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책을 덮을 때



  문득 책을 덮을 때가 있습니다. 책이 재미없어서 덮을 수도 있지만, 책이 재미있지만 책보다 재미있는 다른 일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려는 마음으로 책을 덮습니다. 바람을 한껏 들이켜면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어서 책을 덮습니다. 빗소리를 듣거나 눈발을 바라보려고 책을 덮습니다. 노래하며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함께 놀려고 책을 덮습니다. 밥을 지으려고 책을 덮습니다. 빨래를 걷어서 개려고 책을 덮습니다. 졸려서 잠을 자려고 책을 덮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책을 덮습니다. 자전거를 타려고 책을 덮습니다. 숲에 깃들어 골짝물에 풍덩 뛰어들려고 책을 덮습니다. 마을 어귀 빨래터에 낀 물이끼를 걷으려고 책을 덮습니다. 그리고 시를 한 줄 적바림하면서 내 마음속에서 샘솟는 꿈을 읊고 싶어서 책을 덮습니다. 2016.6.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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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려고 책을 덮다



  여섯 달 남짓이 되어 서울마실을 하는 길에 시를 쓴다. 시외버스를 타는 사이, 시외버스에서 내려 전철을 타고 움직이는 사이, 전철을 기다리는 사이, 수첩을 꺼내어 시를 적어 본다. 처음에는 책을 좀 읽으려 했으나 어느새 머릿속에서 수많은 노래가 어우러지거 얽히고 흐르면서 ‘얘야 책을 덮으렴, 얘야 이 노래를 들으렴’ 하면서 싯말이 자꾸자꾸 흘러넘쳤다. 이리하여 나는 책을 고이 덮고 가방에 넣었다. 한손에 연필을 쥐고 한손으로 수첩을 받치면서 자꾸자꾸 시를 썼다. 서울마실에서 만날 살가운 이웃님을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시를 한 자락 쓰고, 또 한 자락, 다시 한 자락, 그야말로 술술 바람이 불듯이 썼다. 시를 쓰려고 책을 덮었다. 노래가 흘러넘쳐서 책을 덮었다. 춤을 추면서 웃고 싶어서 책을 덮었다. 2016.5.3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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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상 하나 있으면



  걸상 하나 있으면 아무리 넓은 책방이나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아늑하다. 왜 그럴까? 고작 작은 걸상 하나일 뿐인데. 걸상 하나 없으면 아무리 작은 책방이나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갑갑하다. 더욱이 걸상 하나 없는 커다란 책방이나 도서관은 아찔하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지만, 책만 있고 걸상이 없는 곳은 아무래도 책방답지 않고 도서관 같지 않다고 느낀다.


  걸상은 더 많아야 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라도 얌전히 있으면 된다. 온몸을 가만히 맡길 걸상에 앉아서 온마음을 책 하나에 쏟을 수 있으면 된다. 2016.2.28.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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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시집은 낡은 이야기



  낡은 시집에는 낡은 이야기가 깃들었을까? 그러면 새로 나온 반들거리는 시집에는 반들거리는 새로운 이야기가 깃들까? 책꽂이를 새롭게 고치려고 책을 잔뜩 들어내어 옮기다가 《백제행》 2쇄를 본다. 나한테는 《백제행》 1쇄도 있고 2쇄도 있는데, 두 가지 판은 겉그림이나 판짜임이 다르다. 이제 새책방에서 자취를 감춘 《백제행》인데 마지막 쇄를 찍은 겉그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2쇄 때 모습 그대로 흐르다가 판이 끊어졌을까?


  《백제행》을 펴낸 출판사에서 며칠 앞서 새로 선보인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읽었다. 새로 나온 시집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흐를 테지만, 이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시집을 펴낸 시인이 걸어온 ‘예전 발걸음’이다. 예전에 나온 낡은 시집도 예전에 그 시집을 펴낸 시인이 그동안 걸어온 ‘예전 발걸음’이다.


  2016년 눈길에서는 2016년에 나온 시집은 ‘새’ 시집일 테고, 《백제행》은 ‘판이 끊어진 낡은’ 시집일 텐데, 2050년이나 2100년을 사는 사람들 눈길로 보면 두 시집은 어떠한 시집이 될까? 낡지 않은 이야기가 흐르는 낡지 않은 ‘낡은 시집’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2016.2.28.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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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 사진책을 말하기



  필립 퍼키스 님 사진책이 지난 2015년 12월에 새로 나왔다. 이 사진책을 다루는 인터넷서점은 아마 ‘알라딘’뿐이지 싶다. ‘안목 출판사 누리집(http://blog.naver.com/anmocin)’에 들어가야 비로소 필립 퍼키스 님 사진책을 주문해서 받아볼 수 있으리라 본다.


  언제부터였던가, 필립 퍼키스 님 사진책이 한국말로 나왔고, 이분 사진책이 날개 돋힌듯이 팔리지는 않았으나, ‘사진길을 걷는 이웃님’한테 포근하면서 부드러운 노래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구나 하고 느낀다.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삶’을 밝히는 사진을 가르친 필립 퍼키스 님이기에, 이분 사진책은 여러모로 따스하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작품’이나 ‘예술’이 아닌 ‘사진’을 말하는 사진책을 쓰는 필립 퍼키스 님이라고 할까. 이분 새로운 사진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를 놓고 두 달 남짓 마음으로 삭히고 삭힌 끝에 오늘 낮에 드디어 느낌글 하나를 마무리지었다. 이 사진책을 놓고 글을 쓰기로 하고 출판사에 연락해서 ‘보도자료(비평/리뷰)로 쓸 사진’을 얻고서 이레가 지난 오늘 느낌글을 마치면서 여러모로 기쁘다.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글이 아주 술술 잘 풀렸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도 언제나 삶이다. 글이란 무엇인가? 글도 언제나 삶이다. 영화도 만화도 노래도 춤도 연극도 연속극도 모든 것은 언제나 삶이다. 삶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사진을 사진으로 마주할 수 있을 때에는 삶을 삶으로 마주하면서 그리는 손길·눈길·마음길이 된다고 느낀다. 한국에서 필립 퍼키스 님 사진책을 꾸준히 펴내 주는 안목출판사 일꾼들한테 언제나 고맙다. 4349.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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