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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과 닭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설집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6월
평점 :
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2025.3.15.
다듬읽기 259
《달걀과 닭》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019.6.24.
새를 비롯한 숨붙이를 돌아보면, 으레 수컷이 끝없이 맑고 밝게 노래하면서 암컷을 바랍니다. 암컷도 나란히 노래하지만,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새노래는 거의 다 수컷가락입니다. 저(수컷)을 바라보아 주기를 바라는 님(암컷)을 부르려고 목청을 가다듬어서 노래를 펴는 그(수컷)입니다. 노랫가락에 담긴 뜻과 마음이 애틋하구나 싶을 무렵, 님(암컷)은 그(수컷)한테 다가와서 묻지요. “그래, 네 노래는 잘 들었어. 그런데 집은?” 이 말(새소리)을 들은 그(수컷)는 “우리집! 그럼, 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둥지를 틀었지!” 하고 외칩니다. 님(암컷)은 그(수컷)가 틀어놓은 둥지를 요모조모 보면서 “쯧쯧, 안 되겠는걸? 이대로는 모자라!” 하면서 그(수컷)가 어설피 엮은 둥지를 고치고 다듬으며 가꿉니다.
긴긴 나날을 거친 사람살이는 어떠한가 하고 돌아봅니다. 사람도 숫사람이 먼저 말을 트고서 암사람을 불렀을 만하지 싶습니다. 암사람은 언제나 마음과 마음을 잇는 눈빛으로 이야기를 펼 줄 알았다면, 숫사람은 마음과 마음으로는 좀처럼 이야기를 알아차리지 못 하면서 따로 목청을 돋워서 ‘말소리’를 지었지 싶어요. 이때에 암사람이 숫사람한테 다가와서 첫말을 터뜨리지요. “그래, 그래, 네 말 잘 들었어. 그런데 좀 엉성하지 않니?” 이윽고 암사람은 숫사람한테서 어떤 마음이 어설픈지 차근차근 짚고 알려주면서 ‘이야기’를 소리로 옮기는 살림을 짓습니다.
그런데 암수가 서로 맺던 사랑이라는 길을 잊어버린 웃사내(가부장권력자)는 그들끼리 주고받는 벼슬자리를 마련합니다. 이 벼슬자리는 ‘말’이 아닌 ‘글’을 마치 굴레처럼 씌워요. 꽤 오래도록 ‘글’은 ‘수글(숫놈끼리 차지하는 힘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글 = 한문’이었고, 일본이 쳐들어온 뒤에는 ‘수글 = 한문 + 일본말’이었습니다. 일본이 물러간 뒤에는 이제 이 굴레를 털어낼 만했으나, 웃사내는 ‘수글’을 놓기 싫었어요.
지난날 암사람은 글을 구경하거나 얼씬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드문드문 착한 숫사람은 곁님이 글을 읽고 새기기를 바랐어요. 아무래도 숫사람은 스스로 말을 지을 줄 모르고, 말씨(말씨앗)·글씨(글씨앗)를 못 낳았거든요. 그리고 딸을 낳으면서 딸한테 글을 가르치고 물려주는 사내(아버지)가 하나둘 나타납니다. 이윽고 누구나(암수 모두) 말빛과 글빛을 살려야 하는 줄 알아보는 글순이가 나타나고, 어느새 온누리 글밭(문학계)은 차츰차츰 깨어납니다.
다만, 이러한 발자취가 있더라도, 오늘날 숱한 글순이(여성작가)는 ‘수글’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웃사내가 웃사내질을 하면서 뭇사람을 억누르던 ‘수글(한문 + 일본말)’인데, 이 수글은 ‘한문 + 일본말 + 옮김말씨(번역체)’로 더욱 볼썽사납게 뒤틀립니다. 우리는 언제쯤 우리말씨를 알아보고 눈여겨보고 귀담아듣는 마음을 열까요?
《달걀과 닭》을 읽는 내내 ‘수글잔치’를 느낍니다. 설마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님이 이녁 ‘엄마말’을 이런 수글잔치로 썼을는지 아리송합니다. 한글로 옮길 적에는 ‘무늬한글’인 ‘수글’이 아닌, ‘살림글·삶글·숲글’로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봅니다. ‘수글’은 예나 이제나 굴레입니다. 살림글이요 삶글이요 숲글일 적에는 그저 수수하게 ‘글’입니다.
#O Ovo e a Galinha 1960년
ㅍㄹㄴ
《달걀과 닭》(클라리시 리스펙토르/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019)
나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부엌 탁자의 달걀을 응시한다
→ 나는 바로 부엌 자리맡 달걀을 본다
→ 나는 곧장 부엌에서 달걀을 본다
8쪽
달걀은 외재화外在化하는 사물이다
→ 달걀은 밖에 있다
→ 달걀은 바깥에 있다
9쪽
닭의 몸에 관해서 말하자면, 닭의 몸은 달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대의 증거가 된다
→ 닭몸을 말하자면, 닭몸은 달걀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 닭이라는 몸은, 달걀이 있지 않은 줄 보여준다
12쪽
정확히 바로 이 순간부터, 하나의 달걀은 존재하지 않는다
→ 바로 이때부터, 달걀 하나는 있지 않다
→ 바로 여기부터, 달걀이란 없다
16쪽
그리고 나를 비밀 안에서 웃게 만든다
→ 그리고 나는 슬그머니 웃는다
→ 그리고 나는 넌지시 웃는다
→ 그리고 나는 몰래 웃는다
19쪽
구불구불한 길 위에서 그녀는 여자의 운명으로 떨어졌고
→ 그이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시내라는 삶으로 걷고
→ 구불구불한 길을 순이로서 살아가고
25쪽
그러나 삶은 그녀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 그러나 사는 내내 벌벌 떤다
→ 그러나 삶이란 늘 두렵다
36쪽
가정부가 들어오자, 도전적으로 성급하게 지시했다
→ 집일꾼이 들어오자, 서둘러 들이치듯 말한다
→ 부엌지기가 들어오자, 싸울듯이 얼른 시킨다
55쪽
기분이 상하고, 승리감에 들떠서, 나는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 못마땅하고, 우쭐거리면서, 까불며 대꾸했다
→ 싫고, 으쓱거리면서, 덤비듯 대꾸했다
96쪽
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걸음은 차츰 느려졌고
→ 그는 나를 쳐다본다. 나는 차츰 느리게 걷고
→ 그는 나를 본다. 나는 어느새 느릿느릿 걷고
107쪽
수태고지의 성녀처럼, 바로 그렇다. 그는 내가 최소한 자신을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을 허용했고, 그것을 통해 나에게 고지한 것이다
→ 아기를 알린 꽃님처럼, 그렇다. 그는 나를 보며 웃는다. 웃으며 말한다
→ 아기를 속삭인 님처럼, 그렇다. 그는 나랑 웃음짓는다. 웃음으로 얘기한다
120쪽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보호를 해줘야 해요. 쓰다듬는 것도 정말 위험하구요
→ 그래서 내내 돌봐줘야 해요. 쓰다듬어도 안 되구요
→ 그러니까 늘 보살펴야 해요. 쓰다듬다가 다치구요
186쪽
때때로 그는 아내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서,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 아내가 창피하다는데도, 그사람은 곁님이 옷을 갈아입는 곳에 곧잘 들어갔다
→ 아내가 부끄러워하는데도, 그이는 곁님이 옷을 갈아입을 적에 불쑥 들어갔다
239쪽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한 명의 인간이다
→ 그렇지만 나는 그대로 한 사람이다
→ 그렇지만 나는 늘 사람이다
266쪽
나는 동정녀의 영혼을 가졌으며, 그래서 보호가 필요하다
→ 나는 숫색시 넋이며, 누가 돌봐야 한다
→ 나는 숫몸인 넋이며, 누가 지켜야 한다
341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