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풀꽃이 필때면 - 붉은여우 이야기 2 소년한길 동화 9
톰 맥커런 지음, 지넷 던 그림, 우순교 옮김 / 한길사 / 2001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47 ― 예쁜 진달래를 알아본다면 예쁜 사람
 : 톰 맥커런, 《돼지풀꽃이 필 때면》


- 책이름 : 돼지풀꽃이 필 때면
- 글 : 톰 맥커런
- 그림 : 자넷 던, 김종도
- 옮긴이 : 우순교
- 펴낸곳 : 소년한길 (2001.9.15.)
- 책값 : 8000원



 (1) 아파트만 아는 푸름이와 골목을 걸으며


 동네 푸름이들하고 골목마실을 다녔습니다. 지난 3월 28일에 처음으로 함께 걸었고, 4월 10일에 두 번째로 함께 걸었습니다. 날이 퍽 궂고 바람이 제법 불었으나 모두 씩씩하게 잘 걸어 주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 즈음 걷는 골목마실이란 오늘날 푸름이들한테 퍽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푸름이들은 집과 학교와 학원 사이만 오가도록 매여 있을 뿐, 스스로 두 다리로 거닐면서 동네를 쏘다닌다든지 동무들하고 어울리며 논다든지 할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28일에는 모두 스무 푸름이가 함께 걸었습니다. 4월 10일에는 일곱 푸름이와 함께 걸었습니다. 열세 아이가 나오지 않았는데, 나오지 않은 까닭 가운데에는 ‘곧 닥치는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한다며 학원에 가느라 안 나오는 아이가 꽤 많았습니다. 시험공부 때문에 안 나왔다는 아이 가운데 이제 중학교 1학년이나 2학년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골목마실을 보내기로 했으면서도 보름 뒤로 잡힌 중간고사에서 성적이 잘 나와야 한다며 아이들을 그예 학원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웬만한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파트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아파트숲에서 벗어날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어디 놀러 가더라도 자가용을 타고 다른 바닷가나 산으로 가지, 동네 골목을 다니지 않을 테니까요. 옷집과 밥집이 줄줄이 늘어선 곳이나 백화점이나 큰 할인매장으로 나들이를 다녀도, 오래된 저잣거리 마실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이들은 열서너 해나 열일고여덟 해 동안 ‘골목길’이라는 곳을 와 본 적이 한 번조차 없곤 합니다. 인천에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라는 데가 있는데, 이런 박물관에 찾아가 ‘달동네란 박물관에나 있는 곳이요, 지나간 발자국이니라’ 하는 이야기만 얼핏설핏 들을 뿐입니다. 또는 만화 ‘검정고무신’을 보면서 골목길이란 저렇게 생겼거니 하고 여길 뿐입니다.

 집이라고 하면 그저 아파트를 떠올립니다. 때로는 빌라를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 한국전쟁 폭격에 살아남은 옛 일본집이 동네에 버젓이 있음을, 게다가 인천골목길에는 꽤 많이 있음을, 한국전쟁이 끝나고 지은 기와집이 어엿이 있음을, 더욱이 재개발지구로 묶인 곳에는 이러한 기와집이 수두룩하게 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라고 하는 집이 바로 이들 골목집을 허문 자리에 지었고, 인천에서는 갯벌을 메워 짓거나 산과 논과 밭을 밀어내고 지었음을 살피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푸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푸름이들을 낳아 키우고 있는 어버이들부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올바르지 싶습니다. 도시에서 이럭저럭 회사원이 되어 고만고만 돈을 벌어들인 다음 크든 작든 아파트 한 칸 얻어 제법 잘 빠진 자가용 굴리고 살아가는 데에만 마음을 쏟지, 스스로 낮은자리에 서면서 동네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삶을 꾸리는 데까지 마음을 쏟기란 어렵습니다. 아파트 장만할 돈을 쪼개고 나누어 가난한 이웃하고 나눈다든지, 자가용 장만하거나 굴릴 돈을 송두리째 털어 시민사회운동에 들인다든지 하기란 힘듭니다. 돈으로 이루어지고 돈으로 짜여 있는 도시살림을 벗어나 몸과 마음이 자연하고 어우러지는 시골살림을 찾아들기란 더욱더 힘듭니다.

 그림책이나 백과사전조차 아닌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으로 살펴보는 뭇짐승 이야기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사람이 살아가는 도시라는 터전에서는 들짐승이나 날짐승을 만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기껏 까치 비둘기 참새 같은 날짐승을 만난다고 하는데, 인천만 해도 갈매기 직박구리 박새 어치 들이 있기는 하여도 바쁜 걸음을 멈추고 이들 새를 올려다보거나 새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새를 가늠하지 못하지만 어른들 또한 새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풀과 꽃과 나무를 알아채지 못하지만 어른들부터 풀과 꽃과 나무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아파트숲을 이룬 동네이름은 알지만 아파트숲이 아닌 곳 동네이름은 낯설어 하는데, 누구보다 어른들 스스로 아파트숲 이름에만 훤하고 여느 사람들 부대끼는 골목동네 이름을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자동차 이름을 낱낱이 알아보는 놀라운 아이가 있고, 손전화를 아주 잘 다루는 대단한 아이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웬만한 어른보다 사진기를 잘 다룹니다. 늘 보고 늘 곁에 있으며 늘 부대낀다면 아이들로서는 자동차 이름뿐 아니라 풀이름과 새이름을 낱낱이 알아봅니다. 늘 곁에 두거나 늘 마주한다면 아이들로서는 아파트 이름이나 손전화 쓰임새뿐 아니라 물고기 이름이나 밭 갈고 씨 뿌리고 김을 매는 때를 익숙하게 새깁니다. 어른들 생각이 아이들 생각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어른들 말글이 아이들 말글로 차곡차곡 대물림되며, 어른들 삶이 아이들 삶으로 남김없이 옮아 갑니다. 어른들 스스로 말에 앞서 몸으로 부대끼는 삶을 꾸린다면 아이들 또한 스스로 스스럼없이 백 마디 말이 아닌 한 가지 몸짓으로 삶을 꾸리겠지요. 어른들 스스로 맑고 착하고 곱게 삶을 일군다면 아이들 또한 스스로 맑고 착하고 곱게 삶을 일구는 매무새를 배우면서 자라겠지요. 아이들이 거짓말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어른부터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아이들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크기를 바란다면 어른들부터 올바르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동네 골목길을 푸름이하고 함께 걷는다고 온누리를 바꾼다든지 뒤집는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 푸름이들 마음밭에 제 삶터를 느긋하게 돌아보고 차근차근 살피는 매무새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무슨 역사가 있고 저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다는 지식을 들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 집에는 이 집 할매가 매발톱을 심었구나 하고 저 스스로 기뻐하며 가만히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저 집에는 저 집 아저씨가 진달래를 심고 매화나무 스무 해 넘게 기르고 있구나 하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디에서 살아가든 사람을 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자연을 놓지 않으면 반갑겠다고 생각하며, 더 뛰어나거나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 앞서 더 작으면서 어여쁜 마음을 건사할 수 있으면 고맙겠다고 생각합니다.


 (2) 여우를 이야기하는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붉은여우 이야기’라는 세 권짜리 묶음책 가운데 2번 책입니다. 1권은 《여우꼬리별의 전사》이고, 2권이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며, 3권은 《바람을 따라 달려라》입니다. 세 권은 한 묶음입니다만 저마다 따로 이야기를 엮고 있는 낱권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권 책이름이나 3권 책이름만 보고서는 ‘무슨 여우 이야기라고?’ 하는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거꾸로, ‘돼지풀꽃’이라는 낱말이 붙은 책이름을 보고 이 책을 집었다가 ‘뭐야 여우 이야기잖아? 책이름이 왜 이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는 인간이 모르는 비밀이 수두룩하였다(169쪽).”는 말마디처럼,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은 사람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자연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람이 알고자 하지 않아 알지 못하는 자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이 사람만 살아남는 데에 푹 빠지고 바쁜 나머지 들여다보지 않거나 못하는 자연 이야기를 조용히 풀어놓습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연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우리 삶터를 이끌어 간다는 어른들은 자연을 살피지 않습니다. 우리 목숨을 잇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얻을 뿐 아니라 자연식품이 우리 몸에 가장 좋다고 시끄럽게 떠들기조차 하면서 정작 우리 자연을 아름다이 지키거나 건사하거나 가꾸려고 마음쓰거나 애쓰거나 용쓰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돈을 버는 데에 바쁘고 돈을 쓰는 데에도 바쁘며 돈을 움켜쥐는 데에 바쁩니다. 돈만 있으면 자연식품은 마음껏 사먹을 수 있다고 여기며, 돈으로 자연을 되살릴 수 있는 줄 생각하는데다가, 돈이 없으면 굶어죽는 줄 알고 있습니다.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은 여우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책 주인공은 여우입니다. 여우가 맨앞에 나오며, 여우 둘레에 함께 살고 있는 쥐와 오소리와 수달과 토끼와 족제비와 다람쥐 들이 나란히 나옵니다. 여우들이 짝을 짓고 사랑을 나누며 새끼를 낳아 기르고 먹이를 사냥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지키는 한삶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여우를 가까이에서 살피거나 마주하거나 부대꼈기에 펼칠 수 있는 문학이라 할 텐데, 나라밖 이야기꾼들은 이와 같이 여우 이야기라든지 곰 이야기라든지 늑대 이야기라든지 수달 이야기라든지 고니 이야기라든지 줄줄줄 엮어냅니다. 나라안 이야기꾼은 《돼지풀꽃이 필 때면》 같은 이야기책은 엄두를 내지 못할 뿐 아니라 ‘비둘기 이야기’나 ‘갈매기 이야기’나 ‘지렁이 이야기’조차 제대로 적바림하지 못합니다. 흔하디흔한 ‘개구리 이야기’나 ‘개미 이야기’를 올바르고 알차고 알맞고 넉넉하고 따스하게 담아내는 나라안 이야기꾼이 있기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둘레에서 가장 흔하게 마주하고 살갑게 어깨동무하는 참새와 고양이와 개 이야기마저 옹글게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업 감독은 몹쓸 짐승들 때문에 댐 건설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골짜기 주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주민들도 댐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 버릴 처지였기 때문에 댐 짓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163쪽).”는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막개발을 일삼는다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삶터가 무너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막개발을 일삼는다는 사람들뿐 아니라 막개발을 일삼고 있어도 ‘나 살기 바쁜데’ 하면서 팔짱을 끼거나 등을 돌리거나 눈길조차 안 두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 때문에 우리 삶터가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막개발을 일삼는 흐름이 나날이 거세기 때문에 뭇짐승이 도시와 시골 모든 곳에서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이러면서 사람들 또한 목숨을 잃습니다. 목숨은 건사하여도 마음을 잃고 사랑을 잃으며 믿음을 잃습니다. 따스함을 잃고 넉넉함을 잃으며 풋풋함을 잃습니다. 여느 자리에서 나누는 삶을 펼치지 못하는 채 불우이웃돕기만 합니다. 여느 때부터 옳은 사회 바른 교육 곧은 정치 맑은 문화가 되도록 마음쓰지 않다가 무슨무슨 큰일이 불거져야 비로소 촛불을 든다고 법석입니다. 여느 때에 내 삶부터 바로세우면서 튼튼한 넋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커다란 촛대에 안 꺼지는 촛불을 박아 놓고 든다 할지라도 오래갈 수 없는 법입니다. 나무 한 그루는 열 해 백 해 즈믄 해에 걸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가지를 치며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하루아침에 우뚝 서는 나무란 없습니다. 돈을 들여 큰나무를 옮겨심는다 할지라도 옮겨심기 앞서 오랜 나날을 한곳에 뿌리박고 자라야 합니다. 사람들 삶이란, 바로 우리들 삶이란 나무 한 그루 무럭무럭 자라듯 우리 터전에서 옳고 바른 넋과 삶을 알뜰살뜰 꾸리면서 옳고 바른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목소리 외침이 아닌 삶 꾸리기요, 주먹 불끈 쥠이 아닌 손수 땀흘려 가꾸기입니다.

 《돼지풀꽃이 필 때면》이라는 책은 ‘자연보호’라느니 ‘생명사랑’이라느니 ‘개발반대’라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습니다. 뭐가 잘못이고 뭐가 엉터리이고 뭐가 글러먹었다는 소리를 내뱉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여우 눈높이에서 여우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라 하겠지요. 여우 또한 고운 목숨이면서 다른 고운 목숨인 쥐이며 토끼이며 다람쥐이며 잡아먹어야 하는 사나운 목숨임을 꾸밈없이 조용히 들려주기 때문이라 할 테지요.

 진달래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날 《돼지풀꽃이 필 때면》을 즐거이 읽고 덮습니다. 책을 덮은 이즈음은 산수유꽃과 벚꽃과 매화꽃과 목련꽃이 소담스레 꽃을 피웁니다. 머잖아 수수꽃다리가 꽃망울 터뜨릴 테며, 이내 매발톱과 금낭화가 예쁘장한 꽃을 피우며 골목동네 한켠을 해맑게 보듬으리라 봅니다. 개나리 노란 꽃그늘을 아이와 함께 걸었으니, 이제 매화꽃 하얀 꽃그늘을 아이와 함께 걸을 수 있고, 곧 수수꽃다리 보라빛 꽃그늘에서 아이와 함께 파란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3) 다시 새겨읽는 책


 즐겁게 읽은 책을 덮고 나서 책꽂이로 옮겨놓기 앞서 다시금 펼치고 뒤적입니다.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내 마음이 움직였는가를 헤아리며 한 줄 두 줄 되읽고 되새깁니다. 두 번이나 세 번쯤, 때로는 너덧 번이나 예닐곱 번쯤 다시 읽고 거듭 살피다 보면 이 글월이 참말로 나한테 살갑거나 아름다이 와닿았는지, 그냥 그저 그런데 책을 읽는 결에는 눈꺼풀에 뭐가 씌워 잘못 보았는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되읽을 만한 글월이 아니라 한다면 나한테 아름다운 책일 수 없습니다. 거듭 읽은 다음 기쁘게 책꽂이로 옮겨 놓을 수 없으면 나한테 좋은 책일 수 없습니다. 나중에 언제라도 다시 읽고 싶을 뿐 아니라 둘레에 거리낌없이 알리거나 빌려줄 수 있을 만한 책이 아니고는 책꽂이에 두지 말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4343.4.13.불.ㅎㄲㅅㄱ)


[23쪽] 여우들은 랫위들이 호숫가에서 쥐를 너무 많이 잡아먹은 나머지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믿었다. 세이지 브러시는 쥐는 아주 쉬운 먹이지만 베이거나 곪은 상처에 쥐 오줌이 닿으면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여우들은 바로 그런 병 때문에 랫위들이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43쪽] 시네아드는 공포에 휩싸였다. ‘스컬링 독이 어서 나타나 주었으면…….’ 하지만 그건 가망 없는 일이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시네아드는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새끼를 하나만 데리고 달아나야 했다. 고통으로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대체 누구를 데리고 간단 말인가? 잠시, 하지만 마치 한평생과도 같이 느껴지는 공포의 순간이 흘렀다. 시네아드는 스컬링 독이 새끼 숫여우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숫여우가 더 튼튼한 건 사실이었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은 자연의 섭리였다. 하지만 종족의 수를 늘리려면 암여우가 더 절실했다.

[48쪽] 세상에 위험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조금도 모르는 두 새끼 여우는 잠에서 설핏 깨어나 어미의 다정한 젖꼭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더듬었다. 젖꼭지가 잡히지 않자 잠에서 깨어나 눈에 익은 사물을 찾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보이는 건 저희들 둘뿐이었다.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저희들이 이곳저곳을 쑤시며 내는 킁킁 소리와 꼴깍 소리뿐이었다.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자 새끼 여우들은 어리둥절해져서 비틀거리며 한결 더 푸르고 널따란 습지에 이르렀다.

[63, 114, 118쪽] “여기 사는 수달들 말을 들어 보면, 지금 인간들이 짓는 건 다리가 아냐.” 블랙 팁이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다리가 아니라고? 그럼 뭐야?” “지금 인간들은 댐을 짓고 있어.” … 늘 산꼭대기에 서 있던 숫염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송골매도 하늘에서 사라졌다. 바람이 바위벽에서 웅웅거리며 산비탈을 치달아 호수로 몰려갔다. 여우들은 모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댐은 언제 지어지고 물은 언제쯤 불어날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골짜기가 물에 잠길 거예요. 모두 떠나야 해요.” 비키가 말했다. “우린 떠날 수 없어.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거든.” 블랙 팁이 물었다. “골짜기가 언제 물에 잠기는데?”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걸요. 댐이 거의 다 지어졌으니까요.” 비키가 물었다. “물이 얼마나 불어날 것 같아?” “그야 모르죠. 하지만 골짜기의 동물들은 모두 위험해요. 늦기 전에 여길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블랙 팁이 말했다. “우리는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그리고 시나 땅은 우리 고향이야.”

[80, 122쪽] 상록수 숲 깊은 곳에서 붉은다람쥐 한 마리가 높다란 나뭇가지에 앉아 솔방울을 갉아먹고 있었다. 숲은 붉은다람쥐뿐 아니라 들고양이에게도 마지막 은신처가 되는 곳이었다 … 니들 나인은 인간의 손에 키워졌기 때문에 풀밭이 어떤 곳인지 도통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하늘의 여우꼬리별을 길잡이 삼아 다녔다는 암여우들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99쪽] 고양이들이 좀더 주의 깊고 꾀가 있었다면, 호펄롱이 덫을 이용하여 저희들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좀더 눈이 날카로웠다면, 호펄롱이 밧줄에서 앞발을 빼내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111, 140쪽] “꽤 어리던걸. 어른과 새끼의 중간 정도야. 아마 이번 번식기에 아주 일찍 태어난 여우 같아. 다른 가족들은 사냥꾼한테 다 죽었대.” 시네아드가 말했다. “인간들이 그 여우한테 잘 해 준단 말이지? 참, 알 수가 없군.” 스컬링 독이 말했다. “더구나 그 인간들은 양을 치고 있잖아.” … 오소리가 물었다. “적들끼리 힘을 합치게 한다고?” 팽이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 먹고 먹히는 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동물들의 가장 큰 적인 인간들한테 모두 당하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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