안 흐른다고 여깁니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 = 번듯하게 꾸민 글
번듯하게 옷을 차려입기에 멋스러운 사람이지 않습니다. 그저 “차려입은 옷”이고, “몸을 꾸민 옷”입니다. 번듯하게 꾸민 글은 그냥 “차려쓴 글”이고, “겉을 꾸민 글”입니다. 까맣고 커다란 쇳덩이(자동차)를 굴리기에, 이런 쇳덩이를 굴리는 사람이 높거나 대단하지 않습니다. 두다리로 걷는 사람이기에 모자라거나 못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숱한 글은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이거나 “까맣고 커다란 쇳덩이”하고 닮더군요. 차분히 짚으면서 생각을 북돋아 보기를 바라요. 보기좋은 글씨로 적기에 “잘 쓴 글”이지 않겠지요? 보기좋게 차려입기에 “착한 사람”이지 않겠지요? 돈이 많거나 이름을 드날리거나 힘이 세기에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겠지요?
글쓰기와 말하기도 이와 같습니다. 나라지기(대통령)가 말을 했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어떤 보람(문학상)을 받은 분이 썼기에 대단한 글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거나 글을 읽을 적에 ‘마음’만 바라볼 노릇입니다. ‘자리(신분·계급·지위)’는 아예 안 쳐다보아야 비로소 마음과 말과 글을 읽어내게 마련입니다. 오직 ‘마음’만 헤아려야 줄거리를 알아차리고 이야기를 알아듣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 문학 내려놓기 + 살림짓는 사랑으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길은 늘 오로지 하나입니다. 먼저 ‘문학’을 내려놓을 노릇입니다. ‘시·소설·수필·희곡’이라는 무늬(형식)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러고서 우리가 스스로 짓는 살림을 사랑으로 돌보는 눈길과 손길과 발길과 마음길과 숨길과 하루길을 살필 노릇입니다.
글을 쓰고 보니 ‘시’가 될 수 있고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틀에 짜거나 맞추려고 한다면, 이때에는 ‘글’이 아니라 ‘글시늉·글흉내·글척’입니다. 글이란, 말을 옮긴 그림입니다. 말로 나누려고 하는 마음소리를 눈으로도 보고 느끼고 살펴서 아로새기려고 종이에 그리는 ‘글’입니다.
글부터 쓰려고 하지 말아요. 말부터 할 일이고, 마음을 말로 나타내고서 귀담아들을 일입니다. 마음부터 서로 나누면서 말을 하나하나 곱새기고 곱씹은 다음에, 느긋이 글로 옮기고 담고 얹으면 즐겁습니다.
입으로 말을 하면서 글을 쓰기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을 적에는 말을 하면서 쓰면 됩니다.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글을 쓰기로 해요. 한집안을 이룬 짝꿍이나 아이나 어른한테 들려주듯, 반가운 동무나 이웃하고 이야기하듯, 입으로 말소리를 내면서, 이 말소리를 그대로 글로 옮겨 봐요. ‘문학’을 하려고 나서면 문학도 아니고 글도 아니기 일쑤입니다. 그저 글·말·마음이라는 세고리를 살피면서 삶·살림·사랑이라는 또다른 세고리를 나란히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