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꽃 / 숲노래 우리말
말꽃삶 39 가맛마루
― 일본말씨 ‘산복도로’ 떠나보내기
2000년에 처음 부산이라는 고장을 이웃으로 만난 뒤로 몇 해만 살짝 걸렀을 뿐, 해마다 꾸준히 드나들었다. 2000년에 이를 무렵까지 ‘산복도로(山腹道路)’ 같은 일본말은 아예 몰랐다. 내가 나고자란 인천에서는 ‘재’나 ‘고개’나 ‘언덕’ 같은 우리말을 썼고, 곧잘 ‘동산·뒷동산’ 같은 우리말을 썼다. ‘동산’을 ‘東山’이라는 한자로 적는 이가 제법 있는데, ‘동산’은 ‘산(山)’이라 하기 어렵다. 둥그스름(동그스름)한 언덕배기를 ‘동산’이라 일컫는다. ‘언덕’보다 낮거나 작으면서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는, 풀이나 잔디가 부드럽게 돋아서 뒹굴기에 넉넉하고 나무가 알맞게 있어서 해바라기를 하며 낮잠을 누릴 만한 자리를 ‘동산’이라 했다.
마을에서 어울리는 아이어른은 ‘山이 아닌 동산’을 푸근한 쉼터나 뒤뜰이나 마당으로 여겼다. 인천이라는 곳은 예부터 ‘999곳에 이르는 높고낮은 메’가 있다고 여겼다. 즈믄(1000)에서 하나가 모자란다고 여기는데, 하나가 모자라서 ‘서울’이 될 수 없지만, 모자란 만큼 사람이 덜 몰리고 더 아늑하게 쉬고 숨는 터전으로 보았다. 높고낮은 메가 999곳에 이른다면, 이만큼 재나 고개나 언덕도 끝이 없다는 뜻이다. 흔히 부산을 놓고서 ‘산복도로’에 ‘168계단’에 ‘보수아파트’를 둘러싼 달마을을 꼽곤 하는데, 인천은 끝도 없이 오르고 내리는 잿길과 고갯길과 언덕길이 물결친다. 소금밭을 메운 인천 주안이라든지, 갯벌을 메운 중·동·남구 쪽 달마을은 쉴 겨를이 없이 오르면서 내리는 골목바다이다. 다만, 부산에서는 골목바다를 구경터(관광지)로 삼을 줄 아는 품이 있어서 아직 고스란한 곳이 많다면, 인천은 골목바다를 얼른 허물어 잿더미(아파트단지)로 바꾸는 삽질만 많다.
부산에도 삽질은 많지만 인천이 훨씬 삽질이 많은데, 인천은 서울에서 가까운 고장인 탓이다. 서울사람만으로는 서울을 못 굴린다. 그래서 인천사람은 거의 서울로 죽음길(지옥철)을 새벽과 밤마다 납작쿵이 되어 오간다. 그런데 인천사람을 보태어도 서울을 떠받치지 못 하는 터라, 수원과 의정부와 구리와 부천과 남양주와 군포와 의왕와 안산과 과천에서까지 사람들을 박박 긁어모은다. 요사이는 김포에서도 허벌나게 사람들을 긁어모은다. 부산곁에서 부산으로 일하러 오가는 사람도 참 많지만, 서울곁에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서 오가는 사람에 댈 수 없다. 그래서 서울곁에 있는 여러 고을과 고장은 굴레(식민지)이다. 서울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고, 서울이 살면 같이 돈이 넘치는 흥청망청인 데가 ‘서울곁(수도권)’이다.
2000년에 처음 들은 말 ‘산복도로’는 낯설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 뒤로 다른 고장이나 고을에서는 이 일본말씨 ‘산복도로’를 듣지 못 하다가 2015년 무렵 마산에서도 ‘산복도로’라는 말을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山腹’이라는 한자는 ‘비탈’을 뜻한다. ‘비탈 + 길’인 얼개인 ‘산복도로’는 일본에서 엮어서 쓰는 낱말이다. 여러모로 보면, 부산이웃 가운데에 일본말인데 ‘부산 사투리’로 잘못 아는 분이 제법 많다. 부산말을 쓰는지 일본말을 쓰는지 찬찬히 짚으면서 가다듬는 분도 많지만, 그러려니 지나치는 분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인천에서도 일본말을 일본말이 아니라 ‘인천 사투리’로 여겨서 쓰는 일이 이따금 있지만, 이제는 거의 ‘근현대·개항’과 얽힌 데를 가리킬 적에만 남는다. ‘구락부’나 ‘부락’ 같은 일본말을 빼면 그리 안 쓴다고도 여길 만하다.
몰랐다면 모르고 지나갈 테고, 이웃으로 여기지 않으면 시큰둥하게 잊을 테지만, 인천내기로서 서울에서 아홉 해를 눌러앉다가 전라남도 시골에 또아리를 틀고서 부산을 이웃으로 삼는 나날이니, ‘부산말씨 아닌 일본말씨’가 자꾸 귀에 걸거친다. ‘산복도로’를 어떻게 털어내거나 씻어낼 만한가 하고 열 해 즈음 헤아리다가 수수하게 ‘고개·고갯길·언덕·언덕·언덕길·재·잿길·비탈·비탈길’ 같은 말을 쓰면 되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이런 수수한 말씨를 들은 부산이웃 가운데 여태 어느 한 사람도 이 수수한 말씨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산복도로’가 일본말이건 아니건 그냥 ‘부산말씨’로 삼는 듯하다.
2025년을 앞둔 2024년 섣달에 ‘가마메(가마뫼)’라는 옛이름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한자 ‘釜山’은 ‘가마 + 메(뫼)’인 얼개이다. 부산을 이루는 여러 멧줄기는 ‘가마솥’이라 여길 만하다. 인천에 있는 동산이나 언덕하고 다르다(게다가 인천에는 ‘동산중·동산고’ 같은 배움터까지 있다). 요사이는 가마솥을 아예 모르는 분도 많지만, 가마솥이 어떻게 생긴 줄 안다면, 부산 곳곳에 있는 멧길(멧자락길·비탈길)이 어떤 얼거리인지 어림할 만하다. ‘가마 + 메’인 고장이듯, 가마메에 있는 멧길이며 비탈길이며 고갯길이며 잿길이며 언덕길이란, 부산스럽게 부산말씨로 ‘가맛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어디에서도 이 이름을 못 쓸 테지. 오직 부산에서만 ‘가맛길’을 비롯해서 ‘가맛고개·가맛골·가맛재’ 같은 이름을 쓸 수 있다. 가마메인 곳에 있는 고개요 골이요 재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가맛마루’란 이름도 어울린다. ‘마루’라는 우리말은 집에서 가장 넓고 반반하게 두면서 두런두런 모이는 자리를 가리킨다. ‘마루’라는 낱말은 ‘머리’와 ‘미루’와 ‘미르’로도 잇는다. 우리말 ‘미르’는 ‘용(龍)’을 가리킨다. ‘머리’는 ‘꼭두머리·우두머리’ 같은 쓰임새처럼 첫째나 으뜸과 큰곳을 가리킨다. ‘미루나무’에 붙는 ‘미루’는 ‘미르’하고 같은 말이다.
고이기만 하면 썩는다. 고이기만 하기에 꼬부라지고 꼬여서 ‘꼰대’로 잇는다. 고이되 가만히 퍼지고 새롭게 솟으니 ‘샘’이다. 모든 샘은 “고이되 그저 고이기만 하지 않고서 끝없이 솟아서 새롭게 살리는 물밭”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샘 ㄱ’은 ‘샘물’이다. 들숲바다와 뭇숨결을 살리는 곱고 곧은 물줄기인 ‘샘 ㄱ’이다. 그런데 끝없이 솟기는 하지만 고약하고 꼬부라지고 꼬인 모습이라면 ‘샘 ㄴ’인 ‘시샘·시새움’이다. 그저 끝없이 솟기만 한대서 이웃을 살리거나 북돋우지 않는다. 맑고 밝게 살리는 사랑일 적에만 ‘샘 ㄱ·샘물’이다.
나는 부산만 이웃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나라 모든 곳을 이웃으로 삼는다. 푸른별 모든 겨레와 나라도 이웃으로 삼는다. 그래서 누구나 이웃으로 삼으려고 먼저 우리 스스로 쓰는 낱말부터 사랑으로 바라보며 품으려고 한다. 내가 나로 설 수 있는 가장 작은 낱말 하나를, 마치 낟알(나락) 한 톨처럼 사랑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나사랑’을 ‘너사랑’으로 뻗어서 ‘우리사랑’으로 이루는 ‘하늘빛’으로 다가설 만하다.
인천에는 동산과 언덕길과 잿마루가 있다면, 부산에는 가맛길과 가맛재와 가맛마루가 있기를 바란다. 낫거나 나쁘지 않은, 좋거나 싫지 않은, 그저 다르면서 하나인 숨결로 빛나는 길을 함께 생각하고 살펴서 아이 곁에 있는 즐거운 노래를 지을 수 있기를 빈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