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수 있으면 바른다



  화장품이나 비누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요? ‘짓지’ 않고 ‘만든’ 화장품이며 비누이며 샴푸는 어떤 화학약품이나 화학소재로 다루었을까요? 하장품이나 비누나 샴푸를 입에 넣어 먹을 만할까요? 몸속으로 넣을 만하지 않은 이런 여러 가지를 섣불리 얼굴이나 살갗이나 머리카락에 바르거나 묻히지는 않나요? 우리는 입뿐 아니라 살갗으로도 먹습니다. 사람이 살갗으로 여러 가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핵발전소처럼 방사능이 가득한 곳에 온몸을 둘둘 감싸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갗으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배기가스나 공해로 매캐한 곳에서 입가리개만 할 테지만, 먼지가 자욱한 날에는 얼굴뿐 아니라 손발까지 꽁꽁 싸매지요. 몸속으로 넣어도 된다면 입으로 넣어도 될 뿐 아니라 얼굴이나 살갗에 발라도 된다는 얼거리를 살필 줄 안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화장품이나 비누나 샴푸를 제대로 가리거나 물리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다음으로 책을 헤아려 볼 노릇입니다. 우리는 아무 지식이나 정보를 머리에 담아도 될까요? 아무 이야기나 그냥 읽어도 될까요? 많이 팔려서 사람들이 널리 읽는다는 책을 우리 스스로 꼼꼼히 살피지 않고서 그저 받아들여도 될까요? 신문이나 방송에 흐르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까요? 아무것이나 살갗에 바를 수 없듯, 눈을 거쳐 머리로 들어와 마음을 움직일 이야기를 담은 책 하나를 섣불리 손에 쥘 수 없습니다. 더욱이 아이들한테 아무 책이나 선뜻 내밀 수 없지요. 삶을 슬기롭게 읽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은 책을, 말을 말답게 다스리지 않은 책을,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랑으로 삶을 짓는 길을 들려주지 못하는 책을, 어른도 아이도 모조리 물리치거나 걷어치울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2018.7.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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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일까



  경기 시흥에 있는 대교HRD센터라는 곳에서 사흘 동안 배움마당을 누렸는데, 이때 이 건물 한켠에 ‘신입사원 연수’를 온 새내기 일꾼이 잔뜩 있더군요. 그런데 이들 새내기 일꾼은 남녀라는 모습으로 다를 뿐, 옷차림이 몽땅 같습니다. 사내는 위아래 까만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 가시내는 까만 치마에 흰 블라우스. 머리카락조차 사내는 사내대로 가시내는 가시내대로 모조리 같습니다. 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이분들을 얼핏 스쳐 지나가면서 ‘다 똑같은 사람들이네’ 하고 느꼈어요. ‘누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가슴에 이름표를 달지 않고서는 이름을 알기 어려울 테고, 가슴에 단 이름표 없이는 어느 누구한테서도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는 학교하고 감옥하고 군대에서 똑같이 마주하는 모습입니다. 학교·감옥·군대는 사람마다 다 다른 모습인 개성을 죽여서 똑같이 다룹니다. 옷을 똑같이 입히고 밥을 똑같이 먹이며 터를 똑같이 맞춥니다. 이러면서 모두 똑같은 이야기(교과서나 설교나 훈련)를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요. 여기에 회사라고 하는 곳도 똑같은 얼거리로구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나라에서 학교·감옥·군대·회사는 한통속입니다. 더 살피면 학교·감옥·군대·회사에다가 정부(공공기관)까지 틀에 가두는 한통속이 되겠지요. ‘나’라고 하는 숨결이 흐르지 못하는 곳에서 저마다 다른 꿈이나 사랑을 키울 수 있을까요? ‘나’라고 하는 넋을 스스로 찾지 못하도록 가두거나 지우는 곳에서 일하거나 배우는 이들이 ‘나’를 참답게 바라보도록 북돋우는 책을 손에 쥐기 쉬울까요? 우리 삶터는 ‘똑같은 지식’을 담은 ‘똑같은 책’을 ‘똑같은 눈’으로 읽어서 ‘똑같은 줄거리’로만 외우게 다그치는구나 싶습니다. 옷을 맞추려면 틀이 아닌 삶에 맞출 노릇입니다. 삶맞춤 아닌 틀맞춤으로 나아간다면, ‘읽는눈’이 쪼그라듭니다. 2018.7.4.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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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없지만



  저는 이제까지 살며 어느 하루도 ‘스승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에요. 참말로 ‘스승이 없다’고 느낄 뿐 아니라, 온몸으로 알고 배우는 나날입니다. 다만 ‘스승이 없으니 스스로 배우는 길’인 줄 알 수 있어요. 누가 저를 가르치거나 이끌 수 없습니다. 언제나 저 스스로 배우려 나설 수만 있습니다. 훌륭한 분은 이웃이나 둘레에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훌륭하대서 제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한테서 무엇이 훌륭한가를 읽어내려고 해야, 훌륭한 길을 ‘느끼는 배움’ 하나를 얻습니다. 이다음으로는, 훌륭한 길을 가는 분 곁에서 어깨너머로 지켜보면서 ‘엿보는·구경하는 배움’ 둘을 얻어요. 그리고 훌륭한 분한테 말을 여쭈어 제 귀로 하나하나 들으며 ‘듣는 배움’을 얻지요. 훌륭한 분이 제 손을 잡고 따라하도록 시키면서 ‘하는 배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참배움이 되는데요, 이제껏 배운 길을 몽땅 내려놓고서 제 보금자리에 제 몸을 써서 제 마음을 기울이는 제 살림짓기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해 보는 동안 비로소 참답게 배우지요. 이제 막바지인데, 스스로 참답게 배운 뒤에는, 저한테 가장 가까운 아이들하고 곁님한테 이 이야기를 살며시 풀어놓습니다. 아이들하고 곁님한테 ‘제가 배운 삶길’을 이야기로 조곤조곤 도란도란 오순도순 상냥하게 들려주거나 물려준다면, 제 배움길은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온누리에 어떠한 스승도 있을 수 없지만, 슬기롭고도 훌륭하게 삶길을 지은 이웃님이 있어서, 말로도 글로도 책으로도 이야기로도 몸으로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읽으면서 스스로 배우는 살림길입니다. 2018.7.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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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책



  우리는 곧잘 ‘어려운 책’하고 ‘쉬운 책’을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 책은 어느 대목에서 갈릴까요? 어렵구나 싶은 말을 골라서 쓰기에 어려운 책이 될까요? 쉽구나 싶은 말을 골라서 쓰기에 쉬운 책이 될까요? 그러나 쉬운 말만 골라서 쓴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이라 해서 ‘쉬운 책’이 되지 않습니다. 여느 삶자리에서 누구도 안 쓰는 딱딱하거나 메마른 일본 한자말이나 번역 말씨가 가득하도록 쓴 책이라 해서 ‘어려운 책’이 되지 않습니다. 낱말이나 말씨는 쉬워도 ‘어려운 책’이 있을 만하고, 낱말이나 말씨는 딱딱하고 메말라서 어려워 보여도 ‘쉬운 책’이 있을 만합니다. ‘어려운 책’이라 할 적에는, 하루아침에 섣불리 읽을 책이 아니지 싶습니다. 두고두고 되읽으면서 새길 책이 비로소 ‘어려운 책’이겠지요. 한 벌이나 두 벌, 또는 열 벌이나 쉰 벌쯤 읽어도 좀처럼 뜻을 새기기 만만하지 않지만, 알고 싶은 마음을 자꾸 일으키는 책이 바로 ‘어려운 책’일 테고요. 그러나 ‘말씨가 어려운 책’은 ‘어려운 책’이기보다는 ‘어려운 척하는 책’이나 ‘어렵게 보이려고 꾸민 책’이라 해야 옳지 싶습니다. 오래도록 곰곰이 새기거나 숱하게 되읽으면서 이야기를 살피는 책일 적에는 ‘읽으면서 배울 책’이 되지 싶어요. 다시 말해서, ‘어려운 책’이란 없다고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아니, 어려운 책은 없습니다. 말을 비틀거나 비꼬아서 일부러 딱딱하게 한 책은 있을 테지만, 줄거리가 어려워서 못 읽을 책이란 없습니다. 모든 책은 우리 스스로 알고 싶어하는 대로 읽습니다.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다면 못 읽습니다. 다섯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낱말로 엮은 책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안 열고 생각을 안 연다면, 그저 어렵다 싶은 책이 되겟지요. 한 벌이나 두 벌쯤 슥 훑고서 그치지 않기를 바라요. 오늘 줄거리를 다 알아낼 책이 있을 테지만, 모레나 글피에 줄거리를 느낄 책이 있을 테고, 열 해나 스무 해쯤 지나고서야 줄거리를 헤아릴 책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되읽는 사이 새롭게 스며드는 책도 있을 테고요. 그러니까 온누리에는 어려운 책도 쉬운 책도 따로 없이 ‘읽을 책’이 있으며, ‘읽으면서 배울 책’이 있고, ‘읽고 삭이고 새기면서 기쁘게 배우며 이야기꽃을 지피는 책’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저 책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2018.7.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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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읽기랑 그냥외기



  ‘모르는 나’를 고이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열 적에 비로소 귀를 열고 머리를 열면서 새로운 숨결을 받아들입니다. ‘모르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는 척하는 나’를 섣불리 겉에 내세우는 모습이 될 테니, ‘아는 척’은 마음을 못 열고 귀도 머리도 못 여는 터라, 받아들이는 모습하고는 동떨어진 채 새로운 숨결을 모두 멀리하고 맙니다. 배움읽기입니다. 그냥외기 아닌 배움읽기입니다. 그냥외기를 하면 남이 시키거나 보이는 대로 길들어서 믿음을 굳히고 말아요. 이른바 종교나 철학이나 이론이나 정치나 질서나 권력이나 사회가 됩니다. 그냥외기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냥외기에는 종살이 하나만 있어서 늘 쳇바퀴를 도는 하루로 흘러갑니다. 배우는 사람은 젊은데, 안 배우는 사람은 안 젊습니다. 나이가 어리기에 젊을 수 없습니다. 배우기에 비로소 젊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안 배우는 사람은 고리타분하면서 ‘애늙은이’라 하지요. 안 배우려 하는 이는 귀도 머리도 마음도 꾹꾹 닫아걸고 제 좁은 울타리에 가둔 믿음만 둘레에 퍼뜨리려고 하니,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리타분 애늙은이’한테서 멀어지려고 해요. 그런데 적잖은 사람들은 눈도 귀도 마음도 머리도 열면서 새로 배우는 즐거운 사람 곁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스스로 길들어 스스로 종살이를 하며 스스로 쳇바퀴질을 하는 줄 깨닫지 않을 적에는 ‘배우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배우는 사람’한테는 종교도 철학도 이론도 정치도 질서도 권력도 사회도 없습니다. 배우는 사람한테는 오로지 하나 ‘배움읽기’만 있어요. 배우려고 마음을 읽고, 배우려고 바람을 읽으며, 배우려고 숲을 읽지요. 배우려고 사랑을 읽고, 배우려고 삶을 읽으며, 배우려고 옷밥집 같은 살림살이를 읽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삶이라는 앎을 말하지만, 안 배우는 사람은 늘 믿음이라는 굴레(종교라는 쇠사슬)를 욀 뿐입니다. 2018.7.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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