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 호리 다쓰오 단편선 북노마드 일본단편선
호리 다쓰오 지음, 안민희 옮김 / 북노마드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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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2025.3.10.

다듬읽기 233


《늦여름》

 호리 다쓰오

 안민희 옮김

 북노마드

 2024.8.31.



  한자말 ‘용서’는 우리말로는 ‘봐주다(보아주다)’를 가리킵니다. 이 말뜻을 모르는 분이 대단히 많은데, 못마땅하거나 싫으면 아예 고개를 돌리면서 “안 봅”니다. ‘봐주다(보아주다)’를 하려면 고개를 마주해야 하지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그대로 지켜보면서 받아주겠노라”는 뜻인 ‘봐주다·용서’입니다. 그저 보면서 받아들이기만 할 뿐, 안 따지고 안 나무라겠다는 뜻인 ‘봐주다·용서’예요. 그래서 ‘봐주다·용서’를 펴려면 그야말로 스스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보아주지(용서하지) 못합니다.


  미운놈을 보아줄 수 없기에, 차라리 팔을 자르거나 긋는 쪽이 낫겠다고 여기는 사람까지 있더군요. 미운놈이나 싫은놈이 아무리 착하거나 참하게 일하더라도 “하나도 안 보”게 마련이에요. 미운놈이 뭘 하면 티끌만 한 잘못이 바윗덩이처럼 크게 보이고, 미운님이 가만히 있더라도 저놈은 곧 뭔가 터뜨릴 테니까 미리 박살내야 한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잘하면 “잘했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잘못하면 “잘못했네!” 하고 말할 수 있나요? “잘했어!”하고 “잘못했어!”만 말하면서, 다른 군말은 한 마디도 안 붙일 수 있는지요?


  ‘우리 쪽’에 있는 사람은 커다랗게 잘못을 저질러도 ‘봐주’면서, ‘저쪽’에 있는 사람은 아무 잘못을 안 저질렀어도 ‘못 봐주’는 매무새를 이을 적에는 내내 싸움박질입니다. 두 쪽이 똑같이 잘못을 저지를 적에 두 쪽 모두 고르게 나무라고 탓하지 않을 적에도 자꾸자꾸 싸움박질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우리는 나부터 스스로 ‘보아주’어야 합니다. 나부터 보아주는 자리에서 너를 보아줄 수 있고, 오직 사람을 사람 그대로 마주하면서 함께 이 별에서 살림하는 길을 찾습니다.


  《늦여름》을 읽었습니다. 심심하고 수수한 글자락이로구나 싶고, 이 심심맛과 수수맛이 따사로울 만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옮김말씨는 매우 아쉽습니다. 이웃말을 우리말로 담는 길을 좀 찬찬히 ‘보아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ㅍㄹㄴ


《늦여름》(호리 다쓰오/안민희 옮김, 북노마드, 2024)


이삼일 어딘가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 이틀쯤 어디로 살짝 떠났다가

→ 사흘쯤 어디로 슬쩍 마실했다가

8쪽


여행 도중에 제법 무거워졌다

→ 다니는 길에 제법 무겁다

→ 돌아다니는데 제법 무겁다

9쪽


석연치 않은 마음도 들지만

→ 썩 내키지 않지만

→ 그리 내키지 않지만

9쪽


괜찮을 것 같은데

→ 나을 듯한데

→ 나쁘지 않은데

18쪽


프리드리히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 프리드리히가 그놈에 오른다

→ 프리드리히가 검은이름에 오른다

22쪽


내버려두는 게 낫겠다고 체념한 것인지도 모른다

→ 내버려두어야 낫겠다고 넋놓았는지도 모른다

→ 내버려두어야 낫겠다고 고개저었는지도 모른다

23쪽


아까 본 호상가옥 말고도 옛 민가가 여러 채 모여

→ 아까 본 못집 말고도 옛 살림집이 여러 채 모여

→ 아까 본 못물집 말고도 옛 시골집이 여럿 모여

25쪽


숲이 점점 길어졌다

→ 숲길이 더 잇는다

→ 숲길이 더 나온다

→ 숲이 더 깊다

31쪽


캠프파이어를 했나 봐

→ 불놀이를 했나 봐

→ 모닥불놀이 했나 봐

33쪽


접시 위에 샐러리가 없다 싶더니 수프 안에 있었다

→ 접시에 굵미나리가 없다 싶더니 국에 있다

36쪽


우비를 입은 남자가

→ 비옷을 입은 사내가

38쪽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 젊은이가 비틀거리며 나온다

41쪽


바람도 거리에 흩어진 종잇조각을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공기의 흐름에 가까웠다. 그것이 내 등을 떠밀었다

→ 바람도 거리에 흩어진 종잇조각을 움직이지는 ㅇ낳는다. 오히려 가볍게 흐른다. 가벼운 바람이 등을 떠민다

49쪽


나는 격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 나는 몹시 지친다

→ 나는 고단하다

→ 나는 고달프다

49쪽


그녀도 나처럼 피로를 느낄까

→ 그이도 나처럼 지칠까

→ 그사람도 나처럼 힘들까

49쪽


개는 그 집의 불길한 그림자 속에 얌전히 웅크려 앉았다

→ 개는 그 집 시커먼 그림자에 얌전히 웅크린다

→ 개는 그 집 캄캄한 그림자에 얌전히 웅크려 앉는다

51쪽


자기 앞에 환상의 식물이 있음을 깨닫지

→ 제 앞에 눈부신 풀꽃이 있는 줄 깨닫지

→ 코앞에 빛나는 푸나무가 있다고 깨닫지

60쪽


어느 바 안에서 친구 몇몇을 찾아냈다

→ 어느 술집에서 동무 몇몇을 찾아냈다

→ 선술집에서 동무 몇몇을 찾아냈다

61쪽


골목 너머의 불길한 암흑 속을 응시했다

→ 골목 너머 꺼림히 어두운 곳을 본다

→ 골목 너머 꺼림칙히 까만 데를 겨눈다

66쪽


처음으로 밤이라는 것을 목도한 사람처럼

→ 처음으로 밤을 본 사람처럼

66쪽


술집에서 놀 수 있는 금액이었다

→ 술집에서 놀 수 있는 돈이다

80쪽


호수 주변을 드라이브했다

→ 못 둘레를 돌았다

→ 못 언저리를 몰았다

97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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