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마음이거나 그저 한마음으로



  영어로 ‘only’는 여러 가지를 나타냅니다. “오직”이나 “오로지”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저”나 “다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오직”일 때하고 “그저”일 때에는 사뭇 다르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헤아려 보면, “오직”하고 “그저”는 그리 다르지 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뿐이야”하고 “그저 그렇게 흔할 뿐이야”는 사뭇 다를 만하지만,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려 하는가에 따라서 두 가지는 한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온누리를 통틀어 딱 하나뿐이라고 하는 “오직”이기에 아름답거나 값질 수 있습니다만, 온누리 어디에나 흔하고 많다고 하는 “그저”라 하더라도 따사로이 아끼는 마음이 되면 하나만 있든 참으로 많든, 나한테는 모두 아름답거나 값집니다.


  꼭 하나만 있기에 더 값지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숨결입니다. 이리하여, 오직 그 책을 얻어서 읽어야 내 마음이 넉넉하게 자라지 않습니다. 그저 흔한 책 가운데 하나를 읽어도 내 마음을 넉넉하게 가꿀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단히 값지거나 아름답다고 하는 오직 하나뿐인 책을 손에 넣었어도, 얄궂거나 궂긴 마음이라고 한다면, 나는 대단히 값지거나 아름답다고 하는 책으로 삶을 가꾸지 못해요.


  놀랍거나 훌륭하거나 엄청나다고 하는 지식을 코앞에 마주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열어야 비로소 놀라운 슬기나 훌륭한 슬기나 엄청난 슬기를 ‘우러르거나 받들거나 섬기는 몸짓’이 아닌 ‘내가 늘 누리는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늘 누리는 삶으로 받아들이는 슬기일 적에는 참으로 수수합니다. 나처럼 내 이웃하고 동무도 ‘늘 누리는 삶’으로 받아들일 테고, 저마다 어디에서나 ‘수수한 슬기’로 가꿀 테니, “그저 흔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다른 것을 따지거나 재거나 살피지 않으면 됩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숨결로 거듭나려고 하는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다른 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됩니다. 스스로 사랑스러운 넋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가를 알아차려서 제대로 깨달으면 됩니다. 기쁘게 흐르는 한마음으로 가꾸고, 눈부시게 웃음짓는 한마음으로 돌보면 됩니다. 4348.8.8.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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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서 책을 읽을 적에



  골짜기에 깃들어 책을 읽으면 대단히 재미있다. 깊고 깨끗한 골짜기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만 해도 아주 우렁차고, 이 우렁찬 물살 소리를 가로지르는 멧새 노랫소리에다가, 바람이 나뭇잎하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어우러진다. ‘데시벨’로 치면 아주 높은 소리가 퍼지는 골짜기인데, 이런 데에서 책을 손에 쥐면 아뭇소리가 안 들린다. 아주 고요하고 차분하게 책에 사로잡힌다.


  골짜기에 깃들어 책을 읽더라도 눈길을 다른 데에 두면 괴롭다. 이를테면 여름날 휴가철을 맞이해서 시골로 놀러오는 사람들이 골짜기에 함부로 버린 온갖 쓰레기가 눈에 뜨이면 ‘책’이 아니라 ‘쓰레기’에 자꾸 눈길하고 마음이 가고 만다. 골짜기에는 ‘쓰레기를 보러’ 오지 않는데, 휴가철 언저리에는 그만 ‘쓰레기에 눈길이 가’니, 이를 어쩌나?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는 셈이다.


  도시에는 자동차가 아주 많다. 여느 때에 ‘자동차 노래’를 부르는 작은아이는 장난감 아닌 실물 자동차가 쏟아질듯이 넘치기에 눈을 뗄 줄 모른다. 도시에서는 작은아이 손을 붙잡고 걷지 않으면 자동차에 휩쓸리겠다고 느낀다. 그런데 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자동차를 안 쳐다본다. 너무 많으니 안 쳐다볼 수 있을 테고, 자동차를 쳐다보면 ‘내 할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지 못하니, 쳐다보아야 할 까닭도 없다.


  골짜기에서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 골짝물하고 골짝바람하고 골짝나무하고 골짝이웃이 모두 내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도록 돕는다. 그러고 보면, 배우려는 사람들이 깊은 숲이나 절집으로 깃들려고 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숲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곳인가? 사람들이 고요하면서 차분한 마음이 되도록 이끄는 데가 바로 숲이다. 도시라는 곳에도 찻길하고 건물만 있지 않고 너른 숲이 함께 어우러진다면, 도시에서 일하거나 사는 사람 누구나 고요하면서 차분한 마음이 되어 사랑과 평화를 꿈꾸는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4348.8.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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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놀이' 님이 파리와 매미하고 얽힌 이야기에

즐거운 댓글을 붙여 주셔서

곰곰이 더 생각을 기울이며

이 글을 써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


‘다름’하고 ‘같음’을 바라보기



  우리 집 작은아이를 보며 ‘가시내’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작은아이는 누나 옷을 물려입기도 하고, 얼굴 생김새가 가시내 같다고도 합니다. 우리 집 큰아이는 아직 많이 어렸을 적에 머리카락이 더디 자란 모습을 보고, 또 머리카락을 짧게 치니 ‘사내’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큰아이는 ‘이웃한테서 얻은 사내 아이가 즐겨입었다는 옷’도 거리끼지 않고 입었기에 ‘사내’로 잘못 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가만히 보면, 참 많은 이들은 옷차림을 보고 가시내랑 사내를 가르려 하며, 얼굴 생김새로도 가시내랑 사내를 가르려 합니다. 가시내인지 사내인지 알아내야 하거나 가려야 하는 일이 대수로울 수 있습니다만, 이보다는 두 아이가 어떤 이름이며 어떤 숨결이고 어떤 사랑인가를 먼저 바라보고 헤아릴 노릇이리라 봅니다.


  풀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이 풀하고 저 풀이 어떻게 다른가를 도무지 모를 수 있습니다. 강아지풀하고 골풀하고 갈풀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테고, 고들빼기하고 씀바귀는 고들빼기나 씀바귀를 캐거나 뜯어서 먹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무지 못 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풀을 보면서 어떤 풀인지 제대로 가리지 못하면 잘못 먹고 배앓이를 하기 일쑤입니다. ‘먹는 풀’하고 ‘약으로 삼는 풀’하고 ‘돗자리나 바구니를 엮는 풀’을 똑똑히 가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풀은 ‘풀’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똑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풀이 저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까닭은 다 다르면서 저마다 새롭게 재미난 숨결이기 때문이에요. 어슷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똑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개미라고 해서 다 같은 개미가 아니고, 하루살이라고 해서 다 같은 하루살이가 아닙니다. 사람도 이와 같아요. ‘사람이라는 목숨’으로는 모두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서 밥삶이나 옷삶이나 집삶이 달라요. 서양사람은 한·중·일 세 나라 사람을 가리기 어려울 테지만, 한·중·일 세 나라는 먹고 입고 자는 삶이 저마다 다릅니다. 날씨와 흙과 바람과 숲과 들과 바다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사람은 네덜란드나 덴마크나 룩셈부르크나 크로아티아나 이탈리아나 헝가리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말도 밥도 옷도 집도 다 다른데, 어떻게 다른가조차 알기 어렵겠지요.


  시골에서 흙을 가꾸며 사는 사람은 ‘다 다른 벌레와 풀과 버섯과 나무와 꽃과 새’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날마다 다른 바람과 날씨와 볕과 빛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 다른 빗소리와 비내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고, 바람소리와 바람내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름’을 익히고 배우면서 ‘같음’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삶이 시골살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어른(어버이)하고 아이는 다릅니다. 몸피가 다르고 기운이 다르며 생각이 다릅니다. 어른하고 아이는 같습니다. 목숨이 같고 숨결이 같으며 사랑이 같습니다. 서로 다르기에 배우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서로 같기에 아끼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다름’하고 ‘같음’은 늘 나란히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더 살펴야 하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를 앞에 두거나 뒤에 두어야 하지 않습니다. 늘 나란히 흐르는 즐거운 눈길입니다. 4348.8.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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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려는 꿈



  그리려는 꿈이 있어야 생각이 자란다. 생각이 자라야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가 나와야 삶을 이룬다. 삶을 이루어야 마음을 짓는다. 마음을 지어야 하루가 즐겁다. 하루가 즐거워야 웃음이 샘솟는다. 웃음이 샘솟아야 노래가 흐른다. 노래가 흘러야 서로 어깨동무를 한다. 서로 어깨동무를 해야 가만히 손을 맞잡으면서 새롭게 꿈을 꾸는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다.


  그리려는 꿈이 없으면 생각이 못 자란다. 생각이 못 자라면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가 없으면 삶을 이루지 못한다. 삶을 못 이루면 마음을 못 짓는다. 마음을 못 지으면 하루가 따분하다. 하루가 따분하니 웃음하고 동떨어진다. 웃음하고 동떨어지니 노래를 도무지 모른다. 노래가 도무지 안 흐르니 서로 등을 돌린다. 서로 등을 돌린 채 시끄럽게 다투면서 다시금 따분하면서 미움만 넘치고야 만다. 4348.7.2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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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사람, 글쓰는 사람



  ‘말하다’는 한 낱말이다. ‘글쓰다’는 한 낱말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고, 글쓰는 사람은 이 지구별에 생긴 지 얼마 안 된다. 아스라하구나 싶도록 오랫동안 사람은 누구나 말을 했다. 아니, 사람이라면 마땅히 말을 하면서 삶을 지었다. 입에서 터져나온 말은 모두 삶이었고, 꿈이나 사랑은 언제나 말로 꽃피웠다고 할 만하다.


  글이나 책이라고 하는 문화나 문명은 역사가 대단히 짧다. 게다가 수많은 글이나 책은 요 천 해나 이천 해 사이에 몇몇 사람 손에서 태어나고 몇몇 사람 손에만 읽혔을 뿐이다. 글이나 책이 지구별 사람한테 두루 퍼진 지는 기껏해야 백 해쯤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 지구별에서는 ‘글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글(서류)을 만지작거리는 솜씨를 가르치는 학교가 대단히 많고, 웬만한 사람은 글(문서)을 오물조물거리면서 돈을 번다. 숱한 공무원과 회사원은 ‘글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옛날에 처음 태어난 ‘말’을 다루는 ‘글’이라고 할까.


  시골에서 땅을 짓는 사람(말)이 있기에, 도시에서 회사를 꾸리거나 정치를 엮는 사람(글)이 있다. 대통령이건 시장이건 재벌 우두머리이건 의사이건 법관이건, 시골지기(말)가 있기에 비로소 이들은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도 먹고산다. 그런데, 시골지기(말)가 사라지면 어찌 될까? 그때에도 도시에서 문화나 문명이 버틸 수 있을까?


  말이 있어야 글이 있다. 말이 없이 글이 있을 수 없다. 한국말이 있으니 이를 한글로 담는다. 한국말이 없다면 한국사람으로서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그러나, 말(시골과 숲과 사랑)을 살피지 않고 글(도시와 문명과 기계)만 주무르며 이론과 지식을 퍼뜨리는 사람이 자꾸 늘어난다. 말은 모르는 채 글만 뚝딱거리는 책을 손에 쥐는 사람도 자꾸 늘어난다. 말은 아예 잊은 채 글만 붙잡는 사람도 자꾸 생긴다. 삶이 없이 읊는 글은 문학도 철학도 종교도 정치도 교육도 안문도 되지 않는다. 4348.7.2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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