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미워해 보리 어린이 2
요시모토 유키오 지음, 김리혜 옮김 / 보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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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46

 


돌멩이에 맞은 아이
― 왜 나를 미워 해
 요시모토 유키오 글
 김미혜, 황시백 옮김
 보리 펴냄, 1995.1.31.

 


  달팽이한테 빨리 달릴 수 있는 발을 달아 주면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토끼한테 무시무시한 뿔을 달아 주면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잠자리가 사람만큼 커다랗다면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작거나 여린 목숨들이 덩치가 커지거나 무서운 이빨과 뿔을 갖추면 이때부터 들볶이거나 시달리지 않을 만한지 궁금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들 말합니다. 아픈 이웃을 돌보자고들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어려운 이웃이며, 누가 도와줄 이웃이 될까요. 누가 아픈 이웃이며, 어떤 이가 도와줄 이웃이 될까요. 어려운 이웃한테는 돈을 모아서 건네면 되나요. 아픈 이웃한테는 바퀴걸상을 주거나 어깨동무를 해 주면 되나요.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칩니다. 어른은 아이더러 착하게 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자동차는 골목에서 빵빵거립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골목 놀이터에 자동차를 대 놓습니다. 대학교 마친 사람과 중·고등학교 마친 사람이 일터에서 받는 일삯이 다릅니다. 초등학교만 마치거나 초등학교조차 안 다닌 사람이 들어갈 만한 일터는 아주 드뭅니다. 어느 대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회사에 붙고 떨어지고가 달라지곤 합니다. 얼굴 생김새와 몸매로 사람을 가르곤 하며, ‘미인대회’가 버젓이 있어, 얼굴과 몸매로 사람을 쉽게 푸대접합니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공해를 일으킨다고 가르치거나 배우지만, 막상 자동차 배기가스가 사라지도록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배기가스 그득히 나오지만 자가용을 장만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 줄어들지 않습니다. 새로운 고속도로는 자꾸 내지만, 도시와 공장과 골프장과 관광단지를 숲으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 타고난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요징은 고통을 나누어 가지고자 하는 부모 형제와 동무가 있었습니다 …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일로 만족을 얻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왜, 아이들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아이들은 날 때부터 잔혹한 걸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징을 괴롭힌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게 나쁜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야구나 피구 따위를 하면서 사이좋게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아이들이 또 한편으로 약한 아이를 괴롭힙니다. 괴롭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도 했습니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  (29, 83∼84쪽)


  어른들은 전쟁무기를 만듭니다. 어른들은 군부대를 크게 키웁니다. 이러면서 평화를 말합니다. 총칼과 폭탄을 잔뜩 짊어진 몸으로 평화를 말합니다. 핵폭탄까지 만들면서 지구 평화를 말하곤 합니다. 평화를 바란다면 평화롭게 살 노릇이요, 전쟁무기나 군대에 들이는 어마어마한 돈으로 지구별이 평화롭도록 하는 데에 쓸 일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어른들 뒤를 고스란히 잇습니다. 아이들이 늘 지켜보는 어른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삶이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농약을 어찌해야 할까요. 농약 때문에 망가지는 흙과 들과 냇물과 바다는 어찌해야 할까요. 농약을 바라는 도시 얼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농약을 쓰고 코팅까지 입혀 번들거리는 과일이 되어야 ‘맛있어 보인다’고 말하는 도시 얼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한겨울에 비닐집에 난로를 틀어 키우는 딸기를 먹는 도시 얼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이른봄에 비닐집에서 거두는 참외와 수박을 먹는 도시 얼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한국에서 거두는 밀은 아주 조금뿐이지만, 사람들은 빵과 라면과 피자와 햄빵과 과자를 아주 많이 사다 먹습니다. 어른이 사다가 아이한테 먹이는 밀가루밥은 얼마나 아이를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사랑하는 손길이 될까요.


  플라스틱 장난감은 아이들한테 도움이 될까요. 온갖 교과서와 문제집과 참고서는 아이들한테 빛이 될까요.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은 아이들한테 지식이나 슬기가 될까요. 대중문화는 아이들한테 즐거운 놀이가 될까요. 고장말을 몰아내는 표준말은 아이들한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까요.


.. 나도 ‘어째서 이 아이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중국에서 일본으로 와서) 일본어 공부를 해야만 할까? 중국에 있었다면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중국에서 일본까지 오고, 몸도 불편하고 말도 잘 못하는 아이에게, 왜 그런 짓을 할까? 이 아이들은 해코지를 당하려고 일본에 온 건 아닌데.’ … 아이들을 꾸짖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반 아이들이 별 생각 없이 했던 해코지가 요징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는데도, 모두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  (51, 60∼61, 86쪽)


  아침에 멧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포근한 겨울비 내리는 시골집에서 아침 멧새 소리를 듣습니다. 제법 추운 바람이 불 적에는 아침 멧새 소리를 거의 못 들었습니다. 날씨가 포근하니, 갓 이월로 접어들었지만 아침을 깨우는 멧새가 우리 집 둘레에서 지저귀면서 먹이를 찾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영어 노래를 베풉니다. 자동차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와 전자제품 소리를 베풉니다. 새와 풀벌레와 나무와 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아이한테 베푸는 어른이 사라집니다. 도랑물 소리와 골짝물 소리를 아이한테 베푸는 어른은 자취를 감춥니다.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소리를 베푸는 어른은 찾아볼 길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가요. 회사원이 되는 아이들은 무엇을 꿈으로 품는가요. 공공기관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가요. 공무원이 되는 아이들은 무엇을 사랑으로 품는가요.


  경제개발은 왜 해야 할까요. 경제개발은 누구한테 어떻게 도움이 될까요. 마실 물과 들이켤 바람과 먹는 밥이 싱그럽거나 깨끗하지 못하면서 경제개발만 할 적에, 우리 몸과 마음은 얼마나 튼튼하거나 즐거울까요. 민주와 평화가 없이 국가안보만 생각하면 될는지 궁금합니다. 평등과 통일이 없이 교육과 복지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약을 써야 한다는데, 아이들한테 농약 듬뿍 묻은 곡식이나 열매를 먹으라고 건넬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교를 안 마치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며 아이한테 참고서와 교과서와 문제집을 건네는 어른들 손길은, 참말 아이를 걱정하거나 생각하는 사랑인지 궁금합니다.


.. 아이들은 몸이 불편한 아이를 보면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를 특별한 눈으로 봅니다. 아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몸이 불편한 사람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니까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이어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아이는 자주 해코지를 당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해코지를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해코지당하는 사람 눈으로 요징을 보면 요징이 착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요징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기겠다고 한 말은 언젠가 해코지한 아이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요징의 말에는 아무리 해코지를 당하더라도, 상대방을 용서해 주고, 그래서 동무가 된다면 그 동무들을 즐겁게 해 주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씨가 담겨 있습니다 ..  (102, 106, 112쪽)


  요시모토 유키오 님이 쓴 《왜 나를 미워 해》(보리,1995)를 읽습니다. 일본에 있는 ‘일본어 학급’ 교사로 지내면서 만난 ‘어버이 고향은 일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국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아이들’ 가운데 ‘칭요징’하고 보낸 나날을 돌아보면서 쓴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칭요징은 일본사람이면서 중국사람입니다. 칭요징은 중국을 사랑하면서 일본을 미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칭요징은 그저 사람입니다. 칭요징은 따사로운 숨결입니다. 칭요징은 동무와 이웃 모두 사랑스러운 넋인 줄 느낍니다. 서로 어깨동무하고 싶습니다. 서로 즐겁게 어울리고 싶습니다. 함께 놀고 일하면서 아름다운 빛이 이 땅에 드리울 수 있기를 꿈꿉니다.


  그런데, 일본땅에서 칭요징을 마주하는 일본 어린이는 칭요징한테 돌을 던집니다. 작은 돌 큰 돌 골고루 던집니다. 칭요징은 일본 어린이한테 돌을 마주 던지지 않습니다. 말없이 돌을 줍습니다. 일본 어린이가 저한테 던진 돌을 고스란히 모읍니다.


.. 요징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못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데 소중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도시아키를 보는 주위 어른들의 눈은 너무나 지나치게 냉정합니다. 어른들은 좀처럼 도시아키의 마음속을 살펴보아 주지 않습니다. 도시아키를 따뜻한 마음으로 보아 주었으면 하고 바라면 지나친 욕심이 될까요 ..  (150, 159쪽)


  돌을 맞은 아이는 ‘돌을 맞을 만한 까닭’이 있을까요? 가해자인 아이들한테도 ‘핑계로 둘러댈 이야기’가 있을까요.


  학교폭력과 따돌림이 큰 골칫거리라 합니다. 그런데, 학교폭력 가해자인 아이들을 돌보는 어버이는 ‘폭력에 시달린 아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좀처럼 안 꺼냅니다. 동무를 따돌리는 ‘내 아이’를 꾸짖거나 타이르거나 잘못을 바로잡도록 이끄는 어버이도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합니다.


  가만히 보면, 어른들은 뺑소니 사고를 쉽게 일으킵니다. 어른들은 사고를 내고도 외려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를 이루는 법을 보면, 모든 법은 어른들 때문에 생깁니다. 어른들이 워낙 거짓말을 하고 남을 괴롭히며 들볶기 때문에 법이 생깁니다.


  아이들 때문에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갓난쟁이가 징징 운대서 법이 생기지 않습니다. 갓난쟁이가 밥투정을 한대서 법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쉬 마렵다며 풀밭에 쉬를 눈대서 법이 생기지 않아요.


  싸움을 일으키거나 남을 괴롭히는 쪽은 늘 어른입니다. 어른들이 이 사회를 안 아름답게 망가뜨리니 법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이 사회와 나라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을 엉망진창으로 일그러뜨렸기에 법이 있습니다. 모든 어른들 잘잘못 때문에 아이들이 괴롭습니다.


.. 요징은 해코지를 당해도 가만히 참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코지한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 그 사람도 틀림없이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해코지한 아이를 용서했습니다 … 남을 괴롭히는 일 말고는 자신을 만족시킬 길이 없는 아이들은 분명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요징은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  (183, 184쪽)


  어린 칭요징은 “나는 여러 사람과 동무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다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수화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섭니다. 보통 사람과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 모두 동무로 사귀고 싶습니다(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칭요징한테 일본말을 가르친 요시모토 유키오 님은 “학교가 지식만을 가르치는 곳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 다른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려주는 곳, 학교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9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돌에 맞은 아이가 눈물을 삼킵니다. 돌에 맞은 아이가 ‘돌을 던진 아이’ 마음속에 슬픈 외로움이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부디 그 아이 마음에 따사로운 빛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돌을 던진 아이는 두 발을 뻗고 시원하게 잘 만할까요. 돌을 던진 아이는 ‘돌에 맞은 아이’가 얼마나 아프거나 슬픈 줄 알까요.


  학교에서 교사는 어떤 노릇을 하는지요. 교과서는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는지요. 교사는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나요. 여느 동네 여느 어버이는 여느 아이한테 어떤 삶을 물려주는가요.


  입시에 얽매인 학교 아닌, 사랑이 자라는 학교가 되기를 빕니다. 입시를 다그치면서 아이들한테 일찌감치 영어를 비롯한 시험공부만 시키는 학교 아닌, 아름다운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기를 빕니다. 시골 아이를 몽땅 도시로 보내는 바보스러운 학교 아닌, 마을마다 마을사람 되도록 가꾸고 돌보면서 사랑스러운 눈빛 되도록 북돋우는 학교가 되기를 빕니다. 아이들이 동무한테 돌을 던지는 까닭은, 먼저 학교가 아이들한테 돌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와 교사 모두 아이들한테 돌을 던지면서 ‘스스로 아이한테 돌을 던지는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한테 입시지옥이라는 돌은 그만 던지고, 아이들을 따사로운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7.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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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되었습니다 - 초보 아빠의 행복한 육아 일기
신동섭 지음 / 나무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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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22

 


어버이로 살아가는 길
― 아빠가 되었습니다
 신동섭 글
 나무수 펴냄, 2011.3.10.

 


  배고픈 아이를 보면 따스한 사랑이 피어나서 즐겁게 밥상을 차리는 넋이 바로 어버이로구나 싶어요. 바로 어머니 손맛과 아버지 손맛일 테지요. 다만, 예나 이제나 아직 ‘아버지 손맛’은 거의 없고 ‘어머니 손맛’만 넘치지 싶어요. 사회 곳곳에서 성평등을 말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는 어버이 자리에서 성평등을 즐겁고 아름답게 이루는 분들은 드물지 싶어요.


  너무 길든 탓일까요. 집과 마을과 학교에서 도무지 성평등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게다가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스스로 도시락을 싸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모두 급식을 합니다. 대학교를 다니며 도시락을 싸는 젊은이가 아주 드뭅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남이 차려 주는 밥을 돈을 치러 먹는 일’에 길듭니다. 스스로 밥을 차리지 않고, 스스로 설거지를 하지 않아요. 스스로 밥차림을 살피지 않고, 스스로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않아요.


  회사원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든, 노동자가 되거나 장사꾼이 되든, 어느 자리에서도 스스로 밥을 차려서 먹지 않습니다. 요새는 밥을 손수 지어서 먹는 회사가 조금씩 늘기는 하지만 아주 적어요. 관공서나 회사나 공장이 많은 곳을 보면 온통 식당들이 줄을 짓습니다. 낮밥 언저리에는 밥집마다 바글거립니다.


.. 병원에서도 제왕절개로 낳았으니 모유 수유는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우는 은지에게 분유를 먹이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분유는 안 된다고 얘기했는데 자꾸 전화가 와서 “당신들 귀찮아서 그러는 거 아니냐. 모유 수유를 해야 하니 당분간 보리차를 먹여라.”라며 버럭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간호사는 신생아에게 보리차를 먹이라는 얘기는 처음 들어 본다며 황당해 하더군요 … 정해진 시간밖에 아기를 못 보니 아기가 불편해 하든 말든 간호사가 통유리 앞에 들고 있었던 겁니다. 막상 경험해 보니까 ‘이건 너무 SF적이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26, 29쪽)


  도시락을 싸는 겨를은 아깝지 않습니다. 도시락을 싸느라 들이는 품은 아깝지 않습니다. 도시락을 싸기까지 밥을 차리고 반찬을 마련하는 손길은 아깝지 않습니다. 가시내도 머스마도 밥짓기를 배울 노릇입니다. 밥을 정갈하게 차려 맛나게 먹는 즐거움을 누릴 노릇입니다. 어릴 적부터 밥짓기를 즐겁게 누릴 적에 푸름이를 지나 젊은이 되어서도 밥짓기를 즐겁게 누립니다. 젊은 나날에 밥짓기를 즐겁게 누려야, 아이를 낳아 돌볼 적에 밥을 맛나게 차려서 베풀 수 있습니다. 손수 즐겁게 밥을 차린 적이 없이, 어떻게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거나 젖떼기밥을 먹일 수 있겠어요. 스스로 즐겁게 밥을 차리는 매무새를 익히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밥을 어떻게 마련하겠어요. 우리 어버이가 나이가 들어 할매 할배가 되면, 우리가 어버이한테 밥을 사랑스레 차려서 나눌 수 있어야지요. 어린 아이와 늙은 어버이 모두 한테 따스한 밥 한 그릇 나눌 수 있는 몸가짐이어야지요.


  곧,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건사할 때에 삶입니다. 밥과 옷과 집을 즐겁게 다스릴 적에 어버이입니다. 밥과 옷과 집을 사랑스레 물려주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아이는 어른한테서 밥과 옷과 집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마냥 받기만 하다가, 차근차근 어깨너머로 구경하고, 천천히 배웁니다. 아이들은 밥상에 수저를 놓습니다. 아이들은 빈 밥그릇을 치웁니다. 아이들은 접시를 들어서 나릅니다. 아이들은 행주질과 걸레질을 합니다. 아이들은 설거지를 거들고, 이런 심부름과 저런 집일을 돕습니다.


  즐겁게 도우며 즐겁게 웃어요. 기쁘게 거들며 기쁘게 노래해요. 하나씩 배우고 둘씩 사랑합니다. 셋씩 익히며 넷씩 꿈꾸지요.


.. 아기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은지는 넘어지면 바로 울지 않고 힐끗 엄마나 아빠를 쳐다보더군요. 이때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은지야∼” 하면서 달려가면 은지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울음을 터트립니다. 하지만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켜보며 “어 넘어졌네. 손 털고, 무릎 털고.” 그러면 은지도 울지 않고 흙을 털어낸 뒤 다시 걸어갑니다 … 솔직히 말하면 아픈 은지를 데리고 연기 가득한 숯불구이 집에도 데리고 갔습니다. 의사보다 가까운 사람은 부모입니다. 예전에 우리 부모가 그랬듯 감기나 복통, 설사, 열, 땀띠 등 비교적 가볍거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증상은 아이 상태를 가장 잘 아는 부모가 주치의가 돼서 다스리는 게 정말 아기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61, 81쪽)


  겨울밤이 고즈넉합니다. 우리 집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앞서 오줌그릇에 눈 오줌을 마당 한켠 나무 둘레에 뿌립니다. 우리 집 나무들이 아이들 오줌을 틈틈이 받아먹으면서 튼튼하게 자라기를 빕니다. 우리 집 나무들이 아이들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아름답게 뿌리내리기를 빕니다.


  푸른 바람은 나뭇가지를 스치고 마당을 감돕니다. 푸른 숨결은 풀잎마다 맺히고 풀숲에 깃든 풀벌레가 노래로 바꾸어서 나누어 줍니다. 우리 집 나무가 있어 즐겁고, 우리 집 나무를 누리면서 아이들이 뛰놀 수 있으니 기쁩니다.


  깊은 밤에 고즈넉한 바람을 찬찬히 쐬면서 가만히 헤아립니다. 곁님과 함께 시골살이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시골빛을 먹습니다. 나한테 아이들이 없을 적에 이렇게 씩씩하게 시골로 와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나한테 아픈 곁님이 없었어도 이처럼 다부지게 시골로 와서 살림을 꾸릴 만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과 곁님이 있어 내 손은 늘 일하는 손이 됩니다. 네 식구 오순도순 지내는 시골집에서 내 손은 늘 물을 만지면서 쉬지 못하는 손이 됩니다. 그런데, 늘 일하고 쉴 겨를이 없는 터라, 이런 이야기와 저런 생각이 자꾸자꾸 샘솟습니다. 밥을 지으면서 밥내음 이야기를 떠올리고, 빨래를 하면서 빨래빛 이야기를 생각해요. 걸레질을 하고 비질을 하며 이불을 털고 말리는 동안 하늘숨과 풀숨을 되새깁니다. 어떤 물을 마시고 어떤 바람을 들이켤 적에 몸과 마음이 튼튼할 수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신동섭 님이 아버지로서 쓴 《아빠가 되었습니다》(나무수,2011)라는 책을 읽습니다.


.. 한동안 이것 때문에 힘들었는데 요즘은 은지가 눈을 뜨고 있을 땐 딴 생각은 아예 안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저도 함께 ‘노니까’ 시간도 빨리 가고 놀이도 다채로워지더군요 … 그 뒤로 오이, 당근, 미역줄기 등을 치발기로 사용했습니다. 또 삼겹살 먹을 때 싸먹는 각종 쌈은 물론 냉이, 질경이, 쑥 등 길가에서 자라는 풀도 틈만 나면 먹어 보게 했습니다 … 은지는 동생을 반기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눈을 만지려고 하기에 “은지야, 눈 만지면 아파, 다른 데 만질 때도 살살 만지는 거야.”라며 최대한 부드럽게 설명했더니 은지도 알겠다는 듯 “살살” 그러며 쓰다듬고 뽀뽀를 하더군요 ..  (108, 119, 218쪽)


  《아빠가 되었습니다》는 ‘아빠 육아일기’라 할 만합니다. 또는 ‘아빠 육아 수필’이라 할 만합니다. ‘아빠 육아 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글쓴이 신동섭 님은 아버지가 되었기에, 이 보람과 즐거움과 고단함을 차근차근 글과 사진으로 풀어냅니다.


  그러면, 신동섭 님이 아이하고 보낸 나날은 오직 아이만 생각하던 삶이었을까요? 갓난쟁이 입에 당근과 오이와 미역줄기(미역귀 아닌 미역줄기를 주었다는군요)를 물렸다고 하는데, 아이 입에만 당근과 오이와 미역줄기가 들어갔을까요? 아이가 없던 삶에서도 이렇게 하루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 아기를 재우다 보면 세상이 얼마나 소움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층간 소음부터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까지 모든 소리가 평소와 달리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제가 걸을 때 발바닥과 장판이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발에 찍찍이를 붙이고 다니는 것 같더군요 … “그럼 악어가 무서워 붕붕이가 무서워?” “붕붕이가 무서워.” “아빠 차도 무서워?” “응” 악어는 은지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입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아나 봅니다 ..  (140, 263쪽)


  아이한테도 부드럽게 말할 적에 즐겁고, 어른한테도 부드럽게 말할 적에 즐겁습니다. 자동차는 아이들도 무서워 하고, 어른들도 무서워 합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아이들도 싫고 어른들도 싫어요. 전쟁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싫어요. 사랑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반겨요. 평화와 평등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합니다.


  어른인 우리들이 즐겁게 살아갈 적에 아이들한테도 즐거운 삶 물려줍니다. 어른인 우리들부터 사랑을 꽃피울 적에 아이들한테도 사랑스러운 삶 이어줍니다.


  아이키우기는 힘들지 않습니다. 어른인 내 삶을 아름답게 꾸리면 되는 일이 아이키우기입니다. 아이가 있기에 대단하게 무엇을 더 해야 하지 않아요. 아이를 바라보면서 어른인 내 삶을 얼마나 아름답고 즐겁게 가꾸어야 하는가를 돌아볼 노릇입니다. 눈치 아닌 마음을 읽는 삶이듯, 아이 마음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아이하고 나누는 삶이 아이키우기입니다.


  곁님은 회사로 돈을 벌러 가고, 신동섭 님은 집에서 아이하고 살림을 누렸기에 《아빠가 되었습니다》 같은 책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책을 덮으면서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육아 수필’도 좋고 ‘아이 사진’도 좋은데, 조금 더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더 깃들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아이와 지내며 누리는 즐거움이란 ‘그때는 그랬지’ 하고 뭉뚱그려서 들려주는 ‘좋아 좋아 수필’이 아닌, 아이하고 날마다 지지고 볶거나 웃고 떠든 ‘수수한 이야기’에서 피어나지 않나 싶어요.


  아이가 우는 사진을 책에 꽤 많이 실었는데, 아이가 왜 이렇게 자주 울어야 했는지를 더 낱낱이 적으면 훨씬 빛이 나리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아이가 부쩍 큰 뒤를 헤아린다면 이런 이야기가 더 도움이 되겠지요. 아이가 웃는 사진과 얽혀, 아이가 언제 어떤 말빛을 터뜨리면서 웃음보따리가 되는가 하는 이야기를 수수하고 투박하게 더 들려준다면 훨씬 재미나겠지요. 무엇보다 ‘아이가 살아가며 읊은 말’이 이 책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이와 부른 노래도 그렇게 도드라지지 못합니다. 아이와 먹은 밥도, 아이와 함께 누린 옷과 이불과 집살림도, 이런저런 자잘하거나 자질구레한 삶빛이 바로 아이와 지내는 어여쁜 삶노래가 된다고 느껴요.


  아버지는 혼자서 될 수 없어요. 어머니가 있기에 아버지가 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이 함께 있으면서 다 같이 어버이가 되어요. 아이는 아버지 사랑과 어머니 꿈을 함께 먹으면서 자랍니다. 아이는 아버지 노래와 어머니 눈빛을 같이 먹으면서 큽니다. 어버이로서 일구는 삶과 사랑과 꿈을 조금 더 또렷하게, 차근차근 깊고 넓게, 도란도란 사랑스럽게 들려줄 수 있으면 이 책이 그야말로 알찬 육아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벼운 ‘육아 수필’로만 끝내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4347.1.1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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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피는 계절 창비아동문고 127
김명수 지음 / 창비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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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45

 


숲흙을 잊은 사람들
― 해바라기 피는 계절
 김명수 글
 박향미 그림
 창비 펴냄, 1992.9.30.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비료를 먹지 않습니다. 숲에서 씨앗으로 뿌리를 내려 자란 나무는 농약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과일밭을 따로 키우면서 비료와 농약을 듬뿍 치지만, 모든 열매는 비료와 농약이 없이 자랐습니다. 아니, 비료와 농약을 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비료와 농약을 쓰는 까닭은 한 가지입니다. 알을 더 굵게 하고, 단맛을 더 크게 하려는 뜻입니다. 상품으로 더 비싸게 팔 뜻이기에 비료와 농약을 씁니다. 비료와 농약을 안 쓰는 까닭 또한 한 가지입니다. 몸을 살리려 하고, 흙을 지키려 하려는 뜻입니다. 즐겁게 먹고 아름답게 살아가려는 뜻이라서 비료와 농약을 안 씁니다.


  거름을 주면 한결 잘 자라지요. 그런데 거름도 굳이 따로 주어야 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가랑잎이 스스로 거름이 되고, 과일나무 둘레에서 자라다가 시들어 죽는 풀이 저절로 거름이 돼요. 풀에 깃들어 살다가 죽는 벌레들이 거름이 됩니다. 풀벌레가 누는 똥이 거름이 돼요. 풀 먹는 짐승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며 거름이 되지요. 개미가 몰려들고 온갖 벌레가 내려앉아 주검을 흙으로 돌려줍니다. 풀짐승이 풀을 먹고 나무 둘레에서 누는 똥이 시나브로 거름이 됩니다.


  논흙과 밭흙이 제아무리 기름지거나 좋다 하더라도 숲흙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논흙과 밭흙을 온갖 비료와 농약으로 살찌우려 하더라도 숲흙처럼 싱그러우면서 숨쉬지 못합니다. 숲에서는 발이 폭폭 빠질 뿐 아니라 손가락으로 찍어도 쏙쏙 들어가지만, 논과 밭에서는 손도 발도 들어가지 않아요. 논에 물을 대어 진흙으로 만들면 발이 빠지지만 숲흙처럼 보드라우면서 싱그럽지 않습니다. 밭자락 흙이 숲흙처럼 보드라우면서 폭폭 빠지면 아마 밭일을 아무도 못하겠지요.


.. 가사미산에 도라지가 차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산에 도라지가 있다는 소문이 아파트에 퍼지고 나서 사람들이 저마다 꼬챙이를 들고 도라지를 캐러 오기 때문이다 … “할아버지, 저 지붕 위의 박을 따서 바가지로 만들어 주세요.” “바가지는 만들어 뭘 하게? 플라스틱 바가지도 많은데!” 할아버지가 순희에게 물었습니다. “그래도 갖고 싶어요. 어서 바가지를 만들어 주세요.” ..  (29, 40쪽)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아니, 종이로 만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종이로 만든 책은 숲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이로 만든 책 가운데 숲에서 살며 사랑하는 꿈을 적바림한 책을 찾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숲에서 살아가지 않으니 책을 읽습니다. 숲에서 살아갈 마음이 없으니 책을 읽습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모르니 책을 읽습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빛을 깨닫지 못하기에 책을 읽습니다.


  책읽기가 나쁘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러나, 종이책만 알고 숲책을 모른다면 삶을 아름답게 가꾸지 못해요. 요리책을 펼쳐야 밥을 지을 수 있지 않듯, 책을 읽는대소 삶을 알 수 있지 않아요. 교과서를 외운대서 슬기를 깨우칠 수 있지 않듯, 책을 읽기에 슬기롭게 꿈꾸거나 사랑하지 않아요.


  계량기를 쓴다든지 식단을 짠다든지 하면서 요리책을 쓸 수 있어요. 그러면, 아이한테 밥을 차려서 내밀 적에, 숟가락에 밥알을 몇씩 올려서 몇 차례 씹도록 하고, 몇 모금씩 먹어야 한다고 숫자로 따질 수 있을까요. 아이를 씻길 적에 물 온도를 알맞게 맞추기는 해야 하지만, 물질을 몇 차례 하고 비누질을 몇 번 해야 한다고 숫자로 계량을 하거나 측량을 하거나 통계를 낼 수 있을까요. 아이한테 칭찬을 몇 마디 몇 번 며칠 해야 한다는 계량이나 측량이나 통계를 내면서 삶이 즐거울까요.


.. “이러니 나무가 살게 뭐람. 작년에 나무 심을 때 나무장수가 나무뿌리를 싸맨 것을 그냥 묻었구먼, 쯧쯧!” 아버지가 놀란 듯 혀를 찼습니다. “여보, 우리가 얼떨결에 나무를 심느라고 이런 걸 자세히 보지 못했나 봐요. 더군다나 그날 나무 값이 모자라 아이들이 조금통을 터는 둥 정신을 못 차렸던 거예요.” … 한나는 갑자기 메뚜기 생각이 났습니다. 아니, 그 방아깨비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난번 농약을 칠 때 방아깨비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한나는 지난번 농약을 칠 때 농약 냄새 때문에 방아깨비 생각을 까마득히 잊었던 게 미안했습니다 ..  (107, 120쪽)


  시험점수가 아이 삶을 밝히지 않습니다. 성적이나 등수가 아이 꿈을 빛내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아이 사랑을 보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몰고,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다가 안길 뿐 아니라, 학원에 보냅니다. 대학교 졸업장을 바랍니다. 초·중·고등학교 졸업장은 아주 마땅히 거머쥐어야 하는 줄 여깁니다. 아이한테 삶을 가르칠 생각은 안 하고 학교에 보낼 생각만 합니다. 아이하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꿈을 키울 삶은 일구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마냥 학교와 학원으로 내몰기만 합니다.


  삶이 없이 학교가 있으면 무엇이 재미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책만 있으면 얼마나 똑똑하거나 슬기로울까 돌아봐야 합니다. 꿈이 없이 돈만 있으면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까 헤아려야 합니다.


  밥을 먹습니다. 영양소를 먹지 않습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악보를 부르지 않고 작사와 작곡을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지 않으며, 문학이나 예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자랍니다. 아이들은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큽니다. 아이들은 나이값을 하지 않습니다.


.. ‘왜 나는 개로 태어났을까? 왜 사람들은 배가 고파 생선 대가리를 주워 먹는 나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발길질을 할까? 그들은 내가 얼마나 아픈지 생각이나 했을까? 왜 개들은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집을 지켜 주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만 주는 걸까? 그리고 도대체 우리 집 주인 식구들은 나를 버려 두고 어디로 가 버렸을까?’ ..  (159쪽)


  김명수 님 동화책 《해바라기 피는 계절》(창비,1992)을 읽습니다. 숲흙을 아직 알고 아끼며 사랑하는 아이들이 이 동화책에 나옵니다. 숲흙을 아직 생각하고 그리며 떠올리는 어른들이 이 동화책에 나옵니다. 고즈넉하거나 포근한 숲노래까지 흐르지는 않으며, 맑으면서 밝은 숲놀이가 조곤조곤 흐릅니다.


  지난 1992년에 이 동화책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밥 구실을 했을까 궁금합니다. 오늘 2014년에 이 동화책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밥 노릇을 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1990년대나 2010년대나 아이들은 숲빛을 하나도 모를까요. 이제 아이들은 숲무늬를 그릴 줄 몰라 이런 동화책은 애써 찾아 읽지 않을까요. 어른들도 이런 동화책을 장만해서 아이와 함께 읽을 마음이 없을까요.


  교실과 학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려야 오늘날 이 나라 생활동화가 될는지 모릅니다. 인터넷과 온갖 물질문명 이야기를 담아야 오늘날 이 나라 판타지동화가 될는지 모릅니다. 나무를 말하거나 풀을 말하거나 벌레를 말하는 동화는 아무래도 아이한테나 어른한테나 재미없을는지 모릅니다. 봄나무도 겨울나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여름풀도 가을나락도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사귀지 않으며 밥만 잘 먹는 사람들이니까요.


.. “그래, 까모야. 이제 가자. 그런데 이제 보니 넌 참 행복했었구나!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난 엄마도 아버지도 없어. 그리고 넌 친구도 무척 많아 좋겠다. 그리고 맛있는 과일도 실컷 먹을 수 있으니 말야!” 순예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누나, 난 행복한 원숭이가 아니야. 난 밤에만 이렇게 고향에 올 수 있어. 낮에는 누나와 같이 돌아다니며 건강대보탕을 팔아야 하잖아.” ..  (194쪽)


  아이들은 숲에서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놀 만한 숲은 어른들이 다 망가뜨립니다. 숲에 송전탑을 박고, 숲을 관광지로 바꾸며, 숲에 골프장을 짓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는 헬리콥터를 띄워 농약을 푸지게 뿌립니다. 솔잎혹파리라느니 무슨무슨 벌레를 잡겠다며 너른 숲에 농약을 뿌려대요. 사람들이 자가용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과 발전소 송전탑 따위로 숲을 망가뜨리고, 또 닭공장과 돼지공장과 소공장에서 내보내는 엄청난 쓰레기가 숲을 무너뜨리는데, 숲에 농약만 뿌린들 이런저런 벌레가 잡힐 턱이 있을까 알 길은 없어요.


  아무튼, 아이들은 숲에서 놀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숲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파트에 갇혀서 살고 학원과 학교와 시설과 기관에서 교과서와 책만 배웁니다. 어른들은 숲에서 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들을 아파트와 학원과 학교와 시설과 기관에 가둔 채 교과서와 책 지식만 집어넣습니다.


  자연그림책과 생태환경책을 아이들한테 읽힌들 무슨 뜻이 있을까요. 정작 아이들과 함께 숲에서 살지 않는데. 숲에서 살지 않을 뿐 아니라 숲마실도 안 가는데. 숲마실도 안 갈 뿐 아니라, 텃밭조차 돌보지 않는데. 꽃이름과 나무이름 많이 알면 무얼 하겠어요. 정작 꽃과 나무 앞에 서도 이름을 모를 뿐더러, 어떻게 아끼고 사랑하면서 우리 마음이 아름답게 거듭나는가를 느끼지 못하는데.


  예부터 시골사람한테 지식이 있어 흙을 일구지 않았어요. 예부터 시골사람한테 지식이 있어 풀에서 실을 얻고 베틀을 밟아 천을 짜고는 바느질로 옷을 짓지 않았어요. 풀내음을 맡고 풀빛을 먹으며 풀노래를 부르는 삶이었기에, 풀에서 옷을 얻고 집을 얻으며 밥을 얻었습니다. 사람은 풀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풀사람으로 살았고, 풀사람으로 살며 어떠한 쓰레기 하나 없이 풀숨을 나누었어요.


  아이들과 어떤 동화책을 읽을까요? 아이들한테 어떤 동화책을 선물할까요? 아이들과 어떤 삶을 가꿀까요? 아이들과 어떤 보금자리를 돌보며 살아갈까요? 4347.1.1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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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거짓말쟁이 다림창작동화 1
김리리 지음, 한지예 그림 / 다림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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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55

 


생활동화란 무엇일까
― 엄마는 거짓말쟁이
 김리리 글
 한지예 그림
 다림 펴냄, 2003.11.16.

 


  생활동화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삶을 그리면 생활동화가 된다 하겠지요. 그러면,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디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 모습을 그릴 때에 생활동화가 된다 할까요. 아이들한테 읽힐 동화책에 담는 ‘삶 이야기’는 어디에서 마주하고 어떻게 갈무리해서 어떠한 빛으로 그릴 때에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즐거울 수 있을까요.


  김리리 님이 쓴 생활동화인 《엄마는 거짓말쟁이》(다림,2003)를 읽었습니다.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하는 우리 집 큰아이는 이 책에 나오는 그림만 살피면서 ‘왜 이래?’ 하고 묻습니다. 나도 우리 집 큰아이처럼 ‘글을 모르는 사람’인 듯 여기면서 글은 잊고 그림만 따로 들여다봅니다. 그림으로만 볼 적에 이 작품에 나오는 아이와 어머니와 아버지와 교사와 동무들은 그리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아이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거짓말하기’를 물려받거나 배웠다고도 할 테지만, 이보다, 주인공 아이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왜 살아가나?’ 하는 대목이 아리송합니다.


.. “치! 그런데 왜 내가 말을 안 했다고 그래? 난 분명히 엄마한테 말했는데…….” “알았어. 빨리 책이나 읽어 봐.” 나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잘못했다고 해서 화가 나는데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어요 ..  (11쪽)


  아이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아이가 어리니 으레 꾸짖으며, 어른들끼리 속닥거리면서 놀고, 어른이라면서 하루 내내 컴퓨터게임만 하는 모습을 꼭 동화책에 담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이런 모습을 비판하려는 뜻에서 동화책에 담을 수 있습니다만, 굳이 비판을 하려고 동화책으로 담아서 보여주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거짓말은 나쁘다고 말하면서 거짓말 이야기만 잔뜩 보여주는 생활동화는 이 동화책 읽을 아이들한테 어떻게 스며들는지 궁금합니다.


  이 동화책에 흐르는 이야기대로 살펴본다면, 주인공 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한테서 아름다운 모습이나 사랑스러운 빛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합니다. 하나도 겪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요. 그래도 제법 씩씩하고 대견스레 어머니나 아버지하고 달리 착하고 예쁘며 참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다가 그만, 여느 때에 늘 겪고 보며 마주하는 어버이 모습이 아이한테서도 드러나요. 아이는 이런 모습이 드러날 때에 무척 부끄러워 하면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동화책을 읽을 아이들도 ‘아이 스스로 모르는 사이 얄궂은 거짓말과 매무새에 젖어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뒤집기를 하면서 무언가 가르치거나 보여줄 수 있습니다만, 굳이 뒤집기를 해야 할까 아리송해요. 그리고, 뒤집기를 하려 한다면, 주인공 아이네 어버이와는 사뭇 다른 ‘수수하면서 착하고 참다운 이웃이나 동무’를 함께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이끌어야 알맞겠다고 느낍니다.


.. “엄마! 그냥 지나치면 어떻게 해?” “내가 뭘?” “지금 사람들이 건널 차례인데 엄마가 그냥 지나쳤잖아.” “건너는 사람이 없으니깐 그렇지. 운전할 때 말 시키지 말고 입 좀 다물고 있어.” ..  (16∼17쪽)


  아이들은 어른들이 여느 때에 으레 하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먹습니다. 어른들 말이 곧 아이들 말이 됩니다. 어른들이 범죄를 일으키니 아이들도 범죄를 일으킵니다. 어른들이 사회에서 계급과 신분과 재산과 학력 따위로 금을 긋고 푸대접과 따돌리기와 괴롭히기를 일삼으니, 아이들도 학교와 마을에서 똑같은 짓을 저지릅니다.


  아이들이 ‘외계어’나 ‘통신체’를 쓴다고 나무랄 수 없어요. 모두 어른한테서 배우는 말투입니다. 둘레 어른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말하면, 아이들도 저절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말해요. 그렇지만 어른들은 ‘어른이니까’라는 핑계로 아무 말이나 내뱉습니다. 아이들이 보거나 말거나 짓궂은 말을 내뱉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까’ 어른 흉내를 내지 말라 윽박지릅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부터 어른과 똑같이 거친 말을 마구 내뱉거나 지껄여요. 중·고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아주 ‘어른 말투’로 거칠거나 짓궂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주절주절 떠들곤 합니다.


.. 아빠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요. “그게 뭐 어렵냐? 눈 딱 감고 그냥 예쁘다고 하면 되는 거지!” “정말? 그럼 아빠도 거짓말한 거네!” “내가 하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으니깐 하는 거지!” ..  (22쪽)


  생활동화는 어떤 삶을 그릴 때에 생활동화일까요. 어떤 사람들 어떤 삶을 그리면서 아이들과 따사로운 사랑과 꿈을 품을 때에 동화책이 될까요.


  아이를 밥상 앞에 앉히고 ‘나쁜 밥’과 ‘좋은 밥’을 함께 올리고는, 아이더러 ‘좋은 밥’만 먹으라 하고는 어른들은 ‘나쁜 밥’만 먹으면,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울까요. 이때에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과 슬기를 빛내어 ‘그래 그래, 좋은 밥만 먹어야지’ 하고 몸가짐을 추스를는지요.


  생활동화가 ‘착한’ 모습만 그리면서 ‘착한’ 이야기만 들려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막판에 짠 하고 뒤집기를 하려는 얼거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얄궂은 모습들만 잔뜩 보여주는 얼거리로 쓰는 생활동화가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얼마나 즐거울 만한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 나도 이렇지!’ 하면서, 어머니들 누구나 아이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쾌감’을 맛보도록 하는 뜻이 생활동화인지 묻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어머니가 이렇게 아이 앞에서 거짓말을 일삼지 않아요. 모든 아버지가 집에서 아이하고 안 놀면서 인터넷게임에만 빠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런 모습들을 비추면서 생활동화로 어떤 이야기와 생각을 깨우치려 한다 할 적에도, ‘가벼운 뒤집기’로 끝낼 노릇이 아니라, ‘그러면, 어떤 삶이 아이한테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울까’ 하는 대목을 함께 보여주거나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말이 들통이 나서 부끄러운 줄 느끼면 어른도 아이도 하루아침에 깨달아 새 사람이 될까요? 참말 궁금합니다. 마지막에 뒤집기 한 판을 짠 보여주면 ‘동화문학’이 된다고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4347.1.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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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4-01-15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 무척 공감갑니다. '가벼운 뒤집기' 한 판을 위해서 앞 쪽에서 너무 억지스럽고 곱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건, 저도 반대예요. 잘 읽었어요. ^^ 요즘 유아 관련된 이야기를 꾸미고 있어서 더 새겨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4-01-15 12:07   좋아요 0 | URL
'뒤집기'보다는,
처음부터 사랑스레 흐르는 이야기라면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우리들이 '명작'이라 손꼽는
나라 안팎 수많은 어린이문학은 모두 '뒤집기'를 쓰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고이 흐르는 사랑이 있답니다.
사랑을 담아 쓰면 되는 일이라고 느껴요.

페크pek0501 2014-01-1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님이 동화를 쓰시는 날이 오기를...^^

숲노래 2014-01-15 13:32   좋아요 0 | URL
아, 네, 동시부터 좀... 책이 나올 수 있기를 빌고,
동화는 찬찬히 찬찬히
쉰 살 즈음부터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 - 흔들리는 부모들을 위한 교육학
현병호 지음 / 양철북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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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하는 배움책 21

 


아이들은 늘 삶을 배웁니다
―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
 현병오 글
 양철북 펴냄, 2013.12.6.

 


  오늘도 언제나처럼 자장노래를 부르면서 두 아이를 재웁니다. 큰아이는 왼쪽에, 작은아이는 오른쪽에 눕습니다. 밤에 아이들 재우면서 부를 적에는 자장노래이고, 낮에 아이들 함께 놀며 부를 때에는 놀이노래입니다. 밤에 부를 적과 낮에 부를 때 노랫가락을 바꿉니다. 노래를 부르는 빠르기를 달리하고, 노래를 부르는 목청을 달리합니다.


  아이들을 재우거나 아이들과 놀면서 노래를 부르고 보면, 이 노래는 아이한테 들려주거나 베푸는 선물로 그치지 않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내 마음이 따스하고, 노래를 내 귀로도 함께 들으며 즐겁습니다.


  아이들과 들마실을 하면, 아이들만 즐겁지 않아요. 아이와 함께 들길을 걷는 내 몸과 마음도 나란히 즐겁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가면, 아이들만 바다놀이를 하며 신나지 않아요. 나도 바다내음 맡고 바다빛 누리면서 신납니다. 밥을 차려 맛있게 먹일 적에 아이들만 배부르지 않습니다. 나 또한 배부르면서 즐거워요.


.. 서로가 잘되도록 돕기보다 서로가 못되기를 은근히 바라게 만드는 것이 학교와 사회의 문화가 되었다 … 학교가 그렇게 아이들을 하루 종일 잡아놓고 있지 않는다면, 또 그렇게 경쟁하도록 몰아붙이지 않는다면 더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열리지 않을까 …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듣기’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선생님의 말씀이 그만큼 값져서가 아니라 말 잘 듣는 인간을 기르는 것이 학교교육의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일개 학교의 교칙이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셈이다 ..  (15, 16, 20, 34쪽)


  일곱 살 큰아이를 샛자전거에 태웁니다. 네 살 작은아이를 수레에 태웁니다. 나는 앞에서 자전거를 끕니다. 두 아이 무게와 샛자전거 무게와 수레 무게는 꽤 됩니다. 여름에는 더위에 땀으로 폭삭 젖고, 겨울에는 추위에 오들오들 얼어붙습니다. 여름에는 참 덥다고 느끼고, 겨울에는 참 춥구나 느낍니다. 그렇지만 여름에도 겨울에도 자전거를 달립니다. 우리 집에 자가용을 안 모시니 자전거를 타기도 하지만, 자전거를 타면 즐겁습니다. 아이들 숨소리를 느낄 수 있고, 어느 곳에서나 마음대로 멈추어 쉴 수 있습니다. 멧골도 넘고 바닷가도 달립니다. 논둑길도 달리고 고샅길도 다닙니다.


  아이들과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자전거를 달리며 흘리는 땀과 느끼는 추위가 재미있습니다. 들바람을 쐬고 바닷바람을 먹는 자전거마실이 신나요.


  그러고 보면, 아이들 옷가지를 손으로 조물락조물락 비벼서 빨래할 적에도 재미있습니다. 이불을 발로 꾹꾹 눌러 빨 적에도 신납니다. 이 조그마한 옷을 입고 조그마한 몸으로 그처럼 개구지게 뛰고 달리고 노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 조그마한 옷을 한결 아끼고 보듬자고 생각합니다. 이 작은 옷이 어느덧 안 맞을 만큼 자라고, 다른 작은 옷이 어느새 안 맞을 만큼 큽니다.


  마당에서 함께 옷을 넙니다. 방에서 함께 옷을 갭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비질이나 걸레질을 거듭니다. 큰아이는 곧잘 설거지를 거듭니다. 수저를 밥상에 곱게 놓을 줄 압니다. 풀밥을 잘 먹고, 마당에서 까마중을 훑을 적에 함께 훑어 주곤 해요. 이 겨울 지나고 새로운 봄 찾아들면, 아버지와 함께 봄풀 뜯으러 이곳저곳 함께 다녀 주겠지요. 조물딱조물딱 호미질을 하며 흙을 같이 일구어 줄 테고요.


.. 이 땅의 학교는 졸업장을 팔아먹는다. 값비싼 졸업장은 지상천국도 약속한다면서 … 사랑과 이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 아이들이 진정으로 가슴 뛰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가슴속에 사랑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 사실 수능 준비 같은 이상한 공부에 몰입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인 것이다 … 도시에서 자라면서 아이들이 약아지고 양심과 감스성이 무디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까 … 행복은 이렇듯 돈과 시간을 아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데 있지 않을까 ..  (26, 30, 40, 50, 63, 66쪽)


  미술학원에 다녀야 그림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으면 종이와 연필이 있으면 됩니다. 붓과 물감이 있어도 됩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으면 스스로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스스로 그릴 때에 비로소 그림을 배웁니다. 남이 가르쳐 줄 수 없어요.


  글을 쓰고 싶다면? 스스로 글을 쓰면 돼요. 스스로 글을 써야 글을 배웁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면? 스스로 사진을 찍어야지요.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스스로 노래를 불러야지요. 춤을 추고 싶다면? 스스로 춤을 추어야지요. 흙을 일구고 싶다면? 스스로 흙을 일구어야지요.


  자전거를 잘 타고 싶다면 스스로 자전거를 탈 노릇입니다. 자전거를 달리지 않고서 자전거를 탈 수 없어요. 이론을 배우거나 영화를 본들 자전거를 타지 못합니다. 자전거는 이론이 아니라 자전거입니다. 그림도 이론이 아니라 그림이에요. 스스로 즐겁게 그릴 때에 그림이에요. 마음속에 피어나는 이야기를 그려야 그림입니다. 이런 기법과 저런 솜씨를 뽐낸대서 그림이 되지 않습니다. 나타내고 싶은 빛을 그림이라는 틀에 빌어서 보여주기에 그림이에요.


  문장작법에 맞춘대서 글이 되지 않아요. 우리는 보고서나 논문을 쓰지 않아요. 글을 씁니다. 삶을 들려주는 글을 씁니다. 삶을 사랑하는 글을 써요. 자랑하려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즐겁게 살아가면서 나누는 글입니다. 남한테 읽히려는 글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곱다시 적바림하는 글입니다.


.. 고급 빌라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아이의 장래일까 … 우리 교육 현실이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우리네 부모들이 아이들을 닦달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발벗고 나서서 뛰어다닌 결과이지 않을까 … 엄연히 이름이 있는 아이들에게 번호를 매겨서 부르기 편하다는 이유로 이름 대신 번호를 부르곤 한다. 그런 교사들은 흔히 한 해가 다 가도록 반 아이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하기 일쑤다 … 불행히도 학교는 애초에 아이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다. 석탄이나 석유 같은 ‘자원’이 되도록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에 더 가깝다 ..  (75, 82, 95, 125쪽)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못 가르쳐요. 왜냐하면, 학교는 학교이지, 집이나 삶터나 보금자리나 마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울타리나 틀이 아닌, 집이라면, 집에서 무엇이든 가르치고 배웁니다. 우리는 삶을 배우면서 가르치지, 지식이나 교과서나 책을 배우면서 가르치지 못해요. 밥이란 삶이고, 옷이란 삶이며, 집이란 삶입니다.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는 모두 삶입니다. 이론이나 교과서로는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못해요. 학교 아닐 집일 때에 비로소 밥을 어떻게 짓고 옷을 어떻게 지으며 집을 어떻게 짓느냐를 배우고 가르쳐요.


  이론이 아닌 몸으로 먹는 밥이에요. 지식이 아닌 몸으로 입는 옷이에요. 실기나 체험이 아닌 삶으로 누리는 집이에요.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 학교에서는 밥도 옷도 집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 학교를 다니고 나면 밥과 옷과 집하고 멀어지기만 합니다. 대학교를 다닌 아이들이 손수 밥을 차릴 줄 아나요. 유학을 다녀온 아이들이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할 줄 아나요. 대학원 무슨무슨 논문을 쓴 아이들이 나무를 베고 손질해서 기둥을 세우고 처마를 댈 줄 아나요.


  약초도감이나 식물도감을 들여다본대서 나물을 캐거나 뜯지 못해요. 스스로 들과 숲을 다니고 논둑과 밭둑에서 풀을 뜯어서 먹어야 비로소 나물을 캐거나 뜯을 수 있어요. 눈으로 보고, 코로 맡으며, 혀로 느낄 때에 나물을 알고 배워요.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으며, 뱃속에 넉넉히 담아서 삭혀야 나물을 익히고 깨달아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해야 사랑을 압니다. 마음에서 샘솟는 꿈을 꾸어야 꿈이 됩니다. 착하고 참답게 살아가려는 빛이 있을 적에 삶이 즐겁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른들은 곰곰이 헤아릴 노릇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살아가고 싶어서 아이를 낳아 함께 지낼 생각이냐, 아니면 아이한테 졸업장을 선물할 생각이냐, 둘 가운데 어느 길로 가고 싶을는지 헤아릴 노릇입니다.


.. 슈타이너 사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다 … 나무 한 그루 없는 휑한 운동장은 아이들이 운동하기 위한 공간이기보다 전체 조례나 운동회 같은 집단 의례를 위한 공간이다 … 너무 일찍부터 부모와 멀어지고, 대신 텔레비전과 더 가까워진 아이들, 골목과 놀이 친구를 잃어버리고 대신 학원 선생님을 만나는 아이들은 더 이상 몸을 놀려 놀지 않는다 … 문제의 본질은 학교 폭력이 아니라 ‘폭력 학교’이다 ..  (183, 209, 249, 264쪽)


  대안교육을 이야기하는 잡지 《민들레》가 있습니다. 《민들레》를 펴내는 현병오 님이 그동안 꾸준히 쓴 글을 그러모아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양철북,2013)라는 배움책 하나 내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느긋하게 지내지 못한다고 여기는 마음을 이 책으로 찬찬히 보여줍니다. 오늘날 이 나라 학교는 입시지옥일 뿐이요 시험기계만 만들 뿐이라는 모습을 낱낱이 밝힙니다.


  그렇다면, 대안교육은 무엇을 말할까요. 제도권교육 아닌 대안교육은 얼마나 다른 교육일까요. 제도권이 아니니 낫다고 할 만한지요. 대안을 말하니 아름답거나 즐겁다고 할 만한지요.


  교과서를 안 쓰고, 입시지옥이 아니며, 시험기계를 만들지 않는 대목에서는 제도권교육보다 나은 대안교육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심지 않고, 나무를 아끼지 않으며, 나무를 누리지 않는 곳에서 어떤 대안교육이 이루어질는지 잘 모르겠어요. 나무를 심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자리에서 어떤 대안교육 이론이나 생각이 설는지 잘 모르겠어요. 나무를 사랑하고 아끼며 누리는 이야기를 담는 책이 아니라면, 우리 아이들한테 얼마나 즐거울 만한지 잘 모르겠어요.


  제도권교육이냐 아니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안교육이냐 아니냐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삶이냐 아니냐를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냐 아니냐를 헤아려야 합니다. 꿈이냐 아니냐를 읽어야 합니다.


  배움책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는 오늘날 이 나라 교육제도가 얼마나 엉망진창인가를 잘 밝힙니다. 오늘날 이 나라 대안교육도 그리 아름답거나 알차거나 슬기롭지 못하다고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아이와 어른은 어떤 삶으로 나아갈 적에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사랑스러울까요. 우리들은 어떤 삶과 사랑과 꿈을 꽃피우는 하루를 누리면서 활짝 웃을 만할까요.


  아쉽지만,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책에서 이 대목을 건드리지는 않습니다. 삶과 사랑과 꿈이 아름답게 나아가는 길까지 이 책에서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삶이든 사랑이든 꿈이든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남이 찾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책에서 굳이 다룰 까닭이 없을 만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나 대안이나 제도나 교육은 둘째치고, 글쓴이 현병호 님 스스로 이녁 삶과 사랑과 꿈을 어떻게 다스리거나 가꾸면서 하루가 즐겁게 빛나는가를 들려주기를 바라요. 제도권교육과 대안교육 비판은 살짝 내려놓고, 현병호 님 스스로 밝히거나 빛내는 삶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걸어가는 즐거운 길을 밝히면 됩니다. 스스로 부르는 고운 노래를 들려주면 됩니다. 스스로 나누는 예쁜 사랑을 흐드러지게 펼치면 됩니다. 교육이란 삶이니, 삶을 말하고 보여주면 모든 꿈이 즐겁게 이루어집니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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