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56 둘 사이



  우리는 “둘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서 갑니다. “둘 가르기(이분법)”에서 한켠으로 간다면 치우치면서 끼리질이 되지만, “둘 사이”에서 바람을 느끼면서 천천히 걸으면 둘을 그러모으면서 사랑하는 길을 새로 놓기 마련이에요. 더 빨리 가려고 길을 낼 때도 있어요. 지름길입니다. 지름길이란 빠르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없어요. 바로가기(순간이동)도 멋스럽지만, 바로가기를 하면 “둘 사이”가 없어서 아무 이야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굳이 오랜 품이나 날을 들여서 천천히 돌아가는 뜻이라면 이동안 이야기를 짓기 때문일 테지요. 지름길만 본다면 둘 사이가 없고 이야기마저 없어요. ‘사이’가 아닌 ‘가르기’라면 이야기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도 없고 미움·싸움·시샘이 불거집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도록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 봐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맛보도록 아이를 안거나 업으면서 마을살림을 누려 봐요. 책을 많이·빨리 읽어 본들 즐겁지는 않아요. 책을 노래하듯 소리내어 읽으면 즐거워요. 아이가 귀를 기울이는 책을 자꾸자꾸 새로 읽어 주니 더욱 즐거워요. “많이·빠르게 가려는 길”이 아닌 “즐겁게·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에 책 한 자락을 동무하듯 품는다면 스스로 아름답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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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1.9.14.

책하루, 책과 사귀다 55 소수



  2021년 9월 2일 무렵, ‘나라에서 밝힌, 백신 맞고 죽은 사람’은 800이 넘고, 9월 13일 즈음에는 1000이 넘습니다. 이 가운데 나라에서 ‘백신 탓에 죽었다’고 밝힌 사람은 딱 2입니다. 이날까지 백신을 맞은 사람은 3315만이 넘으니, ‘백신 맞고 죽은 사람’은 0.1%가 안 됩니다만, 백신을 맞아서 죽은 사람이 0.1%가 안 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을 모르쇠하거나 “백신은 걱정할 일이 없다”고 말해도 되지 않습니다. “나는 백신 맞아도 멀쩡하다”고 해서 “백신 부작용을 걱정할 까닭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아야 한다”고 밀어붙여도 안 됩니다. 밀가루나 달걀이 몸에 안 받는 사람이 있고, 찬국수(냉면)나 김치가 몸에 안 받는 사람이 있으며, 소젖(우유)이나 요거트나 치즈가 몸에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몸에 안 받는 사람보다 몸에 받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몸에 안 받는 사람을 나몰라라” 해도 될까요?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손가락질해도 될까요? ‘백신 맞고 죽은 사람’은 그야말로 안타까운 ‘작은이(소수자)’입니다. 성소수자도 작은이입니다만, 밀가루·달걀·소젖·김치로 애먹는 사람도 작은이요, 백신 맞고 죽은 사람도 작은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참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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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54 책값 에누리



  책을 사면서 에누리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저잣거리에 가서 저자마실을 할 적에 에누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장사하는 분이 부르는 값에는 그만 한 땀과 품이 있다고 느낍니다. 땀하고 품이 들어간 살림에다가, 가게나 길에 나와서 파는 동안 들일 땀하고 품, 또 이렇게 장사를 하며 삶을 지을 밑돈을 얻는 보람이 ‘값’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름값이 비싸다고 여긴다면 우리 살림새하고 안 맞는다는 뜻입니다. 이때에는 맞춤하거나 싸다고 여길 곳으로 조용히 가면 돼요. 나한테 비싸대서 남한테도 비싸지 않아요. 더 눅어야 좋지 않고, 더 높아야 아름답지 않아요. 살림을 짓고서 나누는 길에 들어간 땀하고 품이 다를 뿐입니다. 새책집에서는 모든 책값이 같으나 헌책집에서는 모든 책값이 달라요. 그 고장에서 그 책을 갖추는 데에 들어간 땀하고 품이 다르거든요. 책집지기가 수월하게 잔뜩 들인 책은 값이 눅어요. 책집지기가 힘겨이 찾아내어 알뜰히 건사한 책은 값이 높아요. 오직 이뿐입니다. 우리가 책을 살 적에는 ‘글님 땀과 품’뿐 아니라 ‘책집지기 땀과 품’이 어우러집니다. 여기에 ‘책을 책집까지 실어나르는 일꾼 땀과 품’이 값으로 붙습니다. 우리가 일한 땀값·품값하고 책값은 같습니다. 책값 에누리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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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53 안 배우고 논다



  배움터(학교)는 사람을 길들이는 곳입니다. 길을 들여서 똑같이 하도록 내모는 곳입니다. 삶터는 살아갈 생각을 스스로 짓는 곳입니다. 살림터는 사랑할 마음을 스스로 가꾸는 곳입니다. 배움터는 우리가 스스로 안 묻고 남이 시키는 대로 외우도록 내몰아 길들이는 곳입니다. 삶터랑 살림터는 우리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생각해서 스스로 삶이랑 살림으로 나아가며 노래하고 즐기도록 흘러가는 곳입니다. 어느 쪽이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바탕이 이러할 뿐이에요. 어느 곳에서든 우리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하고 헤아리면서 스스로 오늘 하루를 누리려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요. 배움터가 아무리 길들이는 곳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이 배움터에서 스스로 눈을 반짝이면서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이야기한다면, “길들여서 시키는 대로 내몰려는 그곳에서 거꾸로 스스로 묻고 생각하며 삶이랑 사랑이 피어나도록 바꿀” 만해요. 삶터나 살림터라 해도 윽박지르거나 시샘하거나 미워하거나 꺼리거나 등돌리거나 따돌리려는 마음이 터럭만큼이라도 있다면, “사랑이 아닌 ‘안 사랑’이 샘솟고 말아, 그만 스스로 바보로 나뒹구는 판”이 되곤 해요. 배움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아요. 다만 스스로 놀고 노래하는 마음일 때에 배우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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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52 힘들게 사네



  웬만한 어른조차 제 등짐을 못 듭니다. 엄청 무겁다고 할 만한 등짐에 사잇짐까지 여럿 겹쳐 들고서 걷거나 자전거를 달립니다. 이런 저를 두고 “힘들게 사네요”나 “고행하시네요” 하고 말하는 분이 있어 “저는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즐겁게 이 길을 걸어요.” 하고 말합니다. 즐기는 하루가 모이고 살림하며 노래하니 삶이 사랑으로 나아가거든요. “자가용 좀 몰면 안 힘들 텐데” 하고 묻는 분한테 “저는 글을 쓰고 읽는 길을 가기로 했기에 손잡이를 안 쥐기로 했습니다. 손잡이를 쥐고서 어떻게 글을 쓰고 읽나요?” 하고 말하지요. “무거운 책을 짊어지느라 책을 못 읽지 않나요?” 하고 되묻기에 “전 이 등짐을 짊어지고 걸어다니면서도 글꾸러미(수첩)를 펴서 글을 쓰고 한 손에 책을 쥐어요. 걸으면서도 얼마든지 쓰고 읽어요.” 하고 보탭니다. 몸소 이고 지고 다니면 힘들다고들 말하지만, 먼먼 옛날부터 얼마 앞서까지 누구나 스스로 이고 지며 살았어요. 아기는 어버이가 폭 감싸안을 적에 사랑스러운 기운을 느껴요. 종이꾸러미인 책도 똑같습니다. 두 손에 쥐고 펼 적에 책은 우리한테서 사랑빛을 받아서 반짝거려요. 손에 쥘 책을 등짐으로 이고 지며 집으로 나릅니다. 제 온사랑을 종이꾸러미한테 살며시 베풀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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