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 - 3단계 세바퀴 저학년 책읽기 1
배유안 지음, 오진욱 그림 / 파란자전거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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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56


 

우물물 마시던 사람들

― 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

 배유안 글

 오진욱 그림

 파란자전거 펴냄, 2010.12.1.



  오월에 핀 감꽃은 유월로 접어들면서 시들고, 유월에는 감꽃이 지면서 감알이 천천히 익습니다. 그리고 유월에서 칠월로 접어드는 즈음 감나무에서 조그마한 풋감이 툭툭 떨어집니다. 해마다 유월과 칠월에 풋감이 지붕에 떨어지며 퉁퉁 울리는 소리를 아침저녁으로 듣습니다.


  처음 시골에서 지낼 적에는 아침저녁으로 지붕을 퉁 하고 울리는 저 소리가 무엇인가 하고 갸우뚱했습니다. 이제는 풋감 떨어지는 소리를 알아채기도 하지만,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도 알아챕니다. 참말 집안에서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마당에 서거나 뒷간에 있을 적에도 나뭇잎 떨어지는 톡 소리를 알아챕니다.


  마음을 기울이면 누구나 소리를 듣습니다. 마음을 안 기울이면 누구도 소리를 못 듣습니다. 우리가 듣는 소리는 스스로 마음을 기울이면서 받아들이는 결입니다. 자동차 소리를 듣거나 전철 소리를 듣는다면, 손전화 울리는 소리를 듣거나 싸움박질 하는 사람들 소리를 듣는다면, 이 소리는 모두 내가 마음을 기울여 받아들입니다.



.. 셋은 서둘러 우물로 돌아갔어요. 우물 안에서도 밤하늘이 보였어요. 우물 모양으로 동그란 하늘에 별들이 모여서 반짝였어요. “예쁘다. 저 별 금오가 보면 좋아했겠다. 데려올 걸 그랬나?” ..  (35쪽)



  예부터 지구별 어느 곳에서든 누구나 냇물을 마셨습니다. 냇물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살던 사람은 우물을 팠습니다. 때로는 못을 파서 못물을 쓰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물이 없으면 삶을 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알맞다 싶은 살림집은, 바람이 맑고 푸르면서 냇물이 싱그럽고 시원한 곳입니다. 이 두 가지가 아름다우면서 햇볕이 따사롭고 넉넉한 곳입니다. 어느 나라이건 어느 겨레이건, 바람과 물과 해를 살펴서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바람과 물과 해가 즐겁지 못하다면 보금자리를 가꾸지 않습니다. 여기에 숲이 있어야지요. 숲이 있어 풀과 나무를 얻고, 숲이 있어 기름진 흙을 누릴 수 있는 데가 바로 보금자리를 닦는 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바람과 물과 해와 숲을 살피며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요.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이들조차 ‘집터’와 ‘논밭’과 ‘마을’을 살필 뿐, 바람과 물과 해와 숲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배운 적이 없고 느낀 적이 없으며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몸을 살리고 마음을 가꿀 수 있는 터전이 어디인가를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둘레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동무가 없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 산예는 천수관음상의 입을 가만히 보았어요. 관음보살이 입술을 달싹이는 듯했어요. 산예는 뚫어져라 바라보았어요. ‘사랑하는 아이야.’라는 말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어요 ..  (48쪽)



  배유안 님이 쓴 동화책 《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파란자전거,2010)를 읽습니다. 분황사라는 절이 우뚝 서던 지난 어느 날을 발판으로 삼아 ‘미르’와 ‘어른’과 ‘아이’가 어우러지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요즈음 아이들이 읽도록 하려고 한국말 ‘미르’가 아닌 요즈음 흔히 쓰는 한자말 ‘용(龍)’을 썼지 싶은데, 이야기 발판이 600∼700년대라 한다면, 동화책에 쓰는 낱말도 지난날 사람들 삶을 더 헤아리고 더 살피며 더 짚을 때에 한결 빛나리라 느낍니다. 한국말로서도 아름답고 알맞게 가다듬는 ‘동화 문장’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가기는 무리예요 (18쪽)

→ 사람 사는 곳에 가기는 힘들어요

각 절마다 돌며 (24쪽)

→ 절마다 돌며

휴, 이제 좀 살 것 같다 (41쪽)

→ 히유, 이제 좀 살겠다

우물에 용이 사는 거 알고 있어 (45쪽)

→ 우물에 용이 사는 줄 알아

스님한테 들었어 (45쪽)

→ 스님한테서 들었어

누룽지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52쪽)

→ 누룽지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았어

미소를 지었어요 (59쪽)

→ 웃음을 지었어요

용들을 잡아갔어요. 구해야 해요 (71쪽)

→ 용들을 잡아갔어요. 살려야 해요

급해! 우선 당나라 사신이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야 해 (85쪽)

→ 서둘러! 먼저 당나라 사신이 묵는 곳을 찾아야 해

내가 순순히 넘겨줄 것 같으냐 (94쪽)

→ 내가 고분고분 넘겨주겠느냐

그래, 새로 시작하자 (109쪽)

→ 그래, 새로 하자

회오리바람 소리 같은 것이 휘휘 나다가 점점 사라져 갔어요 (117쪽)

→ 회오리바람 소리 비슷하게 휘휘 나다가 차츰 사라졌어요



  동화에 ‘것(거)’이라는 말을 자꾸 쓰니 어딘가 어설픕니다. ‘것(거)’을 아무 데나 넣는 말투는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어설픈 번역 말투입니다. 그리고, “各 절마다”처럼 겹말을 잘못 쓴다든지 ‘휴’처럼 일본말을 함부로 쓰는 대목이 아쉽습니다. 일본사람은 한숨을 쉴 때에 나는 소리를 ‘휴’로 적습니다. 한국사람은 한숨을 쉴 때에 나는 소리를 ‘후유’나 ‘히유’로 적습니다. “스님한테서 들었어”처럼 ‘-한테서’ 토씨를 넣어야 하는 자리에 곧잘 ‘-한테’로 적은 대목도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무리·미소·구하다·우선·숙소·순순히·시작·점점’ 같은 한자말을 굳이 써야 했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더 생각해 본다면, 600∼700년이 이야기 발판인데, 이무렵 당나라 사신이 ‘숙소’에 머물렀을까요? 아니겠지요? “묵을 곳”을 뜻하는 ‘숙소’이기에 “묵고 있는 숙소”처럼 적는 글도 알맞지 않아요.


  우리는 “두 손”과 “두 눈”처럼 말합니다. 이 동화책에서도 이렇게 씁니다. 그러나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처럼 쓰기도 합니다. 손과 눈을 ‘두(둘)’로 가리키면서 숫자가 천이 될 적에는 왜 “천 개의”처럼 써야 할까 궁금합니다. “천 손과 천 눈”이라 해야 지난날에나 오늘날에나 올바른 말씨이리라 싶습니다.



..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신 관음보살님, 두 눈이 없는 저에게 부디 눈을 주세요 ..  (109쪽)



  동화책 《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는 두 눈을 잃은 아이가 다시 두 눈을 되찾고, 어린 미르들이 이무기한테서 풀려나 바다로 돌아가는 이야기로 마무리짓습니다. 이야기 짜임새는 구김살이 없다고 느낍니다. 여러모로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이무기가 왜 나쁜 것으로만 나와야 하는지 밝히지 않고, 그저 나쁜 것으로만 다루면서, 미르와 겨루다가 너무 쉽게 꺾이며 사라지도록 하는 흐름은 좀 아리송합니다. 미르는 무엇이고 이무기는 무엇일까요. 이 둘은 왜 서로 맞서려 할까요. 주인공이 미르라 한다면, 미르가 맡은 몫과 미르가 이 땅에서 어떠한 일을 하는지를 찬찬히 밝히기도 해야지 싶어요. 역사와 문화를 고루 섞으면서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면, 역사와 문화를 깊고 넓게 다루거나 짚든지, 아니면 역사와 문화를 뛰어넘어 ‘아이들이 저마다 어떤 삶빛을 가꾸면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넋’인가를 밝히는 데에 눈길을 맞추어야지 싶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게, ‘철부지 어린 미르’가 나오고, ‘백날 비손을 드리며 두 눈을 되찾으려는 아이’가 나와서 만나고 헤어지는 흐름은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눈먼 아이가 두 눈을 되찾는다고 하는 대목에서도 ‘백날 비손(‘백일기도’가 아닌. 왜냐하면, 예전 사람들은 ‘기도’라는 한자말이 아닌 ‘비손’이라는 한국말을 썼을 테니)’을 어떻게 하는가를 찬찬히 그리지 않고, 그저 탑 둘레만 빙글빙글 돈다고만 나옵니다. 어쩐지 비손이 마음을 바치지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비손을 드리는 모습을 그린 동화 작품도, 썩 마음을 기울여 쓰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우물물을 마시며 살던 사람들 마음씨와 숨결과 넋을 더 깊이 헤아리고 더 넓게 품으면서 이야기를 여미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4347.6.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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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라 - 뉴스타파 최승호 피디의 한국 언론 이야기 철수와 영희를 위한 대자보 시리즈 3
최승호.지승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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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4



‘권력’이 아닌 ‘사랑’을 말하라

― 정권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라

 최승호·지승호 이야기

 철수와영희 펴냄, 2014.6.23.



  이름이 같은 두 ‘승호’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승호 님은 최승호 님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조곤조곤 묻고, 최승호 님은 지승호 님이 묻는 말에 따라 생각을 북돋우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정권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라》는 ‘뉴스타파 최승호 피디의 한국 언론 이야기’라고 합니다.


  최승호 님은 문화방송에서 일하다가 ‘잘렸’다고 합니다. 문화방송 사장한테 밉보여서, 또는 이 나라 대통령한테 밉보여서, 또는 이 나라 정치권력한테 밉보여서 문화방송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방송사 사장한테는 칼자루가 있어서 피디 한 사람을 자를 수 있는 듯합니다. 대통령이나 정치권력자한테는 ‘힘(권력)’이 있어서 피디 한 사람쯤 파리 한 마리로 여길 수 있는 듯합니다.


  틀림없이,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이 적거나 여리거나 없는 사람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어김없이, 힘이 없는 사람은, 힘이 세거나 많거나 큰 사람한테 짓눌릴 수 있습니다. 주리를 틀 수 있겠지요. 목아지를 비틀 수 있겠지요. 그런데, 주리를 틀거나 목아지를 비틀더라도, 옛사람 이야기마따나 해는 다시 떠올라요.



.. 안광한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들이 보수·극우 세력들에게 보내는 선물이죠. 자기네들의 생존을 위해서 바치는 전리품이라고 할가요 … MBC라는 공영방송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는 오로지 충성만 하겠다는 겁니다. 저는 안 사장이 보수·극우 세력에게 자기 진정성을 내보인 거로 봅니다 … 법원이 방송인은 공정한 방송을 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 거거든요. 이를 방해하고 막는 시도가 있다면 파업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항거하고 투쟁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한 거예요 ..  (8, 9, 12쪽)



  피디 한 사람을 쫓아낸대서 ‘거짓말’이 ‘참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ㅈㅈㄷ신문이 온갖 ‘말’을 쏟아부을 뿐 아니라, 돈을 들여 방송사를 만들어 온갖 ‘말’을 퍼붓는다 하더라도 ‘거짓말’이 ‘참말’이 되지 않습니다. 정치권력을 거머쥐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이런저런 말을 읊거나 언론조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참말로 그렇지요. 참말로 ‘거짓말’이 ‘참말’이 되는 일이 없고, ‘참말’이 ‘거짓말’이 될 수 없습니다.


  예부터 시골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요. 콩을 심은 데에서는 콩이 납니다. 팥을 심은 데에서는 팥이 납니다. 사랑을 심은 곳에서는 사랑이 납니다. 미움을 심은 곳에서는 미움이 납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사람들을 짓밟거나 짓누르는 ‘씨앗’을 마구잡이로 심습니다. ㅈㅈㄷ신문을 비롯해서 온갖 철부지들이 거짓말이라는 ‘씨앗’을 아무렇게나 심습니다.


  통제와 강압과 차별과 전쟁이라는 씨앗을 심으니, 그네들은 ‘그 씨앗에 따른 열매’를 거둡니다. 거짓말을 심는 기자와 피디와 작가와 학자와 교수와 지식인은 ‘그 씨앗에 따른 열매’를 거두지요.



.. 왜곡된 언론 현실 속에서 국민들에게 제대로 진실이 전달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 퇴보의 주체들이 모두 MBC 내부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김재철 사장, 그 측근들, 하수인들이, 후배들을 잘라내는 인간 백정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데서 날아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같이 ,BC에서 일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이분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도 딴 얘기를 해요.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대합니다. 연기를 너무 잘해요 … 언론을 통제의 대상으로 볼 뿐, 언론의 자유를 믿는 집단은 아닌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보수는 ..  (16, 19, 20쪽)



  최승호 님은 “언론 탓이 크다”고 되풀이해서 말합니다. 《정권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라》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최승호 님은 언론을 밝히려는 일을 하니까, 아무래도 “언론 탓이 크다”고 말할 만합니다. 최승호 님이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했다면, 아마 “교사 탓이 크다”라든지 “학교 탓이 크다”라든지 “교육 탓이 크다”고 말했을 테지요. 최승호 님이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일을 했다면 “정치 탓이 크다”고 말했을 테지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탓할 것은 한 가지도 없으면서, 어느 것이나 탓할 만합니다. 탓해야 한다면 무엇을 탓해야 하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탓해야 할까요. 나쁜 놈을 탓해야 할까요. 나쁜 제도와 법과 권력을 탓해야 할까요. 전쟁이나 군대나 재벌을 탓해야 할까요. 주한미군을 탓하거나 수구보수 무리를 탓해야 할까요.


  탓해야 할 것은 언제나 한 가지라고 느껴요. 우리 삶이 삶답게 흐르지 못하도록 가로막거나 짓누르는 울타리를 탓해야지 싶어요. 우리 스스로 삶을 삶답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목을 죄거나 숨통을 막는 덫을 탓해야지 싶어요.


  그런데, 울타리는 남이 놓지 않습니다. 덫은 남이 놓지 않습니다. 전쟁은 누가 일으킬까요. 군대에는 누가 있을까요. 전쟁무기는 누가 어느 공장에서 만들고 어느 과학자가 어떤 실험실에서 새롭게 뽑아낼까요.


  길은 어렵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정치권력이 밀양에 송전탑을 박고 싶다면 박으라고 하셔요. 정치권력이 핵발전소를 자꾸 늘리고 싶다 하면 늘리라고 하셔요. 정치권력이 골프장을 또 짓겠다고 하면 또 지으라고 하셔요. 정치권력이 아파트를 새로 짓겠다면 또 지으라고 하셔요. 그리고 떠나요. 정치권력이 있는 곳을 떠나요. 서울을 떠나고 부산을 떠나요. 시골에서도 떠나요. 우리 모두 손을 놓아요. 우리 모두 회사에 나가지 말고 공장에 가지 말아요. 우리 모두 학교에 나가지 말고 유치원에 아이들을 넣지 말아요.


  사람은 며칠 굶는다고 해서 안 죽습니다. 사람은 이레쯤 굶는다고 해서 안 죽습니다. 자, 정치권력 거머쥔 이를 남겨 놓고, 우리들 모두 손을 놓아 보셔요. 지하철과 버스도 멈추게 하고, 수돗물도 전기도 모두 멈추게 해요. 하수시설도 멈추게 하고, 고속도로도 멈추게 해요. 공항도 병원도 모두 멈추게 해요. 그리고 모두 집에서 가만히 쉬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깊이 생각에 잠겨요. 사흘쯤, 아니 사흘이 아닌 꼭 하루만 이렇게 해도 돼요. 신문도 끊고 방송도 끊으며 인터넷도 끊어요. 모두 다 끊어요.


  그러면 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 혼자서 밥 해 먹고 똥 누고 하라고 놔두셔요. 대통령은 밥을 스스로 논에 씨앗을 뿌려 풀 뽑고 낫으로 나락을 베어 햇볕에 말리고는 절구로 빻아서 나무를 한 다음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끓여 먹으라고 하셔요. 솥도 손수 쇠를 담금질해서 만들라고 하셔요. 절구도 손수 돌을 깎아서 만들라고 하셔요. 숟가락과 젓가락도 대통령이 손수 만들라고 하셔요. 낫도 손수 만들라고 하고, 옷도 대통령이 손수 모시풀에서 손수 실을 뽑아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아서 바느질로 지어서 입으라고 하셔요. 참말 이렇게 하면 모든 실마리를 풀 수 있습니다.



.. 문제는 종편이 아니라 지상파 공영방송들입니다. 이들이 제대로 보도하면 종편이 힘을 갖기가 어렵죠. 문제는 공영방송이 아무것도 안 한다는 데 있습니다 … 방송이 세상을 보는 데 특별히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 요즘 권력자들이 좀 더 뻔뻔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자정 능력을 이미 상실한 건 아닐까 해요 … 정부가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를 하면서 국민들에게 그 의미와 효과를 정직하게 밝히지 않고, 거짓말 홍보를 하고, 꼼수를 쓰면서 강압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그렇게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놓은 상태에서 세금을 무려 22조나 쓰는 엄청난 사업을 벌였다는 겁니다. 환경은 환경대로 망쳐 버리고, 사업 추진 과정에서 민주주의 시스템을 완전히 붕괴시켰다고 생각하는데요 ..  (25, 30, 49쪽)



  최승호 님은 “언론 탓이 크다”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론은 잘 하지도 잘못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해야 할 말을 할 뿐입니다. ㅈㅈㄷ신문은 ㅈㅈㄷ신문대로 이녁 밥그릇을 채울 만한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ㅈㅈㄷ신문이 이녁 밥그릇을 채울 수 있도록 도울 뿐입니다. 문화방송에서 새로운 사장이 되는 이들이 이녁 밥그릇을 지키는 일만 한다잖아요? 그러면 그러라지요. 그렇게 살다가 죽으라지요. 그렇게 살면서 ‘사랑’도 ‘꿈’도 모르는 채, 스스로 쳇바퀴를 도는 철부지 짓이나 하라지요.


  《정권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라》를 읽으면, 최승호 님은 문화방송에서 쫓겨난 일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슬퍼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승호 님은 문화방송에 있건 뉴스타파에 있건 ‘할 말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파헤칠 것을 파헤쳐서, 알릴 것을 알리는 사람이 바로 최승호 님이지 싶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 취임 1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기자회견을 안 했잖아요. 그걸 기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는 아무도 대통령에게 질문을 안 하는 거예요 … 신뢰라는 것은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저널리스트에게 신뢰도는 생명과도 같기에 길게 보면서 쌓아가야 합니다. 특종을 하겠답시고, 순간적으로 사람을 현혹해서 자료를 얻고 그걸 근거로 보도하는 기자들은 오래 못 가요 … 진실은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대통령 지지율은 60퍼센트를 넘는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느끼는 희망은 급속하게 줄어드는 것 같고요. 사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언론의 탓이 큽니다 ..  (59, 78, 86, 99쪽)



  ㅈㅈㄷ신문에 기대는 사람은 스스로 빛을 안 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ㅈㅈㄷ신문에 얽매인 사람은 스스로 사랑을 안 키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도 우리 이웃이니 모른 척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모른 척하지 않아야 한대서 이들만 생각할 까닭은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나아갈 길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아야 할 빛을 보고, 우리가 말해야 할 꿈을 말해야지 싶어요.


  우리는 ‘권력’을 말할 까닭이 없습니다. 권력을 비판하건 안 비판하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해야 할 뿐입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건 나 스스로를 사랑하건 아주 대수롭습니다.


  최승호 님이 뉴스타파에서 할 일은 늘 한 가지예요. 문화방송에서도 늘 한 가지를 할 수 있으면 되었으니, 바로 ‘사랑 말하기’입니다. 삶을 밝히는 사랑을 말하고, 꿈으로 나아가는 사랑을 말하면 됩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ㅈㅈㄷ신문을 만드는 기자도 밥을 먹어야 합니다. 대통령 ㅂㄱㅎ이건 ㅇㅁㅂ이건 바람을 마셔야 삽니다. ㅂㄱㅎ이건 ㅇㅁㅂ이건 똥오줌을 안 누고는 못 살지요.


  정치권력이나 도시나 물질문명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삶이 대수롭습니다. 사랑이 대수롭고, 서로를 밝히는 꿈을 가꾸는 나날이 대수롭습니다. 오늘까지 씩씩하게 한길을 걸어오셨듯이, 앞으로도 씩씩하게 한길을 걸어가는 최승호 님과 뉴스타파가 되기를 바랍니다. 4347.6.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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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무 우리 집 창비아동문고 199
고은명 지음, 김윤주 그림 / 창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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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54


 

마당에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

― 후박나무 우리 집

 고은명 글

 김윤주 그림

 창비 펴냄, 2002.4.27.



  우리 식구는 인천을 떠나 전남 고흥에 깃들면서 비로소 ‘후박나무’를 알았습니다. 후박나무는 따뜻한 바닷가에서 짠 기운 섞인 바람을 마시면서 자라는 줄 배웠습니다. 울릉섬에서 이름난 엿은 ‘호박역’이 아닌 ‘후박엿’이었고, 후박엿을 고아서 먹은 까닭은 무척 오래 배를 타는 사람들이 배앓이나 배멀미를 하지 않으려는 뜻이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후박나무가 이제는 서울에서도 자랄 수 있다고 해요. 날씨가 크게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식구가 아직 인천에서 살 적에 석류나무를 곳곳에서 보았어요. 인천은 바닷가에 있는 동네이니, 씨줄로 살펴 다른 곳보다 따뜻하다 할 수 있다지만, 석류나무를 키우는 골목집이 퍽 많은 모습을 보곤 놀랐어요.


  따지고 보면, 감나무를 인천이나 서울에서도 키울 수 있으니, 날씨가 바뀌어도 크게 바뀌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를 느끼는 사람이 적거나 드물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 내가 사는 집은 방이 열 개나 되는 커다란 한옥입니다. 마당 한가운데 내 허리 굵기의 후박나무가 잎을 드리우고 있어,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후박나무 집’이라고 부릅니다. 가을이 되면 방방이 문풍지를 새로 붙여야 하고, 토방에서 봄볕을 쬐며 졸 수도 있지만, 비 오는 날엔 댓돌 위의 신발들을 토방 밑이라든지 부엌으로 들여놔야 하는, 여러분이 사는 집과는 좀 많이 다른 집이에요 … 아빠 기억 속의 풍경들은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어요. 동네가 온통 재개발이 되어 대부분 아파트촌이 되었거든요 ..  (11, 22쪽)



  나는 골목집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자랐습니다. 곁님은 판잣집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집 큰아이는 전철길과 맞닿은 옥탑집에서 태어났고 시골에서 자랍니다. 우리 집 작은아이는 멧골집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랍니다. 나는 어릴 적에 ‘나무가 우거진 집’을 꿈꾸었습니다. 아마 곁님은 ‘나무가 우거진 숲’을 꿈꾸었지 싶어요. 이런 꿈대로 우리 식구는 시골집에서 나무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비록 그리 큰 마당은 아니고, 넓은 땅을 아직 누리지는 못하지만요. 우리 아이들은 어떤 보금자리를 마음속으로 바라면서 우리한테 왔을까요.


  큰아이는 개구리와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달게 잡니다. 작은아이는 냇물이나 골짝물이나 바닷물이 흐르거나 철썩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새근새근 잡니다. 두 아이는 서로 다른 빛을 가슴에 품습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다른 숨결로 삶을 짓습니다.


  곰곰이 떠올리면, 나는 어릴 적에 ‘나무를 심을 땅뙈기 없는 시멘트땅 도시 한복판’에서 맞이해야 하는 ‘나무 심는 날’이 거북했습니다. 도무지 어디에 나무를 심으라고 그런 날을 만들었을까요? 길가나 풀밭에 나무를 심으면 이 나무를 곱게 건사할 수 있을까요?



.. 수현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건 ‘술 취한 아빠’입니다. 수현 아빤 평소엔 참 다정하고 농담도 잘하시는데, 술만 마시면 폭군이 된대요. 나는 그 사실을 4학년 때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 나와 경하는 가을을 제일 싫어하는데, 바로 낙엽 때문이랍니다. 쓸어도 쓸어도 또 떨어지는 낙엽은 정말 우리를 미치게 만들어요. 겨울에도 눈 오는 날 제사가 걸리면 우리는 땅으로 꺼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  (38, 77쪽)



  네 식구가 시골에서 살며 궁금해 하는 대목은 하나입니다. 무엇보다 풀이름과 나무이름입니다. 풀을 알고 싶으며, 나무를 알고 싶습니다. 풀과 나무를 알 적에 비로소 시골살이를 누린다고 느낍니다.


  시골에서 만나는 이웃 가운데 나무나 풀을 빈틈없이 아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납니다. 우리 식구가 깃든 마을에서도 이와 같아요. 약으로 삼으려는 몇 가지 나무는 이름을 알 만하고, 이런 나무는 집집마다 몇 그루씩 키우는데, 마을 이웃이 약으로 삼지 않으나 먼 옛날부터 약으로 삼기도 하고 알뜰히 건사하며 아끼던 나무는 거의 모릅니다.


  탱자나무와 찔레나무가 어떤 빛인지 아는 시골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가시나무와 아왜나무와 후박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시골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동백나무와 초피나무에서 얻은 열매로 기름을 짜는 시골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무화과나무와 매화나무를 꾸밈없이 바라볼 줄 아는 시골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나무가 있어 숲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나무는 홀로 자라지 못합니다. 나무 둘레에는 풀이 우거져야 합니다. 풀이 나무 곁에 우거지면서 나무는 한결 싱그럽습니다. 풀 또한 곁에 나무가 있으면서 한결 푸릅니다. 풀과 나무는 언제나 한몸이고, 이를 깨달은 한겨레 옛사람은 ‘푸나무’라는 낱말을 지었어요. 풀은 함부로 베거나 뽑아서는 안 되고, 나무는 함부로 자르거나 꺾어서는 안 되지요. 이렇게 하다가는 사람이 지내는 작은 보금자리까지 망가지거든요.



.. “내가 실수한 건 인정하지만 그것하고 여자인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솔직히 내가 실수한 건 네가 좋아하는 그 남자인 태현이 때문 아니니? 너는 말끝마다 여자, 여자 하는데 여자로 태어난 게 무슨 죄니?” … “왜 여자들이 차 모는 것만 쓸데없는 거냐? 말끝마다 여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나는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제일 재수 없더라. 자기 엄마는 여자 아닌가, 뭐.” ..  (86, 87쪽)



  고은명 님이 쓴 《후박나무 우리 집》(창비,2002)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전남 고흥에 깃든 우리 보금자리에는 후박나무가 우람하게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늘 후박나무를 바라봅니다. 가을이 저물 무렵부터 후박꽃 몽우리가 맺히는 모습을 보고, 겨우내 굵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봄에 차츰 벌어지면서 활짝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요. 후박꽃은 늦봄에 지고 이른봄에 열매를 맺어요. 후박알이 맺으면 마을에 있는 온갖 새가 찾아들어 노래합니다.


  이러다 보니, ‘후박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후박나무 우리 집》에 눈길이 갑니다. 다만, 책이름에 ‘후박나무’를 썼대서 후박나무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후박나무를 사잇그림으로 잘 그리리라고는 여기지 않았어요. 참말, 이 책에 나오는 나무 그림은 좀 엉터리라 할 만합니다. 후박나무는 네 철 푸른 나무이기에 가을에 잎이 지지 않아요. 오히려 후박나무는 봄과 여름에 잎이 져요. 가을과 겨울을 난 뒤 봄까지 기운을 낸 잎이 한봄에 이르러 누렇게 물들면서 사오월 사이에 우수수 떨어집니다. 77쪽에 나오듯이 ‘낙엽 쓸기’는 후박나무 집에서는 가을에 하지 않아요. 봄에 합니다.


  아무래도 《후박나무 우리 집》을 쓴 고은명 님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오래된 집’에서 ‘낡은(오래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사내)들을 바꾸는 어린이(가시내)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했지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마당에 나무가 있는 집’을 글감으로 삼았고, 나무 가운데에서 후박나무를 꼽았구나 싶어요.


  마당에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결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늘 나무를 바라보거든요. 나무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하고 자동차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는 참으로 다릅니다. 나무를 바라보다가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보는 아이하고 자동차를 바라보다가 공장과 송전탑을 바라보며 크는 아이는 사뭇 다릅니다.


  어린이책 《후박나무 우리 집》에서 ‘후박나무’는 아무것도 아닌 곁다리입니다. 굳이 ‘후박나무’가 아니어도 됩니다. ‘감나무’나 ‘은행나무’나 ‘오동나무’여도 됩니다. 어쩌면, ‘오동나무’로 넣을 때에 걸맞을 수 있습니다. 예부터 한겨레가 오동나무를 심은 까닭을 헤아린다면, 이 동화와 걸맞다 할 만해요.


  이 작품에서 후박나무를 꼭 살리거나 밝히면서 들추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나무가 있는데, 따스하면서 소금 기운이 섞인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 잘 자라는 후박나무를 굳이 ‘서울 한복판’에까지 끌어들였다면, 이 나무를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아이들 마음에서 어떤 꽃이나 잎이 샘솟아서 줄기가 뻗거나 뿌리가 내리는 실타래를 보여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 선우를 낳던 해에 불행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신문 배달을 나갔던 아저씨가 교통 사고를 당하신 거예요. 아저씨를 친 운전자는 그냥 도망을 가 버렸는데,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새벽이라 목격자를 찾을 수도 없었어요 … 아빠께는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아빠도 많이 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려요. 남자들은 결혼을 하고도 변하는 게 별로 없는데, 여자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게 되잖아요. 공연히 남자들이 모두 미워집니다 ..  (110∼111, 124쪽)



  후박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참말 새가 하루 내내 끊이지 않습니다. 나는 마당에 앉아서 새들이 지저귀는 노래를 듣습니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새들은 동무 새한테 노래합니다. ‘얘들아, 여기 봐. 후박알이 멋지게 맺혔어. 우듬지에서 열매를 먹으면 되니까 얼른 이리 와!’ 이 노래대로 새들은 자꾸자꾸 모입니다. 우리 집 후박나무에 모인 새들은 후박잎을 먹고 살던 애벌레를 잡아먹습니다. 덤으로 옆에 있는 초피나무에서 초피잎을 먹던 범나비 애벌레를 잡아먹습니다. 때로는 덤으로 우리 집 풀밭에서 살아가는 메뚜기나 사마귀를 잡아먹습니다.


  나무가 자라기에 나무에 맞추어 온갖 애벌레가 찾아들고, 애벌레가 찾아들어 나비가 깨어나면 나비를 보러 다른 새가 찾아들며, 나무 곁에서 생기는 풀밭에는 개구리가 깃들고, 개구리는 풀밭에서 이슬을 먹는 모기를 잡아먹습니다.


  가만히 삶을 지켜봅니다. 차근차근 삶을 헤아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어깨동무를 할 적에 사랑이 빛날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압니다. 어른들도 다 압니다. 다만, 아는 대로 슬기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다 알면서 왜 아름답게 살아가지 못할까요? 다 아는 이야기를 슬기롭게 밝히면서 살아갈 마음을 왜 못 품을까요?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집에서 서로서로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기를 빕니다. 4347.6.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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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 이야기 -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 16가지 불교 철학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4
강호진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 철수와영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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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3



그림을 읽는 눈

―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 이야기

 강호진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4.5.6.



  마음을 다스리는 까닭은 우리 마음이 아름다운 곳으로 흐르면서 삶을 빛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까닭은 우리 마음에 티끌이나 부스러기가 깃들지 않도록 하면서 따사로운 사랑이 깃들도록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느냐를 놓고 먼먼 옛날부터 무척 꼼꼼히 살피거나 헤아렸습니다. 아이 마음에 그려 넣는 빛에 따라 아이들이 하루를 받아먹고 삶을 가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한테 한국말을 옳고 슬기롭게 가르치면, 어린이는 이른 나이부터 한국말을 옳고 슬기롭게 써요. 어린이를 일찍부터 학원에 넣어 무언가 가르치려 하면, 어린이는 이른 나이부터 학원에서 무언가를 일찌감치 배우겠지요.


  예부터 어느 시골에서나 아이들은 낫질과 칼질을 일찍부터 합니다. 절구질과 방아질도 일찍부터 하고, 지게질이나 소먹이기를 일찍부터 해요. 늘 바라보던 일이요, 으레 곁에서 지켜보던 일이며, 어느새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 불교에서 대승보살의 수행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인욕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든 무작정 참는 미련한 견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에 처해서도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있는 지혜와 부분이 아닌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세계에서 제가 어떤 모습과 어떤 이름으로 나고 죽길 반복해서 이 자리에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수없이 나고 죽길 반복하는 과정에서 너의 부모가 과연 한두 분이었겠느냐?” ..  (22, 27쪽)



  오늘날 어린이는 시험문제를 잘 풉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스마트폰을 잘 다룹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버스나 지하철을 잘 탑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연예인 이름이나 대중노래를 잘 외웁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운동경기 소식이나 인터넷게임 이야기를 잘 주고받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어린이는 무엇을 못 할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무엇을 모를까요.


  아마 오늘날 어린이는 밥을 지을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빨래를 손수 하거나 걸레를 쥐어 방바닥을 훔칠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씨앗을 심거나 풀을 뜯거나 나무를 할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지게를 지거나 칡넝쿨로 나뭇단을 묶을 줄 모를 테고, 오늘날 어린이는 노젓기나 그물엮기를 못 하리라 느낍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어린 동생이나 아기를 얼마나 돌볼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국을 끓이거나 김치를 담글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물레를 잣거나 베틀을 밟거나 바느질로 옷을 지을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나이를 먹으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든지 크고작은 심부름을 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스스로 삶을 짓는 일은 못 하리라 느낍니다. 남이 시켜서 일을 한 뒤 돈을 벌 수는 있어도, 스스로 흙과 풀과 나무와 물을 만지면서 삶을 가꾸지는 못 하리라 느껴요.



.. 불교는 전생의 업이나 윤회를 영원불변한 절대적인 체계로 바라보고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러한 윤회와 업력의 틀을 어떻게 타파하고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하는 종교입니다 … 불자에게 관음보살의 성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여자라고 답할지도 모릅니다. 설화나 불교 영험담에서 관음보살은 여자의 몸으로 자주 나타날 뿐만 아니라 불화나 조각상에서도 통통한 살집,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치렁거리는 목걸이와 팔찌 등을 차고 있어 여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승보살 조각상의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보살은 아름답고 수려한 남성을 표현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대승에서 성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  (77, 82쪽)



  강호진 님이 쓴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를 읽습니다. 강호진 님은 절집에 있는 그림마다 어떤 이야기가 서렸는가를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쉽고 알맞게 풀어냅니다. 그냥 그린 그림이란 없고, 아무 뜻이 없이 그린 그림이란 없다고 밝힙니다. 그림마다 깊고 너른 속뜻이 있고, 그림마다 온갖 숨결과 노래가 있다고 보여줍니다.


  불교에서 다루는 여러 이야기를 두루 헤아렸으면, ‘절집 그림’을 누구나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이나 책을 두루 읽었다 하더라도, 절집 그림을 모두 슬기롭게 읽을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절집 그림이든 예배당 그림이든 골목집 그림이든, 그림을 읽으려면 그림을 읽는 눈이 있어야 해요. 삶을 읽고 사람을 읽으며 사랑을 읽는 눈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림을 읽을 수 있습니다.



..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인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 이 이야기는 항시 문수보살을 곁에 두고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문수보살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들 삶 속에서 하찮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누군가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 “아무리 작은 악일 지라도 짓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다 행하라.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 “세 살 아이도 아는 말이지만, 팔순 노인도 실천하기엔 어려운 말이라오.” ..  (90, 129, 156쪽)



  그림은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림으로 어떤 지식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려서 나누는 까닭은 이웃(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천주교도 개신교도 천도교도 지식이나 종교라는 틀에 갇힐 때에는 삶을 밝히지 못합니다. 어느 믿음이든 ‘종교’가 아닌 ‘삶’이라는 자리에서 이웃과 손을 맞잡고 함께 웃는 노래가 될 때에 이야기로 피어납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어머니가 지어서 차리는 밥이란 ‘영양소’가 아닌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마련해서 끓이는 국이란 ‘영양소’가 아닌 ‘사랑’이에요. 아이와 함께 노는 어버이는 아이와 ‘놀아 주지’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놀’ 뿐입니다.


  빼어나거나 훌륭한 이슬떨이가 있어서 어리숙한 사람을 깨우치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면서 숨결입니다. 다 함께 흙을 가꿉니다. 다 같이 살림을 꾸립니다. 서로서로 돕고 아끼면서 보금자리를 이룹니다. 손에 손을 모아 두레와 품앗이를 해요. 마음에 마음을 보태어 마을을 이루어요.



.. “만일 그대가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불교를 비방했다면 주인의 명령에 잘 따르는 개와 다름이 없고,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비방을 하였다면 잘 알지도 못하고서 비방한 것이니 스스로를 크게 속인 것입니다.” … 불교의 수행자는 마치 연꽃처럼 꼭 세속의 환경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 즉 그 마음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상징입니다 … 《유마경》은 또 정토 또한 별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바로 이곳이 정토가 된다는 뜻입니다 ..  (135, 149, 170쪽)



  학교교육은 대학입시를 바랄 때에 ‘교육’이 아닙니다. 학교교육은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가꾸도록 이끌 때에 ‘교육’입니다. 대학입시를 이끄는 학교는 굴레이거나 쳇바퀴입니다. 회사원이 되도록 이끄는 학교는 감옥이거나 노예제입니다.


  불교는 무엇이고, 종교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절집 그림은 무엇일까요. 왜 종교는 사람들 눈을 어둠으로 가릴까요. 왜 슬기는 사람들 눈을 빛으로 밝힐까요.


  《유마경》 그림이 이야기하듯이 수행자는 어디에서나 수행을 합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흙을 일구면서 언제나 수행입니다. 경전을 읊을 때에 수행이 아닙니다. 절집에 머물 적에 수행이 아닙니다. 경전을 읊거나 절집에 머물 적에는 훈련을 하겠지요. 훈련을 하는 까닭은 삶을 짓는 힘을 얻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절집 그림은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삶을 짓는 힘을 스스로 얻도록 돕는 빛을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빙그레 웃고 어깨동무하는 기쁨을 나누도록 돕는 빛을 살며시 이야기합니다.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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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 우리말 지킴이 최종규와 어린이가 함께 읽는 철수와영희 우리말 시리즈 1
최종규 지음, 강우근 그림 / 철수와영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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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2014년 4월에 실린 책소개를 보면,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읽고 써 준 느낌글이 있다. 이 느낌글을 쓰신 분은 광주 노대동에서 '책문화공간 봄'을 꾸리신다고 한다. 아름다운 곳을 열어 가꾸시기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아름다운 눈길로 읽어 주신 뒤에, 느낌글도 아름답게 써 주셨구나 싶다.


그런데,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에서 '나물, 남새, 푸성귀' 이야기를 본문과 부록에서 다르게 적었고, 이 대목을 눈밝은 독자가 알려주어서1쇄로 찍은 책 가운데 책방에 배본한 책을 모두 회수하고, 창고에 있던 책도 모두 그러모아서, '본문에 잘못 적은 대목'을 바로잡아서 새로 찍었다. 그리고, 본문을 바로잡은 책은 어느덧 모두 팔렸고, 즐겁게 2쇄를 찍는다. 2쇄를 찍을 수 있도록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장만해서 읽어 준 모든 분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금 올린다. 앞으로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2권도 펴낼 수 있기를 꿈꾼다. 이 책을 10쇄쯤 찍으면 아마 2권도 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문에서 딱 한 쪽을 바로잡느라 책을 모두 회수하는 일이란 출판사에 크게 피해를 입힌 일이다. 작가로서 몹시 미안하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딱 한 쪽이라 하더라도, 한 쪽에 적힌 한 줄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본문을 바로잡지 못한 책을 일찍 사들여서 읽은 분들한테 더없이 미안하다.


눈밝은 독자가 있어 고맙다. 그리고, 마음밝은 독자가 있어 사랑스럽다. 나도 앞으로, 생각밝은 작가가 되어 하루하루 새 글을 일구어 새로운 책을 아름답게 펴내자고 다짐한다. <전라도닷컴> 2014년 4월호에 실렸던 정봉남 님 느낌글을 한 글자씩 차근차근 옮겨 본다. 나도 느낌글을 쓸 적에 이렇게 마음밝은 아름다운 글로 쓰자고 새롭게 생각한다.


..


흙에서 자라고 꽃처럼 피어나는 우리말 이야기

― 최종규 씨가 펴낸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전라도닷컴 2014년 4월호 / 글쓴이 : 정봉남)



  바야흐로 봄이라 섬진강을 따라가며 꽃마중을 했다. 살랑이는 바람과 찰랑이는 물결과 그 위를 어룽어룽 놀다 가는 햇살이 고왔다. 아련한 노란 빛의 산수유가, 솔숲 아래 갓 피어난 연분홍 진달래가, 흰 꽃으로 뒤덮인 매화 그늘이 적이 그윽하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마음 깊숙이 봄빛이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하늘빛, 물빛, 꽃빛이 모두 고와서 마음이 절로 노래를 불렀다. “햇볕은 고와요. 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서 풀빛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빛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서 빨강이 되어요.” “노란 빛깔 민들레꽃, 하얀 빛깔 냉이꽃, 보라 빛깔 분꽃, 분홍 빛깔 살구꽃…….” 노랫말을 가만가만 톺아보는 사이에 마음은 시나브로 맑고 환해졌다.



  우리말의 뿌리와 결과 너비를 찬찬히 살펴보게 되는



  신기하게 몸에 스미는 기운에 따라 마음이 거듭난다. 따순 햇볕 누리면서 마음을 따순 기운으로 덥히면 따순 볕과 함께 따순 마음이 된다. 따순 마음이 되면서 따순 말을 꺼낸다. 따순 말을 주고받으며 따순 생각을 길어올린다. 따순 생각이 밑바탕 되어 따순 사랑을 일군다. 이렇게 어느 말이든 저마다 그 삶에서 빚어진 느낌과 생각과 뜻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말은 생각을 담아서 주고받는 그릇이고, 살아오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의 집이기도 하다.


  봄날 꺼내든 책은 ‘우리말 지킴이’로 잘 알려진 최종규 씨가 쓰고 강우근 씨가 그림을 그린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이다. “나는 아이들한테 ‘국어사전 말풀이’를 가르치지 않아요. 가만히 마음소리에 귀를 기울인 다음, 마음으로 느끼는 이야기로 말을 들려줍니다. 꽃을 생각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 어여쁜 꽃말이 자랍니다. 꽃을 헤아리면서 내 가슴속에 즐거운 꽃그림이 태어납니다. 꽃을 이야기하니 어느새 내 꿈속에 즐거운 이야기 한 자락이 피어납니다.”


  ‘바람 따라 흐르는 말’, ‘불씨로 타오르는 말’, ‘흙에서 일구는 구수한 말’, ‘풀벌레 노래하는 맑은 말’ 같은 주제로 말을 나누고 이백 여 개의 우리말 속에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테면 ‘물과 같이 맑은 말’에는 김·냇물·눈먹기·보라·샘·시내·실비·아지랑이, ‘동무들과 아끼는 말’에는 길동무·너나들이·얘기동무·어깨동무, ‘숲에서 가꾸는 푸른 말’에는 멧자락·삶터·온누리·우듬지·푸르다,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말’에는 곁·동냥·한뎃잠·한솥밥, ‘일하며 웃음 짓는 말’에는 두레·심부름·울력·일터·품앗이 같은 말 속에 숨은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다.


  마치 조약돌을 어루만지고 도른도른 흘러가는 시냇물을 만난 기분도 들고, 고물고물 새싹 돋는 봄의 흙 기운같이 말랑하고 푸근한 책이다.


  고흥 동백마을에서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를 꾸리고 있는 최종규 씨는 헌책방 책삶을 북돋우려고 《헌책방에서 보낸 1년》, 《모든 책은 헌책이다》 같은 책을 썼으며, 《사진책과 함께 살기》,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 《뿌리깊은 글쓰기》, 《생각하는 글쓰기》 등의 책도 펴낸 이다.

  생각을 넓히고 슬기를 빛낼 때 비로소 ‘말’도 배우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삶의 본질과 닿아 있다.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 고스란히 담긴 넋을 배우기 때문이다. 좋은 말을 통해 좋은 마음을 일구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말갛게 비쳐진다. 흙에서 자라고 꽃처럼 피어나는 우리말 이야기, 우리말의 뿌리와 결과 너비를 찬찬히 살펴보기에 참 좋다.



  나물과 남새와 푸성귀, 채소와 야채의 차이



  그예 숲의 덤불과 언덕에는 쑥과 냉이가 쑥쑥 돋았다. 잠깐 쪼그려 앉아 캤는데도 쑥이 두 손 가득 넘친다. 봄나들이 잘 하면 눈도 즐겁고 입도 즐겁다. “이렇게 쑥쑥 자라니 쑥이라고 했겠지? 옛날 어른들 말도 잘 만드셨네” 하고 웃다가 쑥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으로 썼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의 뿌리를 누구라서 알 수 있을까.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면서 저절로 빚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단군신화에 쑥이 나오는 걸로 보면, 어림잡아도 오천 해 가까이 써 왔구나 헤아리니 와아! 우리가 날마다 쓰는 말의 뿌리, 그 오래되고 깊은 역사가 순간 가슴에 또렷하게 안겨 온다. 대단하다.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나물과 남새와 푸성귀, 채소와 야채의 차이다. 들이나 숲에서 스스로 씨앗을 내며 자라는 풀을 사람들이 얻어먹으려 하면 ‘나물’이라 하고, 사람들이 밭에 따로 심어서 거두는 풀을 ‘남새’라 하고, 나물과 남새를 아울러 ‘푸성귀’라고 한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흙을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왔기에 이처럼 풀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채소’는 남새를 가리키는 중국말이고, ‘야채’는 푸성귀를 가리키는 일본말이라는 것이다.


  흔히 그리고 자주 쓰는 말에도 우리말의 생채기들이 보인다. 우리 몸에는 우리 겨레의 유전 정보가 들어 있듯이, 우리말에는 마음 정보가 들어 있다. 이천 년 동안 중국 한자말에 짓밟히고, 백 년 동안 일본 한자말과 미국말에 할퀴어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우리말의 처지가 자못 안타깝다. 남의 말을 함부로 끌어들여 뒤섞어 쓰면 겨레의 삶으로 빚어낸 삶과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우리의 삶에서 스스로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가지가 자라난 말을 온전히 배우고, 느낌과 생각과 뜻과 얼을 담아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말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그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고 나면, 스스로 어버이 되어 새로운 아이를 낳아 다시 말을 물려준다. 따뜻한 말 한 마디로 마음을 어루만지고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게 할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거친 말의 덤불을 헤치고 나와 흙과 물과 바람의 기운으로 마음이 거듭날 것이라고 믿는다. 수많은 숨결이 섞여 이루어지는 흙, 수많은 목숨을 살리는 흙처럼 우리도 이제 삶에서 배우고 삶에서 움튼 말을 건네주어야겠다.


  오늘 하루 내 입술을 떠난 말은 어디에 어떻게 씨를 내렸을까. 쏟은 말들을 소쿠리에 담듯 건져 보면 오늘 하루는 나에게 어떤 삶이었는지, 마음속으로 어떤 사랑을 품는 하루였는지, 마음밭에 어떤 꿈을 심는 하루였는지 헤아려 볼 수 있지 않을까.


(글쓴이 정봉남 님은 아이 책을 읽는 어른으로, 작고 소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눈밝게 들여다볼 줄 알며 직접 가꾸고 짓는 ‘핸드메이드’의 삶을 사랑합니다. 현재 광주 노대동의 책문화공간 ‘봄’의 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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