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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 - 3단계 ㅣ 세바퀴 저학년 책읽기 1
배유안 지음, 오진욱 그림 / 파란자전거 / 2010년 11월
평점 :
어린이책 읽는 삶 56
우물물 마시던 사람들
― 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
배유안 글
오진욱 그림
파란자전거 펴냄, 2010.12.1.
오월에 핀 감꽃은 유월로 접어들면서 시들고, 유월에는 감꽃이 지면서 감알이 천천히 익습니다. 그리고 유월에서 칠월로 접어드는 즈음 감나무에서 조그마한 풋감이 툭툭 떨어집니다. 해마다 유월과 칠월에 풋감이 지붕에 떨어지며 퉁퉁 울리는 소리를 아침저녁으로 듣습니다.
처음 시골에서 지낼 적에는 아침저녁으로 지붕을 퉁 하고 울리는 저 소리가 무엇인가 하고 갸우뚱했습니다. 이제는 풋감 떨어지는 소리를 알아채기도 하지만,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도 알아챕니다. 참말 집안에서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마당에 서거나 뒷간에 있을 적에도 나뭇잎 떨어지는 톡 소리를 알아챕니다.
마음을 기울이면 누구나 소리를 듣습니다. 마음을 안 기울이면 누구도 소리를 못 듣습니다. 우리가 듣는 소리는 스스로 마음을 기울이면서 받아들이는 결입니다. 자동차 소리를 듣거나 전철 소리를 듣는다면, 손전화 울리는 소리를 듣거나 싸움박질 하는 사람들 소리를 듣는다면, 이 소리는 모두 내가 마음을 기울여 받아들입니다.
.. 셋은 서둘러 우물로 돌아갔어요. 우물 안에서도 밤하늘이 보였어요. 우물 모양으로 동그란 하늘에 별들이 모여서 반짝였어요. “예쁘다. 저 별 금오가 보면 좋아했겠다. 데려올 걸 그랬나?” .. (35쪽)
예부터 지구별 어느 곳에서든 누구나 냇물을 마셨습니다. 냇물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살던 사람은 우물을 팠습니다. 때로는 못을 파서 못물을 쓰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물이 없으면 삶을 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알맞다 싶은 살림집은, 바람이 맑고 푸르면서 냇물이 싱그럽고 시원한 곳입니다. 이 두 가지가 아름다우면서 햇볕이 따사롭고 넉넉한 곳입니다. 어느 나라이건 어느 겨레이건, 바람과 물과 해를 살펴서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바람과 물과 해가 즐겁지 못하다면 보금자리를 가꾸지 않습니다. 여기에 숲이 있어야지요. 숲이 있어 풀과 나무를 얻고, 숲이 있어 기름진 흙을 누릴 수 있는 데가 바로 보금자리를 닦는 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바람과 물과 해와 숲을 살피며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요.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이들조차 ‘집터’와 ‘논밭’과 ‘마을’을 살필 뿐, 바람과 물과 해와 숲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배운 적이 없고 느낀 적이 없으며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몸을 살리고 마음을 가꿀 수 있는 터전이 어디인가를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둘레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동무가 없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 산예는 천수관음상의 입을 가만히 보았어요. 관음보살이 입술을 달싹이는 듯했어요. 산예는 뚫어져라 바라보았어요. ‘사랑하는 아이야.’라는 말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어요 .. (48쪽)
배유안 님이 쓴 동화책 《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파란자전거,2010)를 읽습니다. 분황사라는 절이 우뚝 서던 지난 어느 날을 발판으로 삼아 ‘미르’와 ‘어른’과 ‘아이’가 어우러지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요즈음 아이들이 읽도록 하려고 한국말 ‘미르’가 아닌 요즈음 흔히 쓰는 한자말 ‘용(龍)’을 썼지 싶은데, 이야기 발판이 600∼700년대라 한다면, 동화책에 쓰는 낱말도 지난날 사람들 삶을 더 헤아리고 더 살피며 더 짚을 때에 한결 빛나리라 느낍니다. 한국말로서도 아름답고 알맞게 가다듬는 ‘동화 문장’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가기는 무리예요 (18쪽)
→ 사람 사는 곳에 가기는 힘들어요
각 절마다 돌며 (24쪽)
→ 절마다 돌며
휴, 이제 좀 살 것 같다 (41쪽)
→ 히유, 이제 좀 살겠다
우물에 용이 사는 거 알고 있어 (45쪽)
→ 우물에 용이 사는 줄 알아
스님한테 들었어 (45쪽)
→ 스님한테서 들었어
누룽지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52쪽)
→ 누룽지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았어
미소를 지었어요 (59쪽)
→ 웃음을 지었어요
용들을 잡아갔어요. 구해야 해요 (71쪽)
→ 용들을 잡아갔어요. 살려야 해요
급해! 우선 당나라 사신이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야 해 (85쪽)
→ 서둘러! 먼저 당나라 사신이 묵는 곳을 찾아야 해
내가 순순히 넘겨줄 것 같으냐 (94쪽)
→ 내가 고분고분 넘겨주겠느냐
그래, 새로 시작하자 (109쪽)
→ 그래, 새로 하자
회오리바람 소리 같은 것이 휘휘 나다가 점점 사라져 갔어요 (117쪽)
→ 회오리바람 소리 비슷하게 휘휘 나다가 차츰 사라졌어요
동화에 ‘것(거)’이라는 말을 자꾸 쓰니 어딘가 어설픕니다. ‘것(거)’을 아무 데나 넣는 말투는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어설픈 번역 말투입니다. 그리고, “各 절마다”처럼 겹말을 잘못 쓴다든지 ‘휴’처럼 일본말을 함부로 쓰는 대목이 아쉽습니다. 일본사람은 한숨을 쉴 때에 나는 소리를 ‘휴’로 적습니다. 한국사람은 한숨을 쉴 때에 나는 소리를 ‘후유’나 ‘히유’로 적습니다. “스님한테서 들었어”처럼 ‘-한테서’ 토씨를 넣어야 하는 자리에 곧잘 ‘-한테’로 적은 대목도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무리·미소·구하다·우선·숙소·순순히·시작·점점’ 같은 한자말을 굳이 써야 했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더 생각해 본다면, 600∼700년이 이야기 발판인데, 이무렵 당나라 사신이 ‘숙소’에 머물렀을까요? 아니겠지요? “묵을 곳”을 뜻하는 ‘숙소’이기에 “묵고 있는 숙소”처럼 적는 글도 알맞지 않아요.
우리는 “두 손”과 “두 눈”처럼 말합니다. 이 동화책에서도 이렇게 씁니다. 그러나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처럼 쓰기도 합니다. 손과 눈을 ‘두(둘)’로 가리키면서 숫자가 천이 될 적에는 왜 “천 개의”처럼 써야 할까 궁금합니다. “천 손과 천 눈”이라 해야 지난날에나 오늘날에나 올바른 말씨이리라 싶습니다.
..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신 관음보살님, 두 눈이 없는 저에게 부디 눈을 주세요 .. (109쪽)
동화책 《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는 두 눈을 잃은 아이가 다시 두 눈을 되찾고, 어린 미르들이 이무기한테서 풀려나 바다로 돌아가는 이야기로 마무리짓습니다. 이야기 짜임새는 구김살이 없다고 느낍니다. 여러모로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이무기가 왜 나쁜 것으로만 나와야 하는지 밝히지 않고, 그저 나쁜 것으로만 다루면서, 미르와 겨루다가 너무 쉽게 꺾이며 사라지도록 하는 흐름은 좀 아리송합니다. 미르는 무엇이고 이무기는 무엇일까요. 이 둘은 왜 서로 맞서려 할까요. 주인공이 미르라 한다면, 미르가 맡은 몫과 미르가 이 땅에서 어떠한 일을 하는지를 찬찬히 밝히기도 해야지 싶어요. 역사와 문화를 고루 섞으면서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면, 역사와 문화를 깊고 넓게 다루거나 짚든지, 아니면 역사와 문화를 뛰어넘어 ‘아이들이 저마다 어떤 삶빛을 가꾸면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넋’인가를 밝히는 데에 눈길을 맞추어야지 싶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게, ‘철부지 어린 미르’가 나오고, ‘백날 비손을 드리며 두 눈을 되찾으려는 아이’가 나와서 만나고 헤어지는 흐름은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눈먼 아이가 두 눈을 되찾는다고 하는 대목에서도 ‘백날 비손(‘백일기도’가 아닌. 왜냐하면, 예전 사람들은 ‘기도’라는 한자말이 아닌 ‘비손’이라는 한국말을 썼을 테니)’을 어떻게 하는가를 찬찬히 그리지 않고, 그저 탑 둘레만 빙글빙글 돈다고만 나옵니다. 어쩐지 비손이 마음을 바치지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비손을 드리는 모습을 그린 동화 작품도, 썩 마음을 기울여 쓰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우물물을 마시며 살던 사람들 마음씨와 숨결과 넋을 더 깊이 헤아리고 더 넓게 품으면서 이야기를 여미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4347.6.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화비평)