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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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2025.2.12.

다듬읽기 255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창비

 2004.10.1.



  밀씨도 볍씨도 책씨도 글씨도 찬찬히 흩뿌리기에 천천히 흙에 깃들어 싹트고 자랍니다. 우리가 쓰는 말씨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사뭇 다릅니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무함마드 깐수’로 이름을 숨기고서 샛놈(간첩)으로 남녘으로 몰래 들어온 ‘정수일’ 씨가 사슬살이를 하는 동안 곁님한테 띄운 글월을 모았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라고 북녘에서 일하던 이이는 1984년에 몰래 남녘에 들어와서 ‘마치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 흉내’를 내면서 자리를 잡았고, 1996년에 붙잡혔다지요. 그런데 여느 샛놈과 다르게 북녘을 드나들고 북녘하고 몰래 만나고 돈을 받았더라도, 남녘 살림길(문화)에 이바지했다고 여겨서 ‘죽음(사형)’이 아닌 몇 해만 사슬살이를 하고서 풀려납니다. 다만, 이런 줄거리를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에서 엿볼 수는 없습니다. 이 책만 읽으면 마치 아무 일도 없이 불쑥 사슬살이를 하고 만 ‘한겨레를 사랑한 늙수그레한 글바치’ 모습만 흐릅니다. 여러 이웃말을 대단히 잘한다고 하는데, 막상 이 책을 읽으면 ‘우리말’이라기보다는 ‘중국말’이나 ‘북녘한자말’이 끝없이 튀어나옵니다.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잘하면서 중국책이나 일본책을 읽고 새기려면 한문도 잘해야겠지요. 그러니까 정수일 씨는 다른 여러 이웃말을 잘할는지 몰라도 막상 ‘우리말’은 아직 햇병아리 같구나 싶어요. 비록 아흔 살이라는 나이를 넘었다고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말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배우면서 이녁 맨모습을 고스란히 남기기를 빕니다. 이녁이 일구면서 걸은 배움길은 눈부실는지 모르나, 이녁이 쓴 ‘우리말’은 너무도 초라합니다. 스스로 겨레사랑(민족주의자)이라고 밝히려 한다면, 어느 이웃말보다도 우리말부터 어질게 다루고 펼 노릇이라고 봅니다.


ㅍㄹㄴ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정수일, 창비, 2004)


제때제때에 소식을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 보내는 글로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 제때제때 알리거나 뜻을 적어 보내는 글로, 남한테 안 드러내야 맞는데

4쪽


내용도 마음의 소식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 주종을 이룬다

→ 줄거리도 거의 마음을 알리고자 했다

4쪽


충동의 계기마다 토출(吐出)한 것이어서 각설(却說)로 말머리를 돌릴 정도로 따분한 장광설을 요량없이 늘어놓기도 하였다

→ 불쑥불쑥 뱉은 말이어서, 끊고 말머리를 돌릴 만큼 따분하게 늘어놓기도 하였다

4쪽


겨레의 다시 하나됨에 뜻을 두고 기꺼이 수의환향(囚衣還鄕)해

→ 겨레가 다시 하나되기를 바라며 기꺼이 사슬옷을 입고서

→ 다시 한겨레가 되기를 바라며 기꺼이 굴레옷을 입고서

5쪽


삶의 화두를 한번 점검해보고,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슬기도 터득하는 기회였음을 자긍해본다

→ 삶말을 돌아보고, 슬기로운 소즈믄길을 깨닫는 자리였다고 여긴다

→ 삶말을 짚고서, 소걸음이란 슬기를 배우는 틈이었다고 자랑해 본다

→ 삶말을 뜯어보고, 천천걸음이란 슬기를 느끼는 때였다고 우쭐해 본다

5쪽


필요한 해석이나 설명을 가했으며, 몇곳에는 추기(追記)를 붙이기도 하였다

→ 풀이를 보태었으며, 몇 곳은 덧글을 달기도 하였다

→ 글풀이를 보태었으며, 몇 곳은 꽃적이를 붙였다

5쪽


짓궂은 옥바라지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집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 짓궂은 뒷바라지에 품을 아끼지 않은 곁사람이 고맙고

→ 짓궂은 바라지에 구슬땀을 아끼지 않은 곁님이 고맙고

5쪽


잠 속에서도 희소식을 기다리는 당신의 그 애타는 마음을

→ 자면서도 꽃비를 기다리는 애타는 그대 마음을

→ 잠들면서도 단비를 기다리는 애타는 이녁 마음을

13쪽


해외에서 10년간, 남한에서 12년간이라는 드라마틱한 인생여정을 걸어오면서

→ 먼나라에서 열 해, 남녘에서 열두 해라는 눈물겨운 나날을 걸어오면서

→ 먼곳에서 열 해, 남녘에서 열두 해라는 눈물나는 길을 걸어오면서

13쪽


시간만 있으면 말 그대로 학문에 잠심몰두(潛心沒頭) 했소

→ 틈만 있으면 말 그대로 배움길을 걸었소

→ 짬만 있으면 말 그대로 배우려 했소

→ 겨를만 있으면 말 그대로 배우고 익혔소

13쪽


더 깊이 빠져들어가게 하고, 그 천착(穿鑿)으로 일로매진케 했소

→ 더 깊이 들어가고, 이렇게 온힘을 기울였소

→ 더 빠져들고, 이처럼 달려들고 다가갔소

13쪽


왕왕 오랜 담금질끝에 대기만성(大器晩成)하는 터라서

→ 곧잘 오랜 담금질 끝에 늦그릇이라서

→ 때때로 오랜 담금질 끝에 늦꽃이라서

14쪽


서로가 망연자실 속에 잊음(잊어줌)과 기다림(기다려줌)이라는 딜레마를 피할 수가 없었던 요요(擾擾)한 일이 상기되어

→ 서로가 넋을 잃고 잊고 기다려야 하는 고빗사위를 벗어날 수가 없어 뒤숭숭하던 일이 떠올라

27쪽


우리나라의 단풍은 그야말로 자연경색(自然景色) 중의 절경이오

→ 우리나라 가을물은 그야말로 빛나는 숲빛이오

→ 우리나라 가을빛은 그야말로 눈부시오

→ 우리나라 가을무지개는 그야말로 곱소

28쪽


영어(囹圄) 생활의 고요함은 자꾸 무언가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하는구먼

→ 갇혀서 고요하니 자꾸 지난날을 돌이켜는구먼

28쪽


초록은 동색이라, 남이건 북이건 간에 우리는 한 핏줄을 이어받은 한겨레인 것이오

→ 풀빛은 같으니, 마녘이건 높녘이건 우리는 한핏줄을 이어받은 한겨레이오

33쪽


불초한 후손들이 제구실을

→ 못난 뒷사람이 제구실을

→ 모자란 우리가 제구실을

35쪽


우리 학계는 그간 묵묵불응(默默不應)이었소

→ 우리 배움밭은 여태 귀를 닫았소

→ 우리 배움판은 그동안 눙쳤소

→ 우리 배움마당은 이제껏 모르쇠였소

37쪽


두 나라는 중국에 속한 변방국가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오

→ 두 나라는 중국에 낀 귀퉁이기 때문이라고 하오

→ 두 나라는 중국에 딸린 구석이기 때문이라고 하오

38쪽


일본어로 씌어진 참고서적들이 많아 여전히 일본어와 인연을 맺고 있소

→ 일본말로 나온 읽을거리가 많아 여태 일본말과 사귀오

→ 일본말로 나온 곁책이 많아 아직 일본말과 어울리오

40쪽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던 나에게 이방어(異邦語)의 여신(女神)은 연신 두 개의 올가미를 던졌소

→ 구름길을 바라보던 나한테 이웃말 꽃님은 연신 올가미를 둘 던졌소

→ 쉰을 바라보던 나한테 너머말 빛님은 연신 올가미 둘을 던졌소

44쪽


여느 때와 같이 면벽(面壁)했소

→ 여느 때와 같이 담보기 했소

→ 여느 때와 같이 담을 봤소

47쪽


주례가 흔히 하는 구두선(口頭禪)이지

→ 길잡이가 흔히 하는 거드름이지

→ 길라잡이가 흔히 하는 빈말이지

→ 길님이 흔히 하는 말잔치이지

55쪽


자신의 삶에서 무엇으론가 추억되기를 기대하면서 송구영신(送舊迎新)할 것이오

→ 이 삶에 무엇으로 되새기려나 바라보면서 그믐맞이를 할 셈이오

→ 이 삶에 어떻게로 새기려나 두근거리면서 묵은절을 할 셈이오

65쪽


열매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미공(微功)이나마 이루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이오

→ 열매를 맺으면서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루어 놓을 수가 있었오

→ 열매를 맺으며 비로소 보잘것없으나마 이루어 놓을 수가 있었오

75쪽


여로(旅路)의 양식거리로, 발돋움의 발판으로 남아 나를 지탱해주었소

→ 걸어온 밥으로, 발돋움하는 판으로, 나를 버티어 주었소

102쪽


조금씩 장만해놓은 두견주(杜鵑酒, 진달래술)가 있지 않소

→ 조금씩 장만해 놓은 진달래술이 있지 않소

→ 조금씩 장만해 놓은 진달래꽃술이 있지 않소

120쪽


철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의 일주(一周)변화에다가 연속 꽃을 피우고 있소

→ 철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돌면서 잇달아 꽃을 피우오

141쪽


나름대로 행사극난(行事克難, 일을 진행하고 어려움을 극복함)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소

→ 내 나름대로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오늘에 이르렀소

→ 내 나름대로 자갈밭을 걸으면서 오늘에 이르렀소

159쪽


인생이란 단순하게 가감승제(加減乘除)식으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 삶이란 가볍게 네갈래셈으로 따지지 않고

→ 삶길이란 그저 덧뺄나곱으로 셈하지 않고

180쪽


솔직히 말해서 장미의 아름다움이나 멋을 느끼기란 나로서는 정서불급(情緖不及)이었소

→ 털어놓자면 나로서는 아름답고 멋스런 꽃찔레를 도무지 느낄 수 없었소

→ 나로서는 아름답고 멋있는 꽃찔레를 느낄 수 없다고 밝히오

211쪽


밤이면 또 밤대로 흡사 아열대야(亞熱帶夜)를 연상케 하오

→ 밤이면 또 밤대로 불볕이오

→ 밤이면 또 밤대로 덥소

→ 밤이면 또 밤대로 찜통이오

223쪽


작금 심히 우려되는 괴담이설(怪談異說)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소

→ 요즘 몹시 걱정스레 오싹한 말이 심심찮게 나돌오

→ 요새 무척 근심스레 서늘한 말이 심심찮게 나돌오

242쪽


우리의 전통에 바탕하여 남의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새것을 의욕적으로 창조해나가야 할 것이오. 이것이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이오

→ 우리 옛길에 바탕하여 이웃길을 가려서 받아들이고 우리 새길을 씩씩하게 지어야 하오. 이른바 옛길배움이오

→ 우리 살림에 바탕하여 이웃살림을 알맞게 받아들이고 우리 새살림을 기운차게 일궈야 하오. 이른바 새로짓기오

308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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