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당신한테
[사진은 삶이다 1] 사진을 너무 ‘가볍게’ 찍지 않는가?
서른 해 넘도록 사진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ㅂ교수님을 만나뵌 자리에서 사진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 한켠으로 여러모로 씁쓸했습니다. ㅂ교수님은 당신이 몸담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힘껏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지만, 그 학교 아이들은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살 속 깊숙이 파고들도록 헤아리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자꾸자꾸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배우는’ 아이들이니, 한 해 두 해 익어가는 동안, 열 해 스무 해 무르익는 동안 차츰차츰 거듭나거나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 믿어 봅니다. 다른 문화와 예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만, 사진은 햇수를 먹지 않고서는 펼칠 수 없습니다. 세월이라는 때를 먹어야만 빛이 나게 되는 사진입니다. 한두 장 반짝하고 빛나는 사진으로 뽐내기도 하고, 신문잡지 1쪽을 채울 사진을 만드느라 발이 닳도록 뛰기도 하고 만들기도 해야 할 터이나, 빈자리 메우기로는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빈자리 메우기도 이 나름대로 남다른 이야기가 되기는 할 터이나, 빈자리를 메우는 이야기로 스무 해나 서른 해를 꾸준히 엮어 나가려는 사진쟁이가 이 나라에는 거의 없음을 돌아본다면, 사진기를 앞세운 어르신이나 새내기는 많으나, 정작 ‘사진을 한다’고 할 만한 사람은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어요.
고향이지만 고향으로 여기지 않고 멀리멀리 떨어진 채 지내던 인천으로 돌아온 지 한 해하고 아홉 달이 지났습니다. 곧 이태가 됩니다. 이 이태라는 시간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 해 동안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다니던 때까지 머물던 고향을 몸이며 마음으로 되찾는 때였습니다. 인천사람 스스로 인천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고 서울바라기가 될 뿐더러, 인천 바깥에서도 인천이 고유하고 홀로서지 못하도록 막는 흐름이 보기 싫고 견디기 싫어서 인천을 떠났지만, 이런 못난쟁이 인천으로 돌아와 거의 이태를 지내는 사이, ‘못난쟁이는 못난쟁이이기 때문에 좋다’고 새삼 느낍니다.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대로 좋은 모습이 있을 텐데, 못난 사람도 못난 사람대로 좋은 모습이 있습니다. 부자는 돈이 많아서 좋을 테지요. 그러나 가난뱅이는 가난하기에 좋습니다. 돈이 많아서 즐거울 부자들은 바로 돈 때문에 걱정이 큽니다. 돈이 없어서 걱정인 가난뱅이는 바로 돈 때문에 홀가분하면서 즐겁습니다.
돌이켜보면, 고향을 오래도록 멀리하면서 떠돌이처럼 지내 온 세월이 좋은 스승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처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때는 또 그대로 좋았던 대목이 있었을 텐데, 고향에 머물지 않고 떠나 보냈던 삶은 또 그런 삶대로 제 마음과 몸을 살찌우거나 키워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가지 사진감만을 붙잡고 죽는 날까지 신나게 사진찍기를 하는’ 저 같은 사진쟁이로서는, 떠돌고 맴돌고 헤매던 나날이 고향땅에서 제대로 사진눈을 트게 해 주는 밑거름이 된다고 느낍니다.
떠돌이로 지내다 보니, ‘떠돌이가 모이는 도시’인 인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고, 있는 그대로 동네사람과 만나 있는 그대로 사진을 찍게 됩니다. 낮에는 썰렁하다고 할 만큼 고요하며, 저녁에는 일찌감치 길거리 불이 꺼지며 조용해지는 ‘서울하고 이렇게 가까우면서 참 도시 냄새가 안 나기도 하는’ 인천이란 어떤 데인가를 뼈속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골목길을 사진감으로 삼아서 멋진 작품을 일구어 낸 어르신(김기찬 님)이 계셨지만, 그분 앞으로나 뒤로나 ‘골목길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없는 까닭, 그러면서 ‘골목길 사진 어르신’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사진이 무엇인가 하는 앎, 요즈음 사진쟁이들이 골목 사진을 못 찍는 까닭, ‘골목길 출사’ 나가는 젊은 사진쟁이가 많지만 골목을 골목답게 담아내는 눈길이 보이지 않는 까닭을 하루하루 깨닫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골목 사진을 넘어, ‘한국땅에서 사진 하는 사람 매무새’에서 무엇이 잘못되거나 어긋나 있는가를 알아 갑니다. 여러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삶이 없습니다. 삶이 없으니 사진이 없습니다. 삶이 없으니 글이 없고 삶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으며, 삶이 없으니 사람을 만나도 냄새며 이야기며 자취며 없습니다. 오로지 눈요기가 판칩니다.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며, 눈속임이 넘칩니다.
상업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사진밭에서 거의 따돌림만 받고 있는데, 이분들한테 아쉬움이 있기는 있어도, 이분들한테 배울 대목은 꽤 많습니다. 다른 대목도 참 많이 배워야겠으나, 상업사진 하는 분들은 ‘상업사진판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예인을 찍건 배우를 찍건, 이런 연예인이나 배우하고 형 동생 언니 오빠 누나처럼 지냅니다. 살가운 사이입니다. 살갑지 않고서 이런 사진을 찍어내지 못합니다. 말을 트고 지내지 않더라도 늘 지켜보고 가까이하고 들여다봅니다. 한 울타리에 있어요.
그러나 다큐멘터리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몸담은 자리에서조차 이웃이나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한두 해 그 동네에서 머문다고 다큐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뜨내기이고 구경꾼이며 길손일 뿐입니다. 대여섯 해 머문다면 시늉은 낼 수 있을 테지요. 그렇지만 열 해나 스무 해쯤, 때로는 서른 해나 마흔 해쯤 ‘함께살기’를 하지 않고서야 다큐사진은 안 나옵니다. 함께살지 않고 찍은 다큐사진은 모두 거짓입니다. 눈가림이나 눈속임입니다. 누가 말해 주느냐? 사진이 말해 줍니다. 사진으로 찍힌 작품이 말해 줍니다.
늘 살아야 그곳이건 그이건 그 모습이건 찍을 수 있습니다. 야구장에서 살아야 야구 선수 사진을 찍고, 야구 이야기를 기사로 씁니다. 국회에서 살아야 정치꾼 사진을 찍고 정치 이야기를 기사로 씁니다. 축구장에서 사는 한편, 집에 있어도 텔레비전으로 축구 경기를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축구 이야기를 기사로 쓸 수 있습니다. 축구와 혼인하지 않고서 축구 이야기를 우리 눈과 귀에 찰싹 달라붙도록 감칠맛나는 이야기를 엮어내겠습니까. 우리 눈에 짠한 눈물이 흐를 만한 축구 사진을 찍어내겠습니까. 전민조 님은 《이 한 장의 사진》이라는 사진책을 신문사 사진기자일 적에 펴낸 적이 있는데, ‘이 한 장의 사진’을 찍기까지는, ‘이 한 장 사진과 얽힌 곳에서 살아낸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 세월이 사진을 보여줍니다. 세월이 녹아나면서 사진으로 이야기가 엮입니다.
다만, 사진은 즐겨야 찍을 수 있습니다. 즐기지 않는 사진은 사진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괴로운 굴레입니다. 놀이가 되지 못하는 일은 일이 아니고, 일거리처럼 꾸준히 붙잡을 수 있지 않는 놀이는 놀이가 아닙니다. 일이든 놀이이든 즐겨야 하고, 즐기는 가운데 일은 일대로 놀이는 놀이대로 빛이 나고 우리 삶으로 녹아듭니다.
즐길 수 있으니 늘 곁에 두고, 늘 곁에 두니 삶입니다. 저절로예요. 억지가 하나도 깃들지 않습니다. 스스럼이 없습니다. 샘솟아 납니다. 철철 솟아나며 흘러넘치는데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어차피 철철 샘솟아 흘러넘쳐도 다시 땅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솟아나는 밑물이 될 뿐 아니라, 다시 흙을 거쳐 땅밑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더 싱그럽고 맑고 맛난 물로 거듭나거든요. 그래서 사진 한 장이란, 저절로 찍히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저절로 찍히자면 사진이 제 삶이어야 합니다. 늘 붙잡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리 보아도 사진이고 저리 보아도 사진이어야 합니다. 훌륭한 소설 하나 엮어낸 분이 이리 보아도 소설이고 저리 보아도 소설이듯, 사진쟁이는 이리 보건 저리 보건 사진이 되어야 합니다. 값비싼 장비를 어깨에 메고 있다고 사진쟁이입니까? 훌륭한 장비를 비싼 사진가방에 챙겨 놓고 으스댄다고 사진쟁이입디까? 지금으로서는 널리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사로 우쭐거린다고 이이가 사진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줄 압니까? 지금은 돈도 벌고 이름도 얻고 사진판에서 힘도 낼 테지요. 그러나 이이 작품은 기껏 한 장조차도 사진 역사에 새겨지지 못합니다. 부스러기입지요. 끄나풀입지요. 알맹이 빼먹은 과자봉지와 같습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두 손은 가볍게 봉투는 두툼하게’라고 말하는데, 그예 우스개이긴 하지만, 우스개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겉보기로는 으리으리 보일지 몰라도 속알맹이가 형편없다면 하나도 안 반갑거든요. 겉보기로는 수수하거나 초라하기까지 하더라도 속알맹이가 야무지거나 다부지다면 더없이 반가워요. 세상 어느 일이든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사진찍기에서도 그럴싸하게 보이는 작품을 애써 만들어 내려고 하면 지금 바로 보기에는 참 멋져 보일 수 있습니다. 남들 앞에서 자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럴싸한 사진을 못 찍는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남들 다 찍을 수 있는 그럴싸한 사진을 자기도 한두 장 찍었다고, 내 이름값이 올라가기라도 할까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님처럼 ‘기막힌 모습 하나’를 찍어내는 사진을 수없이 모은들, 이런 사진이 사진으로 값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사진으로 살지 않으면 모두 부질없습니다. 헛것 헛일 헛품 헛사진입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밥하기를 삶으로 받아들이고 빨래하기를 삶으로 받아들이며 아이키우기를 삶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밥과 빨래와 아이가 새삼스럽습니다. 훌륭합니다. 우리한테 맛난 된장찌개 끓여 주는 어머님들 손맛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바로 삶을 모두 바친 밥하기에 있습니다. 그 비싼 세탁기로 보송보송 말린 빨래라 해도 어머님이 손으로 빨아서 말리고 개어 놓은 빨래만큼 느낌이 보드랍지 못합니다. 바로 삶을 모두 바친 빨래하기이기 때문입니다. 똑똑함을 넘어서 슬기롭고 해맑은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는 까닭은, 아이한테 온통 바친 아름다운 어버이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조기교육 때문에 죄다 갖다 바치는 삶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즐거울 어버이 삶을 깨달아 서로서로 돕고 나누는 삶으로 꾸리는 어버이이기에, 아이들이 슬기롭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찍는 사진 한 장이 아름다우려면, 또 우리가 나누려는 사진이 빛나려면, 그리고 우리가 보여주는 사진이 어설픈 자랑거리나 섣부른 돈지랄이 되지 않도록 하자면, 사진을 삶으로 곰삭여야 합니다. 사진을 삶으로 녹여내야 합니다. 곰삭이지 않는 사진은 사진이 아닙니다. 녹여내지 않은 사진은 사진이 아닙니다. 흔한 말로 용두질입니다. 거친 말로 술주정입니다. 짜증 섞인 말로 미친 짓입니다. 한 마디로 웃기는 장난입니다.
사진 한 장 찍어내는 손가락은 아주 가볍게 움직여 살짝살짝 눌러야 합니다. 그러나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만 가벼워야지, 손가락에 힘 살짝 주기까지는 무던히도 땀 빼고 용 쓰고 부대끼는 삶이 밑바닥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땀흘리지 않고 무슨 삶이 있겠으며, 내맡기거나 내던지지 않고 무슨 삶을 이루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귀고 껴안고 어깨동무할 때에도 제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야 뜻을 이루는데, 자기 스스로 흐뭇하고 이웃 모두한테도 흐뭇하도록 할 만한 사진을 이루어내고자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몸과 마음을 바치듯 사진한테도 바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치지 않고서 기계 장난만 하려고 한다면, 바치지 않고서 뻔한 틀거리로 시늉만 내려고 한다면, 모두모두 쓰레기로 그칩니다. 아니, 사진 쓰레기만 수두룩하게 쌓아 놓고서, 참되게 사진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맙니다. (4342.1.3.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