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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
김경애 지음, 현진오 감수 / 수류산방.중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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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곳을 지킨 우리들은 어디를 지켜야 할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2] 김경애,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



 인천에는 인천대학교가 있습니다. 국립이 아닌 시립으로 꾸리는 대학교인데 예전에는 시립이 아닌 사립이었고,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선인재단 학교는 두 사람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곳이었습니다. 열 몇 해 앞서 이들 두 권력자 잘잘못을 다스리며 사립재단을 인천시가 거두어들였습니다만, 인천시는 끝없는 재개발과 새도시 만들기에 힘을 쏟아부으면서 대학교 자리까지 파내어 올봄에 송도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학교를 옮기는 가운데 인천대학교 둘레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은 거의 모두 문을 닫았고, 학교 둘레 골목동네는 아파트 재개발에 휩쓸립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학교를 둘러싸고 있던 큰나무 수백 그루를 파내어 이 나무들까지 송도로 옮기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도깨비집처럼 뒤숭숭한 인천대학교 건물이 되었고, 인천대학교 뒷문은 아예 쓰레기터가 되고 있는 판에, 나무들까지 파내어 간다먄 동네 모습이 더없이 볼품없이 되고 맙니다.

 언덕길이 있는 동네 언덕받이에 세운 스무 군데쯤 되는 학교들이기에, 선인재단 어느 학교 건물에 들어가서 동네를 휘 둘러보아도 온통 ‘내려다보는’ 모습입니다. 위로 우람하게 솟은 건물들이 텅텅 비며 을씨년스럽게 되니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이 어떠할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래도 동네 골골샅샅 봄맞이 꽃이 피고 꽃나무 새 가지가 나며 새잎이 움틉니다. 우람한 건물이 있든 없든 골목사람은 예나 이제나 조용하고 나즈막하게 살림을 꾸리고 있습니다. 인천대학교 벚꽃길은 사라지지만 도화2ㆍ3동 골목길은 그대로 있고, 빈터에 일구는 텃밭과 꽃그릇 가지런히 그러모은 손길은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높직하게 쌓아올린 학교 돌담 위쪽에서는 동네텃밭이 보이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학교에서 동네 낮은 땅으로 내려와 두 다리로 천천히 거닐면 비로소 동네텃밭이 보이고, 동네텃밭 둘레에서 막 피어나고 있는 꽃봉우리 내음이 온몸으로 스며듭니다. 잘 갈아 놓은 텃밭마다 갖가지 푸성귀가 뿌리를 내리면서 곧 첫 싹을 틔우려 하는 한편, 차츰 지고 있는 진달래와 개나리에 이은 다른 꽃들, 이를테면 매발톱이나 금낭화나 동백꽃 들이 조금씩 봉우리를 올리고 있습니다. 숨쉬는 동네이고 숨결 고른 동네이며 숨가쁘지 않은 동네입니다.


.. 정선 귤암리에 사는 토박이 최도순 씨는 “생태계 보전이다 생태 관광이다 하면서 정작 사람이 편안하게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굽이굽이 130리를 즐기던 옛길을 없애고 자동차로만 넓히고 있다. 그 길로 외지 자본가들이 먼저 달려와 펜션이니 모텔이니 찜질방이니 돈벌이 공사를 벌이는 것 아니냐”고 꼬집는다 … 바로 그때 상류에서 공사가 시작되었고, 뿌연 흙탕물이 흘러내려 왔다. 군에서 ‘운일암 반일암 국민 관광지 개발 사업’을 벌인다며 다리를 놓고, 정비 공사를 하는 것이라 했다. 이제 막 알을 낳은 감돌고기와 다른 민물고기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  (85∼87, 191쪽)


 동네 골목집이 하나둘 헐린 자리에 곧바로 빌라가 올라서거나 주차장이 생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골목집 하나가 워낙 작기 때문입니다. 열 평이 채 안 되는 골목집이 많고, 조금 넓다 하여도 스무 평이 안 되는 집이 많습니다. 동네를 모조리 쓸어내야 비로소 아파트를 세울 수 있습니다. 동네를 모조리 쓸어내기 앞서는, 하나둘 헐린 집자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빈터 돌을 고르고 흙을 새로 쏟고 갈아 텃밭을 일굽니다. 이 텃밭이 몇 해를 갈 지 알 수 없어도 텃밭을 일굽니다. 이 텃밭 가장자리에서 몇 해를 살 지 몰라도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습니다. 매실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오동나무 수수꽃다리 엄나무 들을 심습니다.

 인천이라는 도심지에서만 자라는 나무는 없습니다. 인천이라는 터전에서만 살아 있는 풀이나 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 손길을 타고 자라는 나무와 풀과 꽃이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삼을 만한 푸나무는 아니요, 깊은 두메산골 깨끔한 터에서만 구경할 만한 푸나무 또한 아닙니다. 어디에나 흔하고 너른 푸나무입니다.

 개구리 같은 나무랄까요. 맹꽁이 같은 나무랄까요. 두꺼비 같은 나무랄까요. 도룡뇽 같은 나무랄까요. 이제 서울이고 부산이고 광주이고 어디에서고 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도룡뇽처럼 흔한 목숨붙이를 구경할 길이 없을 뿐더러 여느 시골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목숨붙이마냥, 어쩌면 매실나무 오동나무 수수꽃다리 또한 여느 땅에서는 자취를 감추는 나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수한 목숨이 설 자리를 빼앗기면서 나중에는 천연기념물이 되고, 이 천연기념물은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가운데, 우리들은 우리 둘레 고운 동무 하나 다시금 세상을 등지고 말았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로지 사람만 살아남고, 사람 가운데 힘-돈-이름 있는 사람만 살아남습니다.

 좋은 책이기에 살아남는 책이 아니라 잘 팔리는 책이어야 살아남는 책이 됩니다. 좋은 영화이기에 오래도록 다시 보며 사랑받는 작품이 아니라 많이 팔려야 사랑받을 만한 영화가 됩니다.


.. 정작 제주도는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라산 관광 활성화를 명분으로 윗세오름에서 정상까지 삭도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 백록담이 말라 가는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 전역의 지하수 고갈 현상도 심각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골프장 탓이다. 2004년 한 해 지하수 사용량 1811만 9000톤 가운데 25퍼센트(446만 1000톤)를 제주도 내 14개 골프장에서 퍼내 썼다. 생수 회사인 ‘제주 삼다수’의 30만 9000톤보다 골프장 한 곳의 평균 사용량이 더 많았다. 2008년이면 골프장이 40곳으로 늘어난다 ..  (249, 250쪽)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한겨레신문에서 이어싣던 ‘이 곳만은 지키자’ 꼭지를 그러모아 책 두 권이 나온 적 있는데, 이 신문과 책에서 다룬 ‘꼭 지켜야 할 이 땅 아름다운 곳’이 열두 해가 지난 뒤에는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돌아본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모두 서른세 꼭지를 다루는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입니다. 이들 서른세 꼭지, 그러니까 서른세 군데 이 땅 아름다운 곳 가운데 예나 이제나 아름다이 건사하면서 아름다이 살아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애쓰는 분들 땀방울에 힘입어 조금 나아진 곳이 있다지만 어느 곳이나 한결같이 몸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몸앓이라기보다 돈앓이라 해야 옳지 싶습니다. 우리 나라에 돈이 없어서 ‘이 곳만은 지키자’를 못한다고 할 수 없거든요. 우리 나라에 참된 일꾼이 없기에 ‘이 곳만은 지키자’하고 자꾸 동떨어진다고 할 수 없거든요.

 자연 삶터뿐 아니라 사람 삶터를 아름답게 건사하는 데에 쓸 돈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은 우리들입니다. 자연 삶터뿐 아니라 사람 삶터를 아름답게 추스르는 데에 일할 사람이란 그지없이 많은 이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돈이 돈다이 쓰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일할 자리가 없습니다. 애먼 곳에 돈이 흘러넘치고 엉뚱한 곳에 사람들이 득시글합니다.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꿈을 꽃피우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일이란 더없이 드뭅니다.

 시인 김남주 님은 〈똥파리와 인간〉이라는 시에서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 떼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하는 이야기를 읊습니다. 이 이야기마따나 사람들은 돈이 많이 쌓인 서울에 무리지어 웅성거리면서 살아갑니다. 돈이 적게 쌓이거나 없다 싶은 작은도시나 시골에는 좀처럼 뿌리를 내리거나 깃들려 하지 않습니다. 김남주 님은 이 싯말에 이어 “보라고 똥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도 가서 /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을 깊은 데라도 가서 /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하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난한 자리에서 조용히 일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으나 몇몇 아름다운 분들만 조용히 일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 다름아닌 우리들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길과 삶을 알고 있으나 아름다운 길과 삶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들 거의 모두는 아름다운 길과 삶하고는 어긋난 자리에서 아름다움보다 돈에 따라, 사랑스러움보다 힘에 따라, 믿음직스러움보다 이름에 따라 움직입니다.


.. 충청남도는 숲을 키우는 데 2007년부터 2014년까지 71억 원을 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정책의 초점은 관광 개발에 쏠린다. 2014년까지 같은 지역에서 추진되는 국제 관광지 개발 사업에는 그 100배인 7408억 원을 들인단다. 승언리, 중장리 일대 꽃지해수욕장 주변 115만 400여 평에 골프장, 호텔과 콘도, 워터파크를 저성하고 있다 ..  (262쪽)


 《이 곳만은 지키자》이든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든 우리가 우리 터전을 얼마나 더럽히거나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 책 모두 우리 스스로 무너뜨리는 우리 삶을 말합니다. 두 가지 책은 나란히 우리 넋과 얼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우리 매무새요 더없이 엉터리인 우리 몸짓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우리 몸가짐을 밝히는 책입니다.

 입으로는 국산을 외치지만 정작 국산 푸성귀가 자랄 땅이 없을 뿐 아니라 국산 푸성귀가 깨끗하게 자랄 터전이 안 됨을 살피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터전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란 몇몇 엉터리 정치꾼이나 개발업자인 듯 손가락질을 하지만, 우리 터전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란 바로 우리들입니다. 내 밥그릇을 챙기는 우리들이고, 내 밥벌이를 키우는 우리들입니다. 느긋하게 걷지 못하고 넉넉하게 자전거를 타지 못하면서 자가용을 몰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 “천만 원이 넘어도 잡아만 달라고 주문하는 수요가 있는데 주민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이 보호 의식만 강요한들 지켜지겠습니까.” 주민들은 환경부와 지자체가 탁상공론과 책임 떠넘기기로 보호 구역 지정을 미루고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막다른 골목에 갇힌 산양과 야생 동물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  (353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한겨레신문에서는 다른 어느 신문에서도 하지 않은 좋은 기획을 선보이며 우리가 지키고 건사할 우리 아름다운 땅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이러한 마음을 이으며 우리 아름다운 땅을 알뜰살뜰 지키거나 건사하는 매무새를 어떻게 추슬러야 할는지는 밝히지 못합니다. 자연과 생태를 지키는 골프장이란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데, 한겨레신문에서조차 골프 기사와 광고가 넘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살리는 재개발 정책이 아님이 뻔한데, 한겨레신문마저 아파트 기사와 광고가 넘칩니다. 비싼 자가용 시승기가 넘치고, 끝없는 소비물질주의를 북돋우는 기사와 광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좋은 기획 한두 가지란 말 그대로 좋은 기획이요, 좋은 기사 한두 가지란 말 그대로 좋은 기사입니다. 그런데 좋은 넋이나 얼이 한두 가지 기획과 기사로 그치고, 신문은 통째로 좋은 길하고는 벗어나 있다면 어떡하지요. 이곳은 지킨다 하지만 이곳 아닌 다른 곳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곳을 지키기조차 까마득한데 다른 곳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지킬 곳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국립공원을 지키면 되는지, 도립공원을 지키면 되는지 궁금합니다. 공원 아닌 자연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천연기념물 아닌 목숨붙이는 어찌해야 좋을는지 궁금합니다.

 미선나무가 애틋한 만큼 골목동네 개나리 한 그루가 애틋합니다. 금강제비꽃이 소담스러운 만큼 동네텃밭 한켠 도라지꽃이 소담스럽습니다. 우리가 지킬 우리 땅이란 어디이며, 우리가 건사할 우리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이웃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 뿌리내리는 고향이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4343.4.23.쇠.ㅎㄲㅅㄱ)


 ┌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수류산방,2008)
 ├ 글 : 김경애
 └ 책값 : 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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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풀꽃이 필때면 - 붉은여우 이야기 2 소년한길 동화 9
톰 맥커런 지음, 지넷 던 그림, 우순교 옮김 / 한길사 / 200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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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47 ― 예쁜 진달래를 알아본다면 예쁜 사람
 : 톰 맥커런, 《돼지풀꽃이 필 때면》


- 책이름 : 돼지풀꽃이 필 때면
- 글 : 톰 맥커런
- 그림 : 자넷 던, 김종도
- 옮긴이 : 우순교
- 펴낸곳 : 소년한길 (2001.9.15.)
- 책값 : 8000원



 (1) 아파트만 아는 푸름이와 골목을 걸으며


 동네 푸름이들하고 골목마실을 다녔습니다. 지난 3월 28일에 처음으로 함께 걸었고, 4월 10일에 두 번째로 함께 걸었습니다. 날이 퍽 궂고 바람이 제법 불었으나 모두 씩씩하게 잘 걸어 주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 즈음 걷는 골목마실이란 오늘날 푸름이들한테 퍽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푸름이들은 집과 학교와 학원 사이만 오가도록 매여 있을 뿐, 스스로 두 다리로 거닐면서 동네를 쏘다닌다든지 동무들하고 어울리며 논다든지 할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28일에는 모두 스무 푸름이가 함께 걸었습니다. 4월 10일에는 일곱 푸름이와 함께 걸었습니다. 열세 아이가 나오지 않았는데, 나오지 않은 까닭 가운데에는 ‘곧 닥치는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한다며 학원에 가느라 안 나오는 아이가 꽤 많았습니다. 시험공부 때문에 안 나왔다는 아이 가운데 이제 중학교 1학년이나 2학년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골목마실을 보내기로 했으면서도 보름 뒤로 잡힌 중간고사에서 성적이 잘 나와야 한다며 아이들을 그예 학원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웬만한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파트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아파트숲에서 벗어날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어디 놀러 가더라도 자가용을 타고 다른 바닷가나 산으로 가지, 동네 골목을 다니지 않을 테니까요. 옷집과 밥집이 줄줄이 늘어선 곳이나 백화점이나 큰 할인매장으로 나들이를 다녀도, 오래된 저잣거리 마실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이들은 열서너 해나 열일고여덟 해 동안 ‘골목길’이라는 곳을 와 본 적이 한 번조차 없곤 합니다. 인천에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라는 데가 있는데, 이런 박물관에 찾아가 ‘달동네란 박물관에나 있는 곳이요, 지나간 발자국이니라’ 하는 이야기만 얼핏설핏 들을 뿐입니다. 또는 만화 ‘검정고무신’을 보면서 골목길이란 저렇게 생겼거니 하고 여길 뿐입니다.

 집이라고 하면 그저 아파트를 떠올립니다. 때로는 빌라를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 한국전쟁 폭격에 살아남은 옛 일본집이 동네에 버젓이 있음을, 게다가 인천골목길에는 꽤 많이 있음을, 한국전쟁이 끝나고 지은 기와집이 어엿이 있음을, 더욱이 재개발지구로 묶인 곳에는 이러한 기와집이 수두룩하게 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라고 하는 집이 바로 이들 골목집을 허문 자리에 지었고, 인천에서는 갯벌을 메워 짓거나 산과 논과 밭을 밀어내고 지었음을 살피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푸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푸름이들을 낳아 키우고 있는 어버이들부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올바르지 싶습니다. 도시에서 이럭저럭 회사원이 되어 고만고만 돈을 벌어들인 다음 크든 작든 아파트 한 칸 얻어 제법 잘 빠진 자가용 굴리고 살아가는 데에만 마음을 쏟지, 스스로 낮은자리에 서면서 동네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삶을 꾸리는 데까지 마음을 쏟기란 어렵습니다. 아파트 장만할 돈을 쪼개고 나누어 가난한 이웃하고 나눈다든지, 자가용 장만하거나 굴릴 돈을 송두리째 털어 시민사회운동에 들인다든지 하기란 힘듭니다. 돈으로 이루어지고 돈으로 짜여 있는 도시살림을 벗어나 몸과 마음이 자연하고 어우러지는 시골살림을 찾아들기란 더욱더 힘듭니다.

 그림책이나 백과사전조차 아닌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으로 살펴보는 뭇짐승 이야기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사람이 살아가는 도시라는 터전에서는 들짐승이나 날짐승을 만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기껏 까치 비둘기 참새 같은 날짐승을 만난다고 하는데, 인천만 해도 갈매기 직박구리 박새 어치 들이 있기는 하여도 바쁜 걸음을 멈추고 이들 새를 올려다보거나 새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새를 가늠하지 못하지만 어른들 또한 새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풀과 꽃과 나무를 알아채지 못하지만 어른들부터 풀과 꽃과 나무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아파트숲을 이룬 동네이름은 알지만 아파트숲이 아닌 곳 동네이름은 낯설어 하는데, 누구보다 어른들 스스로 아파트숲 이름에만 훤하고 여느 사람들 부대끼는 골목동네 이름을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자동차 이름을 낱낱이 알아보는 놀라운 아이가 있고, 손전화를 아주 잘 다루는 대단한 아이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웬만한 어른보다 사진기를 잘 다룹니다. 늘 보고 늘 곁에 있으며 늘 부대낀다면 아이들로서는 자동차 이름뿐 아니라 풀이름과 새이름을 낱낱이 알아봅니다. 늘 곁에 두거나 늘 마주한다면 아이들로서는 아파트 이름이나 손전화 쓰임새뿐 아니라 물고기 이름이나 밭 갈고 씨 뿌리고 김을 매는 때를 익숙하게 새깁니다. 어른들 생각이 아이들 생각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어른들 말글이 아이들 말글로 차곡차곡 대물림되며, 어른들 삶이 아이들 삶으로 남김없이 옮아 갑니다. 어른들 스스로 말에 앞서 몸으로 부대끼는 삶을 꾸린다면 아이들 또한 스스로 스스럼없이 백 마디 말이 아닌 한 가지 몸짓으로 삶을 꾸리겠지요. 어른들 스스로 맑고 착하고 곱게 삶을 일군다면 아이들 또한 스스로 맑고 착하고 곱게 삶을 일구는 매무새를 배우면서 자라겠지요. 아이들이 거짓말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어른부터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아이들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크기를 바란다면 어른들부터 올바르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동네 골목길을 푸름이하고 함께 걷는다고 온누리를 바꾼다든지 뒤집는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 푸름이들 마음밭에 제 삶터를 느긋하게 돌아보고 차근차근 살피는 매무새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무슨 역사가 있고 저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다는 지식을 들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 집에는 이 집 할매가 매발톱을 심었구나 하고 저 스스로 기뻐하며 가만히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저 집에는 저 집 아저씨가 진달래를 심고 매화나무 스무 해 넘게 기르고 있구나 하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디에서 살아가든 사람을 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자연을 놓지 않으면 반갑겠다고 생각하며, 더 뛰어나거나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 앞서 더 작으면서 어여쁜 마음을 건사할 수 있으면 고맙겠다고 생각합니다.


 (2) 여우를 이야기하는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붉은여우 이야기’라는 세 권짜리 묶음책 가운데 2번 책입니다. 1권은 《여우꼬리별의 전사》이고, 2권이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며, 3권은 《바람을 따라 달려라》입니다. 세 권은 한 묶음입니다만 저마다 따로 이야기를 엮고 있는 낱권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권 책이름이나 3권 책이름만 보고서는 ‘무슨 여우 이야기라고?’ 하는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거꾸로, ‘돼지풀꽃’이라는 낱말이 붙은 책이름을 보고 이 책을 집었다가 ‘뭐야 여우 이야기잖아? 책이름이 왜 이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는 인간이 모르는 비밀이 수두룩하였다(169쪽).”는 말마디처럼,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은 사람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자연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람이 알고자 하지 않아 알지 못하는 자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이 사람만 살아남는 데에 푹 빠지고 바쁜 나머지 들여다보지 않거나 못하는 자연 이야기를 조용히 풀어놓습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연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우리 삶터를 이끌어 간다는 어른들은 자연을 살피지 않습니다. 우리 목숨을 잇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얻을 뿐 아니라 자연식품이 우리 몸에 가장 좋다고 시끄럽게 떠들기조차 하면서 정작 우리 자연을 아름다이 지키거나 건사하거나 가꾸려고 마음쓰거나 애쓰거나 용쓰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돈을 버는 데에 바쁘고 돈을 쓰는 데에도 바쁘며 돈을 움켜쥐는 데에 바쁩니다. 돈만 있으면 자연식품은 마음껏 사먹을 수 있다고 여기며, 돈으로 자연을 되살릴 수 있는 줄 생각하는데다가, 돈이 없으면 굶어죽는 줄 알고 있습니다.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은 여우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책 주인공은 여우입니다. 여우가 맨앞에 나오며, 여우 둘레에 함께 살고 있는 쥐와 오소리와 수달과 토끼와 족제비와 다람쥐 들이 나란히 나옵니다. 여우들이 짝을 짓고 사랑을 나누며 새끼를 낳아 기르고 먹이를 사냥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지키는 한삶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여우를 가까이에서 살피거나 마주하거나 부대꼈기에 펼칠 수 있는 문학이라 할 텐데, 나라밖 이야기꾼들은 이와 같이 여우 이야기라든지 곰 이야기라든지 늑대 이야기라든지 수달 이야기라든지 고니 이야기라든지 줄줄줄 엮어냅니다. 나라안 이야기꾼은 《돼지풀꽃이 필 때면》 같은 이야기책은 엄두를 내지 못할 뿐 아니라 ‘비둘기 이야기’나 ‘갈매기 이야기’나 ‘지렁이 이야기’조차 제대로 적바림하지 못합니다. 흔하디흔한 ‘개구리 이야기’나 ‘개미 이야기’를 올바르고 알차고 알맞고 넉넉하고 따스하게 담아내는 나라안 이야기꾼이 있기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둘레에서 가장 흔하게 마주하고 살갑게 어깨동무하는 참새와 고양이와 개 이야기마저 옹글게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업 감독은 몹쓸 짐승들 때문에 댐 건설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골짜기 주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주민들도 댐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 버릴 처지였기 때문에 댐 짓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163쪽).”는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막개발을 일삼는다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삶터가 무너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막개발을 일삼는다는 사람들뿐 아니라 막개발을 일삼고 있어도 ‘나 살기 바쁜데’ 하면서 팔짱을 끼거나 등을 돌리거나 눈길조차 안 두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 때문에 우리 삶터가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막개발을 일삼는 흐름이 나날이 거세기 때문에 뭇짐승이 도시와 시골 모든 곳에서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이러면서 사람들 또한 목숨을 잃습니다. 목숨은 건사하여도 마음을 잃고 사랑을 잃으며 믿음을 잃습니다. 따스함을 잃고 넉넉함을 잃으며 풋풋함을 잃습니다. 여느 자리에서 나누는 삶을 펼치지 못하는 채 불우이웃돕기만 합니다. 여느 때부터 옳은 사회 바른 교육 곧은 정치 맑은 문화가 되도록 마음쓰지 않다가 무슨무슨 큰일이 불거져야 비로소 촛불을 든다고 법석입니다. 여느 때에 내 삶부터 바로세우면서 튼튼한 넋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커다란 촛대에 안 꺼지는 촛불을 박아 놓고 든다 할지라도 오래갈 수 없는 법입니다. 나무 한 그루는 열 해 백 해 즈믄 해에 걸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가지를 치며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하루아침에 우뚝 서는 나무란 없습니다. 돈을 들여 큰나무를 옮겨심는다 할지라도 옮겨심기 앞서 오랜 나날을 한곳에 뿌리박고 자라야 합니다. 사람들 삶이란, 바로 우리들 삶이란 나무 한 그루 무럭무럭 자라듯 우리 터전에서 옳고 바른 넋과 삶을 알뜰살뜰 꾸리면서 옳고 바른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목소리 외침이 아닌 삶 꾸리기요, 주먹 불끈 쥠이 아닌 손수 땀흘려 가꾸기입니다.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은 ‘자연보호’라느니 ‘생명사랑’이라느니 ‘개발반대’라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습니다. 뭐가 잘못이고 뭐가 엉터리이고 뭐가 글러먹었다는 소리를 내뱉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여우 눈높이에서 여우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라 하겠지요. 여우 또한 고운 목숨이면서 다른 고운 목숨인 쥐이며 토끼이며 다람쥐이며 잡아먹어야 하는 사나운 목숨임을 꾸밈없이 조용히 들려주기 때문이라 할 테지요.

 진달래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날 《돼지풀꽃이 필 때면》을 즐거이 읽고 덮습니다. 책을 덮은 이즈음은 산수유꽃과 벚꽃과 매화꽃과 목련꽃이 소담스레 꽃을 피웁니다. 머잖아 수수꽃다리가 꽃망울 터뜨릴 테며, 이내 매발톱과 금낭화가 예쁘장한 꽃을 피우며 골목동네 한켠을 해맑게 보듬으리라 봅니다. 개나리 노란 꽃그늘을 아이와 함께 걸었으니, 이제 매화꽃 하얀 꽃그늘을 아이와 함께 걸을 수 있고, 곧 수수꽃다리 보라빛 꽃그늘에서 아이와 함께 파란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3) 다시 새겨읽는 책


 즐겁게 읽은 책을 덮고 나서 책꽂이로 옮겨놓기 앞서 다시금 펼치고 뒤적입니다.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내 마음이 움직였는가를 헤아리며 한 줄 두 줄 되읽고 되새깁니다. 두 번이나 세 번쯤, 때로는 너덧 번이나 예닐곱 번쯤 다시 읽고 거듭 살피다 보면 이 글월이 참말로 나한테 살갑거나 아름다이 와닿았는지, 그냥 그저 그런데 책을 읽는 결에는 눈꺼풀에 뭐가 씌워 잘못 보았는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되읽을 만한 글월이 아니라 한다면 나한테 아름다운 책일 수 없습니다. 거듭 읽은 다음 기쁘게 책꽂이로 옮겨 놓을 수 없으면 나한테 좋은 책일 수 없습니다. 나중에 언제라도 다시 읽고 싶을 뿐 아니라 둘레에 거리낌없이 알리거나 빌려줄 수 있을 만한 책이 아니고는 책꽂이에 두지 말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4343.4.13.불.ㅎㄲㅅㄱ)


[23쪽] 여우들은 랫위들이 호숫가에서 쥐를 너무 많이 잡아먹은 나머지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믿었다. 세이지 브러시는 쥐는 아주 쉬운 먹이지만 베이거나 곪은 상처에 쥐 오줌이 닿으면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여우들은 바로 그런 병 때문에 랫위들이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43쪽] 시네아드는 공포에 휩싸였다. ‘스컬링 독이 어서 나타나 주었으면…….’ 하지만 그건 가망 없는 일이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시네아드는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새끼를 하나만 데리고 달아나야 했다. 고통으로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대체 누구를 데리고 간단 말인가? 잠시, 하지만 마치 한평생과도 같이 느껴지는 공포의 순간이 흘렀다. 시네아드는 스컬링 독이 새끼 숫여우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숫여우가 더 튼튼한 건 사실이었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은 자연의 섭리였다. 하지만 종족의 수를 늘리려면 암여우가 더 절실했다.

[48쪽] 세상에 위험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조금도 모르는 두 새끼 여우는 잠에서 설핏 깨어나 어미의 다정한 젖꼭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더듬었다. 젖꼭지가 잡히지 않자 잠에서 깨어나 눈에 익은 사물을 찾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보이는 건 저희들 둘뿐이었다.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저희들이 이곳저곳을 쑤시며 내는 킁킁 소리와 꼴깍 소리뿐이었다.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자 새끼 여우들은 어리둥절해져서 비틀거리며 한결 더 푸르고 널따란 습지에 이르렀다.

[63, 114, 118쪽] “여기 사는 수달들 말을 들어 보면, 지금 인간들이 짓는 건 다리가 아냐.” 블랙 팁이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다리가 아니라고? 그럼 뭐야?” “지금 인간들은 댐을 짓고 있어.” … 늘 산꼭대기에 서 있던 숫염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송골매도 하늘에서 사라졌다. 바람이 바위벽에서 웅웅거리며 산비탈을 치달아 호수로 몰려갔다. 여우들은 모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댐은 언제 지어지고 물은 언제쯤 불어날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골짜기가 물에 잠길 거예요. 모두 떠나야 해요.” 비키가 말했다. “우린 떠날 수 없어.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거든.” 블랙 팁이 물었다. “골짜기가 언제 물에 잠기는데?”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걸요. 댐이 거의 다 지어졌으니까요.” 비키가 물었다. “물이 얼마나 불어날 것 같아?” “그야 모르죠. 하지만 골짜기의 동물들은 모두 위험해요. 늦기 전에 여길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블랙 팁이 말했다. “우리는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그리고 시나 땅은 우리 고향이야.”

[80, 122쪽] 상록수 숲 깊은 곳에서 붉은다람쥐 한 마리가 높다란 나뭇가지에 앉아 솔방울을 갉아먹고 있었다. 숲은 붉은다람쥐뿐 아니라 들고양이에게도 마지막 은신처가 되는 곳이었다 … 니들 나인은 인간의 손에 키워졌기 때문에 풀밭이 어떤 곳인지 도통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하늘의 여우꼬리별을 길잡이 삼아 다녔다는 암여우들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99쪽] 고양이들이 좀더 주의 깊고 꾀가 있었다면, 호펄롱이 덫을 이용하여 저희들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좀더 눈이 날카로웠다면, 호펄롱이 밧줄에서 앞발을 빼내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111, 140쪽] “꽤 어리던걸. 어른과 새끼의 중간 정도야. 아마 이번 번식기에 아주 일찍 태어난 여우 같아. 다른 가족들은 사냥꾼한테 다 죽었대.” 시네아드가 말했다. “인간들이 그 여우한테 잘 해 준단 말이지? 참, 알 수가 없군.” 스컬링 독이 말했다. “더구나 그 인간들은 양을 치고 있잖아.” … 오소리가 물었다. “적들끼리 힘을 합치게 한다고?” 팽이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 먹고 먹히는 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동물들의 가장 큰 적인 인간들한테 모두 당하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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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윤구병의 생태 에세이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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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을 닮고 자연스럽게 꾸리는 삶이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0] 윤구병,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자연을 버린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고 하면 거짓말이 아니랴 싶습니다. 자연을 닮거나 자연과 가깝게 나아간다고는 하지만 자연이 있다거나 자연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도시 터전이라고 느낍니다.

 요즈ㅊㅍ음은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마저 ‘푸른 아파트’임을 내세웁니다. 아파트라고 하는 공동주택은 산을 깎거나 갯벌을 메우거나 논밭을 뒤집어서 세우고 있는 데에도 ‘푸른’ 아파트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자연을 닮은 집이라 할 때에는 자연을 더럽히지 않고 지어야 하며, 나중에 낡아서 허물어야 할 때에 자연에 피해를 입히지 않아야 하는데, 아파트라고 하는 공동주택 가운데 처음 지을 때에나 나중에 허물 때에나 자연을 걱정하는 집짓기란 없다고 느낍니다. 더구나 아파트에서는 물과 전기와 가스와 기름을 ‘고지서’로 헤아릴 뿐, 우리 삶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돌아보기 어렵습니다.

 요사이 널리 퍼지는 말마디로 ‘환경친화’와 ‘생태’와 ‘웰빙’이 있습니다. 이 말마디는 우리들이 누리는 물질문명이나 자본주의 사회로는 앞날이 시커멓다고 깨달으면서 하나둘 불거집니다. 그런데 ‘환경을 생각한다’거나 ‘환경과 사람이 하나로 된다’는 테두리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공산품이란 얼마나 환경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환경을 생각한다는 공산품이란 목숨이 얼마나 되며, 나중에 이 공산품이 쓸모를 다해 쓰레기로 버려야 할 때에 어느 만큼 자연으로 조용히 녹아들 수 있을까요. 자동차가, 자동차 바퀴가, 자동차 오가는 아스팔트길이란 ‘환경친화’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물질문명이 될 수 있을까요. 거름으로 써야 마땅한 똥오줌이지만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똥오줌을 거름으로 쓰기 힘들어진 터전에서, 우리들은 어떤 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하면서 무슨 돈을 벌고 내 삶을 어느 쪽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고 있을는지요.

 나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꾸리는 하루하루일는지 궁금합니다. 나와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들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사랑하고 즐기도록 가꾸는 하루하루일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이 먹는 밥이란 모두 자연에서 얻는데, 밥이 되는 푸성귀이든 고기이든 어떻게 얻는지를 도시사람으로서 어느 만큼 깊고 넓게 살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날푸성귀를 먹는달지라도 손수 길러서 먹는지, 사다가 먹는지, 또 이 날푸성귀를 제대로 가리고 골라서 먹더라도 우리 스스로 하는 일과 품는 넋과 주고받는 말이란 얼마나 ‘환경과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거나 생각하거나 걱정하거나 마음을 쓰면서’ 하는 일이요 품는 넋이요 주고받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 어느 날 새 기술이 개발되면 이제까지 유용하던 기술이 그 기술을 지닌 전문가까지도 포함해서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 입으로 ‘반미’ 외치면 무얼 하나. 쌀만 겨우 90퍼센트쯤 자급이 되고 밀과 보리, 콩 같은 그밖의 주곡 자급률은 5퍼센트 남짓밖에 안 되는걸 … 근대화도 경제개발도 살자고 하는 짓이다. 그러나 그 동기가 이윤에 있으면 이윤을 얻는 한 사람이 잘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못살게 된다 ..  (26, 33, 69쪽)


 전라도 변산에서 농사짓는 두레마을을 이루고 있는 윤구병 님이 쓴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을 올바르게 적는다면 “자연이라는 밥상에 둘러앉다”이거나 “자연스러운 밥상에 둘러앉다”이거나 “자연을 사랑하는 밥상에 둘러앉다”가 아니랴 생각합니다. 아무튼, 자연을 내버리는 이 나라에서 자연을 보듬고자 하는 마음을 품으려는 농사짓는 두레마을이요, 자연하고 등돌리는 이 겨레 사람들한테 자연을 얼싸안는 넋을 나누며 농사짓는 두레마을이고, 자연을 짓밟는 이 누리에서 자연을 쓰다듬는 매무새를 기르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보내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책입니다.


.. 비가 내리고 난 뒤 쌀쌀한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물에 불은 콩을 주웠다. 떨면서 한나절 동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 보지 못하면서 주운 콩이 한 됫박이나 될까. 돈으로 바꾸자면 누가 2000원도 주지 않으리라. 그 시간에 대기업 사보 같은 데에서 온 청탁을 거절하지 않고 원고를 썼으면 100배쯤 높은 고료를 받아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도 뒤늦게 떠올랐지만 콩을 줍는 순간에는 밭에 널린 흰콩밖에 보이지 않았다 … 모든 살아 있는 것은 흙을 딛고 서 있다 … 자연이란 그저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라 생명체들이 자라고 열매 맺고 뛰노는 커다란 삶터이고, 사람도 생명계의 한 구성원인 만큼 이 커다란 생명 공동체에서 그야말로 ‘한살림’을 하지 못하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31, 83, 134쪽)


 머리를 굴려 적바림한 글이 아니라, 스스로 농사짓는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적바림한 글이 깃든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입니다. 그러나 농사짓기 열 몇 해라 하더라도 옹근 농사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또한 옹근 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는 글쓴이 윤구병 님이 스스로 밝힙니다. 당신이 제아무리 시골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또한 농사짓는 두레마을을 이루어 농사짓기 열 몇 해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아직 모르는 풀이름 꽃이름 나무이름이 수두룩합니다. 아직 들나물 멧나물을 손질해서 나물하기를 다 모르며, 책 곳곳에 나오듯 윤구병 님 당신이나 농사짓는 두레마을 일꾼들이나 ‘불량식품 몰래 맛나게 먹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책을 덮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농사짓는 삶으로 거듭난 지 열 해가 되었어도 이렇게 ‘도시에서 살던 버릇’을 떨치기 힘들다면 농사짓는 삶으로 거듭난 스무 해가 되어도 힘들지 않으랴 하고. 서른 해가 된다 한들 얼마나 나아지겠으며, 마흔 해가 된다 한들 어느 만큼 알차거나 알뜰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열 해가 되어도 도시 티를 못 벗을 수 있으나 한 해 만에 도시 티를 벗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더 모질게 먹거나 단단히 품으면서 도시 내음을 걷어치운다든지 도시 빛깔을 접을 수 있으면, 한 해가 아닌 한 달 만에도 아름다운 농사꾼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요. 윤구병 님은 ‘대기업 사보 원고 청탁’을 거절했다고 글에서 밝히지만, 대기업 사보를 들추면 ‘자주’는 아니나 ‘틈틈이’ 당신 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출판사 일로 달마다 여러 차례 서울마실을 하느라, 시골에 살면서도 시골사람으로 시골살림을 꾸리는 삶이란 반토막이라고 할까요.

 윤구병 님이 좀더 옹근 농사꾼으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비내린 뒤 쌀쌀한 날씨에 콩을 주으면서 대기업 사보를 떠올리며 품값을 셀 노릇이 아니라, 비내린 뒤 쌀쌀한 날씨에 콩을 줍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적바림하면서, 비내린 뒤 달라진 콩밭 모습과 시골 논밭 모양새를 써 내려 갈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 삶에서는 놀라운 주의주장이나 철학 또한 어느 만큼 값이 있을지라도, 이보다는 삶에서 묻어나오거나 우러나온 이야기만큼 사람들한테 애틋하거나 사랑스럽지는 않으니까요. 짜릿한 뒤집기 한판이 펼쳐지는 운동경기를 볼 때에도 즐겁다 할 만하지만, 동무들하고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금긋기놀이를 하거나 돌치기놀이를 하면서 웃음꽃을 터뜨릴 때에도 즐겁습니다. 어느 쪽이 더 크고 신나는 즐거움이라고는 잘라말할 수 없습니다만, 윤구병 님이 도시에서 얻은 ‘교수님’이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시골에서 얻으려는 ‘농사꾼’이라는 이름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운동경기 이야기가 아닌 고무줄놀이 이야기 쪽으로, 대기업 사보 글삯 이야기가 아니라 농사짓는 삶으로 열 해를 보내며 얻거나 깨달은 거룩하고 놀라운 즐거움 이야기로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를 차곡차곡 채웠어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 도시에서 사람을 뺀 다른 생명체들이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는 까닭은 도시인들의 위생 관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의 불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 나는 한때 거시경제학이나 정치경제학 같은 것에 빠지고 《자본론》을 줄을 그어 가며 열심히 읽은 적도 있다.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이론을 흔들리지 않는 지혜로 받아들인 적도 있다. 그런데 10년 남짓 농사지으면서 그걸 재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189, 198쪽)


 다시금 책을 펼쳐 읽습니다. 윤구병 님은 시골을 버리고 도시에서 살다가, 홀로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와서 살아갑니다. 시골살이 열 몇 해 삶자락을 책 여러 권으로 한꺼번에 내놓습니다. 바쁘고 힘겹다 하는 시골살이라 하지만 열 몇 해에 걸쳐 적바림한 글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시골사람이었고 예순 해 일흔 해에 걸쳐 시골사람인 농사꾼들은 책을 써내지 못합니다. 또는 책을 써내지 않습니다. 굳이 책으로 써내지 않더라도 스스로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고, 농사꾼 삶을 책으로 펴내려고 하는 출판사가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었다가 농사꾼이 된 사람들 귀농일기는 곧잘 책으로 내놓는 책마을이지만, 처음부터 농사꾼이었던 사람들 농사일기는 한 번도 책으로 내놓지 않은 책마을이거든요.

 이는 나라안이나 나라밖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농사꾼 스스로 농사꾼 삶을 글로 남겨 책으로 내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아마, 구멍가게 장사꾼 또한 당신 삶을 글로 남겨 책으로 내는 일이란 거의 없겠지요. 저잣거리 장사꾼들은 어떠할까요. 장돌뱅이와 배무이와 목수들 삶은 어떠할까요. 큰회사 씨이오라는 분들은 당신 자서전을 끝없이 내놓습니다만, 신집 할배나 나물장수 할매 삶을 당신들 스스로 글로 남기라고 이끌거나 가르칠 만한 초중고등학교 교사나 대학교 교수는 몇 사람이 있을까요.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 삶을 고이 여기거나 살가이 눈여겨보면서 꾸밈없이 글로 써내거나 사진으로 담아내거나 그림으로 그려내는 분은 얼마나 되나요.


.. 또 부자들이나 밥상에 올리는 비싼 ‘유기농 식품’으로 수지를 맞출 생각을 말고도 가용을 쓸 마련이 있어야 하는데, 어찌하면 좋을꼬 ..  (18쪽)


 유기농 먹을거리란 ‘똥오줌을 삭여 거름을 내어 지은 곡식’을 가리킵니다. 몇몇 부자들이 적잖은 돈을 들여 ‘몸에 좀더 좋다는 먹을거리’를 즐기기도 한다지만, 유기농 먹을거리란 부자들만 즐기는 먹을거리가 아닙니다. 착하고 참된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즐기는 먹을거리이고, 도시에서는 생활협동조합을 이루면서 도시에서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건사하며 아이들과 맑고 맑은 나날을 꿈꾸는 사람들이 조그맣게 모두는 따순 손길이기도 합니다. 거름을 내어 지은 곡식이 ‘조금 더 비싼’ 까닭은 풀약을 치고 항생제를 먹여 좀더 손쉽게 더 많이 거두는 곡식이 아니라, 곡식부터 맑고 밝게 키우고자 땀을 들이고 힘을 들이기 때문에 땀값이 ‘마땅한 일삯’으로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변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일군 먹을거리 또한 ‘여느 먹을거리’와 견주면 값이 셉니다. 설마 변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부자들 밥상에 비싼값으로 내다 팔 농사를 짓지는 않을 테지요. 그리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농약에 찌든’ 먹을거리가 아닌 ‘깨끗하고 더 나은’ 먹을거리를 먹어야 하며,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삶을 옳게 바라보고 자연을 꾸밈없이 껴안으면서 맑고 밝은 사람으로 거듭나며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만 잘살면 되는 온누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잘살아야 할 온누리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든 머리 나쁜 사람이든 잘생긴 사람이든 못생긴 사람이든 잘못을 안 저지르는 사람이든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든 누구나 고르게 권리를 누리며 착하고 곱게 살아가야 할 온누리입니다.

 물과 불과 땅과 바람이 뭇목숨을 살리는 힘이라지만, 물과 불과 땅과 바람만으로는 뭇목숨을 살리는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너른 믿음과 따뜻한 사랑과 넉넉한 손길과 착한 매무새가 함께해야 합니다.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라는 책에서 윤구병 님은 물과 불과 땅과 바람이 어우러지는 시골마을 논밭 일구는 농사꾼 땀방울이 얼마나 값있는가를 날카롭게 짚어내어 차근차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날카로움에 한결 보드랍고 더욱 싱그러운 믿음과 사랑과 손길과 몸짓을 어우러 놓는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4343.4.9.쇠.ㅎㄲㅅㄱ)


 ┌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휴머니스트,2010)
 ├ 글 : 윤구병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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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이 바라본 세상 이야기
은종복 지음 / 이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45 ― 맑고 밝게 일하며 살고픈 풀벌레 한 마리
 : 은종복,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이름 :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글 : 은종복
- 펴낸곳 : 이후 (2010.4.1.)
- 책값 : 12000원



 (1) 아이와 살아가며 아이를 생각하기란


 날이 포근하기에 아이를 데리고 골목마실을 나왔습니다. 아이는 조금 걷다가 자꾸 넘어집니다. 걸음이 차츰 더디어집니다. 아이가 졸립다는 뜻이로군요. 아이를 품에 안습니다. 아이가 앞쪽을 보도록 안고 걷습니다.

 아이를 안고 걸어가면 참 힘듭니다. 팔과 등허리가 몹시 저립니다. 그러나 아이로서는 뒤쪽이 아닌 앞쪽을 보면서 안기고 싶겠지요. 아기수레를 안 쓰는 우리 식구는 아이를 걸리거나 안고 다녀야 합니다. 둘레에서 아기수레를 선물해 주거나 물려주겠다는 분이 여럿 있었으나 우리는 안 받았습니다. 아기수레를 밀며 다닐 때에는 아이가 더 다니고 싶지 않아도 어른 마음대로 다니려는 뜻이 있고, 아이가 다리힘을 기르기보다 쉽게 가기를 더 좋아해 버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아이를 안고 다니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터전 길은 고르지 않아 아기수레를 밀면 아이 몸에 더없이 나쁩니다. 아이는 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야 하며, 아이 다리힘으로는 아직 힘들 때에는 엄마나 아빠 품에 안겨 따순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가 잠들 무렵 옆지기가 아이를 업습니다. 일찍 돌아가야겠다 싶어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는 동안 어린아이 하나를 아기수레에 태우고 어린 두 아이를 걸리고 있는 엄마를 마주 바라봅니다. “진짜 힘들겠네.” 옆지기 입에서 절로 터져나오는 목소리입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움직인다면 얼마나 힘이 들까요. 천기저귀를 쓰고자 하여도 쓰기 아주 힘들겠지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종이기저귀를 쓸 때에도 만만하지 않을 테고요. 조금 큰 두 아이가 쫑알거리다가 저희 가고픈 대로 엇갈려 달리면 애 엄마로서는 죽을 노릇입니다. 아이 하나가 저 가고픈 대로 신나게 내달릴 때에도 붙잡기 얼마나 힘든데요.

 아이를 업고 안고 하며 집에 닿을 무렵 아이가 갑자기 깹니다. 낮잠을 잘 때이기에 두어 시간은 자야 하는데 어떻게 깨어납니다. 집으로 오니 말똥말똥 뛰어다니며 놉니다. 얼마 뒤 똥 한 번 푸지게 누고는 다시 신나게 놉니다. 엄마가 아이 똥을 치우는 동안 아빠는 아이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마실을 마치고 금방 돌아온 탓인지 손빨래 비빔질을 하는데 팔뚝이 저려 힘겹습니다. 애벌 두벌 세벌 헹구며 물을 짜는데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늘 따라 빨래를 그만두고 싶으나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 빨래를 이 자리에서 마치지 않으면 저녁나절 아이가 잠들 무렵까지 나올 빨래거리는 더 늘어날 테고 이튿날에는 또 생길 테니까요.

 구부정한 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빨래를 하고 있자니, 다 마친 빨래를 옆지기가 들고 가서 빨래대에 널어 놓습니다. 모처럼 옆지기 몸이 괜찮아져서 집일을 도와주는구나 싶어 고맙습니다. 힘든 가운데 조금이나마 기운이 납니다. 양말과 아기 웃도리 둘을 마저 빨고 씻는방에서 나옵니다.

 아이는 아침에 치우고 낮에 치운 방을 새삼스레 어지르며 놉니다. 엄마도 아빠도 어질러진 방을 치울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그냥 그대로 둡니다. 모르는 누군가 본다면 참 게으른 사람들이라 여길 만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일 때부터 아이키우기를 해 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집일이 얼마나 많고, 많디많은 집일은 그칠 틈이 없는 가운데, 날마다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나마 우리 아이는 아직 어려서 그렇지, 조금 더 크면 종알종알 재잘재잘 말을 신나게 해대며 아빠나 엄마가 혼자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뜨개질을 한다든지 하면 이런저런 일 하지 말고 저랑 놀자며 팔뚝을 잡고 허리춤을 끌어안으리라 봅니다.

 다가오는 4월 1일,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에 나들이를 갈 생각입니다. 저랑 옆지기랑 아이랑 셋이 나란히 나들이를 갑니다. 이날 책방 〈풀무질〉에서는 책방 일꾼 은종복 님이 써낸 책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를 놓고 기림잔치를 벌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기림잔치에 함께한다면 다른 사람한테 번거로울 수밖에 없는데, 여태껏 책방 〈풀무질〉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 아이를 데리고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잔치마당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 때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싫어한다면 싫어하는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아 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른들은 모두 이 아이처럼 어린 나날을 보냈고, 어린 나날을 보낼 때에 ‘풀무질 책방 기림잔치’ 같은 잔치마당에 어버이와 함께 찾아가서 또래 아이들을 보거나 다른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누리를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배우면서 무럭무럭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님은 당신 아이를 대안 초등학교에 보냈고 대안 중학교에 넣었습니다. 은종복 님은 아이가 학교를 안 다니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지만 아이는 또래 동무들하고 놀고 싶다고 했답니다. 아무래도, 은종복 님이나 옆지기 님이나 집에서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면서 즐겁게 놀아 줄 수 있는 터전이었다면 아이로서는 따로 (대안)학교에 가서 동무들과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안 품을 수 있습니다. 높은 뜻이든 낮은 뜻이든 진보 넋이든 보수 넋이든, 모두들 어른들 생각과 삶에 따라 꾸리는 하루하루이다 보니, 아이들한테 ‘우리 어른들이 저희들 나름대로 좋다고 여기는 삶’을 아이한테 곧바로 물려주거나 함께하기보다는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기어 아이들이 보내는 여느 나날과 고운 삶을 따사로이 껴안지 못한다고 할까요. 제아무리 환경운동을 하고 무슨무슨 진보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가용을 못 버리듯, 아이를 옳고 바르게 키우는 자리에서도 돈을 더 벌지 않고서는 뜻있는 배움마당을 열지 못한다는 어려움 때문에 그만 아이들을 우리 어버이가 스스로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맙니다.

 ‘손그림 찍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주민등록증을 거스르는 넋을 지키고 ‘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워야 하는 군인이 되지 않겠다는 얼을 가꾸는 우리 삶일 때에, 비로소 경부운하이니 4대강이니 하는 끝장 막개발을 비롯하여 국가보안법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이나 주한미군 들을 거스를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맑고 밝은 이야기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이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되도록 책으로 내지 않고 쪽글로만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으나, 당신이 품으려는 맑고 밝은 넋을 더 너른 이웃하고 나누려는 뜻으로 책을 하나 여미기로 했다고 합니다.

 “책방 일을 하느라 돈에 눈먼 어른들이 벌이는 싸움을 막을 수 없었다(4쪽).”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돈에 눈먼 어른들한테 돈이 아닌 사랑에 흠뻑 빠져들자는 이야기를 건네고자 바지런히 쪽글을 쓴 〈풀무질〉 은종복 님입니다.

 은종복 님은 당신이 몸담은 환경지킴 모임에서 ‘풀벌레’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흔하디흔한 풀벌레이지만, 오늘날 도시에서는 모조리 자취를 감추어 버린 풀벌레입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풀 한 포기 느긋하게 자랄 땅이 없거든요. 시멘트땅이요 아스팔트땅이니 풀이 자라지 못하고, 풀이 조그맣게라도 풀숲을 이루어야 풀벌레가 깃들 수 있는데, 풀벌레 하나 깃들 땅뙈기는 내버려 두지 않거든요. 건물을 세우고 가게를 들여 돈을 벌든지 아스팔트를 죽 깔아서 자동차 씽씽 달리도록 해야 한다는 도시이거든요.

 “아름다운 우리 말을 살려 쓰면 내 마음도 아름다워지고 세상도 아름다워진다(6쪽).”는 생각을 품으며 쪽글을 꾸준히 가다듬기도 하는 풀벌레 은종복 님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름다운 우리 말’이 아니라 ‘쉬운 우리 말’이요, 동네 할머니들 누구나 알아들을 만한 ‘수수한 우리 말’이며, 초등학교를 다니든 어린이집을 다니든 어린이들 누구나 알아차릴 만한 ‘가장 낮고 가장 가난하며 가장 부드러운 말’입니다.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말입니다. 책 좀 읽었다고 잘난 척하는 말이 아닙니다. 학교 좀 오래 다녀 가방끈 길다고 으스대지 않는 말입니다. 나라밖으로 다녀 본 티를 내겠다는 어설픈 겉치레 말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따스하고 넉넉하고 어깨동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작은 책방 〈풀무질〉이라는 곳부터 ‘잘난’ 책방이 아닙니다. 〈풀무질〉은 참으로 못난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더없이 모자란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그지없이 어설픈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책방입니다. 공안경찰이 〈풀무질〉 일꾼을 붙잡았을 때에 당신한테 들려준 말 “처벌받고 여기서 나가면 그런 돈도 안 되는 사회과학 서점은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 봐요. 좀 건전한 거 있잖아요. 요즘 학생들 술 많이 마시던데 술집 하면 좋겠네요(42쪽).”처럼, 인문사회과학 책방 일이란 ‘돈 안 되는’ 일이니 몹시 바보스러운 책방 일입니다. 따로 인터넷으로 책을 살 수 있지 않으니 번거롭기까지 한 책방입니다. 무슨 경품이나 마일리지를 잔뜩 내붙이고 있지도 않으니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책방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못나고 모자라고 어설프고 어리석고 바보스럽고 번거롭고 멍청한 작은 책방 〈풀무질〉이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못나기 때문에 따뜻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넉넉하며, 어설프기 때문에 착합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푸근하고, 바보스럽기 때문에 믿음직하며, 번거롭기 때문에 싱그러운데다가, 멍청하기 때문에 꿋꿋합니다.

 책방 일꾼과 책손 사이에 높고 낮은 자리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으로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같은 목숨과 또다른 목숨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랑과 고운 믿음으로 손을 맞잡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건전한 일”이라고 하는 “장사 잘될 술집” 아닌 “장사 힘든 책방”을 동네 한켠에서 자그맣게 하는 〈풀무질〉 일꾼들은, 다름아닌 작고 가난하고 모자라고 어설픈 가운데 착하고 살갑고 넉넉하고 따사로운 마음을 땀흘려 일구자고 하는 뜻을 나눕니다.

 수험서를 사 가든 교재를 장만하든 잡지 하나 챙기든, 모두 어여쁜 빛줄기를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는 젊은 넋임을 돌아보면서 쪽글 하나 건네어 우리 삶터를 아름답게 비추며 즐거이 살자는 뜻을 키우고픈 〈풀무질〉 일꾼들입니다. 무엇입네 뭐입네 하고 외치는 분들 목소리마냥 〈풀무질〉 일꾼 목소리는 신문 1쪽을 채우는 일이 없습니다. 풀벌레 한 마리가 우짖는 소리는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파묻히니까요. 아니,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스러집니다. 그러나 풀벌레는 꾸준하게 노래를 합니다. 풀벌레 한 마리는 어마어마한 도시 한복판에서 자그마한 풀숲을 보듬으면서 햇살 한 줌 받아안는 마음결을 다부지게 일굽니다.
 















 (3) 되새겨 읽으며 아쉬운 글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책은 〈풀무질〉 일꾼 은종복 님이 쓴 쪽글들을 갈래에 따라 새로 엮어서 나왔습니다. 은종복 님은 사람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게끔 짤막한 글을 써 왔지만, 책에서는 두어 꼭지를 하나로 묶으며 제법 길어진 글이 많습니다. 이에 따라 쪽글로 사람들하고 나눌 때에는 단출하면서 옹글던 글이 여러모로 헝클어지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은종복 님이 쪽글을 쓸 때에 마음을 깊이 쓰던 ‘우리 말 바르게 쓰기’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 가운데 ‘것’이라는 말투는 346쪽짜리 책에서 자그마치 1000번이 넘게 나오고, ‘하지만’이라는 말투 또한 100번 가까이 나옵니다(‘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하지만’이라 적어야 할 말을 잘못 적는 말투입니다). ‘고통, 불안, 시작, 필요, 원망, 후회, 전체, 강제, 만족, 고민, 열심, 생활, 방향, 결국, 진정한, 통하다, 별, 단, 전혀, 대부분’ 같은 말투도 지나치게 자주 나옵니다.

 ┌ 내가 붙잡혀 간 것은 → 내가 붙잡혀 간 데에는
 ├ 거기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 이에 따르지 않을 생각이다
 ├ 군대를 보내는 것을 보고 → 군대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 정작 팔리는 것은 → 정작 팔리는 책은


 다만, 은종복 님이 아무리 우리 말과 글을 바르게 쓰고자 애쓴다 하여도, 쪽글마다 몇 군데씩 아쉬운 대목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책 한 권에 만 군데가 넘도록 얄궂은 말투가 깃들도록 흐트러지거나 엉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풀무질〉을 기리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냈을 때에도 ‘쉽게 쓴 낱말을 굳이 어려운 한자말로 고쳐 놓아’서 어이없다고 느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이든 이곳 일꾼 은종복 님이든 ‘그냥저냥 흔한 책을 팔’거나 ‘이냥저냥 흔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흔하지 않은 넋’을 출판사 일꾼이 제대로 안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왜 일부러 더 힘들게 글을 가다듬고 짤막한 쪽글을 써 왔는지, 왜 이 짤막한 쪽글을 쓸 때마다 은종복 님은 더더욱 뼈를 깎듯 애쓰면서 글다듬기를 하고 새롭게 말을 배우려고 했는지를 못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좀 어줍잖은 글이라 할지라도 좋은 넋과 훌륭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풀벌레 은종복 님이 굳이 더 마음써서 곱고 맑은 글을 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빛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종복 님 스스로 또이름을 ‘풀벌레’라고 붙이는 마음처럼, 쪽글 하나마다 풀벌레다운 얼과 기운을 실어서 이웃하고 함께하려는 사랑이 있습니다. 책을 엮는 일꾼들은, 또 풀벌레 은종복 님 글을 다루며 싣는 매체 일꾼들은, 글 하나가 그냥 나오는 글이 아니요 글 하나에 머리로만 굴린 이야기가 아닌 몸으로 부대끼며 삭여낸 이야기가 담기는 흐름을 짚어 줄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책을 반갑고 기쁘게 집어들어서 널리 나누는 참뜻을 깨달으면서 지식쌓기 책이 아닌 삶 다스리기 길동무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4343.3.30.불.ㅎㄲㅅㄱ)


[8, 53쪽]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돈에 눈먼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연을 더럽히고, 아이들 목숨줄을 조이고 있다. 전쟁을 일으키고, 강을 파헤치고, 핵무기를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다. 이럴수록 가난하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작은 동네 책방을 살려야 한다. 스스로 마음밭을 맑고 밝게 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 “큰 기업에서 일억 원을 내는 것보다 나같이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만 사람이 만 원씩 내는 게 훨씬 나아요. 큰 기업에서는 한꺼번에 돈을 내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품삯을 조금 올려 달라고 하면 들어주지 않지요. 그런 기업들이 돈을 내는 것은 이름값을 높여서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생각도 들어 있지요.”

[17, 19, 41∼42쪽] 헌법에 쓰여 있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 땅에서 인문사회과학 책방도 다른 많은 진보 모임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이 휘두르는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큰 책방이나 인터넷서점은 단지 돈을 받고 파는 사이로 머물지만, 인문사회과학 책방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누며 세상을 맑고 밝게 바꾸려는 진보 공동체다 … 그때 나를 조사하던 수사관에게 내가 물었다. “이런 책들은 일반 큰 책방에도 모두 팔고 있던는데, 그곳 대표는 왜 조사하지 않는 거죠?” “그들은 단지 돈을 벌려고 책을 파는 것이고, 당신들은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러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거칠었고, 억지로 높임말을 썼다.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또 학생들한테 그 내용을 전할지 안 전할지 어떻게 압니까?” “당신은 학교 다닐 때 시위 전력도 있고 지금도 학교 앞에서 사회과학 서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벌받고 여기서 나가면 그런 돈도 안 되는 사회과학 서점은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 봐요. 좀 건전한 거 있잖아요. 요즘 학생들 술 많이 마시던데 술집 하면 좋겠네요.”

[24, 54쪽] 햇살 한 줌, 빗물 한 방울, 눈송이 하나 볼 수 없는 땅속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책방 한 귀퉁이에 앉아 늦가을, 책방 밖으로 눈발 날리듯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많이 슬펐다 … 나는 사람이 사람을 못살게 하지 않고 사람이 자연을 더럽히지 않는 사회를 바란다.

[27, 44, 68쪽] 자본가들은 자기가 만든 물건을 팔려고 약한 나라를 끊임없이 쳐들어간다. 미국은 동북아시아 패권을 누리거나, 새로운 자본주의 시장을 만들려고 한반도 북녘을 쳐들어가려고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 나 같은 책방 일꾼이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가. 아니다. 대운하를 만들어 자연과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하고, 백성들이 먹고 죽을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미국 소를 자기들 마음대로 들여오는 이명박 정권이 이 나라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다 … 어느 날 열한 살 난 내 아이가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물었다. “아빠, 강남에 있는 땅들은 강북에 있는 땅보다 비싸? 맨날 땅값이 올랐다는 글만 나와?”

[37, 39, 66, 128쪽] 아이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은 모두 어른들 때문이다. 나 같은 어른들이 좀더 편하게 살려고 자동차를 수없이 만들어 공기를 더럽히고, 온갖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물을 썩게 하고 땅을 더럽혀서 그렇다 … 나는 돈에 눈먼 사람들이 배고프고 헐벗은 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볼 때까지 이렇게 해마다 하나씩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끊으려 한다. 이것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며 … 아이들이 학교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살 수는 없나. 학교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배우는 놀이터가 될 수는 없나 … 일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 학교 공부가 끝나고 이곳저곳 다른 배움터를 다니다가 밤 아홉 시 넘어 들어오고 밤 열두 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는 또 좋은 직장을 찾으러 공부해야 하고, 일자리를 얻은 뒤에는 또 쫓겨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이 행복할 것인가. 끝없이 행복을 뒤로 미루며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내 아이에게 강요하기는 싫었다.

[51, 55, 71쪽] 내 아이를 살리자고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죽이러 군대를 보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 … 권정생 할아버지는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맑고 밝은 부자였지요. 다시 태어나면 몸이 튼튼한 젊은이로 나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아이를 낳고 작은 텃밭을 일구며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진짜 부자는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가난하게 살아야 세상이 맑고 밝아진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살맛나는 마을을 만들 수 있다.

[58, 93, 106, 112쪽]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랑 걸으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종복아, 엄마는 종복이랑 이렇게 걸어가면 참 기쁘다. 이렇게 멋지고 듬직한 아이가 정말 내 배속에서 나온 건지 믿어지지 않아. 그냥 종복이란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면 엄마는 너무나 행복해.” … “또 어디 갈 데 없냐?” 숨돌릴 틈도 없이 다음 갈 곳을 미리 물어 오신다. 아버지는 책방에 도움이 되려고 당신 몸을 아끼지 않는다. 당신 몸 아끼지 않고 아들이 잘사는 것을 바라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 “내 머리엔 10원도 안 들어갔다.” 학교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을 할 때 어머니는 꼭 이런 표현을 쓴다 … 어릴 때 가정통신문에 어머니 학력 쓰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무학’이라고 쓰면서 참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배웠다.

[114, 125, 131, 132, 134, 136쪽] 조금 배고프게 살더라도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아이에게 찾아 주고 싶었다 … 내 아이가 6학년이었을 때도 구구단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별 걱정하지 않았다. 구구단은 잘 못 외우지만 생각이 참 깊다 … 아이들을 공부 잘하는 기계로 만들려 하니, 지금 일반 학교는 수용소가 되고 선생은 수용소장이 되고 있다 …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을 떠받드는 세상에선 아이들이 미칠 수밖에 없다 … 어른들이 돈에 눈먼 삶을 사니,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 아이들이 올곧게 잘 배우려면 아름답고 살맛나는 마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140, 144, 162쪽] 모두들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는데, 정말 살려야 할 것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마을이다 …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자연에서 마음껏 놀 수 있을까. 어른들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바깥에서 놀아야 한다. 함께 공차기를 하고 연을 날리고 썰매를 타고 구슬치기를 하자 … 아이들이 좋은 생각을 하기 바란다면 어른들이 좋은 생각을 해야 하고, 아이들이 좋은 책을 읽기 바란다면 어른들이 먼저 좋은 책을 손에 들어야 한다.

[200, 206, 214쪽] 군비 증강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줄까. 군비 증강은 결국 전쟁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 우리 나라도 이것을 본떠 우리보다 더 작은 나라들을 괴롭힌다. 이주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꼬마 제국주의 나라가 되고 있다 … 더 무서운 것은 살인무기는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사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평화는 무기를 버리고, 없애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지난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사람들 마음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지 의문이 들면서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들을 떠올렸다.

[266, 270쪽] “파리야! 네가 내 밥에 앉아 밥을 먹으니 내가 싫구나. 여기에 네 밥이 있으니 내 것 말고 네 것을 먹으면 좋겠다.” … 어떤 사회주의자들은 소로우의 생각을 싫어했다. 사람 하나하나가 나라가 하는 일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소로우의 생각은 노동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세상을 바꾸려면 내 자신을 먼저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276, 310, 323쪽] 지율 스님은 이 세상에 난 모든 목숨붙이를 아끼고 보듬고 섬기는 마음을 지녔다 … 황우석을 떠받들고 지율을 내치려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오로지 1등을 하려는 마음,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면 남이야 어떻든 생각하지 않는 마음,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마음,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면 자연을 파괴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마음은 아닐까 …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어른들 싸움으로 맑고 밝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아파하고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민중의 세계사》를 꺼내 읽는다 … 미국도 인디언을 총칼로 죽인 뒤에야 자신의 나라를, 야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또다른 자본을 수출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힘이 없거나 임금이 싼 사람들을 고용하여 착취하고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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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 느낌이 있는 국립공원 속살 탐방기
박경화 지음 / 양철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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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고 느끼는 여행’을 꿈꾸겠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9] 박경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세상으로 나와서 스무 달째 살아가고 있는 아이는 이제 밤에 두 번이나 세 번, 때로는 한 번만 칭얼거립니다. 깊은 밤에 두세 번씩 깨어나 아이 기저귀를 갈기란 만만하지 않은 노릇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에서 조용히 불을 켜고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한창 갓난아기일 때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어김없이 기저귀갈이를 해야 했고 백일 때까지는 한 시간이 아닌 삼십 분마다 깨어나야 했습니다. 그무렵은 잠을 잔다기보다 졸면서 아기를 본다고 해야 맞았고, 밤 사이에 똥기저귀 빨래를 여러 차례 하는 날이 잦았습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스스로 잘 걷고 달리기까지 하는 만큼, 이제는 아이를 품에 안거나 등에 업고 걷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골목을 휘저을 때에는 어김없이 아이를 안아야 하고, 고단해 하거나 힘들어 하면 그때그때 안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걷는다 하더라도 아이 몸으로는 한 시간 넘게 걷기란 몹시 어려운 노릇입니다. 집에서는 쉬잖고 뛰논달지라도 밖에서는 삼십 분을 거닐어도 몹시 힘든 노릇이구나 싶습니다.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바깥바람을 쏘이며 아이를 걸릴 때면, 아이가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동네 모습이 아이 눈에 어떻게 비칠까 퍽 걱정스럽습니다. 어른 눈으로 보자면 고즈넉한 골목동네랄 수 있으나, 조금만 걸어나가면 곧장 시내이고 유흥거리가 나옵니다. 몇 분 걷지 않아도 자동차 우글거리는 큰길이 나오고, 큰길에는 시끄러운 노래 흘러나오고 번쩍이는 불빛 가득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서울이 아닌 여느 도시이든 시골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익히 보고 길들고 젖어드는 삶자락이란 온통 소비주의 물질문명입니다.


.. 그럼, 곰은 무엇을 먹고 살까? 그 옛날 곰은 육식동물이었다. 그러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잡식으로 바뀌었고, 초식으로 변해 가는 단계라고 알려져 있다. 봄에는 부드러운 나뭇잎과 꽃, 나물류를 맛있게 먹는다. 열매가 맺는 여름에는 덜 익은 열매를 먹는데, 달콤한 산딸기와 뽕나무 열매인 오디, 벚나무 열매, 머루, 다래처럼 사람들이 먹는 모든 열매를 좋아한다 … 이 땅에 산양이 산다는 것은 천연기념물 한 종이 살아 있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 땅의 생태계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다 ..  (16, 43쪽)


 그제 아침 민방위훈련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민방위훈련 통지서는 참 질기게 온다고 느끼면서, 왜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이런 훈련을 시키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를 한동안 곱씹습니다. 누가 무엇을 지키라는 민방위요, 우리가 지킬 만한 아름답거나 빛나는 터전이란 어디일까요. 고향이요 삶터임을 떠나, 내가 깃든 이 도시가, 많은 사람들 복닥이는 이 도시가, 얼마나 지킬 만한 값이 있거나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하기 어려운 이 도시가, 사람 아닌 뭇목숨은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는 이 터전이, 사람이든 뭇목숨이든 개성과 다양성을 건사할 수 없는 이 자리가, 어느 만큼 지킬 값이나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제 낮 목에 사진기를 걸고 한손으로는 우산을 받고 눈길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빗길이었는데 삼십 분쯤 걷다 보니 눈길로 바뀌었습니다. 한동안은 싸락눈이더니 이내 굵은 눈송이로 바뀌었고, 얼음눈이 우산에 철벅철벅 들러붙어 무겁습니다. 눈과 바람과 얼음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얼어붙습니다. 눈으로 덮이는 동네를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으며 ‘눈으로 하얗게 덮이는 곳은 도시이든 시골이든 곱고 맑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그러나 도시에 내린 눈은 그때그때 걷어내거나 치우며, 시골에 내린 눈이 아니고는 햇볕에 녹거나 마르기란 어렵습니다. 아주 잠깐 하얗게 덮어 줄 뿐이요, 요사이는 눈이 내리는 동안에도 쌓이지 않도록 바지런히 쓸고 치웁니다.


..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을 제안한 사람은 놀랍게도 일본인이었다. 1933년 일본인 다무라(田村剛)는 금강산을 답사한 뒤 국립공원 지정 구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 사람들은 지리산 천왕봉과 설악산 대청봉까지 하이힐을 신고 간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는 실제로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이나 슬리퍼를 신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산이 낮고 완만해서가 아니다. 향적봉은 1614미터나 되는 높은 산이지만, 곤돌라를 타고 단숨에 봉우리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29, 210쪽)


 국립공원 나들이를 생각하는 이들한테 좋은 길잡이가 될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라는 책을 읽는 새벽나절, 시계는 세 시 삼 분을 가리키는데, 우리 윗집에 사는 분이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 무겁게 내며 계단을 딛고 올라갑니다. 윗집 이웃은 무슨 일로 이 깊은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갈까요. 택시를 몰기 때문에 이제야 일이 끝나서? 그러고 보면, 퍽 자주 이 깊은 새벽에 발걸음 소리를 듣습니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는 아이가 새벽나절 발걸음 소리에 놀라 깨곤 해서 퍽 애를 먹었습니다. 기찻길 옆 골목집에 살 때에는 새벽 다섯 시부터 울리는 기차소리에도 깨지 않더니.

 “여행이 더 즐거우려면 여행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필요하다(80쪽)”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힘주어 말하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입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는 쓰레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국립공원 둘레 마을’ 사람들 목소리를 빌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관광지를 찾는 사람들 누구나 쓰레기를 손쉽게 만들어 냅니다. 아니, 우리 나라 얼거리는 쓰레기를 끝없이 새로 만들도록 짜여 있습니다. 도시 삶터란 새 물건을 만들어 사고팔면서 일자리를 마련하고 돈을 벌도록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건 하나를 알뜰히 건사하거나 돌보면서 우리 터전을 맑고 곱게 지키도록 하는 틀로 맞추어 놓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다시쓰기나 되살려쓰기 얼거리를 이루어 놓지 않습니다.

 국립공원을 찾아가든 여느 관광지를 찾아가든, 우리는 우리 삶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찾아가서 지냅니다. 우리 삶자리에서 우리 동네를 맑고 곱게 건사하는 매무새를 지키고 있다면, 어느 곳에 간들 그곳 삶자리를 다치게 하거나 흐트려 놓거나 헤살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삶자리부터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얼개여야 비로소 관광지에서도 관광지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살피고 껴안는 삶얼개를 이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라는 책에서든 《희망을 여행하라》라는 책에서든 《이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라는 책에서든,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타령을 제아무리 줄줄줄 늘어놓는다 한들 달라질 낌새가 없습니다. 나아질 구석이 없습니다. 오늘날 뜻있고 생각있다는 진보 지식인마저 1회용품을 버젓이 쓰고 있거든요. 오늘날 뜻있고 생각있다는 보수 우익 인사조차 헌 물건 고쳐쓰기와 재활용품 살리기와 생협 매장 다니기와 텃밭농사 같은 일을 안 하고 있거든요.


.. 여행지에서 여행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지역 경제를 살릴 반가운 손님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쓰레기만 남기고 지역문화를 훼손하는 불청객이라는 것이다 … 최고봉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산에 올라 보면 유독 정상에만 사람들이 북적댄다. 근처에 있는 너른 공간과 시원한 숲그늘을 마다 하고, 굳이 햇볕이 내리쬐고 강한 바람이 부는 정상에만 몰려 있다. 덕분에 전국에 있는 유명한 산봉우리에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한 채 바위만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서만 오르는 바람에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흙이 쓸려내린 것이다. 그리고 정상을 밟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람들은 정상 표지석을 끌어안고 기념촬영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  (45, 177쪽)


 말이 좋아 ‘여행’이요 ‘탐방’이요 ‘트레킹’입니다. 예부터 써 온 우리 말로 하자면 ‘나들이’이거나 ‘마실’입니다. 나들이나 마실이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웃 마을로 찾아가는 일”입니다. 국립공원이든 관광지이든 ‘함부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려도 되는’ 곳이 아니라, ‘내 이웃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든 뭐를 하든 순례를 하든 트레킹을 하든 ‘누군가 살아가는 마을’을 찾아가서 돌아보고 즐기고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우리가 찾아간 마을에 사람들이 있든 들짐승이나 멧짐승이 있든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과 다름없이 곱고 어여쁘고 알뜰한 마을이나 보금자리나 삶자리’를 찾아가서 마주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우리 살림새를 추스르듯 우리가 찾아가는 곳에서 우리 살림새와 모양새를 번듯하고 야무지고 싱그럽고 따스하고 넉넉하게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내 보금자리 동네에서 내 보금자리 동네가 얼마나 곱고 알차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를 느낄 노릇이요, 내가 찾아가는 이웃사람 보금자리 동네에서는 이웃사람 보금자리 동네가 얼마나 곱고 알차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 국립공원은 우리 나라 생태계에서 가장 보전가치가 있는 곳이자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할 만큼 소중한 자연자원과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다 ..  (7쪽)


 그 숲에 가는 우리들은 이 숲 또는 이 도시 또는 이 아파트 또는 이 골목동네에서 아름다운 우리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 섬에 찾아가는 우리들은 이 동네 또는 이 빌라 또는 이 도심지에서 살가운 우리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를 사랑하듯 내 아이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요, 내 어버이를 아끼듯 내 이웃을 아끼는 한 사람이며, 내 동무를 살피듯 낯선 손님을 살피는 한 사람입니다.

 국립공원이란 나라에서 좀더 마음을 써서 건사하는 자연 터전이라 하는데, 국립공원만 건사해서 되는 나라살림이 아닙니다. 국립공원에 좀더 마음을 써야 한달 뿐이요, 우리 터전 어느 곳이든 마음을 샅샅이 쏟아야 합니다. 국립공원만 깨끗이 지켜서 될 일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도시이든 시골이든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을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라 할지라도 맛보고 껴안을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다스려야 합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여행’이 되자면, 무엇보다도 ‘생각하고 느끼는 삶’이어야 합니다. ‘천천히 기다리는 여행’이 되자면, 맨 먼저 ‘천천히 기다리는 삶’을 내 삶으로 곰삭여 놓아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새로운 국립공원을 일구어 내지 못하고 있는 한편, 국립공원 아닌 곳은 손쉽게 허물어뜨리고 있으며, 국립공원마저도 차근차근 잡아먹으며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4343.3.23.불.ㅎㄲㅅㄱ)


 ┌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양철북 펴냄,2010)
 ├ 글ㆍ사진 : 박경화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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